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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형 ==== 유배보내는 것이다. 귀양이라고 부르는 그것 맞다. 주로 양반들(정치범)이 당하는걸로 사극에 그려지나 사실 일반범도 받는다. 소달구지에 끌려가는 묘사가 있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사형수를 사형장으로 호송할때 소달구지에 넣고 간거다. 실제로는 말을 타고 갔다. 근데 전근머 국가 조선답게 귀양하는 동네로 내려갈때 말값, 말 먹이값, 자기 밥값, 의복비, 호송원 경비(말값,밥값,말먹이,의복)+잘 봐달라고 뇌물 까지 자비로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집안에 유배형 한명이라도 받으면 걍 그집안은 뿌리째 망했다고 복창하면 된다. 유배지는 제주도, 전라도 해안과 여러 절해고도 들에 배정되었다. 목민심서를 지은 정약용도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생활할때 이책을 썼다. 사군 6진이 처음 개척되었을땐 저기 백두산 아래에다가도 가족단위로 쳐박기도 하였다. 그리고 형량은 대충 왕 꼴리는 대로. 대명율에선 머륙의 스케일답게 북경에서 몇천리 이런식으로 나와 있는데 대충 북경에서 티베트 근방 어디 사천성 어디 이렇게 짱박아란 말이다. 그런데 콩만한 좃선땅에선 이게 불가능해서 뺑뺑이를 돌렸다. 물론 이렇게 뺑뺑이 돌리면 호송하는 사람도 고욕이고 당하는 사람도 더 고욕에 비용이 배로 불어나기 때문에, 평상시엔 그냥 다이렉트로 전라도로 짱박는걸 선호했지만 왕이 특히 미워하는 얘들은 짤없이 수천리 뺑뺑이 다 채우고 갔단다 ㅎㄷㄷㄷㄷ 그나마 유배지에서 다시 사면복권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간혹 왕이 생각하다 더 열받는다며 유형보다 더쎈 사형때려버려 라고 해서 ㄹㅇ 죽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왕의 총애가 지극해 걍 잠시 머리식히고 오라고 유배보내거나 당대의 쩔어주는 대 문인 학자라면 지방관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런 촌동네에 저런 거물+머학자가 오시다니 하면서 유생들과 양반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잘먹고 잘살수 있었다. 반면 그딴거 없는 사람들은 글이라도 할줄알면 서당차려서 훈장노릇이라도 하지만, 그런거 없음 양반으로 태어나 팔자에도 없는 구걸과 노가다를 뛰어야 했다.그나마 유배중에 병을 얻거나 자연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역죄인이 이걸 받으면 위리안치라고 더 쎈걸 받았다. 현대의 금고형에 가까웠다. 담장높이가 어마무시 해서 하늘이 손바닥만하게 보였다고 한다. :이건 그냥 하는 말이다. 하늘이 손바닥만하게 보이려면 담장을 30~40미터 이상은 올려야 하는데 조선의 씹미개한 건축술 수준으로 담장을 그만큼 올리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정확히는 느그가 생각하는 단단한 벽돌을 단디 쌓는게 아니고 존나 키가큰 까시나무를 베어다가 담장 치는것이다. 남해에 가면 서포 김만중이 유배당했던 곳이 있는데 거기서 체험 가능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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