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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쟁패=== ====제나라를 치다==== {{킬러}} {{학살자}} 항적의 분봉조치는 매우 불합리했다. 자신에게 협력한 세력에게는 좋은 땅을 주었지만, 그렇지 않은 세력은 변방으로 쫓아냈기 때문에 수많은 분쟁을 야기하게 된다. 제나라의 전영(田榮)은 항적이 자신이 옹립한 제왕(齊王) 전불(田市)의 봉국을 교동(膠東)으로 옮기고 대신 전도를 제왕(齊王)으로 삼은 것에 불만을 품었다. 전영이 즉시 제나라 군사를 일으켜 전도를 공격하자 전도는 초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 전불이 항우를 두려워하여 몰래 달아나 교동왕이 되려고 하자 그의 뒤를 추격하여 즉묵(卽墨)에서 죽였다. 전영은 이어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을 공격하여 죽이면서 세 개로 쪼개졌던 제나라를 통합하게 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전영은 팽월(彭越)에게 장군의 인장을 주고 양나라 땅에서 초나라에 반기를 들게 했고, 전영과 마찬가지로 항우의 분봉에 불만이 있었던 진여(陳餘)의 요청을 받아 군대를 보내주었다. 진여는 군대를 이끌고 상산(常山)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상산에 있었던 장이는 달아나 유방에게 투항한다. 항적은 소공각(蕭公角)을 시켜 양나라에서 반기를 든 팽월(彭越)을 공격하게 했고, 오현(吳縣)의 현령(縣令)이었던 정창(鄭昌)을 한왕(韓王)으로 삼아 유방의 진격을 막게 했다. 그러나 소공각은 팽월에게 패배하고, 관중만 차지하면 더이상 진격하지 않겠다는 장량의 기만책에 속아넘어간 항적은 유방 대신 전영을 치러 간다. 이때 항적은 구강왕 영포에게 군사를 데리고 종군할 것을 명했으나 경포는 병이 났다는 핑계로 오지 않고 단지 휘하 장수로 하여금 수 천 명의 군사만을 보내왔다. 기원전 205년 겨울, 항적이 거느린 초군이 성양(城陽)에 이르자 제왕 전영 역시 제군을 이끌고 나와 초군과 조우했다. 이 전투에서 전영은 개박살이 났고 평원(平原)으로 달아났으나 그곳의 백성들에게 잡혀죽었다. 항적은 계속 북진하여 제나라의 성곽과 가옥을 불살라 버리고, 자기에게 항복한 전영의 군사들을 모두 구덩이에 산채로 파묻어 죽인 다음 노약자나 부녀자들은 밧줄에 묶어 포로로 삼았다. 이 짓거리를 북해(北海)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않았다. 초군의 만행에 분개한 제나라 사람들은 항적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고 전영의 동생 전횡(田橫)이 제나라의 도망병 수만 명을 수습하여 성양에서 저항했다. 항우는 성양을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필사적인 저항으로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팽성대전==== {{명장}} 항적이 제나라를 휘젓고 다니는 동안 유방은 항적이 초의제를 시해한 죄를 들어 다섯 제후들을 모아 56만이라는 막대한 군사를 이끌고 삼제를 완전히 평정하고는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동쪽으로 진격했다. 유방의 군대는 군세에 힘입어 항적이 없는 팽성을 손쉽게 장악한다. 그 소식을 들은 항적은 휘하의 장수들로 하여금 성양을 계속 공격하게 하고 자기는 정예병 3만 명을 이끌고 한군을 치러 간다. 머릿수 차이가 엄청났지만 유방은 팽성 함락 이후 매일 주연을 열며 놀기나 했고 싸울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군은 항적에게 무참히 학살당한다. 팽성의 동쪽인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서 무려 10여 만의 한군이 죽었다. 남쪽으로 달아난 한군 패잔병들도 영벽(靈壁)의 동쪽 수수(睢水) 강안에서 뒤를 추격한 초군에게 학살당하여 10여 만의 군졸들이 물고기 밥이 되었다. 수수는 죽은 한군의 시체로 흐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이윽고 초군이 유방이 속한 군대를 삼중으로 포위했다. 그때 갑자기 초군의 서북쪽에서 나무를 부러뜨리고 가옥을 날려버리는 큰바람이 일어나더니 모래와 돌을 날리며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워지며 초군을 향해 불기 시작했다. 초나라 진영은 대 혼란에 빠져 전열이 흩어지자 유방은 그 틈을 타 휘하의 장수 수십 기와 함께 간신히 몸을 빼내 달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팽성의 서쪽에서는 초나라의 장수 정공(丁公)과 마주쳐서 싸워야 했으나 유방의 설득에 넘어간 정공이 유방을 살려보내주었다. 유방은 도망치는 와중에 고향 패현(沛縣)에 있는 가족들을 모두 데려가려 했으나 항적도 유방의 가족들을 붙잡기 위해 사람을 보낸 상태였고, 결국 가족들이 모두 달아난 후라 유방은 가족들을 만날 수 없었다. 그나마 도망치던 와중에 아들 유영(劉盈)과 딸 노원(魯元)을 만나서 자기 수레에 태우고 도망친다. 이윽고 초군의 추격군이 보이기 시작하자 당황한 한왕은 효혜와 노원을 수레에서 밀어서 떨어뜨렸다. 이에 수레를 몰던 등공(滕公) 하후영(夏侯嬰)이 수레를 멈추고 두 아이를 주어서 다시 태우기를 세 번이나 걸쳐서 했다. 열이 뻗친 유방이 하후영을 10 번이나 찔려 죽이려고 했고 하후영도 화가 나서 유방은 하찮은 짐승보다 못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깠다. 유방은 하후영의 활약에 힘입어 초군의 추격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성공하지만 그의 아버지 태공(太公)과 아내 여후(呂后)는 초군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 항우는 유방을 협박하기 위해 그들을 휘하의 군중에 두며 데리고 다녔다. 그때 여후의 오빠 주려후(周呂侯) 여택(呂澤)이 한나라를 위해 군사를 이끌고 하읍(下邑)에 주둔하고 있었다. 유방은 샛길을 이용하여 그에게 달려가 합류했고 형양(滎陽)으로 이동하면서 조금씩 패잔병들을 수습했다. 소하(蕭何) 역시 전적에도 없는 관중의 노약자들을 모두 징발하여 형양으로 끌고 오자 한군의 위세는 다시 크게 일어났다. 초군이 팽성에서 나와 한군과 싸워 승승장구하다가 이윽고 형양의 남쪽 경읍(京邑)과 색읍(索邑) 사이에서 크게 싸웠다. 여기서는 한군이 초군을 패퇴시켰고, 이에 초군은 더 이상 형양을 지나 서쪽으로 진격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항적이 없는 틈을 타 전횡은 제나라의 대부분 땅을 수복하고 전영(田榮)의 아들 전광(田廣)을 제왕으로 세워 제나라를 부활시켰다. ====형양을 점령하다==== {{인성쓰레기}} 한군은 형양에 주둔하면서 초군과 맞서 싸우게 된다. 한군은 황하로 통하는 용도(甬道)를 건설하고 오창(敖倉)으로부터 양식을 실어 날라 먹었다. 한군은 거의 1년간 농성했으나 초군이 여러 차례 한나라의 용도를 공격하여 양식을 약탈해 가면서 한군의 보급이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된 유방은 항적에게 강화를 청하여 형양의 이서 지역을 기준으로 땅을 나눠 갖자고 했다. 항적은 이 안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범증은 강화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항우가 그 말에 따라 강화를 거부하고 형양의 포위망을 더욱 압박하며 세차게 공격했다. 이에 유방의 모사 진평이 계책을 내어 항적과 부하들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부하들이 유방과 내통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린다. 이로 인해 항적이 부하들을 의심하는 분위기가 강해지던 와중, 한군 진영에서 초나라의 사자가 왔을 때 태뢰(太牢)<ref>소 돼지 양을 각각 한 마리씩 잡아 대접하는 지금 기준으로도 ㅆㅅㅌㅊ인 대접법이다.</ref> 의 예로 성대하게 준비한 음식을 차려 놓고는 사자가 연회석에 당도하자 뒤늦게 깜짝 놀라는 체하며 "너 범증의 사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항적의 사자였네?"라고 말하며 들여오던 음식을 가져가도록 하고 그냥 평범한 음식을 내주는 일이 일어났다. 사자가 돌아와 그 일을 고하자, 항적의 범증이 한나라와 비밀리에 내통하고 있지나 않을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항적의 태도에 실망한 범증은 항적의 허락을 받아 항적에게서 떠났고 범증이 팽성을 향해 돌아가던 중 미처 당도하기도 전에 몸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하지만 범증이 죽었다고 해서 초군의 포위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이에 진평이 2천 명의 여인들에게 갑옷을 입혀 병사로 위장하고 형양성 동문으로 보내어 초군의 시선을 끌게 만들고, 기신(紀信)은 유방으로 분장하여 초나라에게 항복한다. 그 틈을 타서 유방은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속아넘어간 것에 분노한 항적은 기신을 화형에 처한다. 유방은 탈출할 때 어사대부 주가(周苛), 종공(樅公)에게 위왕(魏王) 표(豹)와 함께 형양성을 지키도록 했다. 위왕 표는 한나라에 붙었다 초나라에 붙었다 다시 한나라에 붙은 줏대없는 배신자였기 때문에 주가와 중공은 위표를 죽였다. 주가의 완강한 저항을 뚫지 못한 초군은 우선 성고(成皐)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유방을 추격하지만 유방은 완읍에 주둔하면서 초군의 공세를 잘 버텼다. 그 사이 팽월이 하수를 건너 초나라의 동아(東阿)를 공격하여 초장 설공(薛公)을 죽이고 초나라의 성 17개를 함락시킬 정도로 초나라를 휘젓고 다닌다. 이를 두고볼 수 없었던 항적은 군사를 움직여 동쪽으로 나가 팽월을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다시 형양으로 돌아와서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형양을 지키던 주가와 종공은 생포되었다. 항적은 주가를 회유해 보았으나 주가는 너따위는 유방의 상대가 안 된다며 큰소리로 꾸짖었고 분노한 항우는 주가를 팽형에 처하고 종공도 같이 죽였다. 완성에서 항우를 유인하던 유방이 항우가 없는 틈에 성고로 가있었기 때문에 일직선으로 수비라인을 대파한다. 유방 쪽이 어딜 봐도 끝장난 판이었지만 유방은 이걸 또 어떻게 뒤집어놓고 말았다. 우선 유방은 당장 군사를 구할 곳은 북쪽에 가있는 한신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지경이 되어도 늦장을 부리는 인간의 속을 어떻게 마냥 믿겠나. 유방은 성고에서 몰래 먼저 빠져나온 다음. 북쪽으로 향해 한신이 주둔중인 소수무로 향했다. 일부러 낮잠 한숨 자고 한밤중에 한신의 군영으로 찾아간 유방은 한왕이 보낸 사자라고 경비병을 윽박질러 문을 통과하고, 자고있는 한신의 침소에 조용히 들어가서 인수와 부절을 회수. 그대로 꿀잠자는 한신을 제외한 장수들을 소집해서 인사권을 발동해 하룻밤 사이에 한신의 군대를 모조리 손아귀에 장악했다. 일어난 한신이 경악하자 유방은 장이더러 빈 군사는 니가 조나라에서 긁어서 채우라고 한신의 옆에서 쫓아내고, 광무산에 있던 조참, 관영 등의 믿음직하고 뛰어난 장수들을 대거 한신의 옆에 붙여놓은 뒤(의도는 뻔하지?) 한신이 데리고 있던 군사를 모조리 데리고 남하해 전선에 귀환했다. 하지만 군사가 늘어났다고 항우와 야전에서 붙기는 불안하다는 의견이 많자 유방은 우선 한신에게서 가져온 군사 중 2만을 다시 쪼개서 몰래 초나라 땅에 백도어를 건다. 이 군사들은 숨어있던 팽월과 합류했는데, 제나라에서 받았던 1만 남짓한 군사로도 활개치던 팽월은 지원군 2만까지 받자 아주 미쳐서 날뛰기 시작했다. 팽성 주변의 성 수십개가 팽월에게 함락되었고, 팽성에서 뭐가 나가려면 팽월의 허락을 받아야 할 지경이었다. 경악한 항우는 수도의 위기까지 방치할 수는 없어 다시 한번 별동대를 이끌고 초나라 땅으로 갔다왔다. 유방은 이 틈을 타서 군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남진하여 성고(成皐)를 탈환하고 형양으로 진격하여 종리매(鍾離眜)를 쫒아내고 형양 동북쪽에 있는 광무(廣武)에 주둔한다. ====광무 대치==== {{패륜아}} 항적은 팽월을 무찌르고 귀환한 후 한군에게 포위당해 있던 종리매를 구원하고 광무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그러나 산 속에 틀어박힌 한군을 공격하기는 어려웠고 후방에서는 팽월이 자꾸 보급선을 차단시키고 있어서 수개월째 대치 상대를 유지했다. 결국 항적은 큰 도마를 만들고 그 위에 전에 사로잡았던 유방의 아버지 태공(太公)을 올려놓은 다음 유방에게 사자를 보내어 통고했다. "유방은 들어라, 지금 당장 항복하지 않으면 네 아버지는 가마솥의 국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자 유방은 예전에 자신과 항적이 의형제를 맺었던 사실을 들먹이며 말했다. "너와 내가 형제의 의를 맺었으니 내 아버지가 곧 네 아버지다. 그러니 내게도 국 한 사발 보내거라" 화가 난 항적은 태공을 진짜로 죽이려 했으나, 항백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항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유방에게 "나하고 한번 맞짱 뜨자 임마"라고 말하여 단기접전을 요청했으나, 당연히 항적의 상대가 안 되는 유방은 "이 몸은 힘이 아니라 지혜로 싸운다"며 무시했다. 그래서 항적은 군중에서 선발한 장사를 출전시켜 싸움을 걸도록 했다. 한군은 이번에도 무시하려 했으나 초나라 장사가 세 번이나 한군 진영 앞으로 나와 싸움을 걸어오자 누번(樓煩)이라는 활 잘 쏘는 인물이 그를 활로 쏴 죽였다. 열받은 항적이 친히 항왕이 몸에 갑옷을 걸치고 극을 손에 들고 나와 누번에게 싸움을 걸었다. 누번은 항적을 향해 활을 쏘려고 했으나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누번을 꾸짖는 소리에 겁을 먹고 한군의 진영으로 도망쳤다. 유방은 항적이 몸소 싸우러 나온 사실을 듣고는 크게 놀란다. 항적이 유방의 진영에 가까이 접근하여 말을 걸자 유방도 항적과 서로 가까운 곳에서 대화를 하게 된다. 여기서 유방은 항적의 신안대학살, 진왕 자영 시해, 초의제 시해 등 10가지 죄목을 언급하며 항적을 비판했다. 분노한 항적이 결투를 청했으나 유방이 거절하자 항우가 몰래 숨겨 가지고 간 쇠뇌를 쏘아서 유방의 가슴팍에 맞추었다. 하지만 유방은 "어이쿠, 발가락에 맞아버렸네"라고 허세를 부리고는 달아났다. ====불리해지는 상황==== {{폭망}} 유방이 항적을 상대로 시간을 끄는 동안 회음후 한신은 거의 모든 나라를 다 평정했고, 이제 제나라 정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한신이 괴철의 말에 넘어가 이미 역이기의 활약으로 한나라와의 동맹을 맺으려던 제나라를 공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화가 난 제나라는 역이기를 죽이고 항적과 손을 잡는다. 항적은 부하 장수 용저(龍且)에게 20만 대군을 이끌고 제나라와 함께 한신을 막을 것을 명했다. 그러나 유수 전투에서 용저와 제, 초 연합군은 한신에게 크게 패하고 용저도 전사한다. 한신이 원래 항적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항적은 무섭(武涉)을 보내어 한신을 설득하려 했으나 한신은 자신을 찬밥 취급했던 항적을 도와주기 싫다며 거부했다. 그리고 팽월이 또다시 일어나 양나라 땅을 차지하고 초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갈수록 항적이 불리한 상황에 처해가던 중, 유방이 후공(侯公)을 보내 천하를 양분하여 홍구(鴻溝) 서쪽은 한나라의 영토로 하고 동쪽은 초나라의 영토로 하자는 협약을 맺자고 했다. 항적은 이 제안을 승낙하고 그동안 붙잡고 있었던 유방의 가족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제후들의 군사들을 해산한 다음 동쪽의 팽성으로 돌아갔다. 유방도 역시 서쪽의 장안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장량과 진평은 지금이야말로 항적을 몰락시킬 기회라며 공격할 것을 재촉했고, 유방이 그 말을 따라 초군을 기습한다. 그러나 한신과 팽월이 약속한 기일에 맞게 군사를 움직이지 않아 초군을 포위하지 못했고, 고릉(固陵)에서 초군이 역으로 공격하여 이번에도 유방은 꽁무니를 빼야 했다. 하지만 이 전투의 승리가 항적의 운명을 바꾸지는 못했다. 한신의 명을 받아 초나라를 평정하고 있었던 관영(灌嬰)이 유방이 위험에 처한 사실을 듣고 곧바로 달려와 항적을 공격했고, 구원군을 만난 유방도 후퇴를 멈추고 협공을 하자 항우는 퇴각해야 했다. ====해하 전투==== {{끝내기}} 유방은 장량의 진언에 따라 팽월과 한신에게 땅을 떼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러자 한신과 팽월이 군사를 일으켜 유방을 도우러 온다. 그리고 항적의 장수였으나 유방에게 포섭된 영포도 군사를 보내었다. 기원전 202년 연합군은 해하(垓河)에 집결하여 초군을 포위한다. 항적은 연합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하여 군사 10만 중 8만이 전사한다. 남은 군사들도 연합군에게 완전 포위되어 옴싹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결정타로 한군이 밤중에 사방에서 초가(楚歌)를 부르자 사기가 꺾인 초나라 병사들이 탈영하기 시작하여 항적 휘하에는 몇몇 장수와 800여명의 군사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항적은 우(虞)라는 미인을 사랑하여 싸움 중에도 항상 데리고 다녔다. 이런 상황에 비분강개한 항적은 스스로 시를 지어 노래했는데 이 시를 '해하가'라고 부르고 있다. {{인용문|力拔山氣蓋世 (역발산기개세)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수 있지만 時不利兮騅不逝 (시불리혜추불서) 시운을 못 만나니, 오추마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구나! 騅不逝兮可奈何 (추불서혜가나하) 오추마가 앞으로 나가지 않으니 이를 어찌할거나! 虞兮虞兮奈若何 (우혜우혜나약하) 우미인이여, 우미인이여! 그대 또한 어찌할거나!}} 항적이 여러 차례 노래 부르니 우희(虞姬)도 따라 같이 불렀다. 항적의 뺨에 눈물이 몇 줄기 흘러내리자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감히 얼굴을 들어 쳐다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우희의 행적은 더 이상 기록에 없어서 알 길이 없으나, 초한지에서는 자결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항적은 그날 밤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한군의 포위망을 남쪽에서 뚫고 달아났다. 날이 밝자 비로소 항우가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방은 관영에게 명하여 5천의 기병을 이끌고 항우의 뒤를 추격하도록 했다. 항우가 회수를 건넜을 때는 말을 타고 뒤를 따를 수 있는 군사는 100여 명에 불과했다. 항우의 일행이 음릉(陰陵)에 이르러 길을 잃어버리고 밭을 가는 늙은 농부에게 물었다. 농부가 항우를 속여 왼쪽이라고 가르쳐줬다. 항우의 일행은 결국은 커다란 늪지대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한군은 항우의 일행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항우가 즉시 일행과 함께 동쪽으로 나아가 동성(東城)에 이르니 따르는 군사들은 겨우 28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러나 수천의 한나라 기병은 항우의 뒤를 계속 추격했다. {{정신승리}} 한군의 추격을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항우가 말을 타고 그의 뒤를 따르던 군사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지금껏 싸움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그런 내가 이런 처지가 된 것은 하늘이 나를 버렸기 때문이다. 내 실력이 어느정도인지 똑똑히 보여주도록 하마!" 그래도 싸움 실력만큼은 진짜라서 항적은 한군을 향해 돌격하여 도위(都尉) 한 명을 참살하고 백여 명의 군사들 죽였다. 초군이 다시 모이니 그 중 죽은 군사는 단지 2명에 불과했다. 항적은 계속 남쪽을 도망쳐 이윽고 오강(烏江)에 이르렀다. 오강의 정장(亭長)이 배를 강 언덕에 대고 기다리다가 항적에게 강동으로 달아나서 후일을 도모할 것을 권했으나, 항적은 자신을 따랐던 강동의 자제 8천명이 모두 전사하게 된 것이 면목없다며 거부했다. 그리고 정장에게는 자신이 타고 다녔던 오추마를 상으로 내렸다. 항적이 이어서 그 부하들에게 모두 말을 버리고 걷도록 하고 손에는 짧은 무기만을 들고 한군을 향해 돌격했다. 항적 혼자서 죽인 한군의 숫자는 수백 인이 되었다. 그러나 항우 자신도 역시 몸에 십여 군데에 부상을 입었다. 항우가 지쳐서 앉아 있다가 한군의 기사마(騎司馬)인 여마동(呂馬童)을 보더니 소리쳤다. "너는 옛날 내 부하였던 놈이 아니더냐?" 여마동이 항적과 얼굴을 마주치자 뭐라 대꾸하지는 못하고 곁의 왕예(王翳)를 향해 손가락으로 항적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자가 바로 항왕(項王)입니다." 그러자 항적은 "내가 들으니 유방이 내 목을 천금과 만호(萬戶)의 봉지로 사려한다고 했다. 내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겠노라!"라고 말한 후 곧바로 쥐고 있던 단검으로 자기의 목을 찔러 죽었다. 왕예가 달려가 항우의 목을 베어 가져갔고 뒤이어 여러 기병들이 달려들어 항우의 시신을 두고 다투다가 서로 죽인 자가 수십 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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