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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갑함 === 1840년, 프랑스에서 개발된 작열탄은 압도적인 화력과 파괴력으로 당대의 전열함들을 압도했고, 화력과 방호력의 불균형이 발생하였다. 1850년, 프랑스에서는 세계 최초로 증기기관을 탑재한 전열함인 나폴레옹급을 건조했다. 이로서 증기 전열함의 시대가 열렸다. 크림 전쟁이 막바지에 치닫던 1859년, 프랑스에서는 세계 최초의 장갑함인 글루아르급을 건조했고, 첩보를 입수한 영국이 워리어급 장갑함을 건조하였다. 초기의 장갑함들은 기존의 전열함들과 마찬가지로 현측 양면에 포를 탑재했는데, 포가 탑재된 부분의 방호력이 취약해지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시간이 흘러 포의 명중률이 개선되어 더 이상은 그렇게 많은 포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벳에 주포를 탑재한 포좌식 장갑함들이 발전하였다. 1866년 리사 해전에서는 최초로 장갑함 함대간의 전투가 펼쳐졌는데, 바벳에 포를 맞으면 무장이 무력해지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바벳에 장갑을 두른 포탑식 장갑함인 아폰다토레가 전투에 투입되었다. 모든 점에서 우세했던 레지아 마리나는 승리를 자신했지만 장교놈들의 정치질과 나태함으로 대패당하고, 전투에서 승리한 KUK의 명제독 테게트호프는 훗날 오헝제국 최초의 드레드노트에 자신의 이름이 붙는 명예를 누린다. 당시에는 기술력이 충분하지 못해 포가 장갑을 관통하지 못하고 지들끼리 죽치고 쏴갈기는 행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대비책이 강구되었는데, 리사 해전에서 KUK의 장갑함들이 충각으로 적함을 격파시키며 이후 충각은 십수년간 유효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문제는 이게 개 잡소리였다는 건데, 장갑과 속도, 화력이 동일한 적함에 충각한다고 가정했을 때, 전면에 쳐박으면 그냥 연료낭비 카미카제였고, 후면에 박자니 그냥 적선이 튀기만 하면 대비책이 없었고, 결국 장갑이 상대적으로 취약하고 무게중심이며 중요 시설들이 몰려 있는 측면에 쳐박을수밖에 없었는데, 이러면 전면에 있는 제한된 화력만 가지고 20노트 남짓의 속력으로 측면에서 모든 함포를 발포 가능한 적함에 들이박는다는 미친 상황이 나왔기 때문에 실상 충각으로 인한 적함 격파는 어림없는 소리였다. 근데 KUK는 어떻게 성공했냐고? 개탈리아 놈들이 나약해 빠져가지고 충각 한번 박으니 혼비백산하니 이길 수밖에, 허를 찔렀다고 봐야 하나? 역시 1866년, 영국의 로버트 화이트헤드는 현대식 어뢰를 개발했는데, 정작 본국의 로열 네이비는 적은 함선으로 많은 함선을 상대할수 있는 어뢰를 지들은 함선 많다고 개무시했고, 아드리아해로 진출하려 하던 KUK는 해군력 증대를 위해 어뢰를 받아들였고, 로열 마린에 비해 열세에 있었던 마리나 나시옹과 카이저라이히 마리네 역시 흥미롭게 보았고, 이후 어뢰는 장갑함들의 보편적인 부무장으로 쓰였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1890년대 초, 거함거포주의가 극에 달해 17.7인치 주포를 달기도 하는 미친 짓거리들이 나왔는데, 당시 장갑함들의 배수량은 7,500톤~12,500톤 수준으로 비슷한 구경의 주포를 탑재한 조약형 전함들의 절반도 안 되었다. 중순양함 크기도 안 되는 것들이 드레드노트 싸다구 후려갈기는 거포를 달고 있으니 전투가 제대로 될 리가 있나? 당연히 과적으로 맞지도 않는 포나 뻥뻥 쏴대는 한심한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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