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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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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략적인 생애 == 조선말에 태어난 선비다. 독립운동가로 분류되며 상당히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다. 7세경에 성리학의 기초를 배우고 14세 쯤에 대학자였던 이항로에게 가서 사사했다. 이때 배우는 능력이 꽤 특출나서 상당히 기대를 받았던듯 하다. 22-23세 정도에 과거에 급제했다. 처음에 과거시험을 치기로 한 이유는 봉급으로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 세월이 지난 후 대원군이 집권할때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구체적으로는 토목공사를 중지하고 당백전을 파하고 문세 거두는것을 그만두고 그외에 백성을 털어먹는 각종 행위를 그만두라는것이 요지였다. 이 상소는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도록 자극하는 요소가 되었다. 최익현은 상소중에 글귀 하나가 문제가 되어서 위리안치의 형을 받는데, 반대파들이 중벌을 먹이려던것을 고종이 방어해준 것이었다. 대원군을 실각시킨 주요인물이 되어 이름이 알려졌다.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을때 도끼를 들고가서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반대하는 이유는 요약해서 대충 다음과 같았다: 1. 우리가 강해서 상대가 부탁한게 아니라 약점을 보여서 맺게 된 조약이고, 우리가 방비없고 허약한것을 저들이 모두 알고있으므로 앞으로 어떤일이 벌어질지 알수 없다(이 조약이 조선이 일본에 먹히는 첫 발판이므로 꽤 정확하게 본 것이다) 2. 재물을 교역하게 되면, 상대의 물건은 사치품이고 생산되는데 한이 없고, 우리 물건은 필수품이고 한이 있는데 이것을 서로 바꾸면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힘들어질 것이다. 3. 일본인들은 서양인과 같으니 일단 조약을 맺으면 천주교의 책과 초상이 들어와 기독교인이 늘어나고 유교적 질서가 파괴된다. 4. 일본인들이 들어 와 살면 조약을 맺었으니 거절할 말이 없는데, 그들이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이면 백성들이 호소해도 윗사람들은 강화가 깨질까봐 일을 함부로 처리할수가 없을것이다.(조약내에 일본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것과 관련된 말인듯 하다) 5. 일본인들은 조금만 마음에 들지않으면 사람을 죽이고, 재물과 여자밖에 모르므로 짐승이나 다름없는데, 짐승과 사람이 같이 있으면서 걱정거리가 없길 바라는것 자체가 이상하다.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을 어떻게 봤는지 참고가 되는 대목이다) 이미 실권했던 대원군은 최익현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다가 최익현이 올린 이 상소를 보고 마음이 풀렸다고 한다. 그런데 차라리 대원군이 집권중이었다면 이 조약은 성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조선땅에는 다시 전쟁이 났었을 것이다. 일본은 수차례 보낸 사신들이 퇴짜를 맞자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보이고 있었고 이미 별로 많지도 않은 병력으로 강화도 포대를 완전히 박살내버리고 돌아가기도 했었다. 개항을 하는것은 전세계적인 대세였고 조선은 사실 이미 좀 늦었었다. 게다가 이제와서 개항을 하는 상대가 하필이면 일본이었으므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하여튼 저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최익현은 또 유배를 간다. 최익현 말고도 반대하는 상소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최익현이 잡혀가는것을 보고 짐을싸서 돌아갔다고 한다. 일본을 상대로 개항한 조선은 최익현의 예상대로 쌀값이 폭등하고 국가재정이 파탄직전에 이르렀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의 고질적 문제인 권력자들의 사리사욕이 가장 큰 문제이긴 했다. 조선은 임오군란 때에도 밀리고 밀린 쌀 봉급을 뒤늦게 주면서 삥땅을 쳤는데 이때 민씨들의 창고는 재물이 넘쳐흘렀다. 이후 상당히 오랫동안 크게 정치에 관여하는일 없이 사는데 아마 썩어빠진 조정에 발을 담그기 싫었던것이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다. 유교에서는 나라에 도가 행해지면 벼슬하고 그렇지않으면 충고하고 충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떠나라고 가르친다.(물론 이 말을 지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1895년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내릴때 최익현을 잡아와서 상투를 자르려고 용을 썼는데, 최익현의 한 사람의 영향력이 상당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결국 최익현은 상투를 지켰는데 여기서 내 목은 잘라도 머리카락은 못 자른다는 말이 나왔다. 머리카락좀 자르는게 뭐 어렵냐고 호들갑이냐 할 수도 있지만 유학자들의 사고를 보면 이해가 좀 된다. 유학에서는 자기 한 몸을 바르게 처신한 다음 집안을 정돈하고 그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 그 다음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순서로 하는데, 한 몸을 바르게 처신할때 기초가 되는것이 효도하는 것이고 효도에서 또 기초가 되는것은 부모에게 받은 몸과 털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머리카락을 썩둑 짤라버리라는 소리는 유학자들 입장에서 좀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 수준이 아니었을 것이다. 최익현은 성격이 굉장히 강직하고 곧기는 했지만 철저한 수구파였기 때문에 조정에 상주하던 박영효나 유길준같은 개화파들을 싫어했다. 이때 이런 내용으로 상소를 상당히 올린다. 그리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할때 명나라가 오랑캐(청나라)에 망한지 오래돼서 황제 자리가 오래 비었으니 못할것도 없긴 하지만 명령이 금문을 나가지도 못하면서 명칭과 실제가 맞지 않는것 아니냐고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1904년 고종은 무슨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최익현에게 밀지를 내려서 상경하게 한다. 최익현은 많이 늙어서 기력이 없는데다 이질이 심해서 여러차례 거절했으나 결국에는 서울로 가서 고종을 만나고 시책을 건의하고 차자를 올린다. 당시 대한제국은 백성은 부패 관리와 조선거주 일본인들에게 등쳐먹히고 있었고 정부는 비열한 인간들로만 꽉 찬 쓰레기통이었으며 고종은 큰돈을들여 궁궐을 짓고 벼슬자리를 팔아먹고 있었다. 최익현이 올린 차자의 조목들은 단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최익현은 애초에 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온 이상 돌아갈수 없다고 궁 밖에 엎드려 상소를 4차례 올렸다. 상소들은 외국 차관 들여오는것을 결사반대하는 내용과 개혁을 촉구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조선땅의 경찰권을 쥐고있던 일본군은 최익현을 끌고가서 구금하고 그 다음 조선 정부에 통고한다. 대신중 하나는 그래도 쪽팔린줄은 알았는지 최익현은 인망이 높아서 국민의 지지가 두텁고 황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인물인데 이같이 행동한것은 우리 국가를 무시한 것이며 양국의 우호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항의했으나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최익현은 일본군 헌병대에서 대장의 명함을 땅바닥에 팽개치면서 고함을 쳐 대고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불러오라고 악을 쓰다가 구금되고 포천 고향집으로 압송된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나라가 망한것으로 받아들여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상소를 올려서 애초에 일본에서 사람을 보낼때 의도를 몰랐을리가 없는데 대비를 하고 온 나라에 죽을 각오를 했다고 알리지 않은게 일단 문제고, 또 설령 총칼의 위협을 받았더라도 고종 본인이 위엄을 내면서 책상을 칼로 쪼개버리고 대신들은 조약서를 찢어발겨버렸으면 저놈들도 더 어떻게 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을사오적을 당장 죽이라고 하면서 그나마 괜찮은 사람이었던 한규설한테도 장관이라는 놈이 일의 시초도 생각못하고 부하도 관리하지 못했다고 욕을 한다. 그리고 아직 각국 공사들이 돌아가지 않았으니 모두 회합시켜 조약이 무효임을 통고하고 국제법대로 처리하라는 의견을 낸다. 이후 국민대궐기를 촉구한 포고팔도사민, 일본공사관에 일본이 한국의 신의를 배반한 조목을 하나하나 따져 보낸 기일본정부 등을 발표하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의병을 일으키며 동참할것을 권한 창의격문을 쓴다. 이때 최익현은 이미 현대의학을 구경도 안해본 채로 70살을 넘긴 초고령자였다. 이때 쓴 포고팔도사민에 이런 내용이 있는데 {{인용문|우리나라가 고려 이후로 명칭은 비록 중국의 번속이었지만, 토지와 인민과 정사는 모두 우리가 자립하고 자주하여 털끝만큼도 저들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전성기에는 승병이 백여만이요, 재화가 창고에 가득하였으며, 백성은 부유하고, 호구는 번식하여 비록 수 양제와 당 태종의 위세로도 패하여 돌아감을 면치 못하였으며, 원 세조가 여덟 번이나 쳐들어온 다음에야 복속 시켰다. 우리 태조 때에 왜적이 여러번 침범하였지만 번번이 패하였고, 임진왜란에 비록 명 나라의 구원이 있었지만 회복하여 전승한 공은 모두 우리 군사가 왜선 70여 척을 노량에서 침몰시킨 데 있었으며...(중략)...우리나라가 비록 협소하지만 백성들의 성질이 강력함은 반드시 타국에 뒤지지 않는다.}} 이걸 보면 멸망한 명나라를 중화로 보고 조선을 소중화로 봤던 수구 유학자들도 민족의식이 있었음이 보인다. 최익현의 의병은 몇 고을을 점령하거나 일본 관공서를 철거하고 가담자도 계속 늘어서 위세가 꽤 있었다. 의병 부대 안에는 나중에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 되는 김병로도 있었다. 신학문을 배운 청소년 김병로를 감동시킨것을 보면 최익현의 연설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계속 진군하는 와중에 고종이 해산하라는 명을 내려(정말 고종의 뜻에서 나온것인지는 불분명) 최익현의 마음이 심란하던 차에 이미 통감부의 수중하에 들어간 대한제국군 진위대가 총포를 쏴대었다. 최익현은 동족끼리 죽이는것을 용납할수 없었으므로 같이 일본에 대항하고 더러운 이름을 남기지 말라는 뜻을 전했으나 진위대는 무시하고 오히려 소극적인 상대의 자세를 이용해 맹공격하였다. 이렇게 의병이 흩어지고 정시해 라는 문인이 최익현 바로 앞에서 탄을 맞고 죽는다. 최익현은 시체를 안고 통곡하다가 자기도 죽기 위해서 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진위대는 계속 공격하다가 저항이 없는것을 확인하고 주변을 지키고 있다가 좀 지나서 최익현과 최익현을 따라서 주저앉았던 사람들을 체포한다. 최익현의 의병은 그 자체로는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으나 인심을 고무시켜 의병활동이 활발해지게 만들었다는 의의가 있다. 이후에 대마도 감옥으로 보내진다. 흔히들 단식하다 죽은걸로 알지만 사실이 아니다. 처음에 감옥에 왔을때 경비대장이 여러분이 일본음식을 먹으니 일본 풍습을 따르라 하고, 일본 군인 하나가 갓과 탕건을 잡아서 벗기려고 하자 최익현이 사자후를 지르고, 칼을 빼들자 가슴팍을 헤치면서 찌르라고 고함친 사건이 있었는데, 이날 제자 임병찬에게 음식을 먹고 명령을 거부하는것도 옳지 않으니 먹지 않겠다고 하고, 마지막 상소를 구술해 준것이 와전되어 퍼진것이다. 이후 장교가 와서 통역이 실수한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사과하고, 함께 온 제자들과 먼저 감옥에 와있던 홍주의병들이 계속 역사속 사례를 들고 울면서 권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대장이 다시와서 며칠전 말한것은 통역이 잘못말한것일 뿐이고 식비는 한국정부가 내고있다고 권하여서 비로소 식사를 한다. 대마도에 오고 몇달 후 병이 나는데 낫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 이후 관이 바다를 건너오고 가는곳마다 상인, 농부, 과부, 기생, 유학자 등이 와서 곡하고 스님들이 길가에서 치전하여 인파가 수만명이 몰렸다. 사후 몇년후에 제자들이 최익현이 썼던 글들을 모아서 문집(면암집)을 내는데 이때 헌병들이 습격하여 조사하고 일제를 규탄한 부분을 샅샅이 찾아서 목판까지 뜯어갔다. 그런데 다행히 숨겨둔 몇십질이 남아서 내려왔다. 그리고 수십년 후 일제가 문화통치를 표방할때 총독부의 허가하에 다시 인쇄한다. 일제가 망해서 돌아간 뒤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다 형이상학적으로는 독자적인 학설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스승인 이항로의 학설을 계승했다고 한다. 시도 많이 썼다. 대지와 산하에 추운 겨울이 왔는데 / 大地山河屬歲寒 그대가 어려운 길 떠난 것에 놀랐네 / 驚君不計路行難 마지막 길에 좋고 나쁨을 말할 필요있나 / 窮途利病何須問 필경엔 너그러운 우주에 살 것인데 / 到底容身宇宙寬 여행을 좋아했고 경치도 많이 즐겼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최익현이 유독 고평가받는 이유는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가르침받은 자신의 확고한 정의대로 살아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중국의 지식인인 양계초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조선 양반이라는 것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미관말직이라도 관직하나를 잡아서 서민들의 등골을 빼먹고 자신의 욕심을 채울 생각만 가득한 놈들이며, 나라가 어떻게 되든지 관직을 자신의 배를 불릴 도구로 사용할 뿐 국가의 운명같은것은 안중에도 없는 자들이라고 혹평하고있는데, 그 와중에 썩지않은 부류들이 있었고 그 부류의 수장격인 사람이 최익현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이름이 남아오고 있는것이 아닌가 한다. 존나 꼰대인 것처럼 알려져 있는데 당장 위 사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안경 같이 생활 필수 서양물품은 어느 정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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