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태조(고려)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생애== 여하튼 작제건은 진짜로 서해 용왕 빽인지 송악(개성)을 중심으로 경기도-황해도 쪽 서해바다 칠무해급 대해적이 되었기에 왕륭도 무난히 세력을 물려 받아 황해도 칠무해로 활동했고 왕건은 태어날때부터 금수저의 생활을 만끽 하던 와중 사황급이던 [[견훤]]이 대국적으로 후백제를 세우고 [[궁예]]가 양길에게 독립해 신라정부를 뒤엎을려는 [[혁명군]]을 만들어 강릉으로가 신라정부에 반항하던 신라왕족 김순식의 도움을 받고 그대로 서쪽으로 쭉 진출해서 홍천-춘천-철원까지 점령 했다. 그리고 궁예혁명군은 경기도-황해도 일대 까지 왔고 혁명군의 기세가 너무 강해 차례차례 경기 북부, 황해도, 평양 지역 호족들과 그 중 하나인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궁예]]의 부하로 들어갔다. 그래서 왕건도 자연스럽게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다른 동네 호족들은 자기 나와바리 인정 받으면서 대충 궁예 산하 세력 정도로 끝낸 데 비해 왕륭은 자기 나와바리 송악을 궁예한테 넘기면서 자기 세력을 궁예 직속으로 넣는다. 궁예도 일단 강릉에서 후원 좀 받긴 했지만 원래 자기 지역기반이 없던 상태라 송악을 중심으로 삼고 자연스럽게 원래 송악 나와바리 관리하던 왕건은 리더인 궁예에 이은 2인자 참모총장이 된다. 그리고 왕륭 본인은 철원 인근의 금성(개성이랑 철원사이)태수로 임명되며, 궁예에게 굽힌지 1년 만인 897년에 병으로 죽는다. 훗날 고려가 건국되자 왕륭은 세조로 추존된다. 나중에 조카를 때려죽이고, 동생을 죽인 조선의 세조와 한자가 똑같다. 여튼 2인자가 된 왕건이는 칠무해급이라 원래 가지고 있던 병력으로도 쌈질도 좀 했던 모양으로 궁예가 강원도 원주 및 충북, 경기남부 일대의 양길 연합군과 한바탕 할 때에 활약을 엄청나게 해서 명실상부한 궁예 혁명군의 2인자가 된다. 더불어 해적질로 단련된 해상 전투력은 존나게 짱이었던지 해상전투로 수차례 견훤을 엿먹이고 심지어는 견훤군 해군참모총장인 전남 칠무해 수달이를 좆바르고 후백제의 뒷 멀티인 나주를 점령하기도 했다. 거기서 나주호족 오다련의 딸인 오씨와 결혼하였다. 오씨는 태조왕건의 둘째부인이 되며, 훗날 신혜왕후 유씨(패서지역 호족 유천궁의 딸)가 병약하여 일찍죽자 뒤를 이어 장화왕후가 되며, 고려 2대 임금인 혜종의 모후가 되시겠다. 양길연합을 이기고 강원도랑 충청도 까지 먹은 혁명군은 나라이름을 고려로 정하고 궁예가 왕 노릇을 해먹는다. 고려라고 지은 이유는 이미 궁예 세력에서 고구려계 호족이 존나 대세가 됐기 때문. 왕권강화를 해야 하는데 2인자인 왕건을 중심으로 고구려계가 말을 안들어 쳐먹자 궁예는 각종 무리수를 두며 기침 소리를 내던가, 웃음 소리를 내면 철퇴로 머가리를 빠개는 짓을 하고, 원래 자기 나와바리도 아닌 송악에서 왕노릇 하려니 기존 박힌돌들인 고구려계 일찐들이 계속 쿠사리를 주자 궁예는 스스로 고구려 계승의식을 내던져버리고 나라이름을 '마진'으로 바꾼다음 [[태봉]]으로 바꾸었다. 도읍지 또한 [[철원]]으로 옮기는 바람에 [[제설|씨발 눈 치우다가]] 개빡친 군바리들이 궁예 통수를 치고 당시 2인자 였던 왕건이 왕이 되었으며 고려를 건국했다. 왕건은 즉위 하자 마자 좆같은 철원 대신 자기 집인 송악으로 다시 도읍을 옮기고 이름을 개경으로 바꾸었다. 다만 1인자긴 하지만 즉위 초기라서 존나 중앙집권적인 짱쎈 왕은 아니고 그냥 동시대 일찐 중에 가장 잘나가서 1인자 대우를 받을 뿐이었다. 그래서 궁예를 후원하던 강원도나 동해쪽은 왕건이 나~~중에 되서야 자기 산하로 넣을 수 있었다. 그 후 견훤과 적당히 탐색전을 벌이다가 결국 조물성 전투를 시작으로 존나게 치고박기 시작한다. 그러나 조물성전투에서는 고려가 패배한다. 또한 몇 년후 공산전투에서도 패배한다. 고려가 후백제를 역전하기 시작한 전투는 고창전투부터다. 또한 신라 경애왕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경순왕을 바지로 앉힌 후 귀환하던 견훤 통수를 치려다가 되려 [[머구]] 팔공산 부근에서 벌어진 공산전투에서 1만명 넘게 뒤지는 대패를 당하고 왕건 자신도 하마터면 뒤질뻔 했다.이때 부하장수인 [[신숭겸]]이 왕건의 옷을 입고 자신이 왕건 행세를 하면서 시간을 벌다가 결국 견훤에게 잡혀 죽었다. 이때 왕건은 후백제 군대의 포위망을 단신으로 피해 달아나면서 1달 넘게 생사 불명 상태였다. 어찌저찌 해서 가까스로 살아남긴 했으나 이번엔 견훤이 단 한번도 이기지 못했던 해상전을 감행하기도 했는데 수군을 이끌고 개경과 황해도 해안가가 몽땅 줘 털렸다. 존나게 똥쭐이 타는 상황이었으나 결국 안동 고창전투에서 후백제군 8천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며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 결과로 개쌍도 지역 신라계 호족들이 전부 왕건에게 돌아섰으며 경순왕 또한 몇가지 옵션을 조건으로 내걸어 나라를 들어 왕건에게 항복했다. 한편 하필이면 이때 견훤은 장남인 신검에게 통수를 처 맞고 금산사에 감금되었는데 간신히 탈출하여 이 사람도 왕건에게 투항했다. 신라의 왕과 백제의 왕이 전부 자신에게 투항했고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이때쯔음 [[발해]]가 멸망하는 바람에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쏟아져 들어왔고 이사람들을 몽땅 군대에 쑤셔박아 전력상으로 신검의 후백제를 완전히 압도하는 상황이 되었다. 마침내 일리천 전투(선산지역인데 현재로 치면 경북 구미시)에서 후백제군을 물리친 후 하필이면 또 황산벌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아내며 후삼국을 통일했다. 통일 후 왕건은 자신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고구려 고토 회복을 모토로 북진정책을 실시하려 했으나 뭐 씨발 집안 단속도 안되는 마당에 하는듯 마는듯 하면서 통일신라시절 대동강보다 좀 더 위로 올라가서 청천강 까진 알박기 하고 마무리 지었다. 그나마 신라처럼 중앙정부랑 존나 멀어서 관리가 안되던 거랑 달리 대충 평양까진 완전히 지배력을 뻗을 수 있었다. 한편 견훤이 장남 왕으로 안 삼았다가 나라가 망하는 꼬라지를 봐서인지 장남인 왕무, [[혜종]]을 후계자로 찍고 이것저것 뒷배경을 마련한다고 했으나 다 노-쓸모. 애초부터 꼐임을 좋아하는 새끼였는지 귀족의 딸이라면 건든게 아니라 그냥 보지만 보면 냅다 꽂은 레알 쎾쓰머신이었다. 기록된 마누라만 29명인데 그 중 보면 레알 애비가 뭐하는 새끼인지도 모르는 년들도 꽤 많다. 쉽게 말해서 그냥 지 꼴리는대로 박아 댔다고 보면 된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선 결혼 동맹이라는게 의미가 없어졌고 장남이고 차남이고 삼남이고 나발이고 그냥 왕자들 외가쪽 세력 강한놈이 왕 되는 상황. 외가 쪽 배경이 [[흙수저]]인 [[혜종]]은 당연히 좆밥으로 상대가 되질 못했고 결국 이 사람이 죽자 마자 바로 호족들끼리 싸움이 벌어져 [[혜종]]-[[정종]]-[[광종]]대 까지의 혼란을 낳았다. 그나마 광종이 도살자마냥 싸그리 죽이면서 어느정도 안정화됐다. 또한 애새끼를 워낙 많이 싸질러 대서인지 왕씨끼리 규합하기 위해서 자식들끼리 되도록이면 [[근친상간]]을 하도록 했다. 참 씨발. 일단 이 근친상간이 현대에서 보면 좆같은거 맞다. 현대에 저지랄로 말하면 그 새끼가 ㅂㅅ 이다. 하지만 중세의 왕족이나 귀족은 원래 근친이 좀 많았다. 왕건이 좆같은 사상을 가진 병신이 아니라, 그 당시의 어느정도 보편화된 생각인 것이다. 당장 이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유럽 귀족사로 가면 조금만 살펴도 족보가 얽히고 섥혀있다. 아무래도 결혼이 권력이랑 밀접한 연관이 있다보니 그런 것이다. 다만 왕건 이후 3-4대까지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근친이 심하다. 남매, 삼촌, 사촌, 오촌이 서로 결혼을 해대니 3-4대쯤 가면 외삼촌 겸 고모부 겸 사촌 형이라는 좆같은 족보가 만들어 지기도 한다. 그 유명한 천추태후도 왕건 후손인데 천추태후의 아빠와 엄마가 모두 왕건의 (배다른)자식이라 왕건이 친할아버지이자 외할아버지가 된다. 다만 왕건은 존나 페미니스트라 여자는 외가 성을 쓰라고 했기 때문에 할머니 성을 따라서 황보씨이다. 그리고는 사촌인 경종이랑 결혼 했고 동시에 자기 오빠랑 시누이도 결혼함. 그니까 천추태후는 부모가 남매근친, 본인과 남편, 시누이, 오빠 사촌근친겸 겹사돈이다. 근데 여자는 할머니 성씨지만 남자는 왕씨기 때문에 천추태후 친오빠는 왕씨라 천추태후 남편인 경종이 죽자 왕이 되서 성종이 된다. 왕 된지 26년 만에 저세상으로 갔고 가기 전 훈요십조를 남기고 갔는데 이는 주작썰이 있긴 있다. 여하튼 뒤지기 직전 유언은 '''씨발 인생 존나 덧없네'''. 사스가 모든 걸 이룬 진정한 상남자의 좆간지 나는 최후라고 할 수 있다. 죽으면서 후대 왕들에게 지키라고 훈요10조를 남겼다. 그런데 훈요10조의 8번째 조항에 호남지역 인물을 등용하지 말라고 했다. 이걸로 요즈음 지역드립과 엮어서 논란 정도 있는것 같은데 생각해봐라. 자신에게 유일하게 끝까지 저항한 망국 출신의 인물을 등용이나할 수 있겠냐? 가뜩이나 고려는 성종 이전까지 전국호족연합국 이었는데 후백제 본거지인 전라도쪽 인물이 고위직 잡고 다른 호족 애들 선동해서 반란 일으키면 당장 제 2차 후삼국 시대로 돌아가는 건데. (참고로 이 삼국계승의식은 졸라 오래 고려시대에 남는다. 후삼국 통일해서 300년 지난 이후에도 고구려 계승,백제 계승,신라 계승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킨게 숱하다. 이게 사라진건 이성계가 사실 알고보면 우린 다 단군의 후손임!! 따라서 우리의 조국은 조선밖에 없음!!! 이라고 지랄해서 서서히 없어졌다.) ㄴ근데 요건 좀 논란이 있다. 아들인 혜종 외가가 나주인데 그러면 안그래도 왕자들 가운데 장남이란 이점 빼면 지지기반 약한 자식 새끼를 아주 조져 놓는거라서 ㄴ이건 호남지역이 아니라 궁예의 세력권이었던 청주 주변 인물들을 등용하지 말라고 한거다. 실제로 왕건에 대해 가장 적대적이었던 게 이 주변 지역들이다. 좆무위키 가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