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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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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간의 체제 경쟁이 끝나가던 때로, 6.25보다 훨씬 이전, 막 독립했을 때 남한 자유진영의 단독 선거를 치르려는 상황에서 정계는 물론이고 남한 사회 전반에서 단독 선거를 둘러싸고 틈만 나면 갈등이 빚어졌다. 매우 예민한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와중에 제주도는 1947년 3.1운동 기념 집회에서 기마 경찰의 말 발굽에 어린아이가 차여서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에 분노한 제주도민들이 경찰서에 찾아가서 항의하자 이에 경찰이 총을 발포하는 일이 발생하여 민심은 매우 들떠있었다. 사태는 제주도 전역에서 노동자들이 집단 파업을 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이에 경찰관들은 해임되지만 미군정은 제주도는 좌익의 성지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서북청년회]]를 내려보내고 파업을 와해하는데에 주력하려고만 하면서 갈등이 고조된다. 이런 상황에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에서는 아주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무장대를 조직하여 몇몇 동조자와 함께 반미, 반정부 무력 투쟁을 시작했다. 이윽고 이것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군대까지 파견하였고, 남로당 무장대와 정부 진압군, 양쪽 진영 사이에서 결백한 민간인들이 사살되기 시작하였다. 의외로 빨리 해결될 수 있었다. 4월 말, 남로당과 정부가 72시간 휴전하고 나중에 더 협상하기로 합의했는데 72시간 끝나기도 전에 서북청년회로 추정되는 세력이 오라리(오라동)에 불을 지르면서 협상이 파투가 났다. 이거 때문에 정부가 강경 노선을 결정했다. 즉, 시작은 이념에 의한 정치적 항쟁 or 반란의 성격이 강했다. 근데 이걸 정부에서 진압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반공에 대한 이념이 몹시 강했던 때인데, 남로당원들이 버티지 못하고 산으로 도망가자 그냥 산에 있는 사람이면 빨갱이라고 잡아죽이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참고로 누가 [[국민방위군]] 사건 일으키는 새끼들 아니랄까봐 서북청년회 보내면서 보급도 없이 보냈다. 괜히 헬게이트가 열렸던 게 아니다. 통제도 안 되는 놈들을 보급도 안 챙겨주고 자율권에 멋대로 할 명분까지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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