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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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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경과 == === 전쟁이전의 상황 === 1차 대전 말에 터진 1918 변종 독감(스페인 독감)이 1차 대전 종전이 되어서도 전세계를 휩쓸어 사망자를 많이 내었다. 이후 10년 뒤 머공황과 함께 유럽 강대국들은 사이좋게 우울증이 걸리게 된다. 1차대전 당시 전쟁의 공포도 우울증을 주는데 한몫 했지만, 유럽의 민주국가들은 더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게된다. 더군다나 대공황 여파로 군비를 대대적으로 줄여가면서 까지 나라 살림 재건에 힘을 쓰게되기때문에 국민이나 정부나 둘다 전쟁을 바라지않는 형태가 된다 그러나 당장 아무것도 없는 신 파시스트 국가들은 구 강대국이 지배하는 세계를 자신들이 지배하기 바랬고, 이는 구 강대국들과의 충돌이 불가피 하다는것이였다. 가장 먼저 유럽의 지옥불반도가 아프리카에서 에티오피아를 처먹으면서 약간의 불협화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식민지를 점령해도 서방국이 신경쓰지않는걸 확인한 독일은 라인란트,오스트리아,수데텐,체코를 차례대로 처먹게된다. 이렇게 까지 세력이 확장됨에도 불구하고, 서방국은 협정과 조약으로 평화를 유지할수있을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졌었고, 결국 이것은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을 부추기는 꼴이 되고만다. 특히 히틀러한테 수데텐을 존나 거저로 넘겨준 뮌헨협정 이후 영국 체임벌린 총리는 우리 시대의 평화란 씹명언을 남겼다. 체임벌린이 한 수데텐을 넘겨주면 히틀러 욕심이 여기서 끝나겠지란 병신같은 생각의 끝은 당신이 아는대로. 동아시아에서는 1차대전당시 미국 다음으로 뽕을 잘 빨아먹은 일본에서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함께 메이지 유신때의 불평등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곧 머공황과 함께 군부의 시대에 들어오게 되었고, 만주를 먹고 만주국을 만들면서 대놓고 중국을 먹을려는 야욕을 드러낸다. 그리고 바다건너 대공황의 직격타를 맞은 미국은 뉴딜정책으로 국가 재건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지만, 루즈벨트의 뉴딜 땜질은 한계점을 드러내며 미국의 경제를 위기로 몰고있었다. === 유럽전역 전쟁 === 9월 1일 독일군이 기습적으로 폴란드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폴란드는 윽엨 거리면서 버팀과 동시에 영-프에게 전쟁 참전을 요구하고, 영-프는 동의하면서 '공식적'으로 영프가 참전한다. 허나, 실제로 영-프는 마지노 장벽 근처에서 그냥 윽엨 거릴뿐, 공세를 하지않았고 그 사이 폴란드는 소련과 독일에게 잔혹하게 짓밟히게된다. 폴란드가 짓밟힌후 조약에 따라서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분할한다. 애초에 독일 수뇌부는 폴란드 침공으로 전쟁이 확대될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았었고 폴란드 전역 종료 직후의 소모가 의외로 커짐에 따라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 바로 공세를 펼칠 여력이 없었으며 상대방인 영프도 전쟁은 벌였지만 지난 대전의 트라우마로 인해 먼저 움직이지 않기로 하면서 폴란드 침공 이후로 거진 1년이 다되가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은 이 기간동안 본격적인 전쟁으로의 길을 걷게 되었고 마침내 베저위붕 작전으로 일컬어지는 발트해의 주도권을 둘러싼 또다른 전역이 시작되면서 대전 초반기의 가장 극적인 국면이 시작된다. 독일측 해군의 상당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략적 목표는 모두 달성되었고 노르웨이와 덴마크는 독일의 수중에 들어간 것으로 발트해의 전역이 종료되었다. 1919년 1차대전의 종전으로 부터 1939년 까지의 '전간기'라 일컬어지는 기간동안 프랑스는 지난 대전에서 입증된 방어의 우세라는 도그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면, 기술의 발전과 함께 비약적으로 발전한 장비들은 드디어 기동을 통해 공세측이 방어군을 경우에 따라 압도할 수 있다는 전훈을 여러 곳에서 남겼고 독일은 재무장 이후로 스페인 내전에서의 경험을 통해 기동전을 실시할 충분한 기반을 갖추는데 성공했다. 1차세계대전에 개발된 전차는 아직 그 운용의 개념조차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기에 당장은 전선에서 분산배치 되어 보병의 적 방어선 돌파를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하지만 대전 말기에 보병, 포병, 전차, 항공기를 통합적으로 다루는 제병합동의 수준까지 도달하면서 몇몇 장교들은 전차의 기동성에 주목하게 되었고 분산배치가 아닌 전차를 한 곳에 집중한다면 적의 방어선 한 곳을 찢어발기고 그 틈으로 들어가 적의 종심 깊은 곳으로 들어가 지휘부를 휘젓거나 아니면 또다른 방어선 배후로 들어가 정면과 협격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해냈고 이렇게 전차를 이용한 현대 기동전 교리가 출발했다. 이러한 기동전 교리는 특정 국가가 아닌 여러 국가의 군부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결론적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여 실전으로 가다듬은 독일과 소련이 가장 먼저 이러한 전훈을 채택함으로써 본격적인 기동전 테크를 타기 시작했다. 한편, 마지노선으로 대표되는 프랑스군의 일관된 방어전략은 독일의 유력한 침공로로 예상되는 벨기에 지역에서도 예상되었으며 실제로 프랑스 군부는 '딜 계획'이라고 불리우는 유사시 연합군의 벨기에 진출 후 방어를 상정한 작계를 세워두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은 조공을 벨기에 부근에 배치하고 위장공세를 펼치게 하여 연합군이 벨기에로 우루루 몰려오게 판을 짜고 마지노 선 부근에도 2선급 사단들을 배치하여 프랑스의 방어병력을 묶어놓는 한편 벨기에와 마지노선 사이의 아르덴 고원을 주공의 침공로로 삼아 전선을 돌파한 다음 그대로 벨기에 후방 지역으로 보내 벨기에로 진출한 연합군을 포위하고 섬멸할 작전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낫질 작전'이다. 연합군이 벨기에가 주공인 것으로 오판하게 하기 위해서 조공 또한 충분히 강력하여야 했으며 주공은 돌파의 선봉이 될 기갑군이 숲 지대를 넘고 후방으로 상당한 거리를 기동해야 했기에 어느 하나라도 틀어지면 작전 전체가 엎어질 가능성이 높았지만 벨기에의 요새 지대가 공수부대의 침투로 의외로 손쉽게 넘어갔고 폴란드와 발트해 전역에서 경험치를 쌓은 부사관과 장교들이 엄청난 역량을 발휘하면서 모든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됐다. 낫질작전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포위망 안에 영국의 몇개 안되는 상비사단과 프랑스 병력의 3분의 1이 갇히게 되자 연합군은 일대 패닉에 빠져버렸고 이들은 장비고 나발이고 다 내팽개치고 됭케르크 항구로 몰려가 군함이건 수송선이건 어선이건 닥치는대로 올라탄 끝에 그나마 적지않은 인원들을 아슬아슬하게 후퇴시키는데 성공한다. 아직 프랑스는 3분의 2의 병력을 갖고 있었지만 지난 대전에서의 끔찍한 희생이 아직도 국민들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었는데 그러한 상황에 대규모 병력과 장비가 증발 해버리자 그대로 모든 전의를 상실해버렸고 결국 그 한 방으로 프랑스 3공화국이 나가리가 된다. 프랑스 정부 대다수는 전쟁 중지를 원했기에 히틀러와 조약을 맺고 남부 지방에 괴뢰 정부를 세우게 된다. 독일은 이제 다음 국가인 영국 공격을 준비하지만, 영국의 해군력과 공군력을 뚫고 공세를 펼칠수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융단폭격같은 초토전술로 영국인들에게 공포를 심어줄려고 한다. 허나, 영국 공군은 성공적으로 독일의 초토전술을 견디고 역공에 나선다. 그 사이 독일은 소련지방의 유전과 곡창지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되는데,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는 그리스를 찝쩍거리고 있었다. 허나 이탈리아군이 역으로 그리스에게 당하자, 히틀러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추축국에 끌어들이고 유고슬라비아-그리스를 전격전으로 무너뜨리면서 점령해버린다. 이때 써버린 2달은 독일군 입장에서는 매우 아쉬운 두달일 것이다. 그리고 1941년 6월 22일 독일과 여러 파시스트 국가의 자원병들로 구성된 독일군대는 기습적으로 소련을 침공하게 된다. 조직적이고 빠르게 국경선의 군대를 무너뜨리면서 독일군은 전진한다. 소련군은 교리도 후달렸고 흔히 독소전이라 하면 드는 생각과는 달리 이 시기에는 심지어는 병력까지도 후달렸으나 바게트와 다르게 거칠게 저항하고, 조국 전쟁 당시의 전략인 초토화전술을 역시 쓰면서 뒤로 빠지게된다. 독일군은 몇백킬로미터를 달려와도 불타는 마을밖에 볼수없었으며, 포장 도로따위없는 러시아의 영토에서 전진속도는 급속도로 느려터지게 진행된다. 그러나 독일 참모부는 총통이 원하는대로 계속해서 달릴수밖에 없었다. 각 집단군은 3개의 목표가 존재했는데 각각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우크라이나 지방 이였다. 모스크바가 목표이던 중부군은 총통이 원하는대로 모스크바까지 전진했지만, 총통은 '모스크바는 상징일뿐 우크라이나 지방이 더욱 중요하다'라는 말과 함께 우크라이나 지방의 정리를 위해 중부군 일부를 때서 남부군으로 보내게된다. 결국 중부군은 전력이 약체화된 채로 전격전을 계속해서 진행하고, 남부군도 오데사를 기점으로 빠르게 밀고나간다. 그러나 자연이 전격전을 거부하기라도 하듯, 러시아 특유의 가을비로 인해 형성된 라스푸티차로 인해 전진이 이제는 아에 안되다 시피 진행된다. 이 사이 소련군은 방어를 탄탄하게 준비하고 방위전에 돌입할 시간을 얻는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되자 땅이 얼면서, 다시 전진이 진행된다. 허나 이번에는 월동준비가 안된탓에 전투력이 극도로 약화된 채로 모스크바 공방전에 돌입해버린다. 공방전은 참패하고 독일군은 대대적으로 후퇴하게된다. 비슷한때 아프리카에서는 롬멜이 이탈리아군대를 돕기위해 파견와서, 전격적으로 밀고나가서 제 1차 엘 알라마인 전투에서 승리하고 토브룩까지 먹어버리자 히틀러의 과대망상증을 부추기게 된다. 히틀러는 롬멜이 아프리카 지역을 밀면서 소련 남부를 돕고, 소련 남부는 그런 롬멜과 연결되기 위해 코카셔스 지방을 침략한다. 라는 이상한 헛소리를 하게된다. 결국 이 작전은 진행되고, 소련 남부와 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군이 쭉쭉 밀기시작한다. 아프리카에서는 롬멜이 영국군의 숨통을 죄어왔고, 소련 남부지방은 전격적인 독일의 공세에 스탈린그라드까지 밀리게된다. 허나 허황된 꿈을 과격하게 밀어붙인 대가로, 소련군에게 약점을 노출하게 되버렸고 스탈린그라드에 꼬라박힌 독일군대는 양 날개였던 루마니아, 헝가리 군대가 궤멸되면서 포위당하고 만다. 히틀러는 포위가 진행되는 초기에 괴링의 말을 믿고 후퇴를 금지시키나, 결국 상황이 악화되자 파울루스 (당시 스탈린그라드 6군 사령관)을 원수로 진급시킨다. 독일의 원수는 항복하지 않는다 라는 이 말을 행동으로 이행하라는 암묵적인 압박이였지만, 파울루스는 보란듯이 항복한다. 스탈린그라드의 대패이후, 총통의 파시스트 진영은 조금씩 총통에 대한 불신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총통은 다시한번 대규모 공세가 성공해야 진영이 안정화될것이라고 믿었고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이어진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내 당시 독일 사령부가 위치하던 자포리자까지 포포프가 지휘하는 기갑군의 약 40만 내지의 소련군을 궤멸시키면서 훌륭하게 방어를 성공한다(하르코프 전투). 이로인해 소련은 다시금 충격을 받게 되었고, 쿠르스크 아래 진격로가 공백상태가 되고 나서 독일군이 야금야금 먹어서 남게 된 툭 튀어나오게 된 쿠르스크에 주목하게 된다. 그래서 독일 수뇌부는 이 쿠르스크에 밀집된 소련군을 포위섬멸하고자 쿠르스크로 진격하기로 결심한다. 지연전을 꺼려하던 만슈타인의 성격과 다르게 만슈타인은 쿠르스크 북부와 남부에서 진격하여 소모전을 펼치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으나, 그전에 이미 쿠르스크는 주코프의 지휘 아래 굳건한 방어선과 충분한 방어, 예비 병력이 준비되어 있었고, 이탈리아에서 연합국이 상륙하면서 부담이 커진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쿠르스크는 강제적으로 판이 닫히게 된다. 이때 쿠르스크 전투는 역사상 가장 큰 기갑전이었다. 그때 아프리카 전선은 이미 무너졌었다. 롬멜이 빠르게 밀고나갔었지만, 몽고메리가 막고, 길어진 영토때문에 보급로가 늘어나서 보급이 원할해지지 않았고, 케셀링이 보내주는 보급 물자와 병력들도 타란토 공습 등으로 우세를 점하던 영국 해군이 공격하여 격추시키면서 어쩔수없이 독일군은 후퇴한것이다. 한편, 그때 이탈리아는 무솔리니의 과대 망상증이 이루어 질수없음을 깨닫기 시작하고 그를 몰아낸 참이였다.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구출하고, 무솔리니는 북부 이탈리아에 다시 파시스트 정부를 세우고 연합국과 싸우기 시작한다. 이제 독일은 더이상 대대적인 공세보다는 강력한 방어에 치중하는 전술로 1944년까지 버티기 시작한다. 허나 아직 물량과 인력이 남아돌던 연합국과 코민테른은 오버로드 작전(노르망디 상륙작전), 마켓가든 작전(연합군의 패배로 끝났다.), 바그라티온 작전,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리비우-산도미에시 공세, 비슈와-오데르 작전(베를린등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고 파리가 탈환되고 민스크,키에프가 탈환되는등의 큰 성과를 얻게된다. 서부 연합군이 지크프리트 방어선을 돌파하고, 소련군이 드레스덴을 침공하면서 이제 사실상 독일땅에서 전쟁이 진행되었으며, 히틀러는 이들을 막기위해 국민척탄병을 창설한다 모든 젊은이는 군대로 동원되었고 총통을 위해 죽어야했다. 독일은 부상자들과 10대 소년,40대들,해군과 공군 잉여들을 동원해 국민척탄병을 창설한다. 독일은 모델(총통의 소방수라 불렸다.) 원수를 필두로 남은 병력들을 모아 벌지 전투(아르덴 공세)에서 서부전선에서의 도박을 꾀했지만 결과는 씹창이 나면서 독일의 생명줄은 더욱 가늘어져가기 시작했다. 이제 젊은이도,해군과 공군 잉여병력도,중고딩과 40대 애국중년들도 없다. 히틀러는 국민돌격대를 창설한다. 모든 남자는 군대로 동원되었고 이들은 이제 베를린에서 발악하며 싸우게 되었다. 전쟁 말 베를린에서는 모스크바에서 보던 풍경이 재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소련군이 이 악물고 막았던 것처럼, 독일군도 이 악물고 막았다. 독일군이 전차와 압도적인 포격으로 모스크바를 위협했던것처럼 소련군도 전차와 포격으로 베를린을 줘팼다. 하지만 모스크바처럼 이변은 없었고, 베를린에는 결국 붉은 깃발이 걸리게 되면서 유럽전선의 전쟁은 끝이나게 된다. 유럽전선의 사상자는 약 4000만명으로 추산된다. 여담으로 독일이 원래 처음으로 항복한 날은 1945년 5월 7일이었다. 하지만 독일은 서부진영에게만 항복하고 소련에게 항복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혔으며 당시 소련 눈치를 보고 있었던 서부진영 장교들은 좆까라며 칼 되니츠에게 유대인수용소의 실상을 고발한 신문지 몇장을 쥐어주고서 쫓아냈다. 하지만 그 하루동안 1만명 가까이 되는 독일인들이 서부진영에 투항했다. 서방진영놈들도 미래를 내다보고 계산할 꺼 다하고 빠꾸시킨거다. ==== 요약시켜드림 ==== 떡국의 블리츠크릭 -> 불란서 발림 -> 이탈리아 아프리카 어택땅 -> 연합군 발림 -> 역전-> 이탈리아 스멀스멀-> 동부전선에서 마침 개쪽남 -> 야 이탈리아 지켜라 후퇴 -> 소련군이 앞에서 치고 연합군이 뒤에 폭탄드랍 떨굼 -> 소련군은 열심히 남자는 노예로 여자는 창녀로 부려먹으며 전진 -> 폭탄드랍했는데 씨발좆같은 포도밭(이해안되면 50m*50m 격자로 철조망과 바리게이트가 빽빽하게 있다고 보면 쉬움) -> 버벅거리다 독일군이 반격 -> 했지만 개처발리고 연합군 압승-> 베를린 소련군이 점령 === [[태평양 전쟁]] === 우리가 알다시피 쪽본은 육군 해군 대본영 연합함대 이렇게 4개의 머가리를 두고있었는데, 해군은 육군의 순조로운 중국 줘팸이 마음에 들지않았다. 자신들도 뭔가 전과를 세우고싶어하고 있었는데, 미국이 비시 프랑스의 베트남을 일본이 가져간것을 빌미로 abcd 포위망을 가동시키며 고철과 원유 수출을 막자 일본은 당장 90%의 원유를 잃게된다. 위기가 오자, 군부는 미국의 해군을 함대결전으로 박살낸후, 동남아의 원유 생산지대, 고무 생산지대를 점령해 자원을 충당하자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외교적 회담이 몇번 오고갔으나, 미국은 일본은 더이상 신뢰하지않았고, 일본도 더이상의 회담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 결국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하게 되었고, 미국은 이 날을 치욕의 날로 규정하고 세계대전에 뛰어든다. 그리고 그 전날, 일본의 대규모 육군과 수상함대는 홍콩,필리핀,동남아시아등을 공격하기 위해 보낸다. 그리고 단 4개월만에 동남아시아 전역과 버마지역, 필리핀을 손에 얻게되면서 원유와 고무를 공급받기 시작한다. 이는 예측하던 것보다 지나치게 빠른 승리였고, 심지어 히로히토는 "승리의 과실이 우리 입안으로 너무 빨리 들어오고 있소" 라는 말까지 남겼다. 어쨋든 진주만에서 기습받은 직후 전함이 한척도 없던 미군은 항공모함으로 승부를 짓기로 결심하고, 항모 생산에 박차를 가함과 동시에 항모 전술을 연구한다. 이후 얼마뒤 미국의 둘리틀 특공대에 의해서 도쿄가 공격받고, 해군은 미국 기동부대를 파괴하기 위해 미드웨이에서 승부수를 띄운다. 하지만 이미 알고있던 미군은 역으로 일본의 항모부대를 파괴시켜버렸고, 일본은 4대의 항모를 잃고 후퇴한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전함보다 항모가 효율적임을 알게된 해군은 전함 시나노를 항모로 바꾸었고, 신형 항모 취역을 서두르게 된다. 이후 과달카날등지에서 미해병대와 일본군간의 치열한 교전이 펼쳐졌고, 일본군은 결국 패배한다. 그사이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였던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전사하고, 일본은 전선의 축소가 불가피하다고 판단, 절대국방권을 만들어 전선을 축소시키로 한다. 이후 미군은 안전한 필리핀 탈환을 위해서 필요한 재해권 확보를 위해 일본 기동부대와 교전, 여기서 일본 기동부대는 상당수의 함재기와 파일럿을 잃고 후퇴한다. 이후 사실상 깡통으로 변한 기동부대는 레이테로 진입하는 연합함대의 미끼로 전략한다. 레이테는 어처구니없게 실패하고, 시부야 해에서 무사시까지 잃게된다. 이후, 미군은 차근 차근 태평양의 섬을 제압하며, 오키나와 문턱까지 다가오고, 일본군은 야마토를 고정포대로 쓰기위해 오키나와로 보내게된다. 야마토는 오키나와로 가던 도중 미국의 함재기들에 의해 격침된다. 그뒤, 미국은 사용 가능한 함선이 있을것을 우려해, 구레 대공습을 진행하고, 도쿄 대공습도 진행시킨다. 하지만, 일본은 계속해서 옥! 쇄! 를 부르짖으며 죽창을 들고 결사항전을 외치고 있었는데, 더 많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결국 핵무기 두발을 투하를 결정한다. 히로시마 나가사키는 파괴되었으며, 일본은 항복한다. 태평양 전쟁의 사상자는 약 3000만명라고 한다. 짱깨가 드럽게 많이 죽음. === 중일전쟁 === 태평양 전선을 열게 만든 계기이자 2차세계대전을 전세계로 뻗게 만든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애당초 1937년에 시작했으니... 만주국을 처먹고 중국까지 욕심을 냈지만 당연히 서양놈들의 외교적 압박을 받고 있으니 전쟁을 먼저 시작할 계기를 만드려고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킨다. 루거우차오 사건은 한 병사가 한밤에 없어져 그냥 실종처리해버리고 중국이 어찌했다고 주장했다. 탈영한 병사는 갑자기 나타나 똥사느라 늦었다고 했고 그냥 넘기는 헤프닝인가 싶더니 [[무다구치 렌야]]가 공격명령을 하였고 중국 전역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상하이 전투, 난징대학살, 국민당 분열 등 엄청난 사건등이 있으나 알아서 정리바람. 참고로 2차세계대전에서 대부분 유럽전선 태평양 전선에 할애되어 연구되고 있었고 그냥 중국이 일방적을 처맞았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으나 최근 서구측이나 중국 정부나 중일전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계속 주구장창 처맞고 있었다는 편입견은 없어졌지만 군벌이나 졸렬한 지도력을 해결못한 국민당의 병신짓은 어찌해도 커버하지 못한다. 공산당이랑 국민당이 국공합작을해 같이 일본을 물리치자고 하였지만 국민당만 열심히 싸웠지 공산당은 국민당이 일본에 정신에 팔려있는 사이 뒤에서 야금야금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결론은 모택동이만 이득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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