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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자기 == <gallery> 파일:조선백자_1.jpg 파일:조선백자_2.jpg 파일:조선백자_3.jpg 파일:조선백자_4.jpg 파일:조선백자_6.jpg 파일:조선백자_7.jpg </gallery> 백자로 유명하다. 백자의 대명사인 아무 그림 없는 순백자는 교과서 등에 선비들의 고결하고 검소한 정신과 취향이 맞기에 애용되었다고 나와 있는데 그딴거 없고 그냥 염료 살 돈이 없을 정도로 나라가 가난해서 그랬던거다. 다만 시대가 지나고 당시 상황을 여유있게 바라볼 수 있는 시대가 되어 순백의 색채가 또다른 매력을 주는 면이 분명히 있기에 재평가 받은 것이지, 저것의 탄생 비화는 안습했던 조선의 경제력을 반영하고 있다. 애초에 가난을 '고결, 검소, 질박'으로 미화하는 것부터 문제의식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사실 분청사기가 슬슬 사라져 가면서 나타난 백자 초기 형태는 위 사진처럼 코발트 그림이 현란하게 그려진 버전이었다. 이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나라 재정이 내려앉고 백자 기술자들이 전란에 사방으로 흩어져 자기제조술은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백자에 넣던 회회청(코발트)이 너무 비싸서 그냥 그림 안 그린 맨도자기를 유통시킨 게 훗날 발굴되어 백자로 정립된 것이다. 이후 재정문제로 비싼 안료 대신 저렴한 철가루를 안료 땜빵으로 쓴 진사 백자가 탄생했다. 가난이 낳은 작품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마니악한 맛이 있다. 다만 당시 일본은 훔쳐간 도공과 기술력을 업그레이드 시켜 채색자기를 유럽에 많이 팔아먹었고 조선은 세계 도자기 전쟁에서 소외되었다. 예전 사대부나 유력자 무덤 파면 당시 중국에서 수입한 채색자기가 심심찮게 발견되는 것을 보면 백자가 선비취향 어쩌고라는 말을 과연 믿어야 하는지 의심스러움. 질박한 풍토는 돈 없거나 지지리 궁상일 때 어쩔 수 없이 경비 아끼려고 발버둥치는 와중에 생겨난 것이다 당시 사람들도 요즘사람과 똑같이 돈 있고 여유 있으면 무늬 있고 화려하고 현란한 것을 갖고 싶어한 것 다 똑같다. 단적으로 흰옷을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라면서 왜 궁중 복장은 울긋불긋한 색동옷들로 도배돼 있을까? 흰옷 입던 서민들 보고 흰색을 사랑한 백의민족이라고 왜곡하는 것과 동급의 언론플레이라 보면 된다 청나라와 일본처럼 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도자기는 만들지 못했다. 현재 가장 높은 가격에 팔린 조선 백자는 10억이고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도자기는 청나라 건륭제 시기 도자기로 720억에 팔렸다. 일본 도자기는 저 아래에 있다. 일본산 전통 도자기중 가장 비싼게 헬조선에서 직수입한 이도다완이다. 헬조선에서는 장인들이 생활용품 급으로 대충 빚어 만든 싸구려 그릇들이었는데(플라스틱 바가지 급이라고 보면 됨) 이 투박하고 거친 질감과 제멋대로 생긴 모양이 일본 다이묘들을 환장하게 만들었다. 일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일본군들이 민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밥그릇이나 종지그릇들을 보고 환호성을 질러댔다고 한다. 조선의 다완에 말차를 담아 마시면 전쟁이나 정치로 혼탁한 마음이 안정이 된다면서, 예쁘고 화려한 그릇보다는 되는대로 생긴 조선의 그릇이 자신들의 다도를 이룩하는 완벽한 도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들은 매끈하고 예쁘게 생긴 그릇보다 유약이 거칠게 흘러내리거나 그릇 모양이 울퉁불퉁한 것들을 더 좋아했다. 대충 만든 것에 덕후들이 온갖 의미를 부여하여 세기의 명작이 되는 요즘 사례와도 비슷하다. 전에 버전에선 그냥 무조건 병신이라고 깠는데 그 병신 백자 기술자 납치해서 정착시킨 후 무역에 잘 써먹은게 일본이다. 이 글 쓴 새끼 논리가 신기한게 조선에 있을땐 병신 백자라고 까더니 일본 버전으로 바뀌자 세계 짱짱이라고 개지랄을 한다. [[역갤러]] 새끼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놈은 당시 도자기 수출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모르는 새끼가 틀림없다. 조선에서 도자기를 만들던 말던 그걸 발전시킨건 어찌됐던 간에 일본이며 당시 오삼계의 난으로 중국 도자기 생산지였던 정덕진이 완전히 초토화 된 덕분에 중국에서의 도자기 수출길은 완전히 막혀버렸고 도자기 무역으로 돈놀이 하던 동인도회사는 남아있던 재고량으로 버티는 상황이었지만, 마침내 재고가 동이나기 시작하면서 단체로 템스강에 뛰어들기 직전에 이걸 타개한게 일본산 도자기 수입이었다. 고려때 청자 만들던 장인들 후손도 있고 임란후에 아리타 도자기 영향도 준데다 수출품이기도 했고 분청사기와 백자는 당시 집권층과 사회분위기를 타서 만든거니 저렇게 나오지 게다가 성리학은 중국, 일본에서 한물간 학문이었다. :이건 좀 잘못된 내용이다. 중국에서도 양명학이니 고증학이니 운운하지만 결국 성리학에 비교하면 부수적인 학문이었다. 일본은 오히려 성리학을 늦게야 받아들였다. 다만 정착하기 전에 미국이 강제개항 시키고 서구화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성리학도 중국에선 할일없는 사람들 뜬구름잡는 귀족적 학문이라고 명나라 때부터 까였던것은 맞다. 대신 모든 학문 특히 철학은 전단계 학문을 모르면 그다음 단계의 학설을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성리학은 반드시 떼고가야 하는 교양학문이었다. 단지 청나라는 청나라 정부의 한족들에 대한 사상 검열과 탄압이 심해서 더이상 학문발전을 못하고 고증학이란 덕질에 빠져들어서 그런거고, 일본은 성리학이 선진 학문이라 일단 받아들였지만 명분론이 알파이자 오메가인 성리학적 정치관은 일본 현실을 생각하면 영.... 걍 조선만 성리학이 일방주의가 브레이끼가 걸릴 이유가 없었던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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