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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와 사회 == 유교적 경제관에 입각해 상공업 발달을 억제하고 강력한 중농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주력 산업인 농업에서조차 그 생산력이 높지 않아서 결국 조선은 만성적인 재정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돈이 없으니 도로, 저수지 및 관개시설 같은 기반시설에 대한 국가의 투자도 기대할 수 없었고 더군다나 상공업을 억제하는 정책으로 인해 농업 외에 기타 산업이 성장하길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똥땅에 비해 농업생산력은 그래도 동시기 다른 유럽에 비해 높았다. 모든걸 다 포기하고 오직 농사에 모든걸 몰빵했으니 당연한 것이다. 조선의 인구가 좁은 땅에 비해 500만이 넘었으니 GDP 자체도 전근대 기준으로도 꿀리지 않았다. :국가에서는 지속적으로 경작지를 늘리려는 시도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지속적으로 하천 근처의 기름진 범람원을 농지로 개간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며 주로 백성들을 징발하여 개간하였다. 물론 어느 관점으로 보자면 자신들의 밥그릇을 늘리기 위해 백성들을 이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조선 정부에서 농업 생산량을 늘리려고 하지 않았다고 보는 건 조금 무리가 있는 듯 하다. 또한 성리학 교육에만 온 국력을 몰빵해 인재들이 전부 관직 부문에만 집중되어 사회 각 부문간에 인력 배분에 실패했으며, 지식 또한 지배층이 독점하여 민간에 지식이나 정보가 유통될 여지가 거의 없었다. 인쇄와 출판을 사실상 국가가 독점하여 통치에 필요한 것들만 조금씩 서적으로 찍어냈지만 대량생산을 하지 못해 값이 비싸 일반 백성들은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책의 경우 과거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반 백성들이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던 것이었다. 서양도 구덴베르크 이후에나 해결되었다. 조선의 경우 물론 통치체제를 강화하기 위함이었지만 국가에서 교과서인 동몽선습 등을 발행하여 각지의 서당에 배포하기도 하였다. 또한 농업에서 만큼은 기술 배포를 위해 세종 대에는 각지의 농사법을 모아 농사직설을 편찬하였으며 금양잠록, 농가집성 등의 책도 출간되었다. 수취제도에서 조세의 공식적 세율은 토지생산량의 1/10 이었지만 과전법과 직전법이 무너지고 환곡, 병역, 공납제도에서 무수히 많은 폐단이 발생하여 수취제도 전반이 백성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결국 백성들은 부담을 감당하다 못해 토지를 이탈하여 도망다니기에 이르렀다. 수취제도가 심각하게 썩었음을 인식한 조선 후기에 비로소 대동법이 시행되어, 공납을 각 가호에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조세와 같이 토지를 기준으로 하여 부과하는(공납의 재산세화) 일부 개혁적 조치가 행해지긴 했지만 전국에서 이것이 시행되기까지 100년의 세월이 걸렸다. 총체적으로 보면 조선의 경제는 전반적으로 성장을 가져오는 요소보다는 오히려 저해하는 요소를 더 많이 갖고 있었다. 500년에 이르는 역사 가운데에서도 단 한번도 그러한 체제를 바꾸려고 하지 않았고, 지배층들은 착취와 체제의 안정만을 고집했을 뿐이다. 상공업은 집어치우고라도 주력산업으로 찍어놓은 농업의 생산력을 늘리려는 노력도 거의 하지 않았다. :농업 생산력의 경우 고려 때 보다 발달한 것 은 사실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중농 정책을 펼치었으며 농지는 조선 전기부터 계속해서 개간을 통하여 증가하였다. 고려시대 이전에는 방치되었던 하천 근처의 범람원과 원시림들이 개간되어 논과 화전으로 바뀌었고, 치수사업을 통해 보 같은 저수시설을 확충하였다. 소(牛)의 경우도 있다. 세조때의 기록에는 오키나와의 물소와 한국 소를 교배하여 힘이 센 소가 나오도록 계량하였으며 이를 전국에 보급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 초기 3만마리 정도였던 소가 18세기 후반에는 100만마리 정도로 증가하였다는 계산도 있다. 다만 이 경우 소가 많아지다 보니 소 전염병인 우역의 창궐과 소가 옮기는 우두로 인해 천연두가 유행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조선에서도 노력은 했다. 관점을 바꾸어서 말해보자면 지배자 자신들(양반들)의 밥그릇이 나오는 농업을 발전시키려 하지 않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하천 개간과 화전으로 인한 다양한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상업에 대해서도 17세기 이후나 양란이후 처리에서 신하들이 각종 상업적 문제에 대해 토론하였다. 즉 조선 정부가 상업을 무조건 찍어누르기만 한 국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예로 17세기 서인과 남인은 상업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근데 GDP는 생각보다 낮지 않았다고 한다. 'Development Centre Studies The World Economy A Millennial Perspective' 라는 OECD에서 발간한 책에 따르면 1900년대 당시 GDP가 한국이 850달러로 세계 27위, 일본이 1135달러로 세계 24위였다. ...근데 당연하지만 GDP가 높다고 기술 수준이 높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당시 조센 수준을 보면... :저 책을 쓴 앵거스 메디슨의 2010년 자료에서는 조선의 일인당 GDP가 더 떨어졌다. [http://www.ggdc.net/maddison/maddison-project/home.htm] :애당초 앵거스 메디슨 자료는 그냥 재미로만 보는거다. 양천제였다고 하나 실질적으로 반상제였기 때문에 양반층은 부역과 조세에서 면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비는 엄청 많았고 이래서야 나라가 부강해 지려야 질 수가 없다. 거기다 화폐경제도 늦게서야 정착이 되었고 나름 세율은 낮게 잡아주려 했지만 나라에 도둑놈들이 많은 관계로 폐단을 제대로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나라가 거지였다. 남간에서야 정부가 검소하게 운영했다 하는데 안한거와 못한거는 다른거지. :안한거 맞다. 조선은 성리학,민본주의땜에 세금 적게 거두는 작은 정부를 표방했다. 근데 여기서 문제가 그래도 일하는 관리들 녹봉은 짭짤하게 챙겨줘야하는데 개ㅈ만하게 챙겨줘서 대부분의 관료들은 녹봉으로 생계유지조차 못했다. 그러니 지방 관료들의 수탈이 생겨난거지 단순히 동네 사또들이 미친 사이코 새끼들이라 뜯어먹은건 아니였다 === 좆같은 도로 === 유교 탈레반인 정치인(사대부)들은 도로를 건설하면 오랑케가 도로를 이용해서 침략한다는 부류가 대부분이라 도로건설을 극렬히 반대했고 거기다가 도로가 건설되면 상업이 발달해 성리학에 입각한 중농주의가 위협받는다고 주장했다. 상업이 발달하면 중농주의가 파괴되면서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던 정치인(사대부) 자신들이 위협받으니 국가의 발전과 안위보다는 지들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한거 보면 헬조선이라는 말이 그냥 떠오른다. 거기다가 존나 답답한데 놀고 먹고 정치질하는 지주인 사대부들은 세금을 내는 계층이 아닌마당에 노동하는 농민은 지주에게 소작세를 바치고 나라에 세금까지 바쳐야됨. 도로가 발전하지 못 해서 상업이 발달하지 못해 산업도 발달하지 못했고 그에 따른 경제철학이나 사회현상발견같은 혁신을 가져오지 못 해서 예를들면 조선후기 경복궁을 중건할때 인플레이션 개념을 몰랐던 조선은 당백전을 틈만나면 찍어대서 물가가 상승했는데 해결방법은 몰랐다. 거기다가 그나마 있던 도로 거의 모두가 흙길이라 비가오면 질퍽한 뻘로 변해 우천시 교통은 매우 좃 같았음. 그리고 그 도로도 한반도 자체가 산이 존나 많은 국가라서 산길에 겨우겨우 뚫어놓고 걸어다니는 도로였으며 당연히 산으로 다니다보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오죽하면 조선 중,후기들어서 실학자들이 주장한게 "도로 정비해서 수레좀 씁시다"였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급식시절 초중고에서 배우는 실학자 박지원의그 유명한 허생전 자체가 조선은 도로가 없어 유통이 이루어지지않음으로 말미암은 열악한 시장상황을 풍자하는 내용이다 가끔 조선 쉴드치는 국뽕들이 좆선은 해운에 의존하여 도로 안지었다고 쉴드 존나 치는데 시발 무슨 강이 한반도 내륙마다 베네치아마냥 연결되어 있으면 모를까 개헛소리니 들을가치조차 없다. 다만 이는 근대 이전 국가에서 전형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다. 로마를 언급하는데 로마 이후 유럽에서는 로마와 같은 포장도로를 발달 시키지 못했고 도로 대다수가 질척한 흙길이었다. 다만 조선이 국가적으로 도로를 닦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도로를 닦는 것과 같은 일로 인력을 동원하는 건 민폐라고 생각했으리라 추측한다. :삼면이 바다 그거는 ㄹㅇ 존나 어처구니 없는게 씨발 이탈리아도 반도지만 얘네는 워낙 씹사기니 넘어가더라도 바다 낀 나라가 한둘이 아니거늘 그 어느 나라도 조선만큼 도로가 후진 나라는 없었다. 전국 방방곡곡의 도로를 석재로 포장하는건 근대 이전에 로마만이 해냈던 일이기는 한데, 로마처럼 아예 싹 다 포장하는 미친 짓만 안했을 뿐이지 최소한의 관리들은 했다. 동시대 청나라와 비교하는 북학파들의 글만봐도 조선은 전근대 국가 중에서도 특별히 도로가 병신임이 다 나온다. === 도시 === 초기~중기까지는 수도인 한양 및 평양부, 개성 유수부, 광주목, 경주부 등 지방행정단위로서 국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지방관을 파견한 곳을 중심으로 도시가 생성되었다. 17C이후 농업생산력이 증가하고 효종 이래로 화폐가 널리 쓰이기 시작하면서 상업이 발달해 점차 물품거래가 상대적으로 활발한 강 중하류의 포구, 세곡미 저장 창고가 있는 곳, 해안가에 인구가 집중되기 시작하였고 이때 포구, 포구를 중심으로 한 시장(장시)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금강의 강경포나 함경도 원산지역이 대표적이다. :효종 이래로 화폐가 널리 쓰였다는건 개씹구라다. 조선 후기 경제를 대표하는 상품은 바로 '베'였다. 즉 베를 가지고 다니며 물건을 구입할때마다 그때그때 베를 잘라서 내주었던게 조선이 멸망하던 그 순간까지의 경제수준이다. 그나마 초기에는 쌀과 계란으로 물물교환 했던게 발전한거다! 참고로 당연히 쌀 한 포대에 베 2필 이런 통일된 규정따위 없었고 걍 흥정나름인 원시경제수준이었다. ::효종 이후 화폐가 널리 쓰였다는건 개소리 맞다. 명이 15세기에 화폐경제를 부활시키고, 17세기에 일본에서 화폐경제가 발달시작한 것과는 달리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도 조선의 화폐는 대도시나 시장에서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쓰이는 수준이었다. 조선의 화폐제도는 중국이나 일본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임란 이후 명과 일본에서 은이 다량으로 유입될 때에는 동전보다는 은이나 베, 쌀을 화폐처럼 썼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은 유출을 적극 규제하면서 동전이 슬슬 퍼지기 시작한게 숙종때부터다. 그러나 그마저도 동전유통을 별로 좋게 보지 않았던 영조 때 부터는 아예 주조가 중단되기도 했던걸 보면 교과서의 '널리' 라는 표현과는 다르게 국가적으로 광범위하게 쓰이진 못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지주들이 소작농에게 소작을 주는 대신 직접 경작하는 행태가 늘어나고 일부 소작농이 토지를 독점하여 부농으로 성장하는 한편, 많은 소작농들이 토지를 잃고 반 강제적으로 농촌을 떠나 광산노동자나 소상인이 되면서 포구나 장시는 물론 광산 주변에도 인구가 집중되었다. 조선의 가장 큰 도시는 역시 수도인 한양이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세종대에 인구가 10만이었고 임란 이후에 4만, 조선 후기에 20만이었다고 한다. 한성부과 관할하는 한성 밖 10여리 정도의 인구까지 포함하면 30만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지명 뒤에 '-포', '-진'이 붙은 곳이 한성 주변 인구밀집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노량진, 마포등이 그 예이다. 앞서 말했듯이 조선후기 도시의 인구집중화 현상으로 위생,환경 문제가 크게 발생한다. 한양의 식수은 토양의 오염으로 염분도가 상승했고 길거리는 오물과 똥이 방치되고 벌레가 들끓었다. 특히 여름되면 어떤 말로 표현도 못할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도시전체를 뒤덮었기에 조선으로 장사를 하러오거나 선교를 하러 온 외국인들도 차라리 코를 없애버리고 싶다고 한탄할정도. 상'하수도가 정비되지 못해서 그냥 맑은 물 만있으면 마셨고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 복통에 대한 잦은 기록들이 조선 특유의 과식과 한양의 식수원 오염이 원인이라고 추정된다. 거기다가 더럽게 씻지도 않고 머리에 이가 있으면 오히려 장수의 상징이라면서 자랑거리로 삼았다. 그리고 계획적으로 도시가 발전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건설되어 건물과 건물은 규칙성도 없었고 건물끼리 가까이 붙어있어 화제가 나면 일대가 쑥대밭이 돼버렸다. 한양에서 조그만한 화재만 나도 왕이 수시로 보고를 받고 명령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주요도시 인구가 18C(정조 치세시기)에 어떠했을지는 다음 링크를 참고해라. [http://mlbpark.donga.com/mlbpark/b.php?&b=bullpen2&id=2576004] MLB파크 이용자가 아주 구체적으로 작성하였으나, 출처를 적시하지 않았으므로 아주 믿지는 마라. 단순 참고용이다. === 지나친 기술 천시 풍조 === 삼국시대보다 못한 경제적 인프라가 있다. [http://whytimes.kr/news/view.php?idx=389&mcode=m57vrxf 칼럼] 이 병신 칼럼은 백자가 더 높은 온도에 구원서 청자보다 만들기 힘들다는 것도 모르고 쓴거니 무시하자. 진짜 '암흑시대'라는 말을 중세 유럽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추가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깊게 통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유명한 사>농>공>상의 조선 풍조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새끼들에겐 뒤진 공자 새끼 말씀이 제일 중요했고, 그 다음으로는 지들 배때지에 밥 넣어줄 농민들이 중요했고, 기술자는 필요할때만 찾는 쌍것들에 불과했다. 이러한 조선의 풍조는 발전이 정체되어 세계 제일의 극빈 후진국으로 전락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프랑스의 샤를 메시에가 메시에 천체 목록(그 유명한 안드로메다 은하도 포함되어 있음)을 작성하던 그 시기에도 조선 새끼들은 기술 천시 풍조로 천문학에 대한 발전이 전혀 없이 지배층이라는 새끼들이 몇 세기 전에 명나라에서 짓껄인 개소리 '양명학'을 두고 이것이 옳으네 그르네 지들끼리 싸웠던 나라니 얼마나 미개한지 알 수 있다. 요약하지면 상업은 농담 아니고 고대 수메르 문명보다 못한 수준이고(얘넨 수천 킬로 떨어진 인더스와 교역이 활발했고 그를 위해 상인들끼리 공동투자도 하고 놀았다. 쏟아지는 점토판 유물의 대다수가 '영수증'이다), 공업도 동시대 국가 중에서 가장 ㅎㅌㅊ인 수준이며, 그나마 농사에 몰빵해서 농업생산성은 꽤 준수했지만 사실 이마저도 상공업 몽땅 내던지고 몰빵 한 것 치곤 병신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수차 도입을 안한 건 상류층이 얼마나 농민들 배려를 안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고생을 사서한다 아주 기술자를 천시하고 실제로 장인들에 대한 관아의 횡포가 심했다고 한다. 또한 적절한 보수를 지급하지 않았고 대우도 형편없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도공]]들이 일본으로 간뒤, 좋은 대우를 받자 고국으로 돌아가기 싫어했었다고 함 === 지주를 위한 나라 === 조선이 좆망한 가장 큰 원인이다. 선조대 들면서 조선의 주요 지배계층으로 된 사림쪽은 대체로 중소 지주계층이다. 관료들도 죄다 이쪽 계열이다보니 얘네한테 유리한 방향의 정책밖에 내지 않았다. :근데 이건 의외로 유럽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급성장한 독일의 융커 새끼들도 지들이 지주 출신이니까 지들 지역에 유리한 정책과 법률을 만들어서 다른 상공업 지역들을 쪽쪽 빨아먹었다. 농업에 별로 의존하지 않던 부르조아들이 존나게 귀족들을 혐오한 이유다. 왜 상공업 천시하고 농업에 몰빵했냐? 상공업이 흥하면 지주들은 당연히 예전만큼 힘을 못쓰니까 향약보급, 서원을 왜 그렇게 지어댓냐? 말이좋아 교화지 그냥 지방 사대부들 권한확대용이다. 굳히기용 유향소는 덤 노비수가 왜이리 많았나? 상공업이 씹창났으니 농업외에는 할게없고 흉년이 들면 밥만 먹여달라고 노비로 들어오니까 농업사회는 거의 무조건이다 싶을정도로 노동력이 곧 재산이다. 근데 굴러들어온 노동력을 놔주고 싶어하겠냐? 관료라는 새끼들도 극소수의 개념인 빼고는 노비제 굳히는데 안달이 나있다. 수미법? 상공업 좆망하고 농업에 몰빵한 나라에서 수미법 도입은 건국하고 절반이 지나간 상황에서 진행했다. 애초에 수미법은 세부담을 지주한테 지우는 탓에 지들 부담이 늘거든 지주의 나라였던 조선이 망하고 한반도에서 소작이 사라진건 광복 이후, 북괴새끼들이야 지주들에게서 토지를 몰수해서 무상 분배했고 남한은 [[농지개혁법]]이라고 토지를 유상구입해서 농민들에게 장기 분할 납부로 팔았고 어짜피 그 뒤에 한국전쟁으로 지주나 소작농이나 똑같은 거지새끼들이 되면서 소작이 사라졌다. === 상인 === 상공업이 좆망해서 조선이 좆망했다고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새끼들 탓도 크다. 중앙정부가 상인들 이윤좀 빨아먹자고 특정 상인들에게 독점권을 줘버렸다. 조선이 교통이 병신인탓이 이들 덕일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상공업을 이새끼들이 독점해버리니 기술발전이 쉽게 될리가 없다. 더군다나 결속력은 기가막히게 높아서 새로 뭐가 나올수가 없다. 나중에는 어용집단으로 변질되고 이게 구한말까지 지속된다. 우리가 아는 보부상이 그거다. === 당백전 === 조선 왕조가 경제에 대한 지식이 모자르다는 증거. [[당백전|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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