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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창 준비 === 그런 중에 천조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게 되었는데(여기에 소비에트 CO-mi master 레닌도 동의했다. 1919년 당시에 공산주의가 조선에 막 뿌리를 내리려고 하던 차라서 독립을 주장하던 지식인들은 귀가 2배로 쫑긋했다. 사실 20년대 초반 쯤에는 당시 전세계의 분위기가 민족주의를 긍정하는 여론이 불고 있었다. 거기에 윌슨과 레닌도 힘을 실었던 것.)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고무되어서 움직이는 한편, 국내에서는 고종이 죽었는데 사실 고종이 독살 당한 거 아니냐는 소문이 퍼졌다. 일본 입장에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민중은 좆나게 빨리 고무되어갔다. 이 과정에서 2.8 도쿄 YMCA 독립선언, 만주 독립선언 등의 사건이 뒤따르게 되면서 사태는 이미 총독이 손쓰기에는 무리. 한 구석에서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들은 종교계 인사들로, 기독교, 불교, 대종교, 천도교 등 종교계 지도자 및 지식인들이 손을 잡고 만세 운동을 결의하게 된다. 특히 기독교와 천도교는 '일제'하면 이가 갈릴 대로 갈리는 판이었고 대종교는 이미 대놓고 만주 및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일본에 반항하고 있었다. 거기에 불교와도 연결되면서(유교층은 한용운이 접촉했지만 몇몇 빼면 연대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에는 그래도 유림이 참여하긴 한다.) 민족대표 33인이 결성된다. 대종교는 당연한 소리지만 이미 한 판 한 데다가 접촉 자체가 힘들어 참여하지 않았다. 주요 인사로는 천도교의 손병희,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의 한용운이 있다. 이중에서 운동 당시 모인 것은 29명, 고문으로 순국 1명, 대부분 석방 뒤 망명하고 일부는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국회의원도 났다. (안 모인 4명은 다른 지역에서 시위를 지도하고 있었다.) 이후 세 명은 변절하는데(최린, 박희도, 정춘수) 그 중에서 최린은 교과서에까지 실렸다. 아이러니한 건 운동 계획이 들킬 뻔한 위기를 넘긴 것이 최린이라고 한다. 대한제국 대신니뮤들에게도 궐기를 주창해달라고 접촉해봤으나 당연히 응답은 없었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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