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식민지 경제 ==== 1910년대에는 회사령, 토지조사사업, 어업령, 임업령 등을 통해서 일본 기업이 조선 시장에서 성장할 기틀을 닦으면서 자원을 값싸게 약탈하는 식의 정책을 꺼냈다. 그러나 1차 대전이 끝난 직후 1920년대에 들어서 일본의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며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이 많아졌고 시장은 이에 따라 과잉 공급의 상태가 되었으며, 결국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물건을 팔 새로운 시장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이 시기에 들어서는 회사령을 철폐하고 경쟁을 하거나 물건을 매매할 조선의 기업을 제한적으로나마 설립하도록 하게 된 것이다. 어차피 대다수의 재력을 일본인과 친일파가 먹어서 조선인은 상대가 안 될 것이므로 일본 기업 설립의 간소화를 위해 회사령을 철폐했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요컨대 1920년대의 조선은 일본이 생산한 제품들을 판매하기 위한 확대된 시장이었던 셈이다. 이런 일본의 속셈을 알아차린 몇몇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이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했지만 과잉 수요와 헬조선 상인 특유의 바가지, 생산 능력 부족, 국내산의 열악한 품질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좆망했다. 교과서에서는 일제의 간섭과 방해 때문에 실패했다고 설명하는데, 이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은 알 필요가 있다. 그나마 장점을 찾으라면 1910년대에 비해 강압적인 통치가 어느정도 누그러진 것도 사실이고 조선어(한국어) 신문도 매일신보 외에는 금지되었던 1910년대와 달리 검열이 있기는 했지만 허용되기도 있다. 언론 자유도 20년대 초중반에는 나름 보장되어서 조선총독부 통치에 대해서 비판을 하거나, 조선인들에게 일본어로 교육하는 거를 반대한다는 기사가 올라오기도 하였다. 물론 일본의 한반도 통치의 궁국적인 목적인 한반도의 완전한 일본(내지)화 (내지연장주의)는 1920년대에도 변하지 않았으며, 1920년대 자체의 일본이 패망 전에 가장 민주주의적인 시대였다는 것과, 결과적으로 1930년대가 되면서 전부 흐지부지 해졌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조치는 조선인들을 위한 게 아닌 조선의 독립을 막고 통치의 편의성을 위한 조치였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은 1920년대 동안 계속 유지되었지만 세계 대공황이 터지면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