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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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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界郡

해방직후 한반도에서 두번째로 넓은 군이었다. 오죽했냐면 당시 군역이 5,403.63㎢정도인데 지금은 울산크기정도의 시군 6개로 쪼개졌다.

예로부터 강계의 미녀들이 유명했다지만... 혹부리, 뽀그리, 꿀꿀이를 거치면서 대대적으로 기쁨조에 끌려간 결과 예전보다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지금도 북한에서 미녀로 유명한 고장이라고 한다.

연혁[편집]

공귀동과 풍룡동에서 민무늬토기, 흑도, 반달돌칼, 돌도끼, 청공과가 발견되었고 노남동에서 명도전이 나온거랑 강건너에 고구려 국내성이 있었고 동천왕관구검에게 털린뒤 수도를 옮긴 평양성(平襄城)이 여기로 추정된다는 것말고는 쓸거없다.

발해 서경압록부 환주에 속했다가 발해멸망이후 여진족이 차지하게 되었다.

고려말기 공민왕이 북진하면서 수복되었고 1361년 독로강만호를 설치하면서 평안도에 편입되었다. 1369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꿔 만호부를 설치한다음 지방군으로 진변(鎭邊)ㆍ진성(鎭成)ㆍ진안(鎭安)ㆍ진녕(鎭寧)의 사군(軍)을 두고 상부천호가 이군을 관리하게 했다.

1401년 입석(立石)과 등이언(等伊彦)을 스까해서 석주(石州)라 불렀다가 여진족 방어를 위한 군사요충지로 선정되어 1403년 강계부로 고쳐졌다. 1413년 각도의 단부(單府)를 도호부로 개칭하면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433년 5월에 판관을 두었다. 1442년 3월 도절제사영이 영변군에서 본군으로 옮겨졌다가 1446년 1월 원상복귀되었다. 1449년 5월과 1462년 7월 순으로 문,무반토관이 임명되었고 1453년 도절제사영이 혁파되었다.

세조가 방어하기 힘들다고 꿀땅인 4군을 폐지하자 우예군과 자성군의 주민들을 강계로 강제이주시켰고 1457년 10월 익군을 파하고 이산, 위원군, 자성군을 포함하는 강계진을 두었다. 1555년 부사 박수린이 처음 도성을 쌓았고 강계진외에도 벌등진, 고산진, 만포진, 평남진, 신광진이 있었다.

1623년 판관이 없어지고 1692년 우방어사가 파견되서 강계도호부사는 강변우방어사를 겸하게 되었고 뒤에는 강변우방어사대신 청북우방어사와 강계진병마첨절제사가 추가되었다.

병인양요시기 양헌수가 본군출신 포수 500명을 전쟁에 동원했고 1895년 23부제를 실시하면서 후창군, 자성군, 위원군, 초산군, 희천군을 관할하는 강계부의 중심지가 되었다. 1년만에 23부제가 없어지고 13도제가 행해지자 강계군으로 바뀌어 평안북도에 속했다.

일본 제국만주사변이후 희천군과 함께 다양한 천연자원이 개발되고 공장이 오지게 깔리면서 공업화되었고 강변이다보니 독립군 vs 좆본군의 주요 전장이 되곤했다.

해방직후 소련군정에서 자강도가 분리되자 자강도의 중심지가 되었고 6.25 전쟁북괴군인천상륙작전이후 좆발리고 평양 탈환으로 평양까지 털리자 강계군의 지하에 임시수도를 두게 되었다. 때문에 지금도 강계에는 공격을 대비한 지하공장들과 지하 만리장성들이 많다고 한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을 하면서 시중군, 장강군, 전천군, 만포군, 용림군등 울산시정도만한크기의 군들로 공중분해되면서 면적이 많이 쪼그라들었다.

6.25 전쟁 당시 국군이 단 한 번도 점령하지 못한 곳이다. 안티테제인 부산광역시6.25 전쟁 당시 북한군이 단 한 번도 점령하지 못한 곳이다.

지금은 혜산군, 무산군만큼은 아니지만 강변인데다 인구도 많아서 탈북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읍면[편집]

인구는 1944년 기준이다.

  • 강계읍 : 인구 3만81명. 1914년 동면과 서면을 스까해 만든 강계면을 1931년 읍으로 승격하면서 만들어졌다. 강계읍성또한 본읍에 있으며 인풍루는 강계읍성의 부속건물이다.
  • 만포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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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2만2421명. 1669년 설치된 만포진(滿浦鎭)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조선후기에는 외귀방(外貴坊), 1867년 신설된 문옥면(文玉面)이었다가 만포선이 깔리자 만포읍으로 개명되었다. 1944년 5월 10일 자성군 삼풍면 운봉동을 흡수해서 문흥동, 문악동, 옥동, 운봉동의 4개동만 있는 작은 크기가 작은 읍이 되었다. 남쪽으로 646m의 사암봉, 503m의 삼지봉, 658m의 감토봉등 높은 산들이 떼지어있어서 사실상 독립된 생활권이다. 강건너에 바로 집안이 있어 문악동에 고구려시대의 고분이 있고 수릉정, 세검정이 있다. 북괴치하인 1949년 시중면과 함께 만포군이 되었다가 1952년 시중면이 시중군으로 분리되어 외귀면, 고산면, 이서면의 일부와 만포읍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1961년 시로 승격되었다. 2018년 여름에는 40도까지 올라가는 불지옥이 되었다.
  • 간북면 : 인구 9,022명. 1909년이전까지 성간방(城干坊)에 속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고원지대인지라 소속동도 남동, 북동밖에 없는 개깡촌이었다. 1949년 북괴치하에서 여러 리로 분리되었고 1952년 성간군으로 분리되었다.
  • 고산면 : 인구 1만2180명. 1669년 지금의 고산진성터에 세워진 고산진(高山鎭)에서 시작되었다. 1894년 고산방이라 했다가 1909년 고산면이 되었다. 사실상 강계그자체인 독로강이 본면남쪽 경계지대에서 심한 감입곡류를 만들면서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북괴치하인 1952년 만포군으로 옮겨져서 지금은 만포시에 속해있다.
  • 곡하면 : 인구 2,341명. 압록강과 독로강이 합쳐지는 지점에 있는 면인데 동쪽에는 십이집산, 호암산, 자북산, 남쪽에는 대웅산, 서쪽에는 무학산이 있어서 철저히 고립되어있다. 인제원이라고 이쁜 처녀인신공양했던 제사터가 있는데.... 알지? 어쩔 수 없어. 북괴치하인 1952년에 시중군으로 옮겨졌다.
  • 공북면 : 인구 1만5781명. 1694년 마마해진이 세워진 곳이다. 본래 5개동만 있었지만 소련군정시기 여러 동이 신설되었고 1949년 12월 장강군이 신설되면서 장강군이 옮겨졌다. 1952년 인가해리, 두흥리, 공귀리, 공인리, 향로리가 강계시에, 향하리, 장항리, 승방리, 아득리, 문암리가 장간군에, 부지리가 성간군에 분리되면서 공중분해되었다. 독로강의 지류인 남천수계다.
  • 성간면 : 인구 1만4619명. 간북천이 이룬 좁고 긴 충적평야로 생긴 농업지대로 북괴치하인 1949년 1월 전천군으로 분리되었다가 1952년에 성간군이 신설되자 성간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 시중면 : 인구 8,851명. 1404년 금천관(錦川館)이 세워졌던 곳으로 1912년 시상면과 시하면이 스까되어 만들어졌다. 북괴치하인 1949년 만포군으로 분리되었다가 1952년 면전체가 시중군으로 편입되었다.
  • 어뢰면 : 인구 7,941명. 북괴에서 3대폭포중 하나로 이름난 2단폭포인 용수덕폭포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북괴치하인 1952년 시중군으로 편입되었다.

아웃풋[편집]

  • 김준엽
  • 이송 - 탈북자출신 배우로 폴란드로 간 아이들에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