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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리그 역사상 역대급 개씹혹사로 자신의 어깨와 팀 우승을 맞바꿨기 때문에(완봉, 완투를 엄청 많이 하긴 했다) 상대적으로 전성기가 짧은 편이었다"는 지랄 옆차기같은 의견이 있지만, 커리어를 보면 84년 한국시리즈 이후에도 꾸준히 잘해왔다. 결국 그를 은퇴시키게 한건 혹사가 아닌 롯데 자이언츠 프런트의 만행이었다. 혹사로 인해 은퇴했다는 말은 프런트의 만행을 지울수 있다는 점 유의하기 바란다. 그런데 좆무위키 씹새끼들이 이딴 망언을 했다. 선수시절엔 아무튼 존나 잘했다. 존나존나 잘했다. 근데 프로에서 보여준건 그전에 보여준 것의 반도 못미친다. 프로 가기전에 하위리가 씹론토에서 이 분 스카웃하려고 오퍼 날렸다. 어떤 놈들이 퍼뜨린거만 보고 ㅆㅎㅌㅊ 계약이라고 주장하는 놈들이 있는데 프로리그 없는 나라의 신인한테 주겠다는 돈이 4년간 41만달러 보장 + 옵션 20만달러였다. 지금부터 35년도 더 전의 일이다. 참고로 이 계약 제시한 1981년에 토론토 1선발이 받던 연봉이 16만달러였음. 물론 좆같은 병역법 땜에 못갔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당시 막 출범한 프로야구의 인기를 끌어올리고 싶어했던 군사정권과 롯데가 합작해서 훼방놓았다는 음모론도 있다.) :만약 최동원이 삼성이었고 혹사 조금 안당했다면 통산승 더올렸을지 모른다. ::[[김시진]] 콰직콰직 갈아먹은 거 보면 삼성 갔어도 똑같았을 듯. 선수들의 인권을 위한 선수협을 만들려고 했으나 [[롯데 자이언츠]]가 이를 알아채고 구단에 찍혀서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ref>당시에 혹사로 아작나 있던 [[김시진]]과 맞바꿨다.</ref> 되면서 '''많은 롯데 팬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트레이드 이후 얼마 안있어 은퇴를 선택했다. 은퇴 이후 지방의원 선거에 출마해 낙선하기도 했다. 근데 [[김영삼]]이 자기 편 오라는걸 차버리고 김영삼이 있던 구로 나가서 2위까지 먹은거라 못한 건 아니다. 방송사 해설위원, 방송인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2001년 은퇴한 지 10년만에 그라운드로 돌아와 [[한화 이글스]]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2007년 한화 2군 감독이 되었다. 이 때(한화 시절) 진흙 속의 진주였던 류현진 발굴하고 키워냄. 건강 악화로 코치 그만두고 2009년부터 한국야구위원회 경기감독관으로 활동했으나 2007년 진단을 받은 대장암으로 2011년 9월 세상을 떠났다.<br>이때 한화 이글스 구단은 빈소를 차리고 애도하는 등 최동원 전 코치에 대한 예의를 야구계에서 가장 먼저, 훌륭하게 지켰고,<ref>당연한게, '''[[류현진]]''' 키워주고 밀어준 게 이 분이다. 아웃풋이 증명하는 만큼, 꼴런트가 과거에 얽메이지 않고 제대로 사죄해 꼴데로 데려왔으면 롯데에서 지금쯤 크보 씹어먹는 투수들 여럿 나왔을 거다.</ref> 롯데 자이언츠 구단은 강건너 불구경을 하면서 검토드립이나 쳐댔다. 고인이 사망한 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밥숟갈 얹기 식으로 [[롯데 자이언츠]]는 선수 시절 그의 등번호 1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br> 꼴런트 이런 쌍놈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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