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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녀제도와 명나라의 조선인 후궁들 == 참고자료: '''명나라 황제들이 맞이한 조선인 후궁들''' 이 글은 중국의 지식공유 사이트, 커뮤니티에 게재된 ' 명나라 황제는 모두 몇 명의 조선 아내를 맞아들였을까?'라는 제목의 게시글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한중 양국민의 과거 역사 인식에 이해를 돕기 위해 전문을 번역했다./ 편집자 주 대장금이 있던 조선시대, 중국과 조선 사이에는 한가족 같이 지내는 일이 많았다. 명나라 영락(永樂), 선덕(宣德)황제 시대에는 각각 8명의 조선 후궁이 있었다. 시녀, 여사(女史, 후궁을 섬기며 기록과 문서를 맡아보던 여관)로 있던 조선 여성은 영락황제 시절 22명, 선덕황제 시절 16명, 청나라로 넘어가기 전 10명, 순치(順治)황제 시절 16명이 각각 있었으며 노래와 춤을 전문으로 하는 예술인, 주방장만하더라도 선덕황제 때에만 100명이 넘었다. 이 같은 여성은 조국의 언어, 음식, 복장, 가무, 지방 특색과 풍습 등 문화풍속을 중국 궁정에 그대로 들여 와 두 민족의 문화적 교류를 촉진시켰으며 양국 정부와 인민의 우호관계를 증진시키는 중요한 역사적 역할을 했다. 명나라 영락황제, 선덕황제는 각자 여러 명의 조선 후궁을 거느렸으며 일부는 1482년 이후까지 살았다. 정덕(正德) 후기, 명 무종(武宗)은 조선에 가서 후궁을 선발해 조선 전체가 순식간에 불안에 빠지기도 했으며 청나라가 세워지기 전 섭정왕인 도르곤은 조선 여인을 첩으로 맞아들이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중국 사서에도 적지 않게 기록돼 있지만 당시 조선에서 한자로 기록된 ‘조선이조실록(朝鮮李朝實錄)’, ‘고려사(高麗史)’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기록돼 있다. 황제의 말이 통속적인 말 그대로 기록돼 있어 중국의 사서가 다듬은 것과는 다르다. 이 같은 일이 있기 전인 원나라 말기, 원순제(元順帝)의 황후 기씨도 고려인이었으며 원나라 태자 아이유시리다라도 기황후에게서 태어났다. 영락황제가 조선 후궁을 모은 것은 부친인 주원장(朱元璋)과 고려의 국왕 왕창과 후대 왕조인 조선 태조 이성계가 사돈을 맺으면서 시작됐다. 홍무(洪武) 22년(1389년) 4월, 태조 이성계는 명나라로부터 국왕으로 책봉받기 위해 출신이 좋은 여성과 명나라 황제의 자녀와 결혼시켰다. 홍무 25년 고려가 조선 정권으로 교체된 후, 홍무 31년 명 태조가 서거하기까지 조선과 명나라는 여러 차례 혼사와 관련된 일을 상의했으며 조선에서는 5명의 환관을 선발해 난징(南京)으로 보냈다. 명 태조는 당시 조선의 왕에게 “나는 실제로 혼사를 맺고 싶다. 내 자녀 중에는 아들이 많고 딸이 적어 16세만 되도 (혼인이) 성사될 수 있다”고 말했다. 영락제 원년(1403년), 조선의 태종 이방원은 친히 난징을 방문해 영락제를 만나 양국간의 우의를 증진하기도 했다. 영락제는 세 차례에 걸쳐 조선에서 후궁을 선발했다. 영락제는 조선 여성을 좋아하게 됐을 뿐 아니라 한민족의 식습관, 문화풍습도 받아들였다. 첫 후궁선발은 영락제 즉위 초기 때이다. 영락제는 홍무제 시절 혼사를 논의하던 것에 이어 영락 원년 4월, 신하를 조선의 수도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보내 건문제의 심복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문제에 대해 상의함과 더불어 결혼 의사를 표시했다. 영락 5년, 황후 서 씨가 병으로 죽자, 영락제는 이듬해인 1408년 4월 16일, 내사(內史) 황옌(黃儼) 등을 한양으로 파견해 조선에서 후궁을 선발하는 업무를 시작했다. 같은해 11월 일차적으로 5명의 여자를 선발했다. 그녀들은 공조전서 권집중의 딸, 인녕부좌사 윤임첨의 딸, 공안부(恭安府)판관 이문명의 딸, 호군 여귀진의 딸, 중군 부사정 최득비의 딸이다. 이외에 수행원과 환관이 각각 12명이 있었다. 조선의 왕은 예문관 대제학 이문화를 특사로 임명해 후궁들의 호송을 맡도록 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순백의 두꺼운 종이 6천장을 함께 이송하고 종이 조공을 바친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듬해 초 베이징에 도착했다. 2월에는 권씨가 현비(賢妃)로 책봉돼 육궁(후비가 거차하는 궁실)의 업무를 맡아 황후의 직권을 행사했다. 임씨는 순비(順妃), 이 씨는 소의(昭儀), 여씨는 첩여(婕妤), 최 씨는 미인(美人)으로 각각 책봉됐다. 권씨의 오빠인 권영균은 조정의 광록사경(朝廷光祿寺卿, 연회 업무를 책임지는 관공서의 장관)로 임명됐다. 관직 품계는 삼품이며 채색 비단 60필, 채색 명주 300필, 비단 10필, 황금 두 덩어리, 백은 10덩어리, 말 5필, 말안장 2개, 옷 2벌, 지폐 3천장 등을 하사했다. 이들은 책봉된 후궁에게 기본적으로 보낸 청혼예물이다. 순비의 아버지는 홍려사경(鴻臚寺卿, 의식을 전담하는 기구의 장관)으로, 소의의 아버지, 첩여의 아버지는 광록사소경(光祿寺少卿, 광록사 부장관)으로 임명됐으며 관직 품계는 사품이었다. 최씨의 아버지는 홍려사소경(鴻臚寺少卿, 홍려사 부장관)으로 임명됐으며 관직 품계는 오품이었다. 권씨는 ‘명사•후궁전(明史•后妃傳)’에서 유일하게 기록된 조선 여성이다. ‘명사•후궁전’에는 “현비로 책봉된 권씨는 조선인이다 … 자태가 깨끗하고 불순물이 없는 쌀처럼 아름다워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현비는 이듬해 10월 영락제가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이조실록(李朝實錄)’에는 “영락제가 현비의 오빠를 만났을 때 말을 하려 했으나 병이 깊고 눈물만 흘려 말을 하지 못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의 전통음식 및 문화풍습을 좋아한 영락제는 말년에 현비를 그리워해 “짐은 늙어 음식이 맛이 없구나”, “현비가 죽은 후에는 모든 식사, 술, 빨래 등의 일이 별로 안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두 번째 후궁선발은 영락 7년(1409년)에 있었다. 5월 3일, 태감 황옌은 한양에 와서 “지난해 당신이 여기에 왔을 때 모든 여자가 살찌고 피부가 거칠며 키가 작아 모두 보기에 좋지 않았다. 단지 조선 왕의 존경하는 마음을 받아들여 후궁으로 책봉했다”는 내용의 황제의 성지를 발표했다. 같은해 8월, 조선은 후궁을 모두 선발했다. 하지만 당시 명나라 수도가 원나라 저항세력의 공격을 받자, 영락제는 이를 핑계로 후궁을 들여오는 것을 미뤘다. 영락 9년(1411년) 4월 2일, 조선은 정씨의 딸을 베이징으로 보냈다. 영락제는 그녀를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 함께 온 수행원에게 많은 상을 내렸다. 이 같은 일은 비밀리에 진행됐으나 영락제의 자손이 ‘태종실록(太宗實錄)에 “9월 15일, 정윤후(鄭允厚 정씨의 부친)을 광록사소경으로 임명했다. 정윤후는 조선인이다”고 기록했다. 황제의 장인은 보통 그에 상응하는 작위와 녹봉을 받는다. 영락제는 조선의 장인들에게 광록사 직위를 여러 차례 하사하며 자신이 조선의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세번째 후궁선발은 영락 15년(1417년)에 있었다. 조선 측은 한씨, 황씨의 여식을 후궁으로 골라 시녀 6명, 환관 2명의 수행을 받도록 했다. 8월 6일 출발한 이들 일행은 10월 8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영락제는 이들 중 한씨의 딸을 특히 아껴 한씨 집안에 막대한 규모의 재물을 계속해서 하사했다. 같은해 11월 3일에는 포상 조서와 함꼐 백금 2천냥, 문기표리(文綺表里) 2백필, 실•베비단 50필, 마 24필을 하사했으며 왕후에게 별도로 문기표리 80필을 하사했다. 명나라 선종은 중국 역사상 가장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황제 중 하나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인 영락제의 총애를 받아 베이징에 있건 북벌을 떠났을 때에도 항상 할아버지 곁에 있었다. 황제 자리를 이어받는 것도 할아버지에 의해 결정됐다. 재미있는 것은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그 역시 조선의 전통음식을 좋아했으며 특히 조선의 춤을 좋아했다. 재위 10년 동안 가수, 주방장이 100명이 넘었으며 조부와 마찬가지로 조선 후궁 8명을 뒀다. 선덕제 주첨기(朱瞻基)는 단 한번 조선 후궁을 선발했다. 재위 후 2년째인 1426년의 3~4월 사신으로 내관 창성(昌盛), 인펑(尹風), 바이옌(白彦)을 보내 후궁 및 주방장 등을 선발했다. 선덕제는 28세였다. ‘명선종실록(明宣宗實錄)’의 기록을 보면 조선 왕에게 선물로 백금 1천량, 견사, 방직용 실, 비단 240필을 하사했다. 당시 선발했던 여성은 모두 7명으로 성씨, 차씨, 정씨, 노씨, 안씨, 오씨, 최씨 등이었다. 여기에 영락제 시절 입궁한 한 씨에게는 아름다운 미모의 여동생이 있었다. 사신의 말을 들은 후 그녀까지 초대해 후궁은 8명이 됐다. 이들과 주방장 10명, 시녀 16명, 환관 10명 등은 선덕 3년 7월 20일 한양을 떠나 11월 26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선덕제 이후 136년 동안에는 명 황제가 조선에서 후궁을 선발하지 않았다. 명 무종(武宗) 주허우자오(朱厚照)는 색을 밝히고 잔인한 황제로 유명했다. 정덕(正德) 16년(1521년) 정월, 조선에서는 명나라에서 후궁을 선발한다는 설이 확산되자, 민심은 요동쳤고 재빨리 자신의 자녀를 장가 또는 시집보냈다. 당시 조선의 왕은 중종 이역(李懌)으로 대장금도 궁중에 있을 때였으며 이 같은 일의 자초지종을 직접 겪었다. ‘명무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무종은 환관 진의(金義), 천하오(陳浩)를 조선으로 보내 조선의 왕세자 책봉, 후궁 선발 등을 논의했다. 그들이 출발한 후인 3월 16일, 당시 31세였던 명 무종은 지금의 동물원인 ‘표방(豹房)’을 헐었다. 그런데 그들이 요동(遼東)에 있을 때 명 무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이들은 4월 10일 압록강을 건넜으나 이어 즉위한 가정제(嘉靖帝)가 이를 중지시켰다. 조선과 명나라는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양국은 만주, 후금에 이어 청나라를 세운 공동의 적에 맞서 싸웠다. 이에 청 태종은 숭덕(崇德) 2년(1637년), 군대를 통솔해 조선을 공격한 후에 청나라로 국호를 바꾸고 인질, 결혼 등의 조건을 강요했으나 조선은 겉으로 복종하는 척하고 속으로는 따르지 않는 바람에 큰 진전이 없었다. 순치 7년(1650년), 실질적으로 조선을 섭정하고 있던 도르곤의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조선의 왕에게 사돈을 맺을 것을 강요했다. 당시 조선의 왕인 효종 이호의 공주는 2살밖에 안 됐던 것도 있지만 조선과 청나라는 서로간에 적대관계였으며 조선은 전통적으로 중화민족과 오랑캐와의 구분을 확실히 해 왔다. 때문에 조선은 명나라 사람과의 결혼이 정상적이고 더욱 명예로운 일이라 여겼으며 청나라 사람과의 결혼은 치욕이라고 여겼다. 금린군(錦林君) 이개윤은 이 같은 전반적인 국면에서 국난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청에 보내겠다고 나섰다. 효종은 고마운 마음에 이개윤의 딸을 ‘의순공주(義順公主)’로 봉하고 4월 12일 친히 한양 서쪽 외곽에 나가 그녀를 배웅했다. ‘청세조실록(淸世祖實錄)’에는 “5월 21일, 섭정왕은 다른 왕, 대신들을 데리고 친히 조선의 국왕이 보낸 롄산관(連山關)에서 재물을 받고 그날 곧바로 결혼했다.”고 기록돼 있다. 롄산관은 지금의 랴오닝성(辽宁省) 랴오양(辽阳) 일대에 있다. 도르곤은 당시 그 먼 곳까지 직접 갔으며 기다리다 못해 그날 바로 혼인을 치뤘다. 도르곤이 죽은 후, 순치(順治), 강희(康熙) 등 황제는 그의 추악한 행위를 폭로하기도 했다. 순치 13년(1656년), 순치제는 자신의 태자로 하여금 의순공주 호송업무를 지시해 공주를 조선으로 돌려보냈고 조선은 이에 감사를 표시했다. 여기까지 언급된 후궁은 모두 17명이다. 별도로 시녀, 여사를 담당한 여성은 모두 64명이며 이 중 영락제 때 22명, 선덕제 때 16명이며 명나라가 멸망하기 전에는 10명, 순치제 때 16명이다 선덕제 때 입궁한 후궁 한 씨는 ‘샤오한(小韓)’으로 불렸다. 영락 10년(1412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귀란(桂蘭)이다. 명나라 시대, 선덕, 정통(正統), 경태(景泰), 성화(成化) 4대를 섬기며 영종(英宗)의 아들 성화제를 부양했다. 때문에 성화제의 감사와 존경을 받았으며 성화제의 후궁들은 그녀를 ‘여사(女師)’로 받들었으며 ‘외할머니’로 불렀다. 노년에는 고향이 생각나 수차례 태감 정선(鄭善) 등을 보내 고향의 옷, 식품, 문물 등을 가져오게 하고 “고향의 토산물을 보니 고향을 본 것 같다”며 그리움을 달랬다. 성화제도 이 같은 토속물을 보고 너무 좋아하게 돼 조선의 왕으로 하여금 예물을 올릴 것을 요구했다. 이 같은 요구는 순식간에 조선에게 부담을 줬다. 성화 19년(1483년) 5월 18일, 후궁 한 씨는 7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한 씨는 별세 전까지 57년을 명나라 궁궐에서 보냈다. 성화제는 한 씨에게 “정성껏 부지런히 힘써 일했다”며 ‘공신(恭愼)’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표창을 수여해 그 공로를 기렸다. 또한 신하에게 한 씨의 시신을 베이징 서쪽 교외의 향산(香山)에 안장토록 하고 이부상서(吏部尙書) 완안좐(萬安撰)에게 묘비를, 호부상서(戶部尙書) 류쉬슈(劉珝書)에게 묘지명을 쓰도록 했다. 여기에 조선 왕에게 한 씨의 집안을 돌보도록 지시했으며 매년 수도로 오는 조공사절에게도 한 씨 집안의 가족 수를 파악하도록 했다. 그 후, 황제는 추모의 글을 읽고 묘비에 써 있는 글을 조선의 왕으로 하여금 한 씨의 가족에게 전달토록 했다. 이 같은 일이 있기 2년 전, 조선에서는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대장금의 아버지인 서천수도 사건에 참여한 사람 중 하나이다. 후궁 선발은 고대의 수많은 국가에 존재하던 풍습이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국과 조선의 관계가 긴밀했던 시기에 후궁 선발은 조선까지 확장됐다. 특히 명나라 때 많았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한나라, 흉노 시기 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슬픔과 기쁨, 이별과 만남 등의 기록도 곳곳에 존재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조선의 후궁은 언어, 음식, 패션, 가무, 지방 특색과 풍습 등 조국의 문화풍속을 중국 궁정으로 들여와 양국 민족의 문화교류를 촉진시켰으며 양국 정부와 인민의 우호관계를 증진시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성리학과 조선의 제도 === 당시 동양에서 유행하던 성리학을 나라의 중심학문으로 세우고, 반 종교운동을 벌여서 불교와 무속신앙을 배척하였으나, 왕족들부터가 불교를 뿌리 깊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배척을 하지 못한다.(지금도 불교와 무속신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보유한다) 고려의 철저했던 신분제도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약간 개선되었다. 이론만이라면 생업 다 포기하고 빡시게 공부만 하면 평민도 양반 될 가능성은 있었다.이때부터 헬조선종특인 만물노오오오력설이 시작. 이때도 양반들이 일반 백성들도 노오오오오오오력만 하면 선비가 될 수 있었다는 식으로 포장했을 걸 생각하면 극혐이다. 조선 초기도 썩어문들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조선 초기의 기록이 후기보다 적어서 그런지, 조선 후기보다 부패가 적은 줄 안다. 양반들은 자신들의 노비를 늘리기 위해 경국대전에 "애미가 노비면 애새끼도 노비"라는 희대의 좆병신 법이 만들어 진것도 이때다. 이게 그 당시로서는 그나마 나았던 점이 토지는 국가경제의 근본이고(농경사회의 경우) 다수의 사회구성원인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 후자는 그 착취의 대상이 노비에 국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심할 때 노비인구 비율이 50%를 넘어선것은 쉴드불가 어느 체제이건 지배계급이 욕망을 통제하고 적절히 배출하는 기제가 중요하다. 그리고 과부들이 재혼하면 그 자식은 과거를 못보게 하는 좆병신법도 빠질 수 없다. 서얼차대법 < 골품제도. 말이 필요 없다. 6두품들은 그저 출세에 한계가 있다 뿐이지, 서자들은 문과 응시가 아예 금지라서 더 막장이다. === 후기 === 임진왜란때 일본에게 보지를 따먹혔으며 병자호란에는 청나라에게 후장을 개통당해 현세에 도래한 씹지옥이 되었다.정부에서는 '공명첩'이기 뭐시기인 하는걸 사람들에게 팔아서 부족한 돈을 벌었다. 이게 무엇이냐 하면, 말 그대로 이름이 비어있는 수첩이라는 뜻으로 빈칸에 자기 이름만 써놓으면 공무원이 될 수 있는 티켓이었다. 물론 이름만 공무원이고 하는 일도 없고 봉급도 안준다. 다만 신분은 상승할 수 있기에 평민 노비들의 입장에서는 개이득인 것이다. 씨발 나도 갖고싶다 왜 이 짓을 했냐면 조정은 노비에게선 세금을 걷을 수 없지만 평민에게선 세금을 뜯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이제까지 양반니뮤에게 세금을 내던 노비의 세금을 국가로 돌리려 한 것이다. 당연히 당시 재벌...아니 양반니뮤들이 길길이 날뛰며 반대했서 결국 효과는 별로 못 봤다. 그래도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농업 생산량이 왜란 이전의 수준을 능가하였는데, 왜냐하면 외국의 선진적인 농업 기술을 받아들여 적용시켰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모내기법이 있다. 원래에는 밭에다 쌀알을 뿌렸다. 당연히 쌀 생산도 씹창이었는데, 이 때 모내기라는 혁신적인 농사법으로 폭발적으로 식량이 많이 나오게된다. 사실 모내기법 자체는 임란 이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이게 물을 졸라 많이 쓰는데다 한번 삐끗하면 한해 농사가 완전 개망하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라 이제껏 실행을 안 하고 있다가 개량법도 나오고 임란 때문에 대부분의 농지가 강제로 리셋되는 바람에 에라 한번 해보자하고 실행했고 성공하게 된 것이다. 늘어난 식량덕분에 인구도 처음으로 1800만을 넘어섰다. 근데 이조차도 동시기 중국,일본의 인구증가에 비하면 약하다. 상업 공업 과학 기술 다 때려치고 오직 유교와 농업에 몰빵했지만 그 농업 조차도 병신 ... 상업도(일본이나 좆중국보다는 미약했지만) 발달하였다. 평양과 개성, 부산, 서울이 상업이 크게 발달했고, 5일장이니 3일장이니 하는게 이때 처음으로 등장하고, "엽전 한 닢, 두 닢"하는것도 이때 처음 나온다. 서민들의 경제사정도 넉넉해져서, 서민문화라는게 나온다. 게다가 돈 좀 있는 새끼들이 돈 주고 양반을 사서 갈수록 정부 재정은 개쓰레기가 되어간다. 왜냐하면 양반은 세금을 거의 안 냈기 때문이다. 이게 해결된 건 흥선대원군 시기에 이르러서 인데 이땐 이미 조선 멸망 일보직전의 시기다. 그나마 흥선대원군도 경제관념이 제로라서 화폐개혁했다가 경제 말아먹음. :영조는 화폐 없애려고 했다 최근 북한이 화폐개혁했다가 국민들 죄다 초상집으로 만든걸 보면 역시 같은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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