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1940년대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국민당 ===== 국민당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탱킹했고 가끔씩 세력이나 확장하며 팀킬을 저지르는 공산당의 뚝배기도 깼다. 대표적으로 항일 전쟁에 제대로 임하지 않는 공산당 신4군을 궤멸시킨 사건이 있다. 얼마 후 미국과 일본 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전선도 아시아-태평양 전선의 일부에 포함되었고, 얼떨결에 미국, 영국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 일본은 양면전선을 맞이하며 전황이 불리해졌고 조금씩 폭주하면서 억지로 중국을 밀어붙였는데, 일본은 물자가 계속 떨어져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전구렴야]]가 [[임팔 전투]]에서 병신짓을 하는 바람에 남중국 전선이 안정되었고 일본의 몽강연합자치정부와 만주국도 붕괴하고 있었으며 결국 일본이 원폭 쳐맞아 미국에 GG를 치고 소련군이 만주로 진주해 일본군이 아예 중국 대륙에 갇혀버리면서 남은 일본군도 괴멸됨과 동시에 [[중일전쟁]]이 종료되었다. 이 결과로 일본은 중국 내 모든 식민지와 타이완을 중국에 뱉어냈고 상대적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진 대만 섬에 국민군이 진주하여 혹시 모를 패전을 대비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국민당은 겨우 일본과 싸워 이겼는데 뒤에서 세력 확장이나 하면서 땡땡이를 치던 공산당이 꿀을 빠는 행태를 보고는 항복한 일본군들에게 공산당에 투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일본군이 본토로 복귀하기 전까지 국민당에 협력하면서 공산당에 대항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국민당 정부와 일본은 훗날 다시 친해질 여지를 남기게 되었다.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은 협상까지 하며 쌍십협정을 맺었으나, 욕심으로 가득한 공산당은 [[국공내전]]을 재차 일으켰고, 초기에는 국민당이 유리했으나 유격전에 특화된 공산당을 섬멸하기가 힘들었고 군벌들도 공산군에 격파당했으며 경제가 작살나 민심이 전부 공산당으로 돌아선 탓에 베이징이 공산군에 점령당하며 전세가 뒤집혔다. 베이징을 수도로 한 북중국은 공산당이, 난징을 수도로 한 남중국은 국민당이 다스리는 구도가 되었으나 1949년 난징까지 점령당한 국민당의 중화민국은 급속도로 쇠퇴했고 상하이, 충칭, 청두 등을 모조리 공산군에게 빼앗기자 대만의 국부군과 내륙의 군소 국민군들과 신장의 국민당에 협력하는 이슬람군만 남게 되었다. 본토를 빼앗긴 국민당 중화민국 수뇌부는 얻은 지 얼마 안 된 신생 영토인 대만으로 [[국부천대]]를 실시하게 되었으며 본토는 공산당이, 대만 섬만 국민당이 지배하는 구도가 확립되어 오늘날의 [[대만]]이 되었다. UN 상임이사국으로써의 지위는 대만으로 정부를 옮긴 중화민국이 게속 갖게 되었다. 한편 이 과정에서 대규모로 귀한 유물들을 대만 섬에 가져갔는데, 훗날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서 파괴되었던 수많은 유물들을 생각하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