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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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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유럽의 [[갓양인]]들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달로 제국주의가 성립하고, 원료공급지와 상품시장 확보를 위한 식민지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 거의 100년 전인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되고, 그 이후 증기기관 등으로 대표되는 산업화와 여성참정권 신장, 차티스트, 파리 코뮌 등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과정을 골고루 거친 유럽은 1850년대부터 통칭 벨 에포크 라고 불리우는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유럽 대륙 전역에 철도가 보급되고 자동차와 비행기가 개발되는 등 현대전의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안토니오 무치가 전화기를 발명하며 통신 역시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61년 프러시아가 독일의 약소국들을 모아 북독일 연방으로 재탄생하고, 1868년 일본 제국이 메이지 유신을 시작, 1870년에는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되어 이탈리아 왕국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국제 질서가 재편성되고 기존의 열강들의 전유물인 식민지를 이들 국가가 노리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세계에는 전운이 감돌게 되었다. 또한 당시 유럽에 퍼진 민족주의 기류로 인해 단 한번의 전쟁이 세계 대전으로 발달할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1870년 북독일 연방이 프랑스 공화국을 공격, 1871년 승리해 알자스로렌 지방을 얻어가고 명실상부한 독일 제국으로 탄생한다. 그리고 독일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행여 프랑스가 다시 공격할 빌미를 차단하기를 원했고, 국력이 독일보다 약해진 프랑스가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면 다른 열강과의 동맹이 필요하다고 판단, 187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을 불러 대프랑스 동맹을 맻으니 이를 삼제 동맹이라 부른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각기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발칸 반도에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동맹은 유지되기 어려운 것이었고, 1877년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가 반란을 일으키고,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워 재빨리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차지했지만, 발칸 반도에서 슬라브 족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1878년 베를린 회의를 개최,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의 관리를 맡게 된다. 더욱이 비스마르크가 1879년 오스트리아와 비밀리에 동맹을 탄생시키자 위기감을 느낀 러시아는 프랑스에 접촉했다. 하지만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드로 2세가 암살되고 다시 친독일 세력이 독일에 접근해 오자 비스마르크는 러시아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1881년 삼제 동맹을 재탄생시킨다. 한편 튀니지를 프랑스에게 빼았긴 이탈리아 역시 이 동맹에 참여,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는 1882년 삼국 동맹을 맻게 된다. 전운이 감돌았던 발칸 반도에는 1887년 오스트리아의 장교였던 페르디난트가 불가리아의 독립을 선언, 불가리아의 첫 번째 왕이 된다. 이에 격분한 러시아는 1887년 삼제 동맹의 갱신을 거부했고, 비스마르크는 어쩔 수 없이 러시아를 설득해 1887년 독일과 러시아 간의 재보장 조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1888년 독일의 빌헬름 2세가 즉위, 1890년에는 비스마르크가 재상직에서 물러난다. 직접 독일의 외교 정책을 주도하게 된 빌헬름 2세는 적극적인 식민지 정책인 세계 정책을 펼쳐 1890년 러시아와 맻은 재보장 조약의 갱신을 거절한다. 러시아는 어쩔 수 없이 독일 때문에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프랑스와 1894년 러프 동맹을 맻는다. 비스마르크가 그렇게 우려하던 일이 물러난 지 체 5년도 되지 않아서 벌어진 셈. 한편 명예로운 고립이랍시고 [[아싸]]질이나 하던 영국 역시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를 연결하는 독일의 3B 정책이 자신들이 추진하는 카이로-케이프타운-켈커타를 연결하는 3C 정책과 충돌한다고 판단, 1904년 프랑스와 영불 협정을 맻는다. 또한 독일이 중동 지방으로 계속 진출해 오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페르시아를 양분해 독일을 엿먹이고 영러 협상을 1907년 탄생시킨다. 이렇게 해서 대충 판은 짜여졌고, 이제 발칸 반도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 하나만으로도 전쟁은 발발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발생한다. 이렇게 프랑스를 고립시키려는 독일의 전략이 실패하자, 독일은 프랑스 자체의 힘을 악화시키기로 결정한다. 독일은 프랑스가 1904년 영불 협정으로 얻은 모로코에 시비를 털어 1905년 모로코 문호 개방을 주장하였고, 프랑스는 모로코 연안의 항구를 독일에게 양도하겠다는 협상안을 제시하였으나 독일은 이를 거절, 1906년 스페인의 알헤시라스에서 회의가 개최된다. 알헤시라스 회의에서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모든 열강들이 프랑스를 지지함으로서 프랑스는 모로코를 지배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 제 1차 모로코 사건이라고 한다. 한편 우럽 대륙 전체에 전운이 감도는 이때 발칸 지역의 형세를 살펴 보자면,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관리하는 오스트리아, 알바니아 등을 지배하는 오스만 제국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게르만, 마자르, 튀르크 족은 발칸 반도에서 소수민족에 불과했고, 발칸 반도에 다수를 차지하는 슬라브 족은 피지배민족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독립 국가로는 국력 순으로 루마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가 있었는데, 루마니아의 경우 스스로 라틴족의 후예를 자처하는 찐따였기에 당시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가 얽키고 설킨 발칸 반도의 문제에 딱히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불가리아는 국가 자체가 오스트리아의 괴뢰국 취급을 받고 있었기에 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은 세르비아에 접근한다. 세르비아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슬라브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그 계획의 일환으로 오스트리아가 통치하고 있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세르비아에 통합하려 하지만 오히려 오스트리아는 제빨리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고 독일은 러시아에게 세르비아에 대한 지원을 그만 둘 것을 촉구, 러시아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서 위기가 한 차례 지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도욱 고취시키게 된다. 그러던 중 1911년 모로코에서 내란이 발생해 프랑스가 군대를 투입하자 독일아 자국 거주민 보호라는 명목으로 병력을 파견했는데, 이를 두고 제 2차 모로코 사건이 발발한다. 한편 이탈리아는 다른 열강들의 관심이 모로코에 솔려 있는 틈을 타서 비행기를 동원해(이탈리아제 타우베 폭격기, 세계 최초로 비행기가 투입된 전쟁이지만 전황에는 딱히 영향을 주지 못했다.) 트리폴리와 리비아를 침공하고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해 트리폴리 전쟁이 일어나는데, 이때 이탈리아가 이빨 빠진 호랑이인 오스만 제국을 손쉽게 격퇴하자 세력 확장에 몰두하고 있던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오스만 제국과 견원지간이었던 그리스, 세르비아 따까리 몬테네그로 4국이 발칸 동맹을 맻어 1912년 제 1차 발칸 전쟁이 발발한다. 1913년 런던 조약으로 승리를 확정지은 발칸 동맹이었지만, 불가리아와 예로부터 경쟁 관계였던 루마니아가 영토 분배를 두고 내분이 생기자 1913년 불가리아에 선전포고,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역시 선전포고하고 오스만 제국 역시 빼았긴 땅을 되찾기 위해 선전포고하고 러시아마저 세르비아를 지원하자 다구리 쳐맞은 불가리아는 순식간에 패퇴하여 제 1차 발칸 전쟁에서 얻은 영토를 몽땅 토해내고 러시아와 세르비아를 원망하는 처지가 되었다. 세르비아 역시 런던 조약으로 독립한 알바니아를 오스트리아와 불가리아의 반대로 얻지 못하며 오스트리아에 대한 불만이 깊어지고 있었다. 1914년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가 날로 대립이 심해지는 가운데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는 발상을 전환하여 게르만 족과 마자르 족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권리를 슬라브 족에게 주어 슬라브 족을 오스트리아에 동화시킨다는 그럴듯한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심심찮게 반발이 일어나던 보스니아 지역을 안정화시키는 데에 성공했지만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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