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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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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최용건]]-[[김일성]] 정권 교체의 남한 버전. [[서울의 봄]]을 한순간에 끝장내버린 사건.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중심의 [[하나회]]가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장악한 군의 실권을 바탕으로 정부의 실권마저도 장악한 사건이다. 5월 17일에서 18일로 넘어가는 새벽 0시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5.18 내란'이라고도 부른다. 가끔 병신 틀딱들이 5.18 내란이라는 단어를 보고 '역시 5.18은 폭동이다 이기야' 이 지랄을 하는데, 5.18 내란은 5.17 내란을 가리키는 용어다. 극우 논객들도 5.18 민주화 운동을 비하할 때 폭동이라고 비하하지 내란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전두환 자신의 집권 욕심, 차기 대통령으로의 정권이양 이후 12.12 군사 반란에 대한 규명 시도를 우려한 신군부 내의 불안감 등이 맞물려서 하나회는 정권 장악을 획책하게 되었다. 신군부는 [[서울의 봄|사회의 민주화 기운]]에 편승한 운동권과 당시 최규하 정부의 느린 정치 일정 발표가 맞물린 1980년 3~4월 중의 민주화 요구를 바탕으로 한 시위와 소요를 예측하고 있었고, 이를 억누르기 위해 사전에 상무충정훈련을 동반한 시위 진압을 준비하는 동시에, 언론 통제 등의 여러 공작을 통해 자연스러운 군부의 대두를 골자로 한 시나리오를 준비해 나갔다. 마침내 5월,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의 각 대학가에서 본격적인 민주화 요구 시위가 시작되자 신군부는 암암리에 시위, 소요 진압을 위한 군 병력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북괴 남침설 유포 등이 맞물려서 점차 사회의 분위기는 고조되어 갔고, 심재철 등의 주도로 서울역 회군이 이루어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신군부는 10.26 사태 직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선포되었던 계엄을 1980년 5월 17일 전국 계엄으로 확대하면서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전국 계엄 선포를 함으로써 5월 20일에 계엄 해제, 정치 일정 단축 등을 논의하기로 되어있던 임시국회는 없는 일이 되어버렸고 정치인들과 재야 인사들이 줄줄이 체포되었다. 김종필은 부정축재 등의 혐의로 보안사령부에 구속되었고, 김영삼은 가택연금, 김대중은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었고 사형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날 밤을 기해서 제7공수여단 33, 35대대가 계엄포고 제10호 중 가 항과 다 항을 어겼다고 여긴 전남대, 조선대 등을 장악하기 위해서 이동한다. 전국 대학들에 휴교령이 떨어지고 정문은 계엄군이 경비 서고 출입 통제하고 있어서 운동권들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수 탈 때, 정문 앞에서 모여서 시위한다는 발상을 한 대학이 전남대, 조선대 두 곳뿐이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휴교령이 떨어지면 아싸 개꿀 하면서 그냥 집에 있겠지, 누가 굳이 또 학교를 바득바득 기어들어가려고 하겠냐? 그걸 전남대와 조선대 대학생들은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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