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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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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세계 === 레이건 정부의 공산권 압박과 공산주의의 자체적 한계로 이 시기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이 붕괴를 맞이했다. 폴란드에서는 공산당이 몰락하고 노조 출신의 [[레흐 바웬사]]가 민주화를 이루었고 루마니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엘레나 차우셰스쿠]] 부부를 총살하고 민주국가로 전환되었다. ==== 북괴 ==== 공산주의가 점차 몰락해가는 시대 속에서도 김일성이는 혼자서 자신의 권력을 끝없이 강화해나가며 만행을 벌였는데, 1980년대부터는 자기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이다가 자주 망했다. 대표적으로 3대 실책으로 불리는 서해 갑문 설치와 순천 비날론 연합 기업소, 그리고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있었다. 특히 마지막 행사는 주로 공산권이나 제3세계에서 여는 행사를 북한에서 연 것이었는데 이것은 아무런 돈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열심히 돈을 쏟아부어 남한의 성공적인 서울올림픽 준비 및 투자와 대조되었다. 안 그래도 군사비용으로 쓰는 돈이 대다수인데 여기에 돈을 쏟아부어버렸고, 마침 남한에서 민주화 열풍이 좀 심해져서 [[임수경]]이라는 또라이가 [[임수경 방북 사건]]을 일으켰는데 경직된 북한 사회와 대조되는 남한 청년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고 충격받은 북한 사람들이 되려 동요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위상(?)을 알리려고 행사를 준비했다가 되려 북한 전역에 남한의 위상만 똑똑히 각인시켜버렸고 훗날 임수경이 북한처럼 탄광행이나 처형을 당하지 않고 징역 5년을 받는 수준에서 끝나고 가족들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만 되는 수준에서 끝났다는 사실을 북한 사람들이 접하자 북한 사회는 더욱 크게 동요했다. 무엇보다 이 시기부터 탈북자가 급증했고 북한은 1980년대를 시작으로 끝없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이 시기부터 [[김정일]]이라는 작자가 권력 장악을 시도하며 자신의 가족들까지 몰아내고 당 대회에서 여러 직책을 임명받으면서 국가 서열 2위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는 이미 70년대부터 [[기쁨조]]를 조직해 애비인 김일성에게 갖다 바치면서 김일성의 눈을 가리고 실질적인 권력을 본인이 독차지해나가고 있었다. ==== 짱깨 ==== [[흑묘백묘론]]을 내세우며 대외 개방 정책을 펼쳤고 1983년에는 사이가 나빠졌던 소련과도 다시 관계를 회복했다. 1984년에는 [[중영공동선언]]을 발표해 홍콩을 1997년에 되돌려받기로 합의했다. 뭣보다 경제 특구 4개를 시범 지정해 중국 남부 도시들을 키워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통합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공산주의라는 기본 틀을 전제로 한 개혁이었고 독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또한 개혁개방으로 인해 양극화가 심해지고 빈부 격차도 커졌다. 여하튼 개혁개방을 통해 리버럴한 성향을 갖게 된 학생들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안문 등지에서 민주화 요구를 하기 시작했고, 심기가 불편해진 [[덩샤오핑]]은 이들을 강경진압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다가 1989년에 [[후야오방]]이라는 양반이 죽었는데 그는 많은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아오던 인물이었던 탓에 많은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추모를 시작했다. 하지만 1989년 6월 4일 중국인민해방군은 탱크를 밀고 들어와 시위대를 대학살하는 바람에 짱산당 피셜 218명 정도 죽었으나, 실제로는 만명 넘게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과정에서 [[탱크맨]] 같은 영웅들도 나타났다. 여하튼 중국은 무력 진압에 성공했고 당 내의 개혁주의자들을 대거 숙청하면서 다시 권위적인 공산 독재 시대로 회귀했다. 물론 일부 시장 경제는 유지한 채로 말이다. 이후 중국은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사용하며 체제를 유지했고 동유럽의 대거 민주화 열풍에도 휩쓸리지 않은 채 훗날 세계에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거대 독재국가로 자리잡게 된다. ==== 소련 ==== 소련은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였으나 점차 몰락하고 있었다. 마침 아프가니스탄에 세워진 친소 정권이 반소 시위 및 폭동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소련인들이 폭도들에게 사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친소 정권이 쿠데타로 뒤집히면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게 된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지리적으로 천혜의 요새와 같은 나라로 전혀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단기에 끝날 것 같았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무려 8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을 개최했는데 미소 관계가 극악으로 치닫으면서 서구권 국가들이 대거 불참하는 일이 있었다. 공산권 국가들끼리 치룬 이 올림픽은 반쪽짜리 올림픽이라는 평을 받았고 소련은 실제로 큰 타격을 입었다. 1982년에는 소련 제국의 차르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사망했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소련 제국 차르로 즉위했다. 이 시기에는 미국에서 서맨사 스미스라는 급식이 편지를 보내 안드로포프가 답장하고 그 가족을 소련으로 초청한 사건이 있었다. 또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으로 인해 한국과도 사이가 나빠졌고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라는 사람이 컴퓨터 오류로 인한 우발적 미사일 발사를 겨우 막아 핵전쟁을 막아냈다. 1984년 소련 차르인 안드로포프가 사망하고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차르로 즉위했다. 크게 눈에 띄는 사건이나 업적, 실책은 많지 않았고 대신 교육 개혁 작업에 착수했고 중국과 교섭을 시작했으며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불참하면서 해당 올림픽을 제1세계 국가들만의 올림픽으로 만들기도 했다. 물론 제1세계의 경제력이 훨씬 컸기에 소련과 다르게 미국은 큰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1985년 3월 10일 체르넨코가 사망하고 다음날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제국 마지막 차르로 즉위했다. 그의 시대에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로 불리우는 개혁개방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경제 및 정치적 개혁에 실패하고 너무 조급했기 때문에 소련 멸망의 단초를 제공했고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후 이를 수습하는 데에도 실수한 데다가 희생양을 찾아 잘못을 뒤집어씌우기까지 하는 소련 정부의 잘못된 대처 때문에 공산주의 체제의 실패가 더욱 확고해지게 되었다. 1989년에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이 대부분 민주화되면서 공산권도 붕괴를 맞이했고 소련은 이제 해체만을 앞둔 껍데기만 커다란 국가가 되었다. 결국 소련을 몰락시켜버린 그는 훗날 러시아인들에게 옐친과 함께 욕을 덩달아 먹는 신세가 되었다. 반면 유럽에서는 소련 해체와 냉전 종식에 기여했다고 칭찬을 받고 있다. ==== 동독 ==== 동구권 국가들이 하나둘씩 민주화되어가는 추세에서 동독의 공산주의도 더 이상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었고 당시 동독 지도자였던 에리히 호네커는 현실을 부정하며 1989년 동독 수립 4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루는 등 삽질을 했으나 결국 반공 시위가 커지고 그는 물러났다. 이후 에곤 크렌츠가 동독 서기장으로 취임했는데 그는 기존의 억압적인 동독의 분위기를 없애고 점차적 자유 개혁을 이룩하기를 약속했으나 실상은 지켜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갈수록 시위가 거세지자 1989년 11월 9일 여행 일부 자유화 정책을 발표하려고 했는데, 이때 기자가 국경 개방은 언제 할 거냐라고 묻자 당시 정부의 자율화 방침을 전혀 숙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귄터 샤보프스키 총서기가 지연 없이 즉시라고 말해버리는 사고를 치면서 이 소식은 전 세계로 퍼졌다. 결국 동서독 국민들도 이를 접하고 [[베를린 장벽]]을 작살내기 시작했는데 동독 군인들은 이를 막으려 했으나 하도 많은 사람들이 드릴, 해머, 빠따, 불도저, 크레인 등을 들고 달려와 장벽을 작살내는 모습을 보니 여기서 눈치없이 진압했다가는 쳐맞아 죽을 것 같고 자신들의 일이 통일을 방해하는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받아 방치했다. 그리고 베를린 장벽은 이듬해인 1990년 완전히 해체되었다. ==== 베트남 ==== 캄보디아, 중국과 맞다이를 뜨면서 베트남의 경제 상황도 작살났고 이로 인해 수많은 보트피플들이 추가 양산되었다. 이때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 및 글라스노스트 개혁개방 정책이 시행되자 베트남에서도 1986년에 도이모이(베트남 개혁개방)를 추진해 시장 경제를 일부 인정했다. 1989년 캄보디아에서 철수한 후에는 조금씩 자본주의화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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