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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병 === 국궁은 휴대성 및 사거리와 살상력이 꽤 뛰어나다고 하는데, 장점은 거기까지이다. 제작비가 엄청났고 습한 좆반도에선 유지하기도 힘들었으며, 비오는 날엔 사용하기도 힘들었다. 전쟁에서의 실용성 면에서는 만들기도 쉽고 유지하기도 쉬운 만주족의 활이 오히려 더 나았으며, 이는 조선시대 실학자 및 일부 군바리들도 인정하는 것이었다. 미친 국뽕들은 총은 비오면 쓸 수 없으니 조상님들도 어쩔 수 없이 활 쓴거라고 개소리를 하지만 비오면 국궁도 아교가 다 풀어져서 못 쓴다. 편전이라는 무기가 있는데 아주 개쩌는 독창적인 발명품까진 아니고, 비잔틴제국이나 터키 새끼들도 비슷한 걸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터키라든가 비잔틴제국의 스타일이 아니다. 일례로 편전, 통아의 2배, 1/2가 맞다 이 편전이라는 무기도 사거리를 위해 관통력을 희생한 무기다. 편전의 기원이라는 썰 중 하나가 여몽전쟁때 화살 부족하니 화살을 반으로 잘라서 2개로 만들어 썼던게 기원이라는 썰이 있을 정도로 일반 화살보다 작다. 화살 크기가 작으면 당연히 관통력도 낮아진다. 사실 조총 성애자였던 조선군은 후기로 가면 갈수록 궁병보다는 조총수를 존나게 양성하게 된다. 숙련도가 낮은 지방군인 속오군의 경우 배우기 힘든 활을 장비시키는 것보다는 단시간에 배우기 용이한 조총수로 양성하는것이 더 합리적이었고 광해군때 명을 도운답시고 보낸 1만 5천명도 다수가 조총수였다. 숙종 때 충청도 지방 군적부를 보더라도 1300명중 70퍼센트 이상이 조총수였다. 문제는 숙종 시기면 16세기 후반- 17세기 초반인데 이 시기 갓양은 아르쿼부스 따위가 아닌 플린트 락을 쓰고 있었다. 총검도 이 시기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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