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조선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군대 == 시조인 태조 이성계는 한반도 역사상 이순신과 더불어 개사기 천재 지휘관이다. 어느 정도냐면.. 전통적인 기병강국 몽골을 기병으로 격파했고, 평지에서 여진족 기병 수만을 격파하고, 산에서 농성하는 쪽바리들을 상대로 기병으로 상대하고 활로 무쌍난무 펼치고, 이미 20대 때 10만 홍건적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운다. 몽골족, 여진족, 쪽바리, 짱깨 다 때려잡은 한반도 육군 역사상 최고 아웃풋을 자랑한다. 심지어 홍무제는 이성계가 군대끌고 처들어 오면 어케막냐고 신하들과 의논했을 수준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그가 세운 오리지널 헬조선 군대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손 꼽히는 개약체다. 중국은 아무리 삽질하던 시기라도 해도 전반적으로 강력했고, 일본은 계속 된 전국시대로 인해 군대의 용맹과 강력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총력전을 한 임진왜란이 200여년의 걸친 평화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 전에도 조선군은 제대로 된거 같지는 않았다. 리즈시기 태종-세종 시절때 [[대마도]] 정벌 때 매복한 [[대마도]]군에게 당한건 그야말로 개씹좆이라 할 수도 있다. :근데 이건 매복해서 갑자기 당한 것도 있고 집이고 배고 엄청 태워버려서 대마도주가 빌빌 길 정도의 피해는 입히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한게 잘한 건 아니지만 조선 초 사병이 해체된 이후 징집병들로 군대가 편성되면서 근접전 역량이 급격히 저하되었고, 결국 조선군은 근접무기보다는 원거리 무기를 선호하는 군대가 되었다. 조선군의 주요 전술은 고지를 선점한 후 활이나 조총같은 원거리 무기로 무장한 병사들을 배치해놓고 적이 접근하면 격퇴하는 방식이었는데 대마도 정벌에서도 이와 같은 전술을 썼다. 임란때도 근접전은 명군이 주축이 되어야 했다. :이건 사병이 해체된 탓이 아니다. 세조가 멀리서 활쏘면 되는데 창기병 뭐하러 있음? 하면서 창기병 없에고 돈나간다고 화통도감 폐지해서 병신된거지 그리고 전체적으로 수가 정말 적은평이였는데 이괄의 난때 1만2천명이 배신했다고 나라가 씹창났다 ㅋㅋㅋㅋ(그 1만 2천이 당시 최정예병들이었고 그 당시 조선 총 병력이 10만도 안된다. 지금도 최전선에 있는 야전부대 10% 이상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면 진압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 정도 병력을 지휘하는 지휘관을 잘 감시해서 방지하는 거지) 병력의 질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가 바로 보급 자체가 씹망 수준이었다는 거다. 당장 [[임진왜란]] 항목에서 보면 알겠지만 얼마나 보급력이 앰창이었는지 대놓고 자기들한테 덤빈 일본군 작살내려고 온 명나라 군대도 조선의 보급력이 너무 앰창이라서 뜨악한 나머지 어쩔 수 없이 강화교섭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당시 명나라 군대는 봉급제로 은덩어리를 지급받아 이걸로 셈을 하여 식량을 사먹는 시스템이었는데 당시 화폐 경제 자체가 없던 앰창 조선에서는 이게 불가능, 그러자 명군 지도부는 재빨리 요동에서 준비된 식량을 조선으로 운반하기 시작하여 의주까지 운반하였고 그 후의 보급은 조선에게 일임하였는데 조선은 이걸 어떻게 운반해야 하는지의 개념 자체가 씹망이라서 보급이 제대로 안되기 시작했고 결국 명나라에서 온 기병대의 군마 절반 이상이 굶어 죽는 대재앙이 발생했다. 그것도 존나 장거리도 아닌 의주에서 평양까지의 보급을 못해서 이 사고가 터진거다. 명나라가 얼마나 빡쳤는지 조선보급담당 관리를 직접 불러다가 곤장을 때리고 [[류성룡]]까지 불러다가 조질려고 했을 정도로 명나라 입장에서 어처구니가 없었던 일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전쟁론 같은 책이 나오고 있을때 갓조선은 무엇을 하고있었는가? 평화를 사랑해서 임란때는 영웅 한명에 나라의 운명이 좌지우지되기도 했다. [[고려 왕조]]의 군인은 그래도 [[거란]]의 침입을 막거나 한 전적이라도 있었다. 근데 조선의 군대는 진짜 말 그대로 초기를 빼면 털린 역사밖에 없다. 근데 이건 학자풍이 강해져서 그렇게 된 점도 있다. 원래 과거에는 상무정신이 강하고 무사들이 설치는 나라들의 맨파워가 아주 강력했고 세계의 다른 나라들도 학자풍이 들면 군사력이 엄청 하락했다. 심지어 그 로마도 상무정신이 강한 민족들하고 전쟁은 덩치와 장비빨에 비해 엄청나게 고전한다. 그 로마제국이 군사적 최전성기를 맞이한 상태에서 다키아는 아직 온전한 문명 단계에 도달하기엔 상당히 먼 상태였고 다키아의 인구도 고작 50만에 불과했지만 그런 다키아를 ㅅㅌㅊ 지휘관 + 정예병 + 대군을 동원하고도 간신히 이겼을 정도다. 처음에는 오히려 로마가 탈탈 털리고 강화 조건으로 다키아에 기술자와 군사고문, 그리고 배상금을 지불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첨에 그깟 야만족 쯤이야 이때까지 처럼 툭치면 머가리 빡하고 깨지겠지 하고 갔다가 팔크스에 스쿠툼과 오른팔이 같이 잘려나가버렸다. 결국 트라야누스가 15~20 만 대군을 동원해서 줘패버림. 조선군이 이처럼 인식이 개좆병신인 이유는 물론 외세의 침공에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하고 무력하게 당하는 역사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군이 이렇게 굴욕적인 전과를 세운 이유를 요약해보자면 첫째로 전쟁을 수행하는건 무관들이다. 얘들은 말그대로 싸우고 군대를 이끄는 것에 인생을 받친 애들이라 아무리 그래도 병법을 익히고 싸움의 기본적인 이치를 아는등 군대를 지휘할 역량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글 읽고 글 쓰는게 말그대로 빠워였던 병신 조선에서는 전쟁만 일어나면 문관들이 무관의 지휘권을 거의 빼앗다시피하고 군대를 지 좆빵매처럼 휘두르다 존나 시원하게 말아먹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가 대표적으로 칠천량 해전과 쌍령 전투, 선비들의 빼애액질로 억울하게 파직당하고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울분을 참아가며 뒤져버린 수군을 재건하려 혈투를 벌였다. 장수들이 전쟁의 상황을 읽고 부관들과 상황을 의논하고 있을때도 씹선비 새끼들이 나라를 위한 싸움에 서둘러 나서지 않고 뭐하냐 이 매국노 새끼야라며 매도하면 무관으로썬 어쩔 도리가 없었다. 둘째로 조선군의 재정부족이다. 헬조선이라는 별칭과는 다르게 조선에선 세금을 적게 거뒀다. 동시대 일본에선 농민들이 지나친 과세 때문에 폭동을 전국적으로 일으키던 것과는 다르게 꼴에 유교 사상이라고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는 양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근데 거두는 양이 적다 보니까 관리들에게 주는 봉급도 적고 관리들은 주어진 관직의 힘을 이용해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으로 이어진게 문제지. 때문에 군대도 재정부족으로 인해 일정 이상의 군대확장이 거의 불가능했고 더불어 공명첩으로 세금에서 면제되는 양반들이 많아지고 씨발 도저히 못살겠다하고 아예 빤쓰런 해버리는 농민들의 숫자도 늘면서 자연스레 군비의 축소로 이어졌다. 물론 이를 알고 군대를 키우려는 왕들도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말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 거의 유명무실한 수준으로 퇴보한 유령군대였다. 지원도 거의 끊긴 상태에서 쫄쫄 굶던 군인들은 곧 두 차례의 양요를 맞이하고 철저히 패퇴한다. 흥선 대원군은 이 문제점을 간파하고 군대의 확충, 서양화와 신무기 개발, 도입에 박차를 가했지만 경제가 씹창나고 대원군도 곧 고종으로 바뀜당하며 조선의 뿌리로부터 이어지는 군대는 사실상 해산된다. 셋째로 대비가 부족했다, 물론 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임란 전에도 조선은 일본이 힘을 키우고 뭔 짓을 벌일것 같다라는 첩보 정도는 입수했었고, 선조도 나름 군비 확충에 성을 쌓아 올리는 등 전쟁 대비에 박차를 가했다. 물론 대비를 했다 정도지 잘한 것은 절대 아니다. 전국시대를 거치며 뇌가 전쟁에 관한 지식과 병법으로 가득 차있었던 베테랑 왜군들을 기껏해야 고려시대 왜구 해적 정도로 과소평가한 조선은 장창으로 높이가 모자란 성벽 위의 병사가 찔려 죽고 조총 세례에 정예 기병들이 갈려나가는 참사를 겪으며 쇼크를 받는다. 무엇보다 진조차 형성하지 못해 훈련을 시켜야했던 처참한 숙련도의 징집병과 전국시대를 몸으로 느끼며 자란 왜병들의 숙련도 차이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이후 의병이 군세를 일으켜 왜군들과 혈투를 벌이고 몇몇 명장들의 기적과도 같은 수성전에서 왜군을 잠시 주춤하게 만드는 것에 성공하고 풍토병이 돌아 사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왜군의 지원담당인 수군들이 어느 재앙 덩어리의 지휘를 받은 조선 수군들에게 연전연패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왜군의 진격이 멈췄다. 호란에 대해 알아보자, 여진족에 대한 대비 역시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여진족의 군대를 상대하는 것에 초점을 둔 정예병들이 만 단위로 양성되고 있었고 훈련도 매우 엄격하게 진행되었다. 여진족의 전술에 대응하는 전법이 항왜들과 정예무관들의 지시 아래에 개발되었는데, 근데 아시다시피 이 정예병들의 말로는 이괄의 난으로 거의 햇볕에 눈녹듯이 증발해버렸고 실력있는 무관들이 대거 사라지고 전쟁을 지휘해야할 무관들에 대한 불신이 심해져 지휘권 약화와 감시 강화라는 미쳐 돌아가는 결과로 돌아왔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빤쓰런을 시작했지만 청군에 의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히고 별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왕이 산성에 갇혀 국운의 명이 보통 위기에 처한것이 아니라는 풍문을 들은 근왕병들이 남한산성으로 달려갔으나 오는 족족 각개격파 당하고 이에 대응해야할 김자점 씨발럼 휘하의 조선군은 그냥 관전하기만 했다. 결국 하늘이 도와도 모자랄 판에 조선 특유의 병신같은 정치암투에 외세의 침공에 대비해야할 군대가 통째로 증발해버리고, 지휘체계가 통합되지 않아 우왕좌왕하는 지휘부와 인재풀이 터져버리는 것도 모자라 김자점 김경징 두 김씨로 대표되는 병신들의 삽질 때문에 병자호란은 거의 전무후무한 치욕적인 결과로 완패한다. === 병역제도 === 병역제도는 지금의 헬조선처럼 개쓰레기였다. 16살부터 60대까지 죽어라고 군역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지금처럼 계속 병영생활을 한건 아니고 교대로 근무하였지만, 16살부터 60살은 진짜 이 나라가 옛부터 백성을 개호구로 보고 있다는 걸 반증한다. 참고로 '''조선 왕 평균 수명이 50살 전후임.''' 실제로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까지 참전한 개 불쌍한 백성이 있었다. 병역제도의 가장 큰 병신같은 점은 일반 사병들에겐 월급이 없었다는 얘기다. 지금의 헬조선 군대는 휴가 때 오피갈 월급이라도 주지.... 이 땐 그냥 봉족이라고 같이 군역의 의무진 새끼가 재정적으로 도와주는거다. 지금으로 치면 군바리 둘이 사회생활하면서 버는 돈을 군바리한테 돈 조금씩 주는거라 생각하면 된다. 봉족제라고 가호 단위로 계산을 하면서 2명 정도를 묶어다가 군인 한명을 먹여살리게 했다.근데 이게 시간이 점점 갈수록 토지를 가진 자유민은 사라지고 군머를 요역에 동원하는 등 뒷생각 않고 마구 써먹는 등 군역이 점점 더 힘들어졌다. 흙수저들은 그냥 있는 세제만으로도 힘든데 점점 부담이 늘어버리니 좆돼버렸다. 결국 때려치고 노비가 되거나 야반도주를 해버리거나 배째라를 해버렸다. 그래서 군인들 월급이 끊겨버렸다. 군바리 취급이 이러니 솔까 어느 병신이 조선을 위해 싸우겠는가? 더욱 더 골때리는 건 무기나 장비를 병사 스스로 마련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이야 수통같은거 잃어버리면 심해봐야 군기교육대 가지만, 이 때는 군장비 잃어버리면 가산을 탕진해서라도 자기 돈으로 사야 했다. 근데 이런제도는 세계역사상으로도 상당히 많은케이스였다. 그 '''[[로마제국]]'''도 원수정체제때는 일반병이 군장비를 다 부담해야했며 제정시기때는 밥처먹는것도 자기돈으로 해결해야했고 이때도 장비는 공동구매로 마련해야했다. 그러나 정말 큰 차이점은 로마제국은 군인을 무척우대해줬으며 월급도 엄청빵빵하게 대주는 편이었다. 국민소득수준도 천년전나라라는게 믿기지않을정도로 엄청난 넘사벽급의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을보라 똥구녕 찢어지게 가난한 국민대다수가 이런걸 부담할 턱이 있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이탈리아반도는 저주받은 조선의 병신 기후와는 다르게 울림푸스 신들의 축복을받은 젖과꿀이 흐르는 땅이였기에 농업이 굉장히 발달했다. :다 좋은데 로마도 군바리들 우대했다는 건 내전기나 군인 황제 시절에나 그랬지 제정 성립 이후엔 그냥 일반 노동자 수준 돈 받았다. 그래서 이 당시 로마 군인들 보면 대부분 투잡 (주로 농사 또는 목축) 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네가 말한 내전기나 군인 황제 시절 덕분에 군대의 힘이 막강했다. 그래서 황제 되려는 군사령관놈들은.. 로마 시민의 여론보다 자신 휘하 군바리들에게 더 잘보여야 했다. 툭하면 게르만 촌구석에서 군바리 새끼들이 자기 사령관을 황제로 추대하는 일이 빈번했던게 로마니까 이러한 병신같은 제도 덕분에 지금의 헬조선처럼 원조 헬조선은 병역기피가 사회적으로 큰 문제였다. 병역기피할려고 스스로 대가리 밀고 산에가서 땡중되는 이가 수만에 이르렀다. 가장 큰 폐단은 군역을 대신 치뤄주는 것이었다. 얼굴 비슷한 새끼가 토익시험같은 거 대신 치뤄준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지금도 이러한데... 사진기술이 없던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꼼수를 더욱 더 잘 활용할 수 있었다.... 물론 지휘관도 눈깔이 개병신은 아니라서 가짜를 알아볼 수 있었는데 대신 뒷돈 받고 묵인해줬다. 뒷돈 받는 건 헬조선의 유구한 전통이란걸 알 수가 있다. 금품을 받고 군대를 면제해주는 것도 있었는데 이를 방군수포라 한다. 조일전쟁 때 일본군에게 개발리고는 훈련도감이라는 일종의 직업군인 제도를 중앙에 만들었다. 나중에 말기에 들어서면 나라의 군대는 점점 개판이 되어 이러한 소수의 직업군인만이 무기를 다를 줄 알게 되는 상황에 이른다. 조선 후기가 되면 양반은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되는데, 그 꼬라지가 지금의 헬조선 금수저가 맘대로 병역기피 할 수 있는 거와 똑같다(고려도 마찬가지였다) 똥수저들의 군역말고 관직에 오르기 위해 병역을 지거나, 무과제도로 급제한 새끼들도 병신같기는 마찬가지였다. 위에 설명한대로 병역기피 해주는 대신 뇌물 받아 처먹었다. === 보병 === [[임진왜란]] 당시 신나게 털려서 명나라의 원앙진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 원앙진이라는게 긴급징집한 농민용 진법이라 강군하고는 거리가 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 일본사신이 조선 창 길이를 보고 너넨 왤케 창 길이가 짧냐 전쟁할 수 있겠냐 라고 깐 걸 보면 노답 역덕 새끼들이 조선군 나오는 드라마에서 제발 포졸복좀 입히지 마라고 고증질을 해대는데.. 씨발 솔까 지금의 한국보다 더 가난했던 씹조선에서 병사들에게 일일히 갑옷같은 걸 입혔겠냐? 당시 스페인의 테르시오도 보면 모든 장창병이 흉갑을 입은게 아니라 짬 낮거나 거지새끼들은 걍 투구만 썼다. 근데 뭔 조선 씹거지 새끼들이 다 갑옷입은줄 아나 병신들;; 조선시대 찰갑 유물이 부산에서 발굴된 게 있는데 물론, 병사용이 아니라 장교용이란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의 헬조선 전방부대도 돈 없다고 방탄쪼끼 안 입히는데 오리지널 헬조선이라고 뭔 돈이 있어서 일일히 다 갑옷 입히겠냐? 그나마 수도에서 임금 지키는 새끼들이랑 북방에서 여진족 막는 새끼들이나 입혔겠지 === 갑주 === 문관 지휘관이나 무관들이 입었던 갑옷은 현재 유물로도 여러 점이 남아있어 비교적 명확히 확인할 수 있지만 과연 일반 병사들은 어떠했는지 자료가 충분하지 못해 딱히 일반인의 양식 수준으로는 어떠했을지 알 수가 없다. 그 대략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아래 중종34년의 기록, 육군박물관의 흉갑, 그리고 일본 야스쿠니 신사 조선군 흉갑 1점 전시물을 보면 조선의 일반 병사들은 지갑, 흉갑 등을 착용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있었던 서양 선교사 프로이스는 조선병들이 "단단한 가죽 갑옷을 착용하였고, 유럽인의 모자와 같은 철모를 쓰고 있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강철로 되어 있었고 그 밖에는 무쇠로 되어 있었다" 라고 한 바 있어<ref>다만 프로이스의 기록은 그 신뢰성을 의심받고 있다</ref> 가죽으로 만든 갑옷도 착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프로이스의 기록 외에도, 조선군이 가죽제 갑옷을 활용했음을 시사하는 기록이 있는데, 지방 각 현에서 작성한 읍지를 보면 수군용으로 '''피갑주皮甲冑''' 가 비치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 예이다. [http://bemil.chosun.com/nbrd/gallery/view.html?b_bbs_id=10044&num=93450] 갑옷의 형태 참고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4v09&articleno=15854902&categoryId=683307®dt=20100926045831] {{인용|(중종 34년)..군장을 점열하는 일을 일시에 거행하면 '''지갑(紙甲)'''하나의 값이 1동 베 50필에 이르고, 말 한 필 빌리는 값이 베 30∼40필을 넘게 됩니다. 다른 장비의 값도 다 이와 맞먹을 터이니 재산이 넉넉한 자는 이미 갖추었겠지만 아침 저녁으로 끼니를 잇기 어려운 자는 찌든 가난에 울부짖을 뿐인데 어떻게 이들에게 준비하라고 요구하겠습니까. 지갑은 좀먹기 쉽고 빌린 말은 점열이 지나면 즉시 주인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군졸만 괴롭게 하고 나라의 방어엔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이익은 없고 해만 있을 것입니다. 만일 국가에 급히 간열할 일이 있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은 급한 경보도 없으며, 하늘마저 재변을 보여 주는 때인만큼 임금이 친히 교외로 나가서 군장을 점열함은 매우 온당치 못하니 성명을 거두소서.}} 중기에 이미 병역제도, 군포징수제도가 붕괴되기 시작한 조선에서 개인이 마련하는 것이든 국가가 마련하는 것이든 방어구의 준비 상태는 좋지 못했을 것이고 이마저도 형편이 되는 사람은 입고, 아닌 사람은 입지 못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조선군은 아예 갑옷을 입지 못한자, 흉갑이나 지갑, 피갑을 걸친자, 전시에 국가가 만들어 지급하는 두정갑 을 입은 자 등 상당히 제각각이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이에 비해 직업군인인 갑사나 문, 무 지휘관들은 두정갑, 경번갑, 찰갑, 쇄자갑등을 입었다. 즉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을 정확히 고증하고 싶다면 전립과 투구를 제각기 쓴 병사 + 그리고 지갑과 피갑 및 두정갑을 입거나 애초부터 아무것도 입지 않은 병사를 전부 등장시켜야 할 것이다.... 사극에 흔히 등장하는 포졸복, 웨이터복은 조선 후기에 화약무기가 주요 무기가 되면서 갑주의 중요성이 감소해 입게 된 것이다. 사극에서 포졸복을 입은 조선군을 보고 기분이 다운되는 역덕후들이 많지만, 사실 조선 후기 조선군 고증으로는 틀린것도 아니다. 조선 말에는 방탄복의 일종으로 면갑을 보급하기도 했는데, 미칠듯한 더위에다가 물에 빠지면 대책이 없어 그다지 많이 쓰이진 않았다. 19C 무렵부터는 이미 보병들이 방어구를 입는다는 것이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서구에서도 퀴러시어 기병이 3MM정도의 경갑을 착용한 것 외에는 전투시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았다. 좀 역좀알의 시점에서 쓰자면 조선시대 철갑옷 안쓴건 이걸 만들 기술이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http://dcollection.snu.ac.kr/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0058430 논문이다.] 보면 알겠지만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철갑이 굉장히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인이 보통 조선시대 철갑을 잘 안쓰는 줄 아는건 걍 막장 사극 때문이고, 실제로는 철갑 내지는 나무에 철 붙인 갑옷을 썼다. 철갑은 그렇다치고 왜 나무와 철을 결합해서 썼나면 일차로 싸기 때문이다. 두번째 이유는 철이 열전도성이 크기 때문이다. 대체로 조선시대 갑옷의 사용환경은 추위가 하늘을 찌르는 북방이었는데 여기에 철갑입고 가면 누가 얼어 뒤지라고? 거기다가 철은 열팽창률도 높다 나무의 경우 내부 조직에 틈이 많아 열팽창으로 인한 부피증가를 충분히 상쇄 가능하지만 철로 만들면 혹한의 추위에 빵빵 금가는 꼬라지를 볼 수 있을거다. 물론 조선 초기 환경에서 왜구가 들끓는 시점에서는 전장환경이 대체로 따뜻한 남부였고, 설령 남부 아니더라도 빈번한 싸움으로 인해 생존률이 우선시되어 철갑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 진관체제-제승방략-속오군을 거치면서 10만명 이상의 무기를 사전에 준비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누가 제승방략에 대해 예비군 개념이고 실제 상비군은 적었다고 하는데, 일단 걔네들한테 줄 무기와 갑옷 자체는 상비해 두고 있어야 하므로 필요한 갑옷 수가 달라지진 않는다.) 요는 10만 개 이상의 갑옷을 미리 만들어두어야 했으며, 더군다나 유럽과는 달리 이 비용은 중앙에서 각출하는 것이었으므로 - 요컨대 세금 나간다는 말이다 - 참고로 동시대 유럽에서 갑옷 비용과 종자는 기사가 직접 냈다. 물론 영주가 갑옷 사라고 돈을 보태준 기록도 있고 기사들도 지들 장원 있었지만, 지 갑옷 살 돈 없어 파산한 기사들도 많았다는 기록을 보면 어디까지나 성과에 따라 차등지불이었던 듯 하다. 보급성을 심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조선 중기 들어 전란이 많이 줄었으므로 높으신 분들 입장에서 쓸데없는데 돈나간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참고로 서양의 판금갑옷은 그 가격에 있어 굉장한 사치품이었으며, 실제 하급 기사 중에 영지가 가난해서 갑옷 살 돈이 없어 적당한 피갑 입고 싸웠다는 애들도 있다 === 기병 === 이성계가 기병으로 흥해서 그런지 기병비율은 높은 편이었다. 문제는 시간이 가면서 궁기병사랑으로 인해 차징따위 안하는 병신 기병이 되었고 게다가 부정부패로 인해 군마용으로 쓸 말이 고관대작 말로 돌아가고 막상 군마는 쓰레기말. 그나마도 장부상이랑 실제 말 숫자도 다름. 총체적 난국. 그리고 과거나 군 인사체계가 활쏘기 중심으로 돌아가고 전면전에서 여진족과의 국지전으로 전장이 바뀌면서 정작 중요한 충격기병은 줄어들고 거의다 궁기병이었다. 임란 때 타타르 기병을 카피해서 편곤기병을 만들어 일본 보병들 대가리 따고 다녔다. 그러나 그나마 천명 언저리 되던거 이괄의 난때 없어지고 병자호란때도 편곤기병이 있었으나 김자점의 방관과 평안도 일부세력의 투항으로 만주 기병에게 털린다. 병자호란 관련 항목마다 그 놈의 홍이포 홍이포 노래를 부르는 병신이 여기도 똥을 싸질러 놔서 지우고 한마디 하는데, 병자호란에서 조선한테 홍이포는 큰 의미 없었다. 강화도나 화성에 홍이포 모형이 있는 거 보고 실제로도 홍이포를 썼을 거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화약 생산량이 딸려서 천자총통도 잘 안 쓴 조선이다. 화약을 몇 배로 처먹는 홍이포를 썼겠냐? 조선이 홍이포를 제작했다는 확실한 기록은 영조 때 2문 밖에 없다. 그 외에도 홍이포로 추정되는 대포를 보유한 기록이 좀 보이지만 다 합쳐봐야 20문도 안 되고 대부분 서양배에서 노획한 걸로 추정된다. 전투에서 조선군이 홍이포를 썼다는 기록은 전무하다. 조선 후기의 주력대포는 소형 불랑기와 현자총통이었고 그래서 나중에 서양 군함이 왔을 때 생채기 밖에 못 냈지. 정리하자면, 조선군은 홍이포를 거의 운용 안 한 거나 다름 없었다. 애초에 이 홍이포라고 기록에 남은 거도 홍이포의 구체적인 개념을 당대 조선인들이 잘 몰라서 잘못 적거나 엉뚱한 걸 홍이포라고 했다. 실제로 홍이포가 아닌 불랑기가 주력이어서 숙종 대 돈대들 잔뜩 구축할 때도 불랑기만 주구장창 가져다 놨다. 한마디로 윗새끼가 싸지른 표현 중 조선군이 홍이포를 썼단 건 명백히 구라다. 홍이포를 쓴 게 아니니까. 그리고 남한산성에 식량 준비를 못했다고 하는 것도 졸라게 웃긴게 원래는 식량을 성 안에 들여 놓으려고 했다. 근데 담당 지방관이 야 백성들이 존나게 힘들어 하네. 그냥 평시엔 성 밖 창고에 놓고 일 터지면 안으로 옮기지 이래서 기껏 식량 준비해 놓고 못써먹은 거다. 한마디로 윗대가리보다 뭐든지 불평불만만 조온나게 처 늘어놓고 아무것도 안하고 맨날 나라탓, 사회탓 하는 헬조센인들 특유의 기질을 조상들부터가 가지고 있어서 생긴 참극이다. 윗대가리도 문제지만 아랫것들도 좆병신 천지라고 한다. 그리고 그 후손인 헬조센인들도 마찬가지라 이 꼬라지인 거다. === 궁병 === 국궁은 휴대성 및 사거리와 살상력이 꽤 뛰어나다고 하는데, 장점은 거기까지이다. 제작비가 엄청났고 습한 좆반도에선 유지하기도 힘들었으며, 비오는 날엔 사용하기도 힘들었다. 전쟁에서의 실용성 면에서는 만들기도 쉽고 유지하기도 쉬운 만주족의 활이 오히려 더 나았으며, 이는 조선시대 실학자 및 일부 군바리들도 인정하는 것이었다. 미친 국뽕들은 총은 비오면 쓸 수 없으니 조상님들도 어쩔 수 없이 활 쓴거라고 개소리를 하지만 비오면 국궁도 아교가 다 풀어져서 못 쓴다. 편전이라는 무기가 있는데 아주 개쩌는 독창적인 발명품까진 아니고, 비잔틴제국이나 터키 새끼들도 비슷한 걸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터키라든가 비잔틴제국의 스타일이 아니다. 일례로 편전, 통아의 2배, 1/2가 맞다 이 편전이라는 무기도 사거리를 위해 관통력을 희생한 무기다. 편전의 기원이라는 썰 중 하나가 여몽전쟁때 화살 부족하니 화살을 반으로 잘라서 2개로 만들어 썼던게 기원이라는 썰이 있을 정도로 일반 화살보다 작다. 화살 크기가 작으면 당연히 관통력도 낮아진다. 사실 조총 성애자였던 조선군은 후기로 가면 갈수록 궁병보다는 조총수를 존나게 양성하게 된다. 숙련도가 낮은 지방군인 속오군의 경우 배우기 힘든 활을 장비시키는 것보다는 단시간에 배우기 용이한 조총수로 양성하는것이 더 합리적이었고 광해군때 명을 도운답시고 보낸 1만 5천명도 다수가 조총수였다. 숙종 때 충청도 지방 군적부를 보더라도 1300명중 70퍼센트 이상이 조총수였다. 문제는 숙종 시기면 16세기 후반- 17세기 초반인데 이 시기 갓양은 아르쿼부스 따위가 아닌 플린트 락을 쓰고 있었다. 총검도 이 시기 개발했다. === 총병 === [[임진왜란]] 때 탈탈 털린게 인상 깊었는지 후기에 들어선 총병을 많이 양성했다. 하지만 쌍령전투에서 탈탈 털린 걸 보면 운 쥐뿔도 없지만, 김화전투만해도 화력을 보여줬다. 나름 머가리가 없지 않아서 [[선형진]] 비스무리한 운용이 보이긴 하는데 상대 기병이 들이닥치면 어찌 막을지에 대한 방비책이 전혀 되어있지 않다. 그냥 뇌내망상 진법. 역시 군알못 씹선비들답다. :걍 사실 아군기병이 사전에 대기병전 안해주면 보병진영은 뚫리는 순간 올 멘붕오고 패주하다 장기자랑당한게 동서고금을 막론한다.장창,조총,참마도 많이 보유한 일본군도 진영 퍼진상태에서 명기병에게 당한전력이 있지(직산전투) [[송시열]]같은 경우엔 여자도 총으로 무장하자고 주장함. [[나선정벌]]때 노획한 러시아제 수석총과 벨테브레이나 하멜이 참여해 만든 수석총으로 업그레이드할까 생각하다가 너무 비싸다고 그냥 조총 계속 썼다. :조선도 수석총으로 업그레이드 해보고자 했다. 그런데 막상 복제한 수석총이 성능도 그저 그렇고 불발율도 높은데다 비싸기만 오지게 비싸서 결국 조총을 개량하는 방향으로 선회한것임. 조선이 개량하고 또 개량한 조총은 18C까지만 해도 서구 국가들이 쓰던 머스킷과 성능이 그다지 많이 차이 안났다. 단순히 비싸서 안쓴건 아니다. 수석식으로 얻어지는 운용편의성 자체가 조총보다 훨 좋음 그나마도 세도정치기 들어선 아예 관리를 안해서 창고안에 녹슨 총들이 넘쳐흘렀다는 실록의 기사가 인상깊다. 병인양요때는 얼마나 상황이 앰창이었는지 군대도 아닌 호랑이 사냥꾼들을 데려다가 전투를 벌였는데 의외로 프랑스군이 당했고 이에 정신 못차린 조선정부는 신미양요때도 똑같이 호랑이 사냥꾼들을 데려다가 미군과 싸우게 했는데 결과는 3명 사살, 350명 전사였다. :엄밀히 말하면 사냥꾼들 징병해서 써먹은 건 이상한게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총이 기존 냉병기보다 익히기 훨씬 쉽다고 하지만 사용법을 익히기 쉽다는 거지 재장전, 명중 등의 요소는 숙련이 되지 않는 이상은 마찬가지로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없었다. 근데 가뜩이나 비싼 총과 총알, 화약을 일반 쫄따구들한테 무한정 퍼줄 순 없지. 이건 화약병기가 훨씬 발전한 서양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최초의 저격수, 특수부대라고 할 수 있는 샤프슈터, 예거 등등 이런 건 사냥꾼 출신들을 징병해다가 써먹었다. 걔들은 총질하는 게 일상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예외라고 할 수 있는 곳이 미국인데, 거긴 미개척지를 개발하고 사냥도 하고 원주민과 전투를 하고 이러다보니 일반인들도 총에 친숙하니까 그런 거. 미국이 총기 시장 탑인 이유가 다 있는 거다. 따라서 조선군도 남들 하는대로 한 거다. 문제는 이미 그 시기가 되면 사수의 숙련도를 어느정도 보완해 줄 무기 발전이 서양에선 이루어 졌다는 거다. === 포병 === 대포들은 원시적인 사석포 기준으로는 꽤 뛰어났다. 신기전같은 로켓무기는 중국이 그 원조인데, 조선도 꽤 잘 만든 거 같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는 익히 알고 있는 신기전은 신호용으로 주로 사용했고 총통넣은 건 변이중화차라고 행주산성 관련 기록에 나온다. 리볼트가 이미 있었던 건 아니고 리볼트는 효율이 애미뒤져서 금방 버려졌고 화차가 여러 면에서 조금 더 나았지만 그래도 화약 애미뒤지게 많이 처먹는 건 똑같아서 총통만큼 대규모 운용은 못함. 이건 고려말에 화포 도입해서 세조때 화통도감 없어지고 사실상 200년간 개발중단된거라 나름 선전한거 아닌가 싶다. === 수군 === 함대는 대양함대는 없고 연안함대 밖에 없다. 조일전쟁에서 이순신이 포격전 중심으로 일본군 쳐바른게 유명하다. :이것도 말이 포격전이지 당시 사용하던 화포들 사정거리로 따져봤을때 근접전이나 다름없었다. 천자총통? 이순신이 대놓고 화약 많이 처먹는다고 디스한 화기다. 당시 해전은 세키부네나 안택선 보다 높은 판옥선에 기어올라오는 일본군 상대로 산탄을 끼얹어 대는 바다위의 공성전 형태로 진행되었다는게 정설이다. 초반에는 포격으로 원거리전함,주력화포인 현자총통의 최대의 사거리가 1km지점이다 최대사리는 그냥 그까지 가긴 간다 수준이다 덧붙이자면 조선시대 수군에서 군역의무를 하는 자는 신량역천이라 하여, 천한 역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물론 서양에선 임진왜란 20년 전에 레판토에서 함선 200여척 홍이포 1800문으로 사석포와 활 중심 오스만터키를 격파한 적이 있다. 패배한 오스만터키조차도 750문을 가지고 있었다. 국뽕새끼들은 당시 조선 수군이 세계 제일이라는 개소리를 지껄이기도 하는데 그냥 무시하면 된다 참고로 동시기 스페인 무적함대 갈레온은 판옥선보다 몇백톤은 더 나가고 선채도 더 높으며 유렵 최강의 스페인 보병대도 삼백명 탑승해있다. 그리고 그 잘나신 판옥선은 평저선이라서 대양으로 나가면 파도에 뒤집혀서 뒤지기 십상이다. 유럽이 대항해시대에 아메리카 아프리카까지 항해할때 판옥선은 고작 일본 중국 가는데도 벌벌 떨었다. 훗날 2,30여년 후 홍이포 몇문은 동아시아 역사를 바꾼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