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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어린 시절=== {{금수저}} {{자뻑}} 하상(下相)(현재 [[장쑤성]] 쑤첸 시)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에는 항우를 작은아버지 항량(項梁)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는 옛날 진나라 장수 왕전(王翦)과 싸워 패하고 살해당한 항연(項燕)의 아들이다. 항(項)씨는 대대로 초나라의 장수를 지낸 집안으로 항씨는 초나라 왕에게 선물받은 성씨이다. 그렇다보니 항씨 일족은 초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고 항적도 마찬가지였다. 항량은 어린 항적에게 글공부를 시켰으나 진정이 없어서 때려치웠고, 다음에는 검술을 가르쳤으나 항적은 그것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화가 난 항량이 꾸짖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글은 내 이름만 쓸 줄 알면 되고, 검술도 일대일 싸움에서 지지 않을 정도면 그만이잖아요? 그러니까 수많은 인간들 상대로 이길 수 있는 걸 가르쳐주세요." 그래서 항량은 항적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항적의 태도는 크게 다를 바 없어서 자기가 어느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한 순간에 때려치웠다. 흔한 일반 학생들도 이런 태도를 보이면 미래가 뻔한데, 일국의 지도자까지 간 인간이 이랬으니 앞날이 좋을 리가 없었다. 어느날 [[진시황]]이 회계로 순시를 나와 절강(浙江)을 건널 때 그 모습을 보기 위해 항량과 항적이 같이 나와 구경했다. 항적이 성대한 행렬과 함께 지나가는 진시황을 보고는 "숙부님, 저놈의 자리를 내가 차지할 겁니다."라고 말하는 패기를 보였다. 깜짝 놀란 항량은 항적의 입을 틀어막고 "너 우리 일족이 멸족당하는 꼴을 보고싶은 거냐?"며 나무랐지만 이때부터 항적이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항적은 자라면서 키가 팔 척(尺)<ref>고대 중국의 척은 지금 척보다 작아서 23cm 정도 된다. 즉 8척이라고 할 시 키가 184cm정도 되었다는 뜻이다, 당대의 장사였다면 전혀 이상한 키가 아니다.</ref> 이 넘었고, 그 힘은 정(鼎)<ref>솥 정(鼎)이란 한자는 강철로 만든 다리가 달린 솥을 의미한다. 주로 제례용으로 사용된 솥으로 무게가 수 백kg에 달한다.</ref> 을 들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회계 땅을 장악하다=== {{킬러}} 항적이 장성한 후 진나라는 점점 망조를 보이고 있었다. [[진시황]]도 폭정이 심했지만, 그가 죽고 난 후 뒤를 이은 이세황제 영호해도 환관 조고에게 놀아나면서 사치와 향략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진승,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진나라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기원전 209년 9월, 항적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회계태수 은통(殷通)이 항량(項梁)을 부추켜 반란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여기서 항량은 항적을 시켜 은통을 죽이고 회계 땅을 장악했다. 항적은 은통뿐 아니라 저항하는 군사들도 베어 죽여 끽소리조차 못하게 만들었다. 항량은 스스로 회계태수가 되었고 항적을 비장(裨將)으로 삼아 관하의 현(縣)들을 돌아다니며 진무하고 복종시켰다. ===양성 군민들을 생매장하다=== {{싸이코패스}} 광릉(廣陵) 사람 소평(召平)이 항량을 찾아와 진왕(陳王) 섭(涉)의 명령을 가장하여 항량을 초나라의 상주국(上柱國)에 임명하고 진(秦)나라 군대를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항량은 이 명을 따라 군사를 이끌고 장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격했다. 항적도 항량을 따라 진나라와의 전쟁에 종군했다. 이 전쟁 중에 항적이 별동대를 이끌고 양성(襄城)을 공격한 일이 있는데, 양성 군민들의 거센 저항을 받아 함락이 매우 어려웠다. 항적은 분풀이로 성이 함락된 후 살아남은 사람들을 모조리 생매장해 버렸다. ===항량이 죽다=== 진왕 섭(涉)이 죽은 후 거소(居鄛) 사람 범증(范增)이 항량을 찾아와 초왕실의 후손을 찾아서 왕으로 세우라고 권유했다. 항량은 이 말을 따라 초회왕(楚懷王)의 후손 중 웅심(熊心)이란 사람을 찾아내어 초왕으로 추대했다. 이 사람의 왕호가 조상과 똑같기 때문에 구분을 위해 나중에 황제가 되었을 때의 제호인 초의제(楚義帝) 또는 초회왕 심(楚懷王心)으로 불린다. 이맘때쯤 패 땅에서 몸을 일으킨 패공(沛公) 유방(劉邦)이 항량에게 찾아왔다. 항적은 유방과 함께 항량의 명을 받아 별동대를 이끌고 성양(城陽)을 비롯한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 연일 승전보를 듣게되자 교만해진 항량이 진나라 군대를 얕보게 되자, 송의(宋義)가 방심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항량은 그 말을 듣지 않았고, 송의는 제나라의 사자로 온 고릉군에게 항량은 싸움에서 지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결국 항량은 정도(定陶)에서 진나라 군대를 이끌던 장수 장한(章邯)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고 항량도 여기서 전사한다. 그동안 진류(陳留)를 공격 중이었던 항적과 유방은 항량의 본대가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쪽으로 후퇴했다. ===거록대전=== {{명장}} 항량이 이끌던 초나라의 주력군을 대파한 장한의 진군은 초나라의 잔병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즉시 방향을 북쪽으로 돌려 하수를 도하한 다음 조(趙)나라를 공격하여 대파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초회왕 심(楚懷王心)은 송의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항적을 차장(次將), 범증(范增)을 말장(末將)으로 삼아 조나라를 구원토록 했다. 송의의 군대는 안양(安陽)에 주둔한 이후 46일이 지나도록 전진하지 않았다. 이에 항적이 송의에게 당장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자며 따졌지만, 송의는 지들끼리 싸우다가 힘이 빠졌을 때 공격하면 된다며 내가 너보단 작전 더 잘 안다고 면박을 주었다. 이 꼴을 참을 수 없었던 항적은 병사들에게 송의가 장수 자격이 없는 자라고 선동했고, 새벽에 송의의 상장군 막사로 난입하여 목을 따 버렸다. 그리고 장수들 앞에서 송의가 모반하려 했기 때문에 초회왕 심의 명령을 받아서 송의를 죽인 것이라고 선언한다. 장수들은 항우의 기세에 눌려 복종하고 아무도 감히 항거하지 못했다. 항적은 환초를 사자로 보내어 초회왕 심에게 송의를 죽였음을 알리고 초회왕 심은 항우를 상장군에 임명한다. 항적은 거록(鉅鹿)에서 왕리(王離)가 이끄는 진나라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항우는 전중국 짱으로 등극하게 된다. ===신안대학살=== {{학살자}} 거록대전 이후 장한은 극원(棘原)에, 항적은 장남(漳南)에 주둔하며 서로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장한이 여러 번 퇴각하려고 하자 이세황제 호해가 사자를 보내 장한을 책망했다. 장한은 장사(長史) 사마흔(司馬欣)을 사자로 보내 황제에게 자신의 사정을 알리고자 했다. 그런데 사흘이나 기다렸음에도 조고가 나타나지 않아 황제를 알현할 수 없게 된 사마흔은 조고가 장한을 모함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재빨리 장한에게 돌아갔다. 조고가 뒤늦게 알아차리고 사마흔을 잡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장한을 만난 사마흔은 이겨도 조고의 시기를 받을 뿐이며, 지면 죽일 게 뻔하니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결국 장한은 항적에게 항복했다. 항적은 항복을 받아들였지만, 장한 휘하 20만 군사의 반란을 우려하여 야밤에 진나라 항졸들을 기습하고 신안성(新安城) 남쪽에 구덩이를 파서 생매장해 버렸다. ===홍문연=== 초회왕 심(楚懷王心)은 항적과 유방에게 진나라를 공격하는 명령을 내리면서 진나라의 서울 함양(咸陽)을 먼저 점령하는 사람을 관중왕으로 임명할 것이라고 약속했었다. 항적이 꾸물대고 있던 송의를 죽이고 상장군 자리를 차지한 것도 빨리 함양으로 진격하기 위함이었다. 항적의 군대가 서쪽으로 계속 진군했고 이윽고 함곡관(函谷關)에 당도했다. 그러나 항적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유방은 진작에 함양에 와 있었고 유방이 함곡관을 단단히 지키고 있을 것을 명한 상태였다. 유방이 먼저 함양에 온 사실을 알자 분노한 항우는 함곡관을 함락시키고 관중에 들어간 항우는 희서(戱西)에 주둔했다. 유방의 휘하에서 좌사마(左司馬) 직에 있던 조무상(曹無傷)이 몰래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어 유방이 관중왕이 되기 위해 진왕(秦王) 자영(子嬰)을 상국으로 삼고, 성안의 있던 보물들을 모두 취했다고 모함했고, 범증(范增)은 항적에게 유방은 천자의 기상을 가진 자이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항량의 형제이자 항적의 숙부인 항백(項伯)<ref>본명은 전(纏)이고 백은 자에 속하지만 항적과 마찬가지로 본명보다 자가 더 유명하다.</ref>은 유방의 책사 장량과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항백은 장량을 비밀리에 만나 항우가 다음날 새벽에 공격할 예정이라고 말하면서 자기와 같이 유방의 진영을 떠날 것을 권했다. 사태의 심각함을 알게 된 장량은 유방을 만나 항적을 이길 수도 없으면서 왜 함곡관을 막았느냐고 따졌고, 불안해진 유방은 장량에게 이를 어찌 수습해야 할지를 애걸한다. 유방은 장량의 계책을 받아들여 항백을 만나 자신은 관중왕이 될 마음 없고 그저 항적을 맞아들일 준비만 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싹싹 빌었고, 항백은 유방이 항우에게 가서 사죄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항백은 항적에게 가서 진나라를 물리치고 진왕 자영을 사로잡은 공이 있는 유방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고 항적도 이를 받아들여 유방을 치려고 했던 계획을 거두었다. 유방은 다음날 새벽 백여 기(騎)의 군사들만을 거느리고 항왕의 진영이 있는 홍문(鴻門)에 당도하여 항적을 접견하며 사죄의 말을 올렸다. 항적은 이에 친절하게 조무상이 유방을 모함했다는 것을 알려줘버렸다. 물론 이 배신자는 연회 이후 유방에 의해 뚝배기가 날아간다. 범증은 항적에게 유방과 만나는 자리에서 유방의 목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자신이 패옥(佩玉)을 들었을 때 유방을 죽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이라고 말했다. 항적이 유방과 만난 자리에서 연회를 베풀자 범증은 패옥(佩玉)을 세 번이나 들어 신호를 보내었지만 항적은 무시했다. 결국 범증은 자리에 일어나 밖으로 나온 다음 항적의 족제인 항장(項莊)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연회장에 들어가서 검무를 추겠다고 청하거라. 그리고 춤을 추다가 유방의 자리와 가까워졌을 때 그를 죽이거라" 항장은 이 말을 듣고 연회장에 들어가 칼을 뽑아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항적의 곁에 앉아있던 항백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일어나 칼을 뽑아 검무를 추어 항장을 상대하면서 유방을 지켜주는 바람에 유방을 죽일 수가 없었다. 장량도 위험한 상황임을 알아채고는 연회장을 빠져 나와 군문 밖에 있던 번쾌를 불러들였다. 번쾌가 칼과 방패를 들고 연회장에 들어오려 하자 병사들이 막았으나, 방패로 제압하고는 연회장 안으로 들어와 항적을 노려보았다. 항적이 누구냐고 묻자 장량이 번쾌를 소개했다. 번쾌가 마음에 든 항적은 한 말 들이 잔에 술을 따라주도록 명했다. 번쾌는 이 술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러자 항적은 익히지 않은 돼지 앞다리를 안주로 주도록 명했고, 번쾌는 방패를 번쾌가 방패를 땅에 엎어놓고 칼을 뽑아 허벅지부분부터 잘라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쾌는 항적에게 넌지시 누군가가 유방을 해치려고 한다면서 항적을 책망했다. 이에 항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번쾌더러 자리에 앉으라고만 말했다. 번쾌가 장량 곁에 앉아 좌정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유방이 변소에 간다며 자리에 일어나면서 번쾌를 불러 같이 밖으로 나갔다. 유방은 번쾌에게 작별인사도 없이 빠져나가면 큰일나지 않겠냐고 말하지만 번쾌는 지금 우리가 도마 위의 생선 꼴인데 그런 말할 여유가 있냐며 일갈했다. 유방은 장량더러 대신 사과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번쾌와 함께 연회장을 떠났다. 장량은 유방에게서 백벽 한 쌍과 옥으로 만든 잔(酒器) 한 쌍을 받아들고는 항적에게 가서 유방이 인사 없이 간 것을 사죄하고 선물을 바쳤다. 항적이 유방의 안부를 묻자, 장량은 유방이 항적의 책망을 두려워하여 군중으로 달아났다고 말했다. 항적은 유방을 소인이라고 비웃으며 장량에게서 받은 벽백을 상좌에 놓았다. 반면 범증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와서는 자신이 받은 옥잔을 칼로 깨뜨려버리고 한탄했다. "참으로 애통하도다! 어린아이와 함께 일을 도모했으니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항장군으로부터 천하를 뺏어갈 자는 필시 패공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여기 있는 우리들은 그의 포로가 되고 말 것이다!" ===금의환향=== {{뇌근육}} 며칠 후에 항우는 함양으로 들어가 성중의 백성들을 모두 도륙하고 유방이 살려주었던 진왕 자영(子嬰)을 죽였다. 이어서 진나라의 궁궐에 불을 질렀다. 궁궐을 태우는 불길은 3개월이 지나도록 꺼지지 않았다. 한생이라는 사람이 항우에게 진언했다. "관중은 험산과 큰 강에 의지할 수 있고, 땅이 비옥하니 이곳을 패왕의 도성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나 항적은 고향에 돌아가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말한다. "내가 공을 세웠는데 고향 가서 자랑 안 하면 비단옷 입고 밤길에 돌아다니는 것과 다를 게 뭐냐? 비단옷을 입었으면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한생은 이에 항적은 관을 쓴 원숭이와 똑같다며 조롱했다. 화가 난 항우는 한생을 가마솥에 집어넣고 삶아죽이는 팽형에 처한다. ===서초패왕=== 함양을 점령한 항우는 초회왕 심을 왕에서 황제로 올려주고 존호는 의제(義帝)로 삼았다. 스스로 왕이 되고 싶었던 항적은 제후들과 장상들을 불러 말했다. "진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평정하게 된 건 다 나와 제장들이 힘쓴 덕이지, 의제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그러니 내가 공을 세운 사람들을 왕으로 세우겠다." 그래서 항적은 천하를 나누어 제장들을 제후 왕으로 봉한다. 여기서 유방은 한왕(漢王)에 봉하여 파(巴), 촉(蜀), 한중(漢中)을 다스리게 하고 남정(南鄭)을 도읍으로 삼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칭하고 9개의 군을 봉지로 삼으며 팽성(彭城)을 도읍으로 정하고 초의제는 장사(長沙)의 침현(郴縣)이라는 벽지로 보내버린다. 초의제는 침현으로 향하던 중 장강 한복판에서 항우의 명령을 받은 부하의 습격을 받게되고 초의제는 죽임당하기 전에 스스로 장강에 몸을 던져 죽는다. ===초한쟁패=== ====제나라를 치다==== {{킬러}} {{학살자}} 항적의 분봉조치는 매우 불합리했다. 자신에게 협력한 세력에게는 좋은 땅을 주었지만, 그렇지 않은 세력은 변방으로 쫓아냈기 때문에 수많은 분쟁을 야기하게 된다. 제나라의 전영(田榮)은 항적이 자신이 옹립한 제왕(齊王) 전불(田市)의 봉국을 교동(膠東)으로 옮기고 대신 전도를 제왕(齊王)으로 삼은 것에 불만을 품었다. 전영이 즉시 제나라 군사를 일으켜 전도를 공격하자 전도는 초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 전불이 항우를 두려워하여 몰래 달아나 교동왕이 되려고 하자 그의 뒤를 추격하여 즉묵(卽墨)에서 죽였다. 전영은 이어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을 공격하여 죽이면서 세 개로 쪼개졌던 제나라를 통합하게 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전영은 팽월(彭越)에게 장군의 인장을 주고 양나라 땅에서 초나라에 반기를 들게 했고, 전영과 마찬가지로 항우의 분봉에 불만이 있었던 진여(陳餘)의 요청을 받아 군대를 보내주었다. 진여는 군대를 이끌고 상산(常山)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상산에 있었던 장이는 달아나 유방에게 투항한다. 항적은 소공각(蕭公角)을 시켜 양나라에서 반기를 든 팽월(彭越)을 공격하게 했고, 오현(吳縣)의 현령(縣令)이었던 정창(鄭昌)을 한왕(韓王)으로 삼아 유방의 진격을 막게 했다. 그러나 소공각은 팽월에게 패배하고, 관중만 차지하면 더이상 진격하지 않겠다는 장량의 기만책에 속아넘어간 항적은 유방 대신 전영을 치러 간다. 이때 항적은 구강왕 영포에게 군사를 데리고 종군할 것을 명했으나 경포는 병이 났다는 핑계로 오지 않고 단지 휘하 장수로 하여금 수 천 명의 군사만을 보내왔다. 기원전 205년 겨울, 항적이 거느린 초군이 성양(城陽)에 이르자 제왕 전영 역시 제군을 이끌고 나와 초군과 조우했다. 이 전투에서 전영은 개박살이 났고 평원(平原)으로 달아났으나 그곳의 백성들에게 잡혀죽었다. 항적은 계속 북진하여 제나라의 성곽과 가옥을 불살라 버리고, 자기에게 항복한 전영의 군사들을 모두 구덩이에 산채로 파묻어 죽인 다음 노약자나 부녀자들은 밧줄에 묶어 포로로 삼았다. 이 짓거리를 북해(北海)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않았다. 초군의 만행에 분개한 제나라 사람들은 항적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고 전영의 동생 전횡(田橫)이 제나라의 도망병 수만 명을 수습하여 성양에서 저항했다. 항우는 성양을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필사적인 저항으로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팽성대전==== {{명장}} 항적이 제나라를 휘젓고 다니는 동안 유방은 항적이 초의제를 시해한 죄를 들어 다섯 제후들을 모아 56만이라는 막대한 군사를 이끌고 삼제를 완전히 평정하고는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동쪽으로 진격했다. 유방의 군대는 군세에 힘입어 항적이 없는 팽성을 손쉽게 장악한다. 그 소식을 들은 항적은 휘하의 장수들로 하여금 성양을 계속 공격하게 하고 자기는 정예병 3만 명을 이끌고 한군을 치러 간다. 머릿수 차이가 엄청났지만 유방은 팽성 함락 이후 매일 주연을 열며 놀기나 했고 싸울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군은 항적에게 무참히 학살당한다. 팽성의 동쪽인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서 무려 10여 만의 한군이 죽었다. 남쪽으로 달아난 한군 패잔병들도 영벽(靈壁)의 동쪽 수수(睢水) 강안에서 뒤를 추격한 초군에게 학살당하여 10여 만의 군졸들이 물고기 밥이 되었다. 수수는 죽은 한군의 시체로 흐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이윽고 초군이 유방이 속한 군대를 삼중으로 포위했다. 그때 갑자기 초군의 서북쪽에서 나무를 부러뜨리고 가옥을 날려버리는 큰바람이 일어나더니 모래와 돌을 날리며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워지며 초군을 향해 불기 시작했다. 초나라 진영은 대 혼란에 빠져 전열이 흩어지자 유방은 그 틈을 타 휘하의 장수 수십 기와 함께 간신히 몸을 빼내 달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팽성의 서쪽에서는 초나라의 장수 정공(丁公)과 마주쳐서 싸워야 했으나 유방의 설득에 넘어간 정공이 유방을 살려보내주었다. 유방은 도망치는 와중에 고향 패현(沛縣)에 있는 가족들을 모두 데려가려 했으나 항적도 유방의 가족들을 붙잡기 위해 사람을 보낸 상태였고, 결국 가족들이 모두 달아난 후라 유방은 가족들을 만날 수 없었다. 그나마 도망치던 와중에 아들 유영(劉盈)과 딸 노원(魯元)을 만나서 자기 수레에 태우고 도망친다. 이윽고 초군의 추격군이 보이기 시작하자 당황한 한왕은 효혜와 노원을 수레에서 밀어서 떨어뜨렸다. 이에 수레를 몰던 등공(滕公) 하후영(夏侯嬰)이 수레를 멈추고 두 아이를 주어서 다시 태우기를 세 번이나 걸쳐서 했다. 열이 뻗친 유방이 하후영을 10 번이나 찔려 죽이려고 했고 하후영도 화가 나서 유방은 하찮은 짐승보다 못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깠다. 유방은 하후영의 활약에 힘입어 초군의 추격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성공하지만 그의 아버지 태공(太公)과 아내 여후(呂后)는 초군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 항우는 유방을 협박하기 위해 그들을 휘하의 군중에 두며 데리고 다녔다. 그때 여후의 오빠 주려후(周呂侯) 여택(呂澤)이 한나라를 위해 군사를 이끌고 하읍(下邑)에 주둔하고 있었다. 유방은 샛길을 이용하여 그에게 달려가 합류했고 형양(滎陽)으로 이동하면서 조금씩 패잔병들을 수습했다. 소하(蕭何) 역시 전적에도 없는 관중의 노약자들을 모두 징발하여 형양으로 끌고 오자 한군의 위세는 다시 크게 일어났다. 초군이 팽성에서 나와 한군과 싸워 승승장구하다가 이윽고 형양의 남쪽 경읍(京邑)과 색읍(索邑) 사이에서 크게 싸웠다. 여기서는 한군이 초군을 패퇴시켰고, 이에 초군은 더 이상 형양을 지나 서쪽으로 진격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항적이 없는 틈을 타 전횡은 제나라의 대부분 땅을 수복하고 전영(田榮)의 아들 전광(田廣)을 제왕으로 세워 제나라를 부활시켰다. ====형양을 점령하다==== {{인성쓰레기}} 한군은 형양에 주둔하면서 초군과 맞서 싸우게 된다. 한군은 황하로 통하는 용도(甬道)를 건설하고 오창(敖倉)으로부터 양식을 실어 날라 먹었다. 한군은 거의 1년간 농성했으나 초군이 여러 차례 한나라의 용도를 공격하여 양식을 약탈해 가면서 한군의 보급이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된 유방은 항적에게 강화를 청하여 형양의 이서 지역을 기준으로 땅을 나눠 갖자고 했다. 항적은 이 안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범증은 강화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항우가 그 말에 따라 강화를 거부하고 형양의 포위망을 더욱 압박하며 세차게 공격했다. 이에 유방의 모사 진평이 계책을 내어 항적과 부하들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부하들이 유방과 내통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린다. 이로 인해 항적이 부하들을 의심하는 분위기가 강해지던 와중, 한군 진영에서 초나라의 사자가 왔을 때 태뢰(太牢)<ref>소 돼지 양을 각각 한 마리씩 잡아 대접하는 지금 기준으로도 ㅆㅅㅌㅊ인 대접법이다.</ref> 의 예로 성대하게 준비한 음식을 차려 놓고는 사자가 연회석에 당도하자 뒤늦게 깜짝 놀라는 체하며 "너 범증의 사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항적의 사자였네?"라고 말하며 들여오던 음식을 가져가도록 하고 그냥 평범한 음식을 내주는 일이 일어났다. 사자가 돌아와 그 일을 고하자, 항적의 범증이 한나라와 비밀리에 내통하고 있지나 않을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항적의 태도에 실망한 범증은 항적의 허락을 받아 항적에게서 떠났고 범증이 팽성을 향해 돌아가던 중 미처 당도하기도 전에 몸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하지만 범증이 죽었다고 해서 초군의 포위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이에 진평이 2천 명의 여인들에게 갑옷을 입혀 병사로 위장하고 형양성 동문으로 보내어 초군의 시선을 끌게 만들고, 기신(紀信)은 유방으로 분장하여 초나라에게 항복한다. 그 틈을 타서 유방은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속아넘어간 것에 분노한 항적은 기신을 화형에 처한다. 유방은 탈출할 때 어사대부 주가(周苛), 종공(樅公)에게 위왕(魏王) 표(豹)와 함께 형양성을 지키도록 했다. 위왕 표는 한나라에 붙었다 초나라에 붙었다 다시 한나라에 붙은 줏대없는 배신자였기 때문에 주가와 중공은 위표를 죽였다. 주가의 완강한 저항을 뚫지 못한 초군은 우선 성고(成皐)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유방을 추격하지만 유방은 완읍에 주둔하면서 초군의 공세를 잘 버텼다. 그 사이 팽월이 하수를 건너 초나라의 동아(東阿)를 공격하여 초장 설공(薛公)을 죽이고 초나라의 성 17개를 함락시킬 정도로 초나라를 휘젓고 다닌다. 이를 두고볼 수 없었던 항적은 군사를 움직여 동쪽으로 나가 팽월을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다시 형양으로 돌아와서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형양을 지키던 주가와 종공은 생포되었다. 항적은 주가를 회유해 보았으나 주가는 너따위는 유방의 상대가 안 된다며 큰소리로 꾸짖었고 분노한 항우는 주가를 팽형에 처하고 종공도 같이 죽였다. 완성에서 항우를 유인하던 유방이 항우가 없는 틈에 성고로 가있었기 때문에 일직선으로 수비라인을 대파한다. 유방 쪽이 어딜 봐도 끝장난 판이었지만 유방은 이걸 또 어떻게 뒤집어놓고 말았다. 우선 유방은 당장 군사를 구할 곳은 북쪽에 가있는 한신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지경이 되어도 늦장을 부리는 인간의 속을 어떻게 마냥 믿겠나. 유방은 성고에서 몰래 먼저 빠져나온 다음. 북쪽으로 향해 한신이 주둔중인 소수무로 향했다. 일부러 낮잠 한숨 자고 한밤중에 한신의 군영으로 찾아간 유방은 한왕이 보낸 사자라고 경비병을 윽박질러 문을 통과하고, 자고있는 한신의 침소에 조용히 들어가서 인수와 부절을 회수. 그대로 꿀잠자는 한신을 제외한 장수들을 소집해서 인사권을 발동해 하룻밤 사이에 한신의 군대를 모조리 손아귀에 장악했다. 일어난 한신이 경악하자 유방은 장이더러 빈 군사는 니가 조나라에서 긁어서 채우라고 한신의 옆에서 쫓아내고, 광무산에 있던 조참, 관영 등의 믿음직하고 뛰어난 장수들을 대거 한신의 옆에 붙여놓은 뒤(의도는 뻔하지?) 한신이 데리고 있던 군사를 모조리 데리고 남하해 전선에 귀환했다. 하지만 군사가 늘어났다고 항우와 야전에서 붙기는 불안하다는 의견이 많자 유방은 우선 한신에게서 가져온 군사 중 2만을 다시 쪼개서 몰래 초나라 땅에 백도어를 건다. 이 군사들은 숨어있던 팽월과 합류했는데, 제나라에서 받았던 1만 남짓한 군사로도 활개치던 팽월은 지원군 2만까지 받자 아주 미쳐서 날뛰기 시작했다. 팽성 주변의 성 수십개가 팽월에게 함락되었고, 팽성에서 뭐가 나가려면 팽월의 허락을 받아야 할 지경이었다. 경악한 항우는 수도의 위기까지 방치할 수는 없어 다시 한번 별동대를 이끌고 초나라 땅으로 갔다왔다. 유방은 이 틈을 타서 군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남진하여 성고(成皐)를 탈환하고 형양으로 진격하여 종리매(鍾離眜)를 쫒아내고 형양 동북쪽에 있는 광무(廣武)에 주둔한다. ====광무 대치==== {{패륜아}} 항적은 팽월을 무찌르고 귀환한 후 한군에게 포위당해 있던 종리매를 구원하고 광무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그러나 산 속에 틀어박힌 한군을 공격하기는 어려웠고 후방에서는 팽월이 자꾸 보급선을 차단시키고 있어서 수개월째 대치 상대를 유지했다. 결국 항적은 큰 도마를 만들고 그 위에 전에 사로잡았던 유방의 아버지 태공(太公)을 올려놓은 다음 유방에게 사자를 보내어 통고했다. "유방은 들어라, 지금 당장 항복하지 않으면 네 아버지는 가마솥의 국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자 유방은 예전에 자신과 항적이 의형제를 맺었던 사실을 들먹이며 말했다. "너와 내가 형제의 의를 맺었으니 내 아버지가 곧 네 아버지다. 그러니 내게도 국 한 사발 보내거라" 화가 난 항적은 태공을 진짜로 죽이려 했으나, 항백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항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유방에게 "나하고 한번 맞짱 뜨자 임마"라고 말하여 단기접전을 요청했으나, 당연히 항적의 상대가 안 되는 유방은 "이 몸은 힘이 아니라 지혜로 싸운다"며 무시했다. 그래서 항적은 군중에서 선발한 장사를 출전시켜 싸움을 걸도록 했다. 한군은 이번에도 무시하려 했으나 초나라 장사가 세 번이나 한군 진영 앞으로 나와 싸움을 걸어오자 누번(樓煩)이라는 활 잘 쏘는 인물이 그를 활로 쏴 죽였다. 열받은 항적이 친히 항왕이 몸에 갑옷을 걸치고 극을 손에 들고 나와 누번에게 싸움을 걸었다. 누번은 항적을 향해 활을 쏘려고 했으나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누번을 꾸짖는 소리에 겁을 먹고 한군의 진영으로 도망쳤다. 유방은 항적이 몸소 싸우러 나온 사실을 듣고는 크게 놀란다. 항적이 유방의 진영에 가까이 접근하여 말을 걸자 유방도 항적과 서로 가까운 곳에서 대화를 하게 된다. 여기서 유방은 항적의 신안대학살, 진왕 자영 시해, 초의제 시해 등 10가지 죄목을 언급하며 항적을 비판했다. 분노한 항적이 결투를 청했으나 유방이 거절하자 항우가 몰래 숨겨 가지고 간 쇠뇌를 쏘아서 유방의 가슴팍에 맞추었다. 하지만 유방은 "어이쿠, 발가락에 맞아버렸네"라고 허세를 부리고는 달아났다. ====불리해지는 상황==== {{폭망}} 유방이 항적을 상대로 시간을 끄는 동안 회음후 한신은 거의 모든 나라를 다 평정했고, 이제 제나라 정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한신이 괴철의 말에 넘어가 이미 역이기의 활약으로 한나라와의 동맹을 맺으려던 제나라를 공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화가 난 제나라는 역이기를 죽이고 항적과 손을 잡는다. 항적은 부하 장수 용저(龍且)에게 20만 대군을 이끌고 제나라와 함께 한신을 막을 것을 명했다. 그러나 유수 전투에서 용저와 제, 초 연합군은 한신에게 크게 패하고 용저도 전사한다. 한신이 원래 항적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항적은 무섭(武涉)을 보내어 한신을 설득하려 했으나 한신은 자신을 찬밥 취급했던 항적을 도와주기 싫다며 거부했다. 그리고 팽월이 또다시 일어나 양나라 땅을 차지하고 초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갈수록 항적이 불리한 상황에 처해가던 중, 유방이 후공(侯公)을 보내 천하를 양분하여 홍구(鴻溝) 서쪽은 한나라의 영토로 하고 동쪽은 초나라의 영토로 하자는 협약을 맺자고 했다. 항적은 이 제안을 승낙하고 그동안 붙잡고 있었던 유방의 가족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제후들의 군사들을 해산한 다음 동쪽의 팽성으로 돌아갔다. 유방도 역시 서쪽의 장안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장량과 진평은 지금이야말로 항적을 몰락시킬 기회라며 공격할 것을 재촉했고, 유방이 그 말을 따라 초군을 기습한다. 그러나 한신과 팽월이 약속한 기일에 맞게 군사를 움직이지 않아 초군을 포위하지 못했고, 고릉(固陵)에서 초군이 역으로 공격하여 이번에도 유방은 꽁무니를 빼야 했다. 하지만 이 전투의 승리가 항적의 운명을 바꾸지는 못했다. 한신의 명을 받아 초나라를 평정하고 있었던 관영(灌嬰)이 유방이 위험에 처한 사실을 듣고 곧바로 달려와 항적을 공격했고, 구원군을 만난 유방도 후퇴를 멈추고 협공을 하자 항우는 퇴각해야 했다. ====해하 전투==== {{끝내기}} 유방은 장량의 진언에 따라 팽월과 한신에게 땅을 떼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러자 한신과 팽월이 군사를 일으켜 유방을 도우러 온다. 그리고 항적의 장수였으나 유방에게 포섭된 영포도 군사를 보내었다. 기원전 202년 연합군은 해하(垓河)에 집결하여 초군을 포위한다. 항적은 연합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하여 군사 10만 중 8만이 전사한다. 남은 군사들도 연합군에게 완전 포위되어 옴싹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결정타로 한군이 밤중에 사방에서 초가(楚歌)를 부르자 사기가 꺾인 초나라 병사들이 탈영하기 시작하여 항적 휘하에는 몇몇 장수와 800여명의 군사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항적은 우(虞)라는 미인을 사랑하여 싸움 중에도 항상 데리고 다녔다. 이런 상황에 비분강개한 항적은 스스로 시를 지어 노래했는데 이 시를 '해하가'라고 부르고 있다. {{인용문|力拔山氣蓋世 (역발산기개세)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수 있지만 時不利兮騅不逝 (시불리혜추불서) 시운을 못 만나니, 오추마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구나! 騅不逝兮可奈何 (추불서혜가나하) 오추마가 앞으로 나가지 않으니 이를 어찌할거나! 虞兮虞兮奈若何 (우혜우혜나약하) 우미인이여, 우미인이여! 그대 또한 어찌할거나!}} 항적이 여러 차례 노래 부르니 우희(虞姬)도 따라 같이 불렀다. 항적의 뺨에 눈물이 몇 줄기 흘러내리자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감히 얼굴을 들어 쳐다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우희의 행적은 더 이상 기록에 없어서 알 길이 없으나, 초한지에서는 자결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항적은 그날 밤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한군의 포위망을 남쪽에서 뚫고 달아났다. 날이 밝자 비로소 항우가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방은 관영에게 명하여 5천의 기병을 이끌고 항우의 뒤를 추격하도록 했다. 항우가 회수를 건넜을 때는 말을 타고 뒤를 따를 수 있는 군사는 100여 명에 불과했다. 항우의 일행이 음릉(陰陵)에 이르러 길을 잃어버리고 밭을 가는 늙은 농부에게 물었다. 농부가 항우를 속여 왼쪽이라고 가르쳐줬다. 항우의 일행은 결국은 커다란 늪지대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한군은 항우의 일행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항우가 즉시 일행과 함께 동쪽으로 나아가 동성(東城)에 이르니 따르는 군사들은 겨우 28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러나 수천의 한나라 기병은 항우의 뒤를 계속 추격했다. {{정신승리}} 한군의 추격을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항우가 말을 타고 그의 뒤를 따르던 군사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지금껏 싸움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그런 내가 이런 처지가 된 것은 하늘이 나를 버렸기 때문이다. 내 실력이 어느정도인지 똑똑히 보여주도록 하마!" 그래도 싸움 실력만큼은 진짜라서 항적은 한군을 향해 돌격하여 도위(都尉) 한 명을 참살하고 백여 명의 군사들 죽였다. 초군이 다시 모이니 그 중 죽은 군사는 단지 2명에 불과했다. 항적은 계속 남쪽을 도망쳐 이윽고 오강(烏江)에 이르렀다. 오강의 정장(亭長)이 배를 강 언덕에 대고 기다리다가 항적에게 강동으로 달아나서 후일을 도모할 것을 권했으나, 항적은 자신을 따랐던 강동의 자제 8천명이 모두 전사하게 된 것이 면목없다며 거부했다. 그리고 정장에게는 자신이 타고 다녔던 오추마를 상으로 내렸다. 항적이 이어서 그 부하들에게 모두 말을 버리고 걷도록 하고 손에는 짧은 무기만을 들고 한군을 향해 돌격했다. 항적 혼자서 죽인 한군의 숫자는 수백 인이 되었다. 그러나 항우 자신도 역시 몸에 십여 군데에 부상을 입었다. 항우가 지쳐서 앉아 있다가 한군의 기사마(騎司馬)인 여마동(呂馬童)을 보더니 소리쳤다. "너는 옛날 내 부하였던 놈이 아니더냐?" 여마동이 항적과 얼굴을 마주치자 뭐라 대꾸하지는 못하고 곁의 왕예(王翳)를 향해 손가락으로 항적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자가 바로 항왕(項王)입니다." 그러자 항적은 "내가 들으니 유방이 내 목을 천금과 만호(萬戶)의 봉지로 사려한다고 했다. 내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겠노라!"라고 말한 후 곧바로 쥐고 있던 단검으로 자기의 목을 찔러 죽었다. 왕예가 달려가 항우의 목을 베어 가져갔고 뒤이어 여러 기병들이 달려들어 항우의 시신을 두고 다투다가 서로 죽인 자가 수십 명에 달했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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