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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 국왕 부부가 죽창질당하는 것을 본 유럽 전역의 금수저들은 자신들도 같은 꼴을 당하는 일이 없고자 프랑스 죽창맨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혁명 정신으로 무장한 죽창맨에게 금수저 따까리들은 한낱 꼬치구이에 불과했다. 이후 [[나폴레옹]]이란 전쟁사 희대의 천재<ref>이전 서술에서는 나폴레옹이 프랑스판 항우라고 했는데, 나폴레옹이 그런 말을 지하에서 들었으면 지옥에서 그랑다르메를 이끌고 올라와 기뮤식과 편집자를 밟아버렸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법전 편찬, 정교분리와 능력 위주의 관료제 확립, 그랑제콜 제도 도입, 지적법 제정 등의 업적도 있는데, 항우는 "글은 자기 이름 쓸 정도만 알면 족하다" 라고 말했을 정도로 댕청했던데다가, 병법공부도 중간에 때려쳤으며, 18제후왕 분봉으로 중국을 헬게이트 춘추전국시대로 돌려놓으려 했다. 다시 말해 유럽에 자유주의 열풍을 몰고 온 나폴레옹과 중국에 일시적으로 복고주의 열풍을 몰고 온 수꼴 항우는 클라스가 다르다.</ref><ref>나폴레옹과 항우의 공통점은 존나 잘 싸웠는데 지 능력 잘난 맛에 살아서 외교적 능력이 개 상병신이었다는 점이다. 전유럽이 그의 적이었는데 아무리 개깡패라고 해도 버틸 수가 있나. 물론 전유럽이 그와 정면대결해서 이길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긴 했지만 어차피 나폴레옹은 순간이동능력자도 아니고 단 한사람이라는게 패인이다. 누가 총대메고 나폴레옹 바짓가랑이 잡고 있을 동안 나머지 신나게 나폴레옹 부하때려잡으면 된다는 전략 앞에선 나폴레옹도 답이 없었다. 유방이 항우를 잡은 것도 이와 비슷한 전략이었으므로 나폴레옹과 항우는 비교대상이 된다. 뭐 나폴레옹 법전같은 걸로 나폴레옹이 나은 인간이라고 누가 써놨지만 항백이나 카롤린 뮈라같은 집안내부의 적이라든가 부하들의 배신들을 보면 항우와 나폴레옹은 무너져내려가는 모습이 비슷하다.</ref><ref>위 글을 쓴 나폴레옹 빠돌이 새끼는 21세기에도 영웅후빨을 하고 자빠져 있다. 역사적 인물, 특히 정복자를 미화하고 후장써킹하는 모습은 후진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저 새끼가 나폴레옹 시대 때 프랑스 태어났으면 징병되서 라인배틀하다가 대포맞아 팔다리 짤려도 황제폐하 만세하고 뒤질 새끼다.</ref> 가 등판해 프랑스 황제로 즉위하고 유럽 대륙의 네임드 국가들을 하나하나씩 박살내며 1804년 속칭 '''자유주의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하고 스페인 게릴라들에게 발목을 잡히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전투 패배로 지중해 한복판에 유배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해 파리에 도착<ref>이때 나폴레옹의 탈출과 복귀 과정을 보도했던 프랑스 언론 '모니퇴르'의 기사 내용은 서울대 논술문제에도 나올 정도로 가히 곡학아세, 태세전환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나폴레옹이 처음 엘바를 탈출할 때는 그를 살인마로 묘사했으나 점점 그를 묘사하는 논조가 우호적으로 바뀌더니 그가 파리에 도착하자 '''황제 폐하'''를 외쳤다고.</ref>, 다시금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과 블뤼허가 이끄는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대서양 저편의 세인트헬레나<ref>이 섬은 영국령이지만 나폴레옹이 머물렀던 곳에 한해 프랑스령이라고 한다</ref> 로 유배당해 그곳에서 뒤졌다. 나폴레옹 이후 유럽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와 유럽 각국 [[틀니딱딱충]]들의 합작품인 빈 체제가 개막했다. 이로인해 프랑스에는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한동안은 루이 씹팔세와 샤를 씹새가 프랑스를 다스렸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으로 쌓은 죽창 정신은 건방진 국왕들을 냅두지 못했고 결국 7월 혁명(1830)으로 샤를 씹새를 쫓아냈다. 이후 그나마 시민들에게 관대해 보였던 루이 필리프를 프랑스 국왕으로 옹립했으나 얘도 1848년 2월 혁명으로 쫓아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프랑스의 자유민주주의는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또한 이 두 혁명은 유럽 전역의 혁명에 영향을 주며 빈 체제를 박살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등판해 프랑스 최초의 머통령이 되었으나 1852년 구국의 결단으로 공화정을 엎어버리고 제2의 보나파르트 제국을 탄생시켰다.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의 근대화를 주도하고, 크림 전쟁과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개입하면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장시켰지만 이 과정에서 유럽 각국에게 어그로를 끈 나머지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켰다. 결국 이를 지켜보고 있던 [[비스마르크]]가 보불전쟁(1870-1871)으로 프랑스를 박살냈고, 나폴레옹 3세는 폐위되었다. 그때 프로이센이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갓-독일제국을 선포한 것이 히틀러 에펠탑 인증샷과 함께 프랑스사 양대 굴욕으로 꼽힌다. 보불전쟁 이후 프랑스는 독일에 밀려 유럽대륙에서 [[콩라인]]이 되었지만 1차 세계대전 전까지 '''벨 에포크(프랑스어로 좋은 시절이라는 의미)'''라 불리는 유럽의 최전성기 속에서 번영을 누렸다. 프랑스는 2차 산업혁명과 식민지 개척을 통해 부를 축적했으며, 랜드마크인 에펠탑도 이 시기 만들어졌다. 그리고 식민지는 서아프리카의 대부분과 인도차이나 등지로 영국 다음가는 제2의 식민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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