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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1차== {{승리}} {{성전}} {{참교육}} {{정의구현}} {{감성팔이}} {| class="wikitable" width=59% ! colspan=6 style="background-color:#ffffff; color:;"|임진왜란 당시 전투 전개 |- ! colspan=2 | [[북관 대첩]] !! → !! '''진주 대첩''' !! → !! [[벽제관 전투]] |- |} {{임진왜란 3대 대첩}} {{전쟁 정보 |분쟁= 진주 대첩 |그림= 갓갓민.jpg |설명= 조선이 승리한 3대 대첩 중 하나 |날짜= 1592년 음력 10월 6일 |장소= 경상남도 진주성 |결과= 조선의 승리 |교전국1= <center>'''조선군'''</center> |교전국2= <center>'''왜군'''</center> |지휘관1= [[김시민]] [[이광악]]<br>[[유숭인]] [[김성일]]<br>[[곽재우]] [[최경회]]<br>[[정기룡]] |지휘관2= [[호소카와 타다오키|호소카와]]<br> 오타 가즈요시 <br>등등... 다수 |병력1= 약 3천 8백<br> + 의병 |병력2= 약 3만 |사상자1= 불명 |사상자2= 대략 1만 추정 }} 갓갓민 장군이 이끄신 대첩으로 3대첩 중 하나로 기억되었다.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이후 진주성까지 지켜낸 덕분에 전라도를 지켜냈고 일본의 보급로에 타격을 주기 시작하면서 이때부터 평양에서 조명 연합군과 대치중이었던 일본군의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원래 그럴수밖에 없는것이 장군이 현명했다 화약을 충분히 마련하고 해자를 깊이 판 후 의연히 대처했다. [[유숭인|경상우병사]]가 패한 후 달려와 성문을 열어 달라고 했지만 지휘권 혼란을 우려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덧붙여서 진주성 자체도 매우 견고하고 훌륭한 성이었다. 지금은 내성밖에 안 남았지만 외성도 있었던 시절엔, 웬만한 방법으로는 함락시키기 어려운 난이도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그니까 왜군 입장에선 여기를 먹어야 조선인들의 기를 꺾을 수 있다. 조선의 기를.. 꺾고 곡창지대 점령... 또돗또도돗... 히데요시는 머갈통에서 계산을 마치고 [[호소카와 타다오키]] 등 왜군 제장들에게 진주성 공략의 미션을 내렸다. 하지만 먹고 싶다고 해서 먹을 수 있느냐? 그건 아니거든요. 진주성이 먹기 어려운 천혜의 요새이긴 하지만 왜군들은 원래 난공불락의 성을 점령하는게 일상이었던 전국시대를 거쳐온 놈들이었다. 그런데 왜 못함락시켰냐면 진짜 말 그대로 지휘관이 훌륭하고 싸움을 잘 준비했던 덕분이다. 김시민 장군이 전투가 있기 전에 제작했던 대형화기 총통이 무려 70자루였다. 으아아 70개의 대포 거기에 성 안의 사람들이 결사항전의 의지로 버텼으니 성을 함락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용문|수 많은 왜군들이 성벽을 기어오르다 목숨을 잃었고 화실을 비오듯 쏘아대니 크게 무너져 곡소리가 하늘에 닿았다|고대일록}} 왜군은 포로로 잡힌 조선 아이들을 데려와 항복을 재촉하는 문구를 외치게 했는데 킹시민은 이 심리전에 휘둘리지 않았고, 오히려 모두에게 냉정하게 있을 것을 당부하면서 버텨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니 슬금슬금 근처에서 의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왜군이 진주성을 포위해놓고 공격하던 참에 후방에서 의병들이 막 찌르고 도망가는 것이다. 한밤중에 나타나 공격하고 튀어버리니 왜병들은 잠도 못 자고 피곤한데 낮에 싸움까지 치뤄야 하는 이중고를 겪게 됐다. 전투 마지막 날에는 난전이 벌어졌다. 성 안에 난입한 왜군과 조선군의 싸움이 벌어졌고 김시민 장군은 시체 속에 숨어있던 왜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져내렸다. 그 와중에 곤양 군수 이광악이 곧바로 지휘권을 이어받았고 진주성 전투는 기어이 조선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대략 왜군의 피해규모가 총병력 3만중 사망자만 1만정도에 지휘관급 사망자만 3백이라니 거의 전멸이나 마찬가지다. 이게 1차 대첩인데...문제는 이긴건 좋은데 두번째에서 좆털린다 ==2차 전투== {{알림 상자 |색 = skyblue |배경색= white |테두리색=#3296FF |제목색=red |제목=<font size=3><span style="color:black"> <big><span style="color:#FF0000">주의!</span> 이 문서는 너무 안타깝습니다.</big> </span> </font> |본문=<span style="color:black"> 슬퍼서 눈물이 멈추지 않습니다. 슬프고 심히 빡칩니다. |왼쪽 그림 = CWniF7WWwAAp0aM.jpg |왼쪽 그림 크기 = 120픽셀 }} {{전쟁 정보 |분쟁= 2차 진주성 전투 |그림= 혹탈_반격의 서막 최신짤.jpg |설명= 왜군의 진주성 유린 사건 |날짜= 1593년 음력 6월 22일 |장소= 경상남도 진주성 |결과= 왜군의 승리 |교전국1= <center>'''조선군'''</center> |교전국2= <center>'''왜군'''</center> |지휘관1= [[서예원|진주목사]]<br>[[최경회|경상우병사]]<br>[[황진|충청병사]]<br>[[김천일|도절제]]<br> 외 다수 |지휘관2= [[가토 기요마사|싸움머신]]<br>[[시마즈 요시히로|시마즈 또라이]]<br>[[고니시 유키나가|예수쟁이]]<br>[[우키타 히데이에|총사령관]]<br>[[다테 마사무네|애꾸 초딩]]<br> 외 다수 |병력1= 약 6천 |병력2= 약 9만 |사상자1= 전멸 |사상자2= 불명 }} 4차 평양성 전투로 왜군이 털리고 명과의 강화협상 진행을 위해 전 병력이 부산포로 퇴각했을 때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 땅에 있던 10만 왜군이 한번에 몰려와 진주성을 공격는데 이건 남아있던 침공군 거의 전병력이었다. 참고로 당시 관군 의병 다 합해 수비군은 수천명.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갚으라는 명을 내려 일본측에서 무슨일이 있어도 무너트리라는 명령이니 알아서 철수해라 라고 공격의도를 대놓고 보일정도로 각오하고 왔다. 진짜 말 그대로 1차 진주성 전투, 진주 대첩의 보복이었기 때문에 명나라가 하지 말라고 만류해도 들어쳐먹질 않았다. 닛뽄의 태합인 히데요시가 무조건, 무조오오껀 함락시켜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으니 이건 뭐 답이 없었다. 일본은 아직 [[김시민]]이 살아있는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주성을 무조건 함락시키라는 명령은 김시민의 목을 히데요시 앞에 가져다 놓으라는 말과 동급이었다. 그래서 원래 임진왜란에 투입한 다이묘는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등 좆밥들이었는데 이 전투에서만은 도요토미가 자신과 동급의 다이묘인 [[다테 마사무네]]를 넣어줬다. 다테는 고니시 가토 나부랭이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다이묘로 무려 도쿠가와와 비비는 대다이묘이다. 여기 참여한 의병장들은 이미 여기가 죽을 자리라는걸 알고 있을 정도였다. 권율과 곽재우도 엄청난 숫자에 가망이 없다고 보고 구원을 포기했다. 진짜 딱 이 느낌이다. 어우 시발 이걸 어케 막아! 여기 있음 다 죽는다;;; 얼마나 절망적이었냐면 2차전투에서 가장 활약한 황진도 "곽재우(郭再祐)가 공을 만류하며 말하기를, “진주는 외로운 성(城)이니 지켜낼 수가 없다. 그리고 공은 충청도 절도사를 맡고 있는 만큼, 진주를 지키다 죽는 것은 직분에 걸맞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이미 창의사(倡義使)에게 승낙하였으니,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식언(食言)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곽재우가 공의 뜻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술잔을 나누며 서로 작별하였는데, 뒤에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애통해하며 슬퍼해 마지않았다. " 라고 했다. 나름 네임드인 정기룡도 진주성으로와서 "힘내" 하고 갔다. 그러니까 여기 온 분들은 죽을자리 찾아 온 상남자들이시다.. 거의 10만에 가까운 왜군을 지휘하는 지휘관들도 보통의 조무래기들이 아니라 전국시대에 한껏 이름 날리던 무장들이 싸그리 몰려온 수준이다. 임진왜란에서 최고 절정기를 보여준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부터 시작해서 시마즈의 상또라이 [[시마즈 요시히로]], 모리의 브루들링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규슈의 최종병기 [[타치바나 무네시게]], 오슈의 중 2병 [[다테 마사무네]]에 이르기까지 거의 일본판 갈락티코 수준의 라인업이었다. 하도 적의 숫자가 많아서 낮에 한두번, 밤에 한두번 이렇게 싸운게 아니라 낮에 세번 몰려오고 밤에 네번 몰려오는 식으로 어쨌든 존나게 몰려왔다. 놀랍게도 조선군은 개떼같이 몰려오는 왜군 웨이브를 몇번씩이고 격퇴해낸다. 심지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각종 공성무기가 달려오는데도 어떻게든 물리쳐냈음. 그렇게 막아내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가장 뛰어난 장수였던 황진이 왜군에게 저격당해 사망해버렸다. 황진의 죽음은 진주성 군민들에게 우린 좃됐다고 생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실 경상감사 김성일이 전투에 앞서 병사해버린게 가장 큰 문제였던 건지도 모른다. 보통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하려면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가 있어야 하는데 2차 진주성 전투는 그게 제대로 작동했다고 보기가 어렵다. 마지막 날에 왜군은 성문을 무너뜨리며 들어왔다. 성이 뚫린 이상 소수의 조선군이 왜군을 막을 방법은 없었고 조선 지휘관들은 싸우다 죽거나 물에 빠져 죽는 등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 서예원은 목이 베어져서 왜국의 히데요시한테 보내졌다. 히데요시 이 새끼는 이게 [[김시민]]의 목인줄 알았다고 함. 엌ㅋㅋ 또요또미의 가슴엔 진주 대첩이 사무치길 엄청 사무쳤던듯. 지휘관이 너무 많아 내분이 있었다는 주장은 말이 안되는데 의견일치가 안 된 적도 없었고. 다들 죽을 힘을 다해 싸웠지만 서예원이 경비를 제대로 안해서 성벽이 무너진거였고. 애초에 수천으로 10만 대군을 그것도 질적으로 차이나는 상황에서 막아내려는것 자체가 절망적인 상황이다. 사실 병력차는 말도 안될 정도이며 관민 포함해 6~7만 명이 성에서 열흘 버틴거면 일본측 피해도 상당할거다. 애초에 쪽바리들 올 때 명령이 함락 못시키면 할복해라 수준이였다. ㄴ 그래서 다테가 들어간 것이다. 다테 정도면 일본 내부에서는 다테보다 무서운 다이묘라고는 도쿠가와 하나뿐일 정도로 대단한 다이묘였고 이 전투 자테가 도요토미의 야심작이었기에 무조건 이겨야만 했다. 그런데 정작 그 다테는 전투 내내 징징거렸다. 이 전투 이후 논개가 왜장과 함께 자살한다. ===진실=== 사실 이렇게 허무하게 패한 원인 중에 하나가 [[원균]]탓이다. 왜냐 하면 원균은 진주성을 보충하려고 둔 병력을 [[권율]]에게 징징거려서 자기가 육군전술을 한테니 달라고 뗑깡을 부리는 바람에 5000명의 병력이 진주성 예비대에서 원균 휘하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이 병력은 진주성 근처 제석산성에 있던 것이다. 허나 이 병력들은 이후 무엇을 했느냐? 칠천량 해전에서 싸그리 날아갔다. 그것만 있었어도 2차 진주성 전투를 이리 허망하게 패하진 않았을 것이다. 근데 사실 이 5천명 있었어도 왜군 10만을 이기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저 왜군 사망자가 조금 더 늘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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