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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와의 관계 == <div align=center>[[파일:순이.jpg]]</div> 한마디로 명백한 [[명나라]]의 속국이다. [[조선왕조실록]] 보면 그냥 스스로 처음부터 외번을 자청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야, 우덜이 요동 실효지배 시도하다 버리고 떠난 관청이랑 백성들 있는데 거기서 왕 할래?" 괜히 제안한 거 아니다. 그나마 독립국으로 인정은 해줬다는게 다행이다. 사실 이점은 청나라때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황제들도 거기 독립국인데 말잘듣는데 뭐하러 치냐? 냅둬 이랬음 ㅇㅇ (명태조,청태종 빼고) 단지 청 때 명 때보다 훠얼씬 많이 뜯어갔을 뿐이다. === 건국 초 === {{의외}} [[홍무제]]는 생전에 "조선군 20만명만 요동에 쳐 기들어와도 우린 헬게이트 오픈임 ㅇㅇ"이랬다고 한다. 물론 당시 명나라가 조선보다 동원력이 월등히 앞썼고 오랜 전란이 겨우 끝났다고 해도 정예병력만 20만이기 때문에 엄살처럼 보일수도 있겠으나 아직 후방에는 [[북원]]세력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나마도 [[원나라]] 잔존세력과의 대치때문에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이때문에 홍무제는 조선을 견제하고 있었고 태조시기에는 조선도 처돌았는지 명나라의 몽니에 어깃장을 부린다. 대표적인 게 정도전이다. [[정도전]]의 요동정벌 계획 및 여진족 귀순문제를 둘러싼 마찰로 인해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또한 정도전이 말 안듣고 계속 개지랄하니까 여러번 정도전을 명에 보낼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인용|임금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이성, 강계 등지에 와서 의탁한 여진의 인물을 찾아 돌려보내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좌우에 이르기를 "황제는 군사가 많고 .... 작은 나라를 자주 책망하면서 강제로 청구함이 한량이 없었다. 지금 또 나에게 죄가 아닌것을 책망하면서 군대를 일으키겠다고 위협하니, 이것이 어린아이에게 공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태조실록}} 원래 명나라 주원장은 여진족 기병을 기반으로 삼은 이성계를 경계하고 있었다. 비단 이성계의 군벌 세력만이 아니라 고려에 좆달린 새끼들은 별에 별 전투를 겪어서 실진경험도 꽤 있었다. 게다가 조선은 몽골과 여진이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인구가 많았다. 이것 때문에 신진 사대부들도 동명성왕(고주몽)의 옛 강토(요동) 운운하며 고구려 흉내 내보려 했다....였는데 정도전 죽고 이방원이 정권 잡으면서 일단 숙이고 보는 자세를 취한다. 그런데 이런 놈들이 먼저 간을 보니 명나라로서는 기쁘기 그지 않을 수 없었고 이들을 순이라 부르게 된다. 그러나 조선에 대해 항시 경계심을 갖고 있던 명태조 주원장이 죽고 [[태종]]이 명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함으로 인해 관계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현실은 조선또한 장부상으로나 10만 대병력을 동원할수 있었지만 실재로는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문제로 저정도로 병력 동원은 불가능하다. 명나라는 10만 10만씩 두번 써먹을수 있었지만 조선으로선 10만을 한타싸움에 갈아넣어야만 헀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산악지형이라는 조선반도 홈 어드벤테이지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도전을 주살하고 집권한 태종이 현실을 인정하고 명나라와 선린우호 관계를 다시 구축한 것이다. 마침 역시 쿠데타로 황제가 성조 영락제로 바뀐것도 있었다. ..고는 하지만 사실 관계가 나아졌다는 것은 조선이 명에 반강제적으로 저자세 외교를 강요받는 수준이었다. 명의 사신은 조선에서 갖은 횡포를 부렸고 조선은 명의 눈치를 엄청 보아야 했는데 다음 링크를 참고해라. [https://books.google.co.kr/books?id=6Ta4BQAAQBAJ&pg=PT147&lpg=PT147&dq=%EB%AA%85%EB%82%98%EB%9D%BC+%EC%84%B8%EC%A2%85%EB%8C%80%EC%99%95&source=bl&ots=LsTIIO9jW-&sig=AacBLqHWgVCoBt5BpDInB2WiPbk&hl=ko&sa=X&ved=0ahUKEwjRz7iauYrMAhWFIJoKHYq9CKw4ChDoAQgyMAU#v=onepage&q=%EB%AA%85%EB%82%98%EB%9D%BC%20%EC%84%B8%EC%A2%85%EB%8C%80%EC%99%95&f=false] 반도 최고의 군주로 칭송받는 [[세종]]조차도 명과의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어찌할 바를 찾지 못했다... 속으로 씨발거리거나 신하들이랑 뒷땀만 깔뿐이다. :실제로 명사신 앞에서 신하 셋과 함께 절하고 춤추는 추태를 보였다,다만 이땐 베트남이 강하게 나가다 명의 "일부"로 "수십년"이나 먹혔다. 물론 이외에 수치는 찾기 어려운데 애초부터 명 내부부터 조선을 완벽하게 신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도(세종 본명)를 시험한게 아닐까 ::참고로 베트남은 옛날부터 개겨서 베트남이 이길 때도 있었지만 맨날 대량학살 당하고 식민지 신세였다. 명도 베트남놈들이 게릴라랑 사정사정하면서 간신히 몰아낸 다음 지들이 미녀도 조선보다 훨씬 많이 바치면서 알아서 기었다. 반면에 조선은 보낸 공녀들이 명나라 왕족들과 혼인관계를 맺기도 하고 물론 명나라 새끼들 중에서도 조선 가지고 지랄하는 새끼들이 있기는 했지만 확실히 대접이 달랐다. 서열도 그냥 높았음. === 조선 중기 이후 === 조선 초부터 어쩔수없이 명나라 눈치를 보는 사대외교를 하긴 했어도 그나마 조선 초 집권파였던 관학파들은 마음속으로나마 "씨발..큰나라면 다야? 존나좆같네" 라는 생각을 가진 놈들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집권파인 사림들은 정말로 명에 대해 충성과 으-리를 다해야 한다고 뼛속깊이 생각하는 인간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이는 그 이름높은 성리학자인 율곡 이이가 <기자실기><ref>조선의 모든 문화의 근원이 중국사람인 기자에게서 왔다는 사상을 글로 싸지른 율곡이이의 저서</ref> 를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얼추 알 수가 있다. 사림들은 명을 부모의 나라로 인식했고 조선을 중화의 세계에 편입된 소중화로, 나머지 이민족을 중화세계 밖의 오랑캐로 인식하는 화이론적 세계관을 답습했고 이러한 사림들의 생각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15만 대군을 조선에 파병한 이후 더욱 강해졌다. 결국 사대부의 존화주의적, 화이론적 세계관은 명이 망한 뒤에도 신종황제나 의종황제의 묘<ref>'만동묘' 라고 하는데 고종때 철거되었다.</ref> 를 조선에 세우는 정신병적인 사대의리 의식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이 묘는 신하들이 감히 똑바로 서서 올라갈 수 없도록 계단을 매우 가파르게 만들었다. 일본이 강제로 중단, 철거시키지 않았다면 지금쯤 만동묘 세계문화유산+조선의 빛나는 문화로 포장하여 전세계에 똥을 뿌렸을 것이다. :아니 다른 건 몰라도 만력제 찬양은 인간적으로 인정할 만한 부분 맞지 ㅅㅂ. 사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무조건 중국 찬양은 까고 보는데 애미없는 풍신수길 씹새끼 막는 데 만력제의 도움이 얼마나 컸냐. ::간단히 신종 제사나 치렀으면 모르겠는데 사대부놈들이 정신병 걸린것처럼 만동묘 계단을 가파르게 만들어서 똑바로 서서 올라갈 수 없게 만들었단게 포인트임. 조선인 전체가 대중화에 알아서 기겠습니다라는 뜻이 담겨있는데 얼마나 개좆같음. 이딴 개짓거리를 지배층이 주도적으로 조선멸망할때까지 하고 자빠졌으니 신정국가 조선이 일본손에 망한것도 당연함. 사실 조선시대는 정신적인 '중제강점기'라고 봐도 무방할듯하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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