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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들을 대하는 태도 === {{노예}} [[파일:경복궁.jpg]] '''영국이 거문도 점령하고 조선인들 동원해서 기지 건설할때, 그에 알맞은 보수를 주었다고 한다. 그 당시 거문도의 조선인들은 공사에 동원하고도 보수도 제대로 안주는 조선 정부와는 반대로, 보수를 제대로 지급하는 영국의 태도 때문에 큰 반감은 없었다고 한다.''' :반감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영국으로 돌아간다고 했을때 주민들 바짓가랑이 붙잡고 매달림. ::어패가 있다. 전근머 똥양 국가는 조 용 세라 하여 노동력도 국가에서 정당하게 뽑아쓸수 있는 세금이다.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건 중국에서 율령제 받아들인 모든나라 공통사항이다. 단 중국은 명나라 후기 부터 세금이 은 하나로 전부 통일되어서 걍 나라에서 세금으로 걷어 들어온 은으로 직업군인들과 노동자들을 모집해 임금을 결제했다. 이건 남미에서 은이 흘러넘쳐 들어오면서 세계적인 추세였다. 즉, 조용조를 만든 중국 본인도 예전에 폐지하고 세금일원화를 실행했고 일본도 마찬가지 였는데 조선 혼자서만 천년전 당나라가 만든 조용조를 고수하며 백성들을 조지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냥 [[노예]]로 설명 끝이다. 왕이 까라먼 무보수로 노동에 나와서 부역질해야했고 왕이 싸우라하면 죽창들고 싸우러 나가다 적에게 죽는 SCV 겸 저글링이었다.(그건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 동시대 일본 명나라 오스만 심지어 유럽국가들도 그랬다) :조선 초 요역은 8결의 토지에서 1명의 장정을 1년에 6일 이하의 기간 동안 무상으로 부릴 수 있도록 했다. 군역도 원칙이 있었고, 왕이나 지방 수령 개인이 맘대로 할 수 없었음. 마음대로 할수 있었다면 그건 중세때까지임. 이러한 무보수노동은 정조 이후로 없어졌다. 수원에 있는 화성 지을때 백성들한테 임금을 주고 부려먹었다. 덕분에 보통 5년이 넘게 걸리는 작업을 2년만에 끝냄. 사상적으론 왕토사상으로 모든게 왕의 것이다. 물론 대놓고 뺐는 경운 드물었지만 또라이 임금 나오면 백성의 사유재산이고 지랄이고 없다. 연산군은 전국 팔도 미녀들 납치해서 궁궐에 뒀다. :그 왕토사상이 중앙집권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중세의 귀족 분할통치 (즉 장원 영지 등의 사전)를 억압 내지는 부정하는 장치였다는 소리다. 조선은 상당히 백성에게 잔혹했던 나라로 조금만 반항끼를 보이면 그대로 찍어누르는 경우가 많았다. 동학농민운동때 조선의 힘으론 안되니까 바로 청나라 군대 불러서 유혈진압을 시도했을정도였다. (사실 이건 [[태평천국의 난]]때 청나라도 했던 짓이다. 역갤 새끼들은 인정 안 하겠지만 일본도 한때는 이랬다) 평소에 백성이 어쩌고하는건 다 코스프레였던 것이다. 사실 백성들도 병신이다. 세도정치 시기에 탐관오리에 대한 학정으로 민란이 일어났는데 양반들 선동으로 그걸 진압하는 의병이 일어난 적이 있다. 똥수저들을 똥수저들로 진압. 사실 집단의 대표자라는 건 그 집단을 구성하는 인간들 수준에 맞는 퀄리티라는 말이 있기에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지도자가 병신인데 국민들은 깨시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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