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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

반도에서 재난이 일어날 경우, 위정자들은 눈 먼 장님이 되고 백성들만 좆된다는 점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경신대기근은 조선 현종의 재위 기간인 1670년(경술년)과 1671년(신해년)에 걸쳐서 있었던 대기근이다. 경신년이어서 경신대기근이 아니다. 경신년은 서기로 1680년이다.

조선 500년 역사상, 가장 큰 기근이었으며 가뭄과, 대홍수, 냉해 등이 반복되어 조선 8도 전체의 흉작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조선 인구가 1300만 명 정도였는데 이중 자연사를 제외한 30~40만 명이 직접적으로 사망했다.

무려 임진왜란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갈려나간 재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선지 역사 교과서에는 이 얘기가 빠져있고, 심지어 어떤 교과서에는 현종은 평화로운 시대였다고 개소리를 한다. 무슨 의도인지...

불가피한 자연재난일 뿐이었다?[편집]

혹자(급식충 국뽕들)는 경신대기근이 1600년대 후반, 기후변화로 인한 전세계적 환경 피해이며 따라서 조선이 당한 재난이 불가피한 점이 없었다고 항변하지만 같은 시기 중국은 청나라 5대 황제 옹정제의 통치 하에서 번영을 구가하였다. 그리고 옆나라 일본의 농부들은 도쿠가와 막부 체제에서 도시 상인을 단단히 옭아매던 세금과 동업 조합이 자유로워지고 농민에 대한 대우가 좋아져 농업 생산량이 급증했고 상업 또한 활발하여 이미 조선의 국력을 수배 앞서는 상황이었으며 이에 따라, 왜구들이 급감하게 되었다. 물론 같은 농촌이더라도 지역 간 편차는 있었다.

또한 위정자들은 수세기에 걸쳐온 연합 파벌 정치, 노론과 남인 간의 무의미한 예송논쟁 등 정권 욕심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백성의 생활 안정과 대기근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은커녕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경신대기근은 조선에서 발생한 벼농사 위주의 단작 농업 방식이 수전방식의 벼농사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단기적 대규모 아사 사건이며 위정자들의 무능력한 통치에 따른 '조선 특유의 인명 경시, 백성의 삶은 관심이 없는 위정자들의 통치' 등의 이유로 발생한 인재(人災)의 문제이지, 지구촌 기후 변화에 따른 전세계적 자연 재해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자연 재해다[편집]

사실 냉해 + 가뭄 + 홍수 + 우박 + 병충해 + 그 외 여러 자연 재해가 섞여있는 이 총체적 난국에선 무능한 놈이든 유능한 놈이든지 똑같이 말아먹게 될 거다.

문제 이 당시 전국 8도 대기근으로 인해 농산물 감소가 심했다. 구휼책 또한 식량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위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구휼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쌓은 재정이 거의 없고 청나라로부터 쌀 수입 하는 것도 체면 차리느라 반대하여 사태를 키운 감이 없진 않지만 이 기근 동안에는 정확히 현종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봐야 한다.

기해예송과 갑인예송 사이에 껴있어서, 그리고 또한 환국의 시발점이라는 점과 밑에 기록에 3번 정도 나온 것처럼 조정 상태가 정상인 건 아니었지만 자연 재해 스케일이 꽤 커서 현종 때 조정이 경신대기근에 한해서는 문제가 없다고 보여지는 중.

요약하면 세종대왕이었다면 무리 없이 해결했을 기근을 해결 못 했으면 가루가 될 때까지 까여야 하겠지만 이 정도 기근은 세종대왕이더라도 해결하는데 피눈물을 흘릴 정도이므로 현종은 당연히 수습 불가. 요런 식이다.

급식충 국뽕들이 하는 전형적 평가에 대한 반박 Ⅱ[편집]

경신대기근은 조선 정부의 미흡한 대응이 재해를 확대한 부분은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다. 대책 없는 이앙법으로의 전환이었다. 조선 후기 이앙법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저수지, 보 등의 수리 시설은 충분히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1인당 토지 면적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가뭄, 자연재해 피해는 클지 모르나 노동력이 절감될 수 있는 이앙법은 지주 및 농민 입장에서도 꽤 매력적이었고 지주 층이 많고 1인당 토지면적이 넓은 삼남 지방에서 이러한 한탕주의식 이앙법이 확대되고 있었다.

이를 반증 하듯이, 경신대기근 때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곳은 삼남 지방이었으며 직파법과 밭농사 위주였던 경기 북부 지방, 함경 평안도 지방은 그렇게 치명적인 피해가 없었다.

ㄴ 요동도 기근이 돌았다는데 왜 함경, 평안도는 피해가 없냐?

냉해나, 가뭄은 흔한 기후 현상이고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수도 없이 발생했다.

만약 이 시대에 직파법이 유지되었거나, 이앙법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충분한 수리 시설, 농민들의 자가 노력 (대기근 이후, 농민들은 두레 및 품앗이 등의 노동력 관리법, 민간 비용의 보 건설 등 각 향촌 단위별로 조직) 혹은 묻지마 한탕주의식 이앙법이 17세기에 유행을 타지 않았다면 경신대기근이 이렇게 큰 피해는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17세기 후반에 이르게 되면 농민은 벼 경종법으로 이앙법을 전면적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당시 이미 이앙법이 풍속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갑자기 금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었고 수리 시설도 없이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 논에 물 대기 농법으로 폭탄 돌리기를 하는 와중에 재해를 만나 더더욱 망하게 된 것이다.

즉, 요약하면 저수지와 보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농민들의 한탕주의식 벼농사가 전국적으로 유행을 타고 있었고, 그것이 재해를 부풀렸다. 그리고 조선 정부의 벙찐 대응까지 겹쳐서 대량 아사와 같은 화를 더 불러온 것이다.

ㄴ 그말대로면 보리철에는 기근이 없어야지 미친놈아

세종대왕이 있었다면... 타령하는 국뽕충이 또 보이는데 시발, 세종대왕이 현종 때 살았으면 애초에 저수지 지어서 가뭄, 홍수에 좆털리지 않았거나 구휼미는 잘 풀어서 굶기지는 않았겠지.

이 사건 이후로 현종은 바로 '제언사'라는 저수지, 보 관리 관청을 신청하고 국가적으로 수리 시설을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이앙법을 쓰면 농사에는 편하지만 모내기 철에 가뭄을 만나면 크게 실농하므로 국가에서 권장하기 어려운 일이다. (현종실록)

당시 기록[편집]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인가.
- 《현종개수실록 22권》 1670년 5월 2일, 2번째 기사


이틀 뒤인 1월 3일에는 지난 해(1669년) 12월 29일에 평안도에 흰 무지개가 뜨고 삼중 햇무리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1월 11일에 또 달무리가 생겨 목성과 달을 동시에 둘렀으며, 2월 9일에 달무리가 지고, 2월 12일에는 햇무리가 졌으며, 2월 14일에 또 다시 햇무리가 졌다.

1월 13일에는 지난 9일에 황해도에 우레가 쳤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런 흔치 않은 현상을 '불길한 징조'로 여긴 것은 단순한 중세적 미신일 수도 있지만 무지개와 무리가 며칠 동안 연속적으로 보였다는 것은 그 이전에 많은 비가 오랫동안 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과 황해도에서 거의 동시에 우레가 발생한 것 역시 광범위한 호우가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햇무리는 3월 11일에 또다시 졌다.

조선 정부의 대응[편집]

조선 정부 당국은 오랜 당파 싸움에 한창이었으며, 사실상 대기근에 대한 전국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고작 한성 감옥에 잡혀 있는 백성 중 일부의 사면령이나, 지방관청 관리에 개인적인 조치, 하늘에 대한 기우제 정도의 대책이었다.

ㄴ 1차 예송논쟁은 10년 전 일이고 2차 예송논쟁은 대기근 끝나고 2년후다.

ㄴ 백년후에 일본에서 대기근이 발생했을때 구휼자체가 없었다. 조선은 제주목사가 구휼미 떨어지니까 본토에 구휼요청까지 할정돈데 뭔 기우제 정도의 대책소릴 하냐

경술년 3월 경기도에서 쌀 8천 석을 구휼하였는데 모두 썩었으며 그마저도 겨와 모래 뿐인 쌀이라서 백성들이 분노하였다.

다음날 남인 당수 허적이 산골에 둔전을 만들고 유이민들을 모아 군부대를 만들 것을 건의했지만 국가 재정이 없었으며, 왕이 관심도 보이지 않아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3월 20일엔 강화 유수 김휘가 갑진년 이전의 환곡을 탕감해 줄 것을 임금에게 청했다. 하지만 임금은 거부하였다. 다른 고을에서도 이를 본 보기 삼아, 세금이 줄어든다는 이유였다.

5월까지 전국적으로 대가뭄이 발생하였고, 5월 이후 장마철에 접어들면서 대폭우, 추수철에는 냉해가 발생하였으나, 식량 상황과 관련 없는 엉뚱한 대사면령만 반복해서 발표했다. 한양에서만 472명을 모두 석방했는데, 상당 부분 비리를 저지르거나, 세금을 포탈한 양반층 자제, 관리 등이었다. 같은 해 북방으로 귀양 간 이가 너무 많으니 따뜻한 남방으로 옮기라고 명했다.

귀양은 양반만 가는 것이므로 이 시기 재취감을 받아 풀려나거나, 귀양 고을이 바뀌거나, 수형이 줄어든 수형자는 태반이 양반이었다.

가뭄이 끝나고 폭풍우와 장마가 시작되었는데, 이 또한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6월, 대사헌 김수항과 여러 간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여러 신하가 진언했는데, 조정에서는 하나도 받아 드리지 않았다.
7월  전라 감사가 도내에 굶주린 사람이 많다고 하자 7월 13일, 또다시 대대적인 사면령을 반포하여 범죄율이 급증하였다.

이 대기근 와중에 1670년 산간 지방의 유민을 단속하여 호적에 강제 편성하고, 1672년 국경 지대의 범월인(犯越人)을 처벌하는 법을 시행했다.

호구 장악을 위해 오가작통사목(五家作統事目)을 제정하여, 오가에 소속된 백성 중 유랑민이 발생할 경우 주변 이웃, 친지에게 환곡 및 조세를 징수하였는데, 이를 '인징' 및 '족징'이라고 조상님들은 불렀다.

그리고 수십 년 후 바다 건너 동조선에서도 비슷한 레베루의 대기근이 발생한다.

결론[편집]

경신대기근의 원인으로 잘못 지목되고 있는 소빙하기는 13세기 초부터 17세기 후반까지 장기간에 걸친 현상이며 1560년, 1750년, 1850년쯤에 극지방의 빙하가 최대치로 보고되어 있다.

경신대기근은 조선 현종 대에 경술년(1670)과 신해년(1671)에 조선삼남지방에서만 집중 발생하였고 소빙하기 최대치였던 시기와 맞지도 않으며 직파법이 유행했던 황해도 이북 지방은 기온이 더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큰 피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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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대기근의 원인은 전지구적 소빙하기 따위의 영향이 아니라 17세기 후반 삼남 지방에서 수전농법으로 한탕주의식 벼농사가 확대되다가 재해를 만나 크게 말아먹은 결과다.

ㄴ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농법이 잘못된 건 사실이지만 엄연히 소빙하기의 여파와 겹쳐서 터진 일인데 뭔 헛소리냐 ㅋㅋㅋㅋㅋ 경신대기근은 명백히 자연 재해다. 중세시대 분위기가 끝나가는 17세기 유럽에서 왜 미개한 마녀사냥이 판쳤게? 유럽은 이 자연 재해 때문에 냉해를 입어서 이를 마녀 탓으로 몰고 애꿎은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리고 농사법 바꾸는 게 무슨 쉬운 방법인 줄로 아는데, 조선이 행정력이 아무리 좋아도 전국을 이앙법으로 바꾸기에는 조선의 행정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학계에서도 경신대기근은 자연 재해라는 게 정설이다. 실제로 유럽이나 중국에도 냉해 때문에 농사를 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