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제2차 세계 대전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개병신 트롤 집단 이탈리아 == {{좆병신}} {{인용문|'''이탈리아는 유럽의 말랑말랑한 아랫배다. [[윈스턴 처칠]]. 이탈리아를 조롱하며.'''}} 이탈리아의 병신같은 짓은 독일의 기운을 쪽쪽 빨아먹어줬다. 아프리카에서 13만명이 털리지는 않나,그리스 침공했다가 역으로 쳐발리고 그 덕에 독소전이 더 늦게 개전되질 않나,시칠리아 상륙 당하고 이탈리아 상륙까지 당하지는 않나,역잘알이 아니라서 더는 모르겠다만 최소 잘한 짓은 하나도 못본거 같다. 독일을 쪽쪽 기운 빨아주고 지는데 한목 했으니 어쩌면 고마워해야하지 않을까싶기도 한다. 진짜 이새끼는 1차대전에는 잘 싸워놓고 왜 이지랄이 났는지 존나 미스테리다. 이 트롤짓만 한 이탈리아는 독일에서도 병신으로 보는것 같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 책을 보던중 (짭 말고 찐 나의 투쟁)존나 낄낄 거리면서 본 내용이 있다. 나치놈들이 이태리의 병신 짓을 깐 내용이다.얼마나 병신 같았는지 5페이지나 까주고 있다. 다음은 나의 투쟁 중 내용으로,한글자도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옮기겠다. {{인용문|'''이제껏 일어난 모든 사건들을 감정적인 문제를 뒤로하고 냉정하게 돌이켜 보면, 두체(무솔리니)와 나의 굳은 우정과 동맹국 이탈리아에 대한 성의는 오산이었다. 안타깝지만 나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보아도 명백히 이탈리아와의 동맹은 우리 독일보다 적군을 도운 일이 많았다. 그 뒤로 일어난 무수한 어려움에 비하면 이탈리아 동맹이 준 이익은 매우 적다. 만일 우리가 끝내 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이탈리아에게도 책임이 크다. 이탈리아가 우리를 위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역할은 전투에 참가하지 말아주는 것이었다. 이 불개입만 지켜주었더라면 우리도 이탈리아가 매우 고마웠을 것이며, 값진 선물도 잊지 않고 챙겨주었을 것이다. 그들이 멋대로 날뛰지 말고 방관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해 주었더라면 우리는 많은 구체적인 보상으로 고마움을 전했으리라. 그리하여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이 승리의 영광과 성과를 추축국 동지인 이탈리아와 아낌없이 나누었을 것이다. 고대 로마의 후예들이 조상들의 역사적 신화였던 지중해 패권을 차지하여 온 세계에 선언하도록 기꺼이 협력했을 것이다. 이 모두를 다 주어도 이탈리아를 동맹국으로 대접하는 것보다는 훨씬 이득이었으리라.'''}} {{인용문|'''솔직히 말해 동맹국 이탈리아는 우리 발목을 잡을 뿐이었다. 이탈리아 때문에 우리는 북아프리카에 새로운 정책을 펼 수 없게 되었다. 이탈리아가 이 지역을 바라는 사실은 분명했고, 두체(무솔리니)도 이 요구만큼은 언제나 빼놓지 않았다.'''}} {{인용문|'''이탈리아가 세누시 교단에게 자행한 잔혹한 행동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게다가 오만한 두체(무솔리니)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스스로를 '이슬람의 검' 으로 축복케 하여 비웃음과 분노를 일으켰다. 이 칭호는 예언자 무함마드나 정복자 오마르에게 걸맞은 것이다. 그럼에도 무솔리니는 매수와 억압이라는 수를 써서 몇몇 고관들이 자신에게 칭호를 수여하도록 강요했다. 우리에게 관대한 친이슬람 정책은 너무나도 마땅하고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산되었다. 대체 우리가 이탈리아와의 동맹으로 잃은 것이 얼마나 많은 것일까. 이 전쟁의 무대에서 우리가 가진 최고의 패를 내지 못하게 방해한 존재는 다름 아닌 이탈리아였다. 우리는 프랑스 보호령에 있었던 모든 나라의 독립 을 선언하고, 영국에 억압받는 지역 주민 모두가 반란을 일으키게 하려 했다. 이 정책만 시행되었다면 이슬람 국가들 모두가 감동했을 것이다.'''}} {{인용문|'''군사적인 부문에서도 수지가 맞지 않았다! 이탈리아가 싸우면 거의 반드시 적국에게 첫 승리를 안겨주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 승리에 힘입어 처칠은 자국민에게 용기를 불러일으켰으며, 친영국적인 지역 전체가 다시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아비시니아(에테오피아) 와 키레나이카에서에서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힘도 없는 주제에 무모하게 그리스 원정을 시도했다. 그들은 우리 말을 듣지도 않았고, 한마디 의논도 없었다. 이는 완전히 무의미한 전투였다. 이탈리아군의 꼴사나운 실패는 발칸 반도 사람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결과를 불러왔다. 베오그라드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끝내 1941년 봄에는 전환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 모두가 이탈리아의 무모한 행동이 원인 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발칸 반도에 무력 개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서 안타깝게도 러시아 침공은 뒤로 늦추어졌다. 그 밖에도 우리의 우수 사단의 전투력이 불필요하게 소모되었다. 끝내 우 리는 끝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광대한 땅을 점령해야만 했다. 이런 예상 밖 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굳이 그곳에 우리 부대를 배치하지 않아도 좋았으리라. 발칸 반도의 나라들도 우리 제3제국(나치 독일)에 대해 어느 정도 호의적인 중립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고, 나도 우리의 급강하 폭격기나 낙하산 부대를 코린트나 크레타가 아닌 몰타 제도와 지브롤터<ref>그 당시 스페인의 맨아랫쪽 왼쪽에 있는 좆나 작은 영국령 땅.</ref>에서 쓰고 싶었다.'''}} {{인용문|'''만일 이 전쟁이 추축국 (독일과 이탈리아) 의 것이 아니라 독일 혼자만의 전쟁이었다면, 우리는 1941년 5월 15일에 러시아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으리라. 전면적이고 압도적인 승리와 진격으로 의식이 고양되었던 우리는 겨울이 오기도 전에 동부전선의 전투를 마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오스트리아를 병합할 때 두체(무솔리니)가 보여주었던 태도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에 대한 감사로, 나는 이탈리아에 대해 비판적으로 판단하기를 삼갔다. 오히려 언제나 이탈리아를 대등한 상대로 여기려 노력해 왔다. 그러나 생존의 법칙은 진정 대등하지 않은 존재를 대등하게 다루는 것이 크나큰 실수임을 입증해 주었다. 두체는 나와 동등했다. 국민들에 대한 야심은 나보다 더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야심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