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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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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사회주의}} {{하지마}} {{원흉}} {{폭동}} {{극혐}} [[1991년]] [[8월 19일]] 소련 공산당의 보수파들이 연합하여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반대해 쿠데타를 일으킨 사건이다. 하지만 쿠데타는 이틀만에 실패하고 [[벨라베자 조약]]을 체결하게 만들어 사실상 소련을 해체시키는데 공헌한 사건이다. == 배경 == 1985년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으로 집권하게 되고 농부시절에서 쭉 구상해오던 [[페레스트로이카]] 및 [[글라스노스트]]의 개념을 구체화 시키고 실현시키려고 했었다. 이때 고르바초프는 이전 브레즈네프와 달리 동유럽이 민주화되는 과정에서도 군대를 보내 진압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폴란드를 시작으로 소련의 위성국들이 민주화가 되기 시작한다. 이 동유럽 혁명이 퍼지고 퍼져, 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 침공|독일이]] [[프랑스 침공|날뛰던]] [[영국 본토 항공전|때를]] 노린 스탈린에 의해 소련에 강제합병된 발트 3국을 중심으로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자는 요구가 일어나게 된다. 당연히도 이러한 움직임에 소련 보수파<ref>흔히 생각하는 우익의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소련 체제에 대해 보수적인, 즉 당시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영 좋지 않게 보던 극좌파들을 의미한다.</ref> 내에서 반발이 심해졌다. ==진행== 1991년 발트 3국이 독립 선언을 하고 일부 지역에서 민족주의로 인한 무력 사태가 빚어지자 소련 지도부는 기존 체제론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이후 [[겐냐디 야나예프]] 등 보수파 지도층들은 고르바초프가 별장에 가있을 당시 쳐들어와 연금했다. 하지만 모스크바 시민들은 쿠데타에 강렬히 저항했고, 당시 탱크 위에 올라타서 총파업을 하자고 호소하던 [[보리스 옐친]]은 이로 인해 시민들 사이에서 급부상하게 된다. [[1991년]] [[8월 21일]] 이 쿠데타는 최종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결과== 비록 쿠데타는 진압되었지만, 이후 우크라이나를 시작으로 하나하나 소련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며 고르바초프의 [[주권국가연합]] 계획은 완전히 망가지게 되고, 이는 결국 소련 해체라는 결과를 낳는다. 고르바초프는 실권을 완전히 잃게 되고, 더 강경한 급진파던 옐친이 권력을 잡게 되며, 이후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이 되지만 무리한 급진 개혁으로 인해 러시아 국민들은 꽤 심한 고통에 시달린다. 쿠데타 주역 대부분은 사면되어 천수를 누리다 죽게 된다. [[김영삼|엥]] [[전두환|이]][[노태우|거]] [[12.12 사태|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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