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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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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 :{|class="wikitable" border="1" table align=middle style="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border:2px solid #E61E2B" |align="middle"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color:#FFD40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span=2| [[파일:Coat of Arms of Joseon Korea.svg|30픽셀|링크=조선 왕조]]<br>조선 추존 왕비<br><big><big>'''헌경왕후 | 獻敬王后'''</big></big> |- |align="middle" colspan=2|[[파일:혜경궁 홍씨.png|400픽셀]] |- |align=center| '''존호''' |align=center|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 |- |align=center| '''휘호''' |align=center| 인철계성(仁哲啓聖) |- |align=center| '''[[시호]]''' |align=center| 헌경왕후(獻敬王后) |- |align=center| '''부군''' |align=center| [[사도세자|장조]] |- |align=center| '''봉작''' |align=center| 왕세자빈 → 혜빈(惠嬪) → 혜경궁(惠慶宮) |- |align=center| '''본관''' |align=center| [[풍산 홍씨]] |- |align=center| '''자녀''' |align=center| 의소세손, [[정조(조선)|정조]], 청연공주, 청선공주 |} 惠慶宮 洪氏 == 개요 == [[사도세자]]의 정실부인이자 [[정조(조선)|정조]]의 친어머니. 자식이 [[정조(조선)|왕]]이 되었지만 [[사도세자|남편이 왕이 되지 못한 역적이었기에]]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였고 실제로 생전에는 왕후로써 대접을 못받았다. 하지만 정조가 어머니를 위해 혜경궁을 지어주었고 그 혜경궁의 주인으로 궁호가 혜경궁이 되었다. == 생애 == [[선조(조선)|선조]]의 딸인 정명공주의 5대손으로 선조의 6대손으로 태어났다. [[1744년]] 10살의 나이로 동갑내기 [[사도세자]]와 혼인하였고 세자빈이 되었다. 그리고 [[1750년]] 아들 의소세손을 낳았는데 의소세손은 3살이 되던 해에 죽고말았다. 의소세손이 죽은 그 해에 [[정조(조선)|정조]]를 낳았다. 하지만 평화도 잠시,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관계가 틀어지고 [[사도세자]]가 미쳐버리자 홍씨도 궐내에서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자 자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세손을 지키기 위해 죄인의 부인인 자신이 책임지고 궐을 나가겠다고 영조에게 직접 청했고 그렇게 궐에서 쫒겨나게 된다. 사도세자가 죽은 날 세자비가 아닌 "혜빈(惠嬪)"으로 강등되게 되었고 세손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되게 된다. 잠시 친정으로 가있다가 다시 궁으로 돌아온 홍씨는 세손을 영조가 있는 [[경희궁]]에서 지내게 하도록 영조에게 간청했다. 당시 홍씨는 창덕궁에서 지내고 있었기에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세손의 나이가 9살이었다.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기 싫어서 세손은 눈물을 흘리며 난리를 쳤고 영조 또한 어머니와 함께 있는것이 낫지않겠냐고 하였으나 홍씨는 자기와 함께 있으면 할애비보다 어미를 더 좋아한다는 오해를 받을까봐 미래를 위해 영조에게 보냈다. == 정조 즉위 이후 == 꿈에도 그리던 아들이 왕이 되었지만 정조는 법적으로 엄연히 효장세자의 아들이었고 홍씨는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였다. 또 당시 왕실 최고어른은 영조의 정실부인이자 홍씨보다 10살이나 어린 [[정순왕후]]였다. 따라서 대왕대비의 칭호는 못받았으나 정조가 어머니를 위해 혜경궁을 지어주었고 혜경궁 홍씨라는 궁호를 받게 되었다. 정조 즉위 이후에도 사도세자의 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궐내에서 엄청난 압박과 지탄을 받았으나 아들이 다 막아줬고 환갑잔치날에는 33년만에 처음으로 사도세자의 무덤까지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정조가 요절하자 그녀의 인생은 다시 파탄나기 시작했다. 정순왕후의 외척인 [[경주 김씨]]와 혜경궁의 외척인 [[풍산 홍씨]]가 대립하며 홍씨 집안 자체가 파탄나게 생긴 것이었다. 결국 정순왕후의 명으로 혜경궁의 남동생인 홍낙임이 사약을 받는 일까지 생기자 집안이 풍비박산나며 혜경궁의 지위까지 박탈당하게 생겼다. 다행히 손자 [[순조]]가 [[1814년]] 복권시켜주었으나 [[1815년]] 눈을 감고 만다. 순조는 홍씨의 사후 할머니에게 헌경(獻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고종(조선)|고종]]대에 다다르자 사도세자가 장종(莊宗)으로 추존되며 혜경궁 홍씨도 헌경왕후(獻敬王后)로 명예왕비로 추존되었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우자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명예황후로 격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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