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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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황조 가운데 이 관우를 뜻한다.

관우에 대한 평가[편집]

관우에 대한 평가다.

정욱 : 관우는 혼자서 일만명과 싸워도 이긴다.

주유 : 유비는 용맹한 영중의 자태가 있고, 관우와 장비같이 곰같고 범같은 장수들을 가지고 있어, 결고 오래도안 굽히면서 남을 위해서 쓰여줄 자가 아닙니다.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론, 가장 좋은 계책은 유비를 옮겨 오(吳)에 두면서, 그를 위해서 성대하게 궁실을 짓고 미녀와 완상(玩賞)물을 많이 두어 그의 이목을 즐겁게 해주고, 관우 장비 이 두사람을 나눠 각자 한 곳에 두어, 주유 저 같은 자로 이들을 얻어 함께 싸우게 한다면, 대사(大事)는 아마 정해질 것입니다. 지금 땅을 함부로 나눠줘 그들의 대업을 세우는데 도와주고, 이 세 사람을 모아 모두 변방에 두신다면, 교룡(蛟龍)이 구름과 비를 얻어 끝내는 못속의 한갓 물건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유엽 : 관우가 유비를 돕는데 유비가 뭐를 못하겠느냐?

곽가 : 관우는 충분히 일만을 당한다

제갈량 : 마초가 쎄긴한데 관우한테는 안된다

ㄴ 이 말을 듣고 관우는 미친듯이 히히덕거리며 빈객들에게 자랑질했다.

여몽 : 관우 상대로 남긴 말이 꽤 많다.

'우리가 양양을 얻고 남군을 얻으면 관우에게 의지할게 뭐가 있냐? 관우는 신하 주제에 광패하게 군다. 하루라도 빨리 없애야 한다.' - 손권에게 한 말

'관우는 평소 용맹하여 그를 적대하는 것은 어렵다. 게다가 그는 벌써 형주를 점거하고 은혜와 신의를 대대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아울러 원래 공로가 있으며 담력과 기세가 성대하여 도모하는 일은 쉽지 않다.' - 육손에게 한 말

'그렇지 않아도 힘은 임무를 맡으셨는데, 그곳도 게다가 관우와 인접한 곳으로 말입니다. 관우는 워낙 출중하기도 하거니와 학문을 좋아해, 춘추좌씨전을 읽어, 거의 전부를 입으로 줄줄 외운다는데, 그런데 그는 강직하고 웅대한 기백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한편으로 자부심이 매우 강한 성격으로, 다른 사람들 위에 서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금 관우와 마주보게 되었으니까, 간단하건 복잡하든 뭔가를 준비해서 그를 맞설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 - 노숙에게 한 말

그리고 관우를 안심시키기 위해 겉으로는 관우와 친하게 친한 척을 함. 한편 관우는 이를 경계함.

감녕 : 관우는 내가 무서워서 강을 못 건넌다.

서황 : 이것은 나라의 일이오.

ㄴ 기록보면 사적인 이야기하다 정색빨고 이소리 한거라 좀 애매함

진수 : 평한다.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범 같은 신하이었다. 관우는 조공에게 힘써 보답하고 장비는 의로써 엄안을 놓아주었으니 아울러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관우는 굳세고 자부심이 강하고 장비는 난폭하고 은혜롭지 않하여 자신의 단점으로써 패망하게 되었으니 이치의 상례로다.

연의의 일기토들이 대부분 뻥인데 관우가 안량을 베어 죽인건 정사에도 적혀있는 팩트다. 안량 베어죽이기 전부터 장비와 함께 이미 만인지적의 용장으로 평가받았으니, 아마 유비가 서주로 가기 전부터 이미 여러 군공을 세웠던 걸로 보인다.

관우 초기 생애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흙수저 출신이었던 걸로 추측되며, 연의나 민간전승에는 고향의 악덕관리를 때려죽이고 도망쳤다가 유비를 만난걸로 묘사된다.

여하튼 똥수저 출신이어서 그런지 같은 흙수저들에게는 잘 대해줬지만, 귀족들이나 사대부들을 존나 싫어했다. 사대부들은 공경하지만 소인배들은 멸시하고 잔혹하게 대했던 장비와는 대조되는 부분.

실제 정사에서 장비는 용맹하면서도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실제 관우와 장비는 연의와는 정반대로 관우가 성격이 불같은 돌격대장이고 장비가 엄근진한 문무 겸비의 지장이었을 것이다.

물론 지휘관으로의 자질도 제법 있었던 걸로 보인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했던 유비가 형주를 관우에게 맡기고 입촉하지도 않았을 거고, 진짜 힘만 쎈 빡대가리였다면 위나 오의 명사들이 관우를 두려워하고 경계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형주공방전에서는 위나라 최고의 장수 중 하나였던 조인을 코너로 몰아가기까지 했으니 지휘관으로도 ㅍㅌㅊ 이상은 쳤던 것으로 보인다.

시호[편집]

촉한에서 관우의 시호는 장목후(장무후라고 해도 된다)인데 송나라 때부터 갑자기 왕의 시호가 붙기 시작하더니 명나라때는 협천호국충의대제라는 식으로 황제 칭호까지 붙기 시작한다. 이후 청나라에 들어서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翊讚宣德關聖大帝)는 최종 시호가 붙었으며 증조부는 광소왕(光昭王)으로, 조부는 유창왕(裕昌王)으로, 부친은 성충왕(成忠王)으로 다시 추존되었다. 이쯤되면 자식 빨도 이만한 자식 빨이 없을듯.

청나라 옹정제 때는 아예 전국 각지에 관묘를 세울 것을 지시해서 공자의 제사와 같이 본다, 가을에 성대히 문무백관이 참석한 가운데 황제가 직접 제사를 행하고 관우를 주신으로 국가적인 제사가 행해지기 시작했다. 이쯤되면 관우가 뭘했다고 공자랑 동급 취급 받는지 의문이다.

솔직히 아닌말로 진짜 군신으로 추앙받아도 하등 이상할것이 없는 조선의 충무공 이순신도 추증해서 겨우 영의정 붙여 줬는데 관우는 뭘 했다고 관성대제라고 불린단 말인가. 그의 주군 유비나 같이 묶여서 툭하면 까이는 제갈량도 저런 엄청 휘황찬란한 시호를 받진 못했다. 현대 인터넷의 관까 추세는 이런 역대 중국왕조들의 관우 신격화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된 것일수도 있다. 까놓고 삼국지연의에서 공적이 많이 부풀려진 장수중 하나가 관우이기도 하고.

ㄴ당연히 조조 밑에 있다가 유비에게 돌아간 충성심(사실 똥아시아의 유교 탈레반들이 노예 근성을 좋게 포장한 단어) 때문이다. 조조가 여자 안 줘서 삐져가지고 그랬다는 얘기도 있지만 조조 밑에 있었으면 이쁜 여자들 잔뜩 끼고 광란의 파티 벌일 수 있을텐데 고작 그거갖고 유비한테 돌아가 개고생을 했을까. 아무튼 관우가 장군으로서 까이는건 반박불가지만 충신(노예)인건 맞다. 그러니까 황제들도 관우 띄워주며 신하들한테 네들도 관우같은 충성심 좀 가져보라며 노예근성 교육 시킨거다. 네들도 만약 황제 됐는데 관우처럼 충성 바치는 신하 있으면 싫겠냐.

ㄴ근데 내가 위에서 충성심을 노예근성 포장한 단어라고 깠는데 "그럼 이순신 장군님도 왜군에게 붙어 출세할 수 있었는데 계속 자신을 갈궈댄 조선에 충성을 했으니 노예근성이냐"라고 반박할까봐 미리 말한다. 유비는 '군벌'이고 조선은 '나라'다. 이순신 장군님은 선조 새끼가 아니라 조선에 충성한거다. 위의 황제 새끼들은 자기한테 충성하는 노예가 되라고 관우 띄워준거고. 좋은 의미로 충성심이란 단어를 사용하면 갓순신 장군님이야말로 관우보다 더한 충신이다.

ㄴ갓갓갓의 충성심이야 더 말할 필요가? 그런데 유비도 서촉 들러가고 한중왕 드립치고 왕이 되고 황제가 됨, 즉 이렇게 따지면 관우는 개국공신이란 거지. 사실 따지고면 개국초에 군벌아닌 집단도 있냐, 위촉오 다 그런점에선 같다, 왕건만해도 송악의 유력호죽 출신이고, 갓갓갓이 충성하신 조선왕조도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면 몽골에 투항해 세력을 키우던 동북면 군벌이나 매한가지 아님?그런 식으로 말하면 모든 개국공신들은 노예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밖엔 안된다. 심지어 킹세종의 아버지 이방원은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담면서 조선왕조 세운 공신 아니냐? 유비가 나라를 세우지 못 했다면 야 그렇수도 있겠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촉한이 나라가 아니라고 할 순없다.

ㄴ그리고 전제군주제 사회에서 왕이 심각한 잘못을 저질로 하늘과 백성에게 버림 받지 않는한 신하들은 왕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왕이라는게 '그 나라'를 만든 조종조와 사직을 대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대에 사는 민주주의 공화국의 시민이라 당시의 이런 믿음을 질 모르지만 갓갓갓은 왕이 심각한 하드트롤러임에도 왕, 조선조정. 백성들에게 모두 충심릏 바친인물이다. 전제군주제에선 결국 충이라는 단어 사용이 이렇다, 괜히 선조의 하드트롤링 중 하나인 명나라 도주가 신하들에게 까인게 아니다. 의주 넘어서 중극으로 런하려 힐때 이산해나 유성룡이 '장난합니까? 시발 왕이 나라의 어버이 인데 어버이가 자식을 버려요? 여기서 왕노릇하기 진짜 싫으신가 보죠? 압록강 건너면 닌 왕 아님. 정 갈거면 세자한테 양위하고 가시죠?'이런 말이 나올랑 말랑해서 선조가 그만두었다. 전제군주제에서 왕의 위상이 이렇다는 거다.

요즘 얼치기 역사강사들(특히 설 뭐시기)이 말하는 것 줌에 이순신이 선조를 충심을 섬기자 않았다 운운하고 이순신이 "무능한 왕조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 싸웠다"는 주장도 나오는데, 이는 상당히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이다. 여러 사료에서 볼 때, 이순신은 선비로서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를 다하는 유교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 그렇다고 백성을 위해 싸우지않았다는 말도 맞는 말은 아니다. 충무공은 최전방에서 전장의 참혹함을 실제로 느낀 분이고 이 전쟁에 희생되어가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을 다한다. 피난민들을 모두 받아들여 그들이 안전하게 살아 갈 수 있도록 목민관으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했다. 따라서 충이라는 단어를 포장해서 '임금에게 충성하지 않는 충'이란 소릴 갓갓갓이 들었으면 대노할 소리다.

본디 원래 충(忠)이라는 말의 뜻은 어떤 일에 있어서 끝까지 성심을 다라는 마음을 뜻하며 꼬한 '올곧은 마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란 뜻이었다. 관우고 이순신이고 자기가 믿는 가치를 위해 성심을 다한 올곧은 마음으로 군주를 섬겼다고 보는것이 맞다. 그리고 관유가 신이된건 산시성 소금장수들이 저신들이 믿던 관우신앙을 돌앋니며 전국에 전파한된 것도 있는데 소위 위정자들이 이런 풍토에다가 도가적 성향이 강한 태공망 여상대신 유가적 성황이 강한 관우로 바꾼 이유도 있었다. 즉, 원래 백성들에게 퍼진 관우 신앙을 국가가 정책적으로 이용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그리고 유교적 충을 단순히 왕의 말만 듣는 딸랑이가 되라는게 아니다. 관우의 강직한 성품을 본받아 임금이 잘못한다면 그걸 목숨을 걸고서랃 지적할줄 알아야 한다는것 역시 충이다.

우리나라 경우엔 임진왜란 당시 쪽바리를 물리쳐줬다하여 관제묘가 몇 개 세워져 있는데 가지 마라. 중국인들밖에 없다.

중국에서 관우는 전쟁의 신을 비롯하여 부+복의 신으로 추앙받고 아예 관우라고 불리지도 않고 관공으로만 불린다.

이 관공신앙이 아니었다면 관우의 고향인 윈청 시는 서부의 깡촌 1밖에 안됬을지도 모른다.

근데 관우가 왕, 진군 소리 붙은건 이미 송나라때부터였고 삼국지연의는 원말명초 소설이다. 뭐든 삼국지연의, 나관중 탓으로 돌리면 편하긴 하겠지. 연의 탓, 나관중 탓부터 하는 새끼들은 연의 이전에 나왔던 삼국지평화 같은 거 보면 거품물고 뒤집어질 듯.

ㄴ 근데 위쪽 어디를 찾아봐도 관우가 신이 된 건 전부 삼국지연의 때문이다! 나관중 OUT! 이라는 내용은 없고 그냥 역사적으로 왜 관우는 신까지 된거냐 정도인데 넌 왜 갑자기 쉐도우 복싱하고 있음? ㄴ근데 이순신도 나중에 왕이 인정하고 제사차려줄정도로 대우받고 무속에서 전쟁의신으로 모시지 않음? 후대에 박문수가 이순신만큼 못한다고 까이고 정조가 엄청 빨아주잖이?게다가 숙종이 고맙다고 엄청하는데

관우 그는 누구인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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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장잉의손.jpg 장잉정신이 돋보이는 글입니다.
얼마나 할 짓이 없었으면 이런 일을 했을까 하며 부탁을 랄랄치는 글입니다.
너 이새끼 화이팅

사실 이게 관우의 본모습이다. ㅅㅂ 여몽 어케죽였노 시발련ㄴ아

저 객관적인 모습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관빠, 관까들은 그냥 관우전, 여몽전, 감녕전에서 인용된 내용을 주로 하는, 물론 노잼인 이하의 내용을 보자.

초기 기록[편집]

관우의 자(字)는 운장(雲長)으로 원래의 자는 장생(長生)이었으며, 하동(河東) 해현(解縣) 사람이었지만 탁군으로 도망하여 망명했다. 선주(先主:유비)가 향리(鄕里)에서 무리를 모았을때 관우는 장비와 함께 이를 도왔다.

선주(先主)가 평원상(平原相)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하여 부곡(部曲)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선주(先主)는 잠을 잘 때에도 두 사람과 침상(寢牀)을 함께 했으며, 그 은혜는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관우와 장비는 여려 사람이 모여 앉아있는 자리에서도 하루종일 선주(先主)를 모시고 서 있었고, 또 그를 따라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도 어렵고 험한 것을 피하지 않았다.

선주는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기습하여 죽이고 관우로 하여금 하비성을 지키도록 하고, 태수(太守)의 일을 대신하도록 했다.

그리고 선주(先主)는 소패(小沛)로 돌아갔다.

「촉기(蜀記)」에 전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조공(曹公:조조)이 유비와 함께 여포(呂布)를 하비성에서 포위했을 때 관우가 조공에게 아뢰어 여포 수하의 진의록(秦宜祿:벼슬 이름인 듯)을 구원해줄 것과, 여포의 처(妻)를 아내로 맞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애걸했다. 조공(曹公)은 이를 허락했다.

여포를 격파하고나자 관우는 또다시 그 일을 조공(曹公)에게 여쭸다. 그러자 조공은 불쾌하게 생각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더니, 먼저 했던 약속을 어기고 여포의 처(妻)를 자기 곁에 두었다. 그러자 관우는 마음이 편치가 아니했다.

이것은 '위씨춘추(魏氏春秋)'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관우를 임명하여 서주목(徐州牧)의 일을 대신하게 했다고 한다.

원소의 장수 안량을 베고 유비에게 돌아가다[편집]

건안(建安) 5년, 조공(曹公)이 동쪽 정벌길에 나서자 선주(先主)는 패(敗)하여 원소(袁紹)에게로 달아났다. 조공은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갔는데, 그에게 편장군(偏將軍)의 벼슬을 내리고 예(禮)로써 심히 후하게 대우했다.

원소(袁紹)가 대장 안량(顔良)을 파견하여 동군태수(東郡太守)유연(劉延)을 백마(白馬)에서 공격하자, 조공(曹公)은 장요(張遼)를 관우과 함께 선봉으로 삼아 맞서게 했다. 관우는 안량의 대장기와 마차의 덮개를 멀리서 바라보더니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 나가서는 수만의 병사들 사이에 있는 안량을 찔러죽이고 그의 목을베어 돌아왔다. 그러나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 능히 관우를 당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원소는 하는 수 없이 백마의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이에 조공(曹公)은 즉시 표(表)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했다.

처음에 조공은 관우의 사람됨이 용감하고 기상이 굳세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오래 머무를 뜻이 없는 것을 살피고 장요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그의 뜻을 시험해보게."라고 했다.

장요가 관우에게 그의 의중을 물어보니 관우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조공께서 나를 후히 대우해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유장군(劉將軍:유비)의 후한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을것을 맹세하였으니 이를 어길 수는 없소. 그러니 여기 끝까지 머무를 수는 없고,

대신 다른 공을 세워 조공께 보답하고 떠날 것이오."라고 하였다.

장요가 이를 조공에게 보고하자 조공은 관우가 진정 의기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안있어 관우가 안량을 죽이자 조공은 그가 반드시 떠날 것임을 알고 상을 무겁게 베풀었다. 그러나 관우는 그 상을 모두 봉(封)해 놓고 떠나감을 알리는 글을 올려 놓은 후 선주(先主)가 있던 원소군으로 달아났다.

조공(曹公)의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관우를 추격하려 하였지만,조공은 "누구나 각기 그 주인이 있는 것이니 추격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부자(傅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장요가 이를 태조(太祖:조조)에게 고하려 하다가 태조가 관우를 죽일까 두려워하여 말하지 못했는데, 이는 군주를 섬기는 도리가 아니었으므로 곧 탄식하며 말하기를, "조공은 나의 군부(君父)요,관우는 형제와 같다." 그러면서 관우가 한 말을 고했다.

태조는 "군주를 섬기는 근본을 잊지 않았으니 천하에 다시없을 의사(義士)로다. 그러면 언제쯤 떠날 것 같은가?"라고 묻자, 장요는 "관우는 공(公)의 은혜를 입었으니 공을 세워 이를 보답한 연후에 반드시 떠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신(臣) 배송지(裵松之)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조공이 관우가 머무르지 않을 것을 알고도 내심 관우의 뜻을 아름답다고 여겼다. 떠나가는 관우를 추격하여 잡지않고 그가 갈 수 있도록 내버려 뒀는데, 이는 왕의 으뜸가는 도량이라 아니할 수 없음이니, 어느 누가 능히 이를 따를 수 있겠는가? 이것은 조공(曹公)의 용서하는 미덕의 결실이다.』

형주에서의 관우[편집]

관우는 선주(先主)를 따라 유표(劉表)를 따르게 되었다. 유표가 죽자 조공(曹公)은 형주(荊州)를 정벌했는데, 선주는 번성(樊城)에서 남쪽으로 강을 건너려고 하며 별도로 관우를 보내 수백 척의 배를 이끌게 하여 강릉(江陵)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공은 추격을 계속하여 당양(當陽)의 장판(長阪)까지 이르게 되자, 선주는 한진(漢津)을 끼고 달려 관우의 배와 서로 만나게 되었고 함께 하구(夏口)에 이르게 되었다.

손권(孫權)이 병력을 보내 선주를 도와 조공을 막도록 하자, 조공은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여 돌아갔다.

선주는 강남(江南)의 여러 군(郡:무릉·장사·영릉·계양 등)들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고, 공이 있는 자들에게 상을 내렸으며 관우를 양양태수(襄陽太守)·탕구장군으로 봉하여 강북에 주둔하게 했다.

선주가 서쪽으로 익주(益州) 원정길에 올랐을 때, 관우에게 형주(荊州)를 맡아 지키도록 하였다. 마초(馬超)가 선주에게로 투항하 여 왔다는 소식을 듣자, 일찌기 그와 교류하며 지냈던 사람이 없었던 까닭에 관우는 제갈량(諸葛亮)에게 글을 써 보내 마초의 인물됨과 재주가 누구와 비교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제갈량은 관우의 오만함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곧 답장을 보내"마맹기(馬孟起)는 문무(文武)를 겸비했고 그 능력은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일세의 호걸로써, 경포·팽월(彭越)과 같은 무리일 것이니 마땅히 익덕(益德)과 나란히 앞섬을 다툴 수 있을 것이고, 미염공(美髥公)의 절륜(絶倫)함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오."라고 했다.

관우는 수염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제갈량은 옛날부터 그를 '염(髥)'이라 했다. 관우는 서신(書信)을 살펴보더니 크게 기뻐하며

이를 빈객(賓客)들에게 보여 주었다.

형주공방전[편집]

건안 24년, 선주(先主)는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관우에게 전장군(前將軍)의 벼슬을 내리고 절월(節鉞)을 내렸다. 그 해에 관우는 군사들을 이끌고 번성(樊城)의 조인(曹仁)을 공격했다. 그러자 조공(曹公)은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을 돕도록 했다.

가을이 되어 큰 장마비가 내리자 한수(漢水)가 범람하여 우금이 이끄는 칠군(七軍)이 모두 물 속에 잠기게 되었다.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하였는데, 관우는 또 장군 방덕(龐悳)의 목을 베었다.

양(梁)·협(陜)·육혼(陸渾)의 여러 도적들은 관우의 관인(官印)이나 봉호(封號)를 받아 그의 한 무리가 되었고, 관우의 위엄은 화하(華夏:중국을 일컫는 말)에 떨쳤다.

조공(曹公)은 그의 예봉(銳鋒)을 피해 허도(許都)를 떠날 것을 신하들과 논의하기까지 했으나,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장제(蔣濟) 등은 '관우가 뜻하는 바를 이루게 되는 것은 손권(孫權)이 반드시 원하는 일이 아닐 것이므로, 사람을 보내 손권에게 관우의 배후를 치도록 권하고 강남을 나누어 손권이 갖는 것을 허락 해준다면 번성의 포위는 스스로 풀릴 것'이라고 주장하자 조공(曹公)은 이에 따랐다.

그런데 그 이전에 손권이 사람을 보내 그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혼인시킬 것을 제의한 적이 있었는데, 관우는 손권의 사자에게 모욕적인 말로 꾸짖으며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손권은 대노(大怒)했다.

또한 남군태수(南郡太守) 미방이 강릉(江陵)에 있었고 장군 부사인(傅士仁)은 공안(公安)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평소 관우가 자기들을 경시했던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우가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면서 미방과 부사인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일을 맡겼지만, 이들은 서로 최선을 다해 관우를 원조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우는 "돌아가면 마땅히 이들을 문책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고, 미방과 부사인은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손권이 몰래 미방과 부사인을 유혹하자 이들은 사람을 보내 손권을 따르겠다고 했다. 한편 조공(曹公)은 서황(徐晃)을 보내 조인(曹仁)을 구원했다.

관우는 이것을 당해낼 수 없게 되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러나 손권이 이미 강릉을 점령하고 관리들과 처자식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관우의 군대는 흩어져버렸다.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공격하여 관우와 그의 아들 평(平)을 임저(臨沮)에서 참수했다.

「전략(典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관우가 번성을 포위했을 때 손권은 원군(援軍)을 보내 그를 돕도록 했지만, 고의로 신속한 진군(進軍)을 늦추며 주부(主簿)만 먼저 보내 그의 명(命)을 알리게 했다. 관우는 원군의 도착이 늦어지는 것에 대해 화를 냈고, 또한 자기 스스로 우금(于禁) 등을 사로잡은 자신감에

"오소리 자식같은 것이 감히 이럴 수가 있는가? 번성을 쳐서 빼앗게 되었는데, 내가 너 따위를 멸하지 못하겠는가!"라고 욕했다. 손권이 이 말을 전해듣자 관우가 자신을 가볍게 보고 있음을 알고, 편지를 써서 관우에게 사과하고 자신이 직접 가겠다고 하였다.

신(臣) 배송지(裵松之)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형주(荊州:관우)와 오(吳:손권)은 비록 겉으로는 화목한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의심하여 서로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밀히 군사를 일으켜 관우를 기습한 것이다.』

「촉기(蜀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관우와 서황은 서로 아끼는 사이였으므로 먼거리에서도 서로 말을 주고 받았는데, 단지 평범한 이야기만을 주고 받을 뿐 군사(軍事)의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잠깐 대기하던 서황이 말에서 내리더니 명령을 내렸다. "관운장의 머리를 얻어오는 자는 상금으로 천근을 주겠다."

관우는 놀라고 두려워하며 서황에게 "대형(大兄)! 이것이 무슨말씀이오?"하고 묻자, 서황은 "이는 국가의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촉기(蜀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손권이 장수를 보내 관우를 공격하고 관우와 그의 아들 평(平)을 사로잡았다. 손권은 관우를 살려주어 조공을 유비의 적이 되게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좌우에서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리의 새끼는 기를 수가 없습니다. 뒤에 반드시 해를 입히게 됩니다. 조공(曹公)도 관우를 즉시 제거하지 않을 것이므로 큰 우환거리가 될 것이어서, 도읍을 옮기는 일을 의논하는 일이 생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찌 지금 그를 살려둘 수 있겠습니까?"

손권은 곧 참수해버렸다.

 신(臣) 배송지(裵松之)가「오서(吳書)」의 기록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손권은 장수 반장(潘璋)을 보내 관우의 달아나는 길을 가로막아 끊어 버렸다. 관우는 곧 죽게 되었다. 임저(臨沮)는 강릉에서 2∼3백리 떨어져 있는데, 불시에 관우를 죽였으니 어찌 생사(生死)를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오력(吳歷)」에는,

『손권이 관우의 머리를 조공(曹公)에게 보내자, 조공은 그의 주검을 제후의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촉서 관우전

관우 상대로 서황이 펼친 전략[편집]

태조가 마침내 직접 양평에 이르러, 한중의 여러 군대를 이끌고 나왔다. 다시 서황을 보내 조인을 도와 관우를 토벌하며 완(宛)성에 주둔하도록 했다. 한수가 급작스레 범람하게 되어 우금 등이 물에 잠겼다. 관우는 번성에서 조인에 대한 포위를 풀고, 또 양양(襄陽)에서 장군 여상(呂常)을 포위했다. 서황이 거느리던 병사에는 신병들이 많아, 관우와 예봉을 다투기 어려워, 마침내 양릉피(陽陵陂)의 둔영으로 전진했다.

태조가 다시 돌아와, 장군 서상(徐商), 여건(呂建) 등을 서황에게 보내면서 영을 내리길 "모름지기 병마(兵馬)가 집결하게 되면, 함께 전진하라"고 했다. 적(賊)들이 언성(偃城)에 주둔했다. 서황이 도착하자, 거짓으로 길에 참호를 파서, 적의 배후를 끊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적들이 둔영을 불지르고 달아났다. 서황이 언성을 얻고서는, 양쪽에서 진영을 이어 차츰 전진하니, 적의 포위망에서 3장(丈) 떨어진 곳까지 왔다.

태조가 (이 때의) 전후로 해서 은서(殷署), 주개(朱蓋) 등 무릇 12개의 영을 파견해 서황에게 가게 했다. 적은 위두(圍頭)에 주둔하였고 또 따로 사총가에 주둔하였다. 서황은 일부러 큰소리로 위두의 진영을 공격하라고 하고는 몰래 사총을 습격했다. 관우는 사총이 격파되는 것을 보고 친히 5천 명의 보병과 기병을 인솔하여 서황과 교전하였는데 서황은 관우를 격퇴시키고, 그대로 포위망 안까지 깊숙이 추격하여 끝내 적을 무찔렀으며, 어떤 적들은 달아날 길이 없자 면수(沔水)로 뛰어들어 죽었다.

태조가 영을 내리길 "적의 참호와 녹각의 포위망은 열 겹이나 되었는데, 장군은 전투를 매번 이기게 하여 마침내 적의 포위를 함락시키고, 많은 적의 머리를 베었다. 내가 용병(用兵)을 한지가 30여년인데, 옛날에 용병을 잘했다고 들었던 자도 오래 동안 핍박당하면서 샛길로 적의 포위망에 진입했던 자는 없었다. 또한 번성과 양양이 포위당했던 것은 거(莒)와 즉묵(卽墨)(이 포위되었던 때의 일)보다 심했으니 장군의 공은 손무(孫武)나 양저를 넘는다"고 했다. 서황이 군대를 떨치며 마피(摩陂)로 돌아오니, 태조가 7리나 나가 서황을 맞이하고 주연을 크게 베풀었다. 태조가 술잔을 들어 서황에게 권하며, 또 그를 위로하며 말하길 "번성과 양양을 보전하게 된 것은 장군의 공이요"라 했다.

위서 서황전에서 인용

관우에 대한 여몽의 평가와 대 관우상대로 오가 취한 통수 전략[편집]

노숙이 죽자, 여몽은 서쪽으로 육구에 주둔하며 노숙 군대의 인마 1만여 명이 모두 여몽에게 속했다. 또 한창태수(漢昌太守)에 배수되고, 하준(下雋) 유양(劉陽) 한창(漢昌) 주릉(州陵)을 식읍으로 했다. 관우와 땅을 나눠 접경하고 있었는데, 관우가 매섭고 빼어난데다 (오를) 병합하려는 마음이 있지만 또 그 나라가 상류에 있어 형세상 오래가기 어려움을 알았다. 처음에 노숙 등은 조공이 아직 살아있음으로 해서 화난(禍難)이 이제 시작되었는지라 마땅히 서로 도와야지 같이 원수가 되어 잃어서는 안된다고 여겼다.

여몽이 은밀히 계책을 진언하길 정로장군(征虜將軍; 손교(孫皎))에게 남군을 지키게 하고, 반장(潘璋)은 백제(白帝)에 주둔하며, 장흠(蔣欽)은 유격병 1만명을 거느리고 장강을 아래위로 순행하며 적이 있는 곳에 따라 대응하고, 저는 나라를 위해 양양을 먼저 점거하여 그렇게 된다면, 조조에 대해 걱정할 게 무어며 관우에게 힘입을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또 관우는 신하인데 사기와 힘을 존숭하여 거꾸로 뒤엎는 것(反覆)이 있으니, 마음깊이(腹心)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지금 관우가 바로 동쪽으로 향하지 못하는 것은 지존께서 성명(聖明)하고 저희 등이 있기 아직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강하고 성할 때 도모하지 않는다면, 하루 아침에 엎어질 것이니, 다시 힘을 펴고자 해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 했다. 손권이 마음 깊이 그 계책을 받아들였는데, 또 다시 그와 서주를 취할 뜻을 의논하였더니,

여몽이 대답하길 지금 조조는 멀리 북방에 있어, 새로이 여러 원씨(袁氏)를 격파해 유주(幽州)와 기주(冀州)를 위무하고 안집(安集)하느라 동쪽(동오)으로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서주 땅의 수비병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가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세가 육지와 통하고, 날랜 기병이 달리는 곳이라, 지존께서 지금 서주를 얻는다 할지라도 조조가 후일 반드시 와서 쟁패를 벌일 것이고, 비록 7~8만명으로 수비한다 해도, 오히려 응당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관우를 취해 장강을 모두 점거하여 형세를 더욱 늘릴 만 못합니다라 했다. 손권은 이 말이 더욱 옳다고 여겼다. 여몽이 노숙을 대신하게 되어 처음으로 육구에 이르러서, 겉으로는 은혜와 후의를 더욱 닦아 관우와 우호를 맺었다.


오서 여몽전에서 인용

여몽의 군사를 보고 침공에 대비하는 관우[편집]

후에 관우가 번(樊)성을 토벌하는데, 병사를 남겨 장차 공안과 남군을 수비하도록 했다. 여몽이 상소를 올려 말하길 관우가 번성을 토벌하며 수비병을 많이 남긴 것은 필히 제가 뒤에서 도모할까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병이 있으니, 병사를 나눠 건업(建業)으로 돌아가 병 치료를 명목으로 하고자 합니다. 관우가 이를 들으면, 반드시 수비병을 철수시켜, 다 양양(襄陽)으로 보낼 것입니다. 대군이 장강에 떠서 밤낮으로 말을 달려 그 빈틈을 습격하면 남군을 항복시킬 수 있고, 관우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라 했다.

오서 여몽전에서 인용

육손이 관우를 통수치려고 쓴 아첨[편집]

육손은 육구(陸口)에 이르러 관우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전에 나는 당신이 적군의 동태를 관찰하고 나서 일정한 법칙에 따라 군대를 지휘해 가볍게 일어나 큰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았는데, 당신의 공적은 위대하오! 적국이 패배한 것은 동맹국에는 이로운 일이므로 당신의 승리 소식을 듣고 손뼉을 쳤고, 중원을 석권하는 대업을 이루어 함께 조정을 보좌하고 기강을 유지시키기를 희망했었소. 최근 재능없는 이 사람이 임명을 받아 서쪽으로 오게 되었소. 나는 당신의 풍채를 앙모하여, 좋은 대우와 가르침을 받기를 바라고 있소.

또 이렇게 말했다.

-우금 등이 당신의 포로가 되자,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간에 그대를 존경하고 찬탄하였으며, 장군의 공훈은 세상에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소. 비록 옛날 진문공(晉文公)이 성복(城濮)의 싸움에 참가시킨 군대나 회음후(淮陰侯 ; 漢信)가 조(造)나라를 공격한 계략일지라도 그대를 넘을 수는 없을 것이오. 서황(徐晃) 등이 적은 수의기병을 진지에 주둔시켜 당신의 동향을 엿보고 있다고 들었소. 조조는 교활한 적이오.그는 실패한 분노 때문에 어려움을 생각지 않고 아마 은밀히 병사를 늘려 그 뜻을 이루려고 할 것이오. 비록 그의 군대는 강하지 않을지라도 용맹하고 강인한 장수는 여전히 있소.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항상 적을 경시하는 생각이 생겼소. 고인의 용병술에 의지하여 싸움에서 승리한 후에는 더욱 경계고, 장군이 다방면으로 방침을만들어 완전하게 승리하기를 희망하오. 나는 서생으로 재능이 소원하고 학문이 얕으며행동은 더딘데, 감당하지 못할 직무를 맡게 되었소. 나는 위엄과 덕행이 있는 당신과 이웃이 되어 기쁘고, 나의 마음을 전부 기울이고 싶소. 비록 당신의 계책에 부합되지 못할지 라도 여전히 그리워할 것이오. 만일 당신의 관심을 얻게 된다면 이런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이오.

오서 육손전 인용

관우의 쌀도둑질과 여몽의 형주 침공[편집]

손권은 여몽을 소환해 들이라는 격문을 노출시키고, 은밀히 같이 계획을 도모하였다. 관우가 과연 믿고 점차 병사를 철수시켜 번성으로 가게 했다. 위(魏)에서 우금(于禁)을 시켜 번성을 구하게 했지만, 관우는 우금 등과 인마(人馬) 수만을 다 잡아 들이고, 양곡이 부족함에 기탁해 상관(湘關)의 미곡을 마음대로 취하였다. 손권이 이를 듣고 마침내 실행에 옮겼는데, 먼저 여몽을 파견해 선봉에 서도록 했다. 여몽이 심양(尋陽)에 이르러 그의 정병들을 모두 배 안에 숨겨두고, 백성들에게 노를 젓게 하여, 상인의 복장을 해입고 밤낮으로 가서, 관우가 강변에 세워둔 둔영의 관측소에 이르러, 모두 잡아 포박해 버리니, 이 때문에 관우는 알지 못했다. 마침내 남군에 도착하자, 사인(士仁)과 미방이 모두 항복했다. 여몽이 성에 들어가 점령하고, 관우 및 장수와 병사들의 가족들을 다 잡았으나, 그들 모두를 위무(慰撫)하고, 군중에 영을 내려 민가에 들어가거나 약탈하는 바가 없게끔 약속하였다.

오서 여몽전에서 인용

형주공방전에서 관우의 평가[편집]

긍정적인 평가 : 명실공히 위 군부 1인자인 조인이 이끄는 군이, 그것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내려와 전투 준비도 끝나있던 상태에서 형북의 주둔군과 함께 아무것도 못해보고 성에 갇히게 된다. 관우가 맡던 지역은 강릉 빼면 거의 의미가 없던 곳들이었고 조인이 주둔했던 형북은 촉, 오가 지녔던 형남 전체보다 부유했던 지역이었음에도. 그 후 장료와 같은 전에 실린 우금군까지 아무것도 못해보고 항복했고, 관우의 기세는 한중전 이후 재정비하던, 마찬가지로 장료와 같은 전에 실린 서황이 이끄는 군까지 오고서야 꺾였음.

ㄴ 꺾인거라 보기도 뭐하다. 애초에 서황이 관우를 칠때 상황은 면수(번성 주위 호수) 장악에 양양은 완전히 포위당해 연락이 끊긴상태다. 관우가 서황과 붙을때 보기5천 뿐이였던것도 이게 이유였고
그렇다고 양양, 면수장악이 풀린것도 아니다.

그리고 서황의 병사가 신병이라 그렇다는데 기록보면 분명 병사들을 더 충원했고 이후 최후 공격당시엔 12영의 군졸들까지 더 보탠 군세라고 되어 있음. 조조는 천도드립을 치고 우금, 서황을 차례로 보낸 것으로 모자라 대오전선의 장료를 이동시키고 하후돈과 함께 직접 남하할 정도로 쫄려있던 상태. '번성에 짱박힌 조인 하나 못잡았다' 정도로는 촉 공격으로 인해 약체화되어 악진, 문빙, 여몽에 차례로 휘둘리던 소수 약졸들을 키워 조인, 우금, 서황, 방덕, 만총 등이 모두 덤벼야(그것도 방어전으로) 막아낼 수 있도록 몰아쳤으며 조조가 모든 것을 걸어 막도록 만든 관우의 위엄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솔직히 관우가 명분을 주고 잘못한 면도 있긴한데 그렇다고 손권이 잘한것도 아니지 않나? 기록보면 노숙이 죽은 이후로 여몽이랑 짝짜궁하고 대놓고 형주를 노렸다, 즉 노숙이 죽은 217년 이후론 먼저 뒷통수 칠 생각을 했던건 오나라 측이라는거다, 이건 관우가 쌀도둑질 한 때랑 결혼 동맹 거절하기도 이전이다. 관우가 대놓고 동쪽을 경계했을 정도면 저쪽도 그리 신의있게 나간건 아니라는거지, 어차피 익양대치 이후로 형주 영유권에 대해선 거의 결판이 난 상황인데 통수칠 준비 다 해놓고 관우가 방심하고 명분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게 손권 패거리인데 솔직히 손권이 잘한거냐? 애시당초 손권이 익양대치 이후로 서로 지난일은 잊고 신의있게 나갔다고 한다면 관우가 과연 번성을 끝나 함락시키지 못하란 법도 없었을거임.

ㄴ 그럼 그걸 잘 알고있는 관우가 왜 무리를 해서 오나라 한테 기회를 주냐? 오나라가 그런 포커스를 보이면 괜히 무리를 하지 말았어야지. 당시 촉나라는 한중 먹고서 한참 내정 다지기 하던 시점이라 제대로 지원도 못해주는 실정인데 뭘 믿고서 번성까지 공격을 한거냐?


부정적인 평가 : 관우는 익양대치 이후로 약화된 촉한 지역의 형주를 가지고 무리하게 번성과 양양을 공략했는데 결국 이것이 화를 부른것이다, 긍정적인 평가측에서도 지적했듯히 관우가 가진 형주는 기껏해야 남군정도가 제대로 된 기능을 하는곳인데 여기서 수세적으로 잘 지켜도 모자란 판국에 무리하게 강릉의 수비병력까지 빼면서 포위망을 강화하려 하는데 작정하고 몰려드는 위의 군세를 당해낼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거기에 관우가 손권의 침공을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고 나오는데 그렇다면 수비를 강화해야 함에도 여몽의 병세 악화라고 무리하게 병력을 뺀건 무슨 자신감인가? 여몽 빼고 다른 오나라 장수들은 다 호구로 보였나? 예전에 감녕이 지킨다는 얘기를 듣고 감히 진격하지 못한건 관우가 아니라 다른 장수였나? 거기다가 손권의 결혼동맹 파토와 우금의 병력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무리하게 군량고를 턴 건 손권에게 명분만 주는 일이었다.

반준은 두문불출했단 소리가 나오지만 손권 방문하자마자 우디르하는 괴상한새끼다. 더군다나 세놈 공통특징이 보급담당이다. 애초에 우번도 쓰리질로 남군먹고나서 빨리 장악 안하면 통수쳐맞을거란 말 나온거봐서 미방, 반준 두놈이 문제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거기에 동료들과 화목하지 못하여 미방과 사인이 제대로 지원을 하지않고 바로 항복할 생각을 품게 만들었으니 내외 정치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면서 무리하게 용병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미방이 지원을 제대로 안한건 사실이고 나중가면 우번한테 사사로운 원한으로 국가를 배반했다고 존나 까임. 거기다가 아무리 관우랑 사이가 틀어졌다고해도 관우는 분명히 미방이 남군 홀라당 태워먹고 그 지랄해놓고 군수물자도 제대로 대지않은 공적인 잘못을 가지고 죄를 묻겠다고 한 것인데 그거 처벌 받기 싫어서 지 형과 주군을 배반한게 옳은 행동은 아니다.

ㄴ 미방과 부사인이 기구한게 나중에 또 정치적으로 좆됬음을 감지한 오나라가 촉으로 돌려보내서 결국 처형당한다.

포승줄로 묶어갔는데 뭔 정치적 문제냐?

그리고 익양대치때 관우군은 3만이라고 나오는데 몇년 안 지났을테니 군세가 갑자기 늘었다 보기 어려울것이고 번성공략 때도 비슷한 숫자였을것이다. 관우가 이 정도의 군세 가지고 위에서 조조가 싹삭 긁어서 몰려드는 군세들과 혹시 모를 오의 기습을 막고 조인이 굳게 지키는 번성을 공략할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면 관우는 스스로의 군사적 역량에 지나치게 자신감을 가졌던지 우금 잡은 후에 극도로 오만해졌다는 결론이 나올수밖에 없다. 여러모로 한참 익주와 한중을 정비하고 있을 주군 유비가 지원할만한 상황도 아니지 않았나? 그러니까 화하를 진동시키고 우금의 7군을 잡은 상태에서 병력을 철수시켰으면 위는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함부로 관우를 치지 못했을것이고 손권 역시 마찬가지 였을것이며 관우에게도 명예로운 전장으로 남았을것이다. 촉서 관우전에 관우가 꿈을 꾸고 스스로도 돌아가기 힘들겠다고 예언했는데 무의식적으로 관우 스스로도 무리라고 생각한것은 아닌가? 애당초 관우에게 주어진 임무는 형주를 잘 지키는 것이지 무리하게 혼자서 독단적으로 양번을 먹으라는 지시는 아니지 않았나?

오죽하면 손권이 형주먹었단 사실 알고나서 샌드위치로 잡을생각 안하고 관우한테 소식알려서 병력이나 빼게만들라고 서황에게 했겠냐 근데 내가보기에도 양번 먹어도 지킬수 있는지는 의문

공연히 먹고 지킬수나 있는지도 의문인 번성, 양양을 무리하게 공략할 필요가 있었는가 말이다. 결국 지나치게 동원할수 있는 역량을 넘어서 무리하게 욕심을 부린 결과가 쌀도둑놈이라는 오명과 형주 상실과 관우 자신의 목숨을 잃는 일이 된 것임.

천도 고려한 이유도 양번뚫리면 허창까지 금방이라서 그런게 크고.

또한 관우가 트롤짓을 제대로 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없는 촉의 인재풀을 더 얇게 만들어버렸고 유비도 이에 눈이 뒤집혀서 손권이 관우가 다스렸던 형주 영토 돌려주겠다고 하고 제갈량도 오랑 싸우기보다 손권의 제안 수용하고 오나라랑 동맹 맺어서 위나라에 대응해야 한다고 유비에게 간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는 바람에 1차로 날린 촉의 인재풀을 더 날려버리는데 한몫함. 이로 인해 제갈량은 나중에 위나라에 대한 북벌을 감행했을 때 자신을 도와줄 인재를 찾는데 애를 먹었고 한정된 루트로 위에 대한 북벌을 감행할 수 밖에 없었음. 결국 위나라는 12년이나 걸렸지만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냈으며 제갈량 사후 촉은 마땅한 인재가 없어 결국 위나라에 263년 잡아먹히게 됨.

후일담[편집]

관우에게는 장무후(張繆侯)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아들 흥(興)이 그의 뒤를 이었는데, 관흥(關興)은 자(字)를 안국(安國)이라 했고 어려서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 승상 제갈량은 그의 그릇됨이 매우 남다르다고 보았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시중(侍中)과 중감군(中監軍)을 지냈지만 몇해 뒤에 죽었다. 그의 아들 통(統)이 그의 뒤를 이었는데 관통은 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관직은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에까지 이르렀으나 그가 죽은 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관흥의 서자 이(彛)가 뒤를 이어 작위에 봉함을 받았다.

「촉기(蜀記)」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관우가 출전하여 번성을 포위했을 때 돼지가 그의 발을 무는 꿈을 꾸었다. 관우는 이것을 그의 아들 평(平)에게 말하며,

"나도 이제 늙었나 보다. 돌아올 수 없을 것 같구나!"라고 했다.

「강표전(江表傳)」에 이르기를,

『관우는 좌씨전(左氏傳)을 좋아하여 내용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촉기(蜀記)」에 이르기를,

『방덕(龐德)에게는 회(會)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종회(鍾會)·등애(鄧艾)를 따라 촉(蜀)을 정벌했다. 촉이 망하자 관씨(關氏)의 가문은 모두 멸하여 그 대(代)가 끊어졌다.』고 했다.

나~중에 촉이 쫄딱 망하면서 방덕 아들한테 관씨 성 가진 놈들이 죄다 몰살당했는데, 이 쪽은 관흥 후손이고 관평 후손이 오나라 땅에 남아 있어서 관우 후예가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전해진다.[1] 그리고 방회(방덕 아들)는 이 일로 존나 까인다. 생각해 봐도 지 애비 복수한답시고 무고한 서주 주민들까지 학살하던 조조하고 비슷한 또라이짓.

관우에 대한 몇가지 일화[편집]

조조의 형주 진공 이후 유비에게 대든 관우[편집]

「촉기(蜀記)」에 이르기를,

처음에 유비가 허도(許都)에 있을 때 조공(曹公)과 함께 사냥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사냥 중에 무리가 흩어지자 관우는 유비에게 조공을 죽일 것을 권했지만 유비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하구(夏口)에 이르러 장강(長江)가를 떠도는 처지가 되자 관우는 화를 내며 말하기를, "지난날 사냥을 할 때 만약 이 관우의 말을 들었다면 오늘과 같이 곤란한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비는 "그때는 다만 국가를 위해 조조의 재주를 아깝게 생각했을 뿐, 만약 천도(天道)가 옳은것을 돕는 것이라면 이것이 복(福)에 어긋나는 것이었음을 알았겠는가?"라고 했다.

신(臣) 배송지(裵松之)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유비는 후에 동승(董承) 등과 함께 모의하여 조공(曹公)을 죽일 것을 결의하였지만, 일이 사전에 탄로나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만약 유비가 국가를 위해 조공을 아깝게 생각했다면 그의 이러한 언행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는가! 관우가 이와 같이 권했을 때 이것을 옳게 여겨 듣지 않았던 것은 조공을 따르는 심복이나 친척의 무리가 많아, 미리 심사숙고하여 일을 하지 않고서는 이를 행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공이 비록 살해된다고 해도 자신의 몸이 반드시 징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을 했기 때문에 유비는 이를 하지 않은 것이었을 뿐, 어찌 조공을 아끼는 마음이 있었겠는가? 이미 지나간 일이었기에 단지 아름다운 말로 꾸며댄 것일 뿐이다.』

촉서 관우전,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지 주군한테 대드는 거랑 유비 변변찮은 변명 보소

청니 대치 당시 악진에게 패한 관우[편집]

후에 형주를 평정하는데 종군하여, 양양(襄陽)에 남아 주둔하면서 관우, 소비(蘇非) 등을 쳐서 모두 패주시키니, 남군(南郡)과 여러 군의 산과 계곡의 만이(蠻夷)들이 악진에게 와 항복했다. 또 유비와 임저(臨沮)현장 두보(杜普), 정양(旌陽)현장 양대(梁大)를 토벌하여, 모두 크게 격파했다.

위서 악진전에서 인용

ㄴ관우전엔 이런 내용 찾아볼수도없던데

ㄴㄴ위서 악진전에 나와있다

관우가 북쪽길을 끊다[편집]

유비와 주유는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따로 관우를 보내 북쪽길을 끊어 놓았다. 이통은 부대를 인솔하여 공격했는데, 말에서 내려 방책을 걷어내고 포위권으로 진입하여 싸우면서 앞으로 나가 조인의 군사를 구출하여, 무용이 여러 장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위서 이통전에서 인용

마취제 없이 수술을 받은 관우[편집]

일찌기 관우는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그의 왼쪽 팔을 관통당한 일이 있었다. 뒷날 비록 낫기는 했지만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욱신거리고 아팠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화살 촉에 독(毒)이 있어 그것이 뼈속으로 들어가서 그런 것이니, 마땅히 팔을 가르고 뼈를 깎아내면 이 고통은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관우는 순순히 팔을 뻗어 의원에게 자신의 팔을 가를 것을 명했다. 이때 마침 관우는 여러 장수들을 초청하여 음식을 먹으며 서로 마주 대하고 있었는데, 피가 흘러내려 받쳐놓은 대야에 가득넘쳤다. 그러나 관우는 구운 고기를 자르고 술을 마시며 담소(談笑)를 나눌 뿐 태연했다.

촉서 관우전

감녕이 익양대치 때 지킨다는 소리를 듣고 감히 진격하지 못한 관우[편집]

후에 노숙을 수행하여 익양을 진무시키고 관우에게 대항했다. 관우는 3만 명의 병사 중 직접 정예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상류 10여 리의 얕은 여울에 배치하고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려 한다고 말했다. 노숙이 장수들과 상의할 때 감녕은 당시 3백 명의 병사만 있었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시 저에게 5백명을 증원시켜 줄 수 있다면,제가 가서 그에게 대항하겠습니다. 관우는 제가 기침하여 가래침을 뱉는 것을 듣고 감히 물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물을 건너면 저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노숙은 곧바로 병사 1천명을 선발하여 감녕에게 더해 주었다.감녕은 그날 밤에 갔다.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건너지 못한 채 머물러 있으면서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오늘날 이것을 관우뢰라고 부른다. 손권은 감녕의 공로를 칭찬하고 서릉태수로 제수했으며,양신.하치 두 현을 통솔하도록 했다.

오서 감녕전에서 인용

서황의 말에 당황한 관우[편집]

관우는 서황과 더불어 예전부터 서로 경애했다. 멀찍이서 함께 대화했는데 다만 평생(平生-평소)의 일만 말할 뿐 군사(軍事)는 언급하지 않았다. 잠시 뒤 서황이 말에서 내리며 영을 내렸다,

“관운장의 머리를 얻어 오는 자는 금 1천근을 상으로 내릴 것이다.”

관우가 놀라고 두려워하며 서황에게 말했다,

“대형(大兄), 이 무슨 말이오!”

서황이 말했다,

“이는 나라의 일이오.”

촉서 관우전에서 인용

ㄴ이게 서황이 무서워서 벌벌떤 내용이냐? 친하던 사람이 죽이려고 드니까 놀란거지. 저 시대에 쓰여진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병신이또...

ㄴ네 다음 관빠

ㄴ나도 딱히 이걸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는 내용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관까 새끼들이 많긴 많구나

ㄴ사적인 대화 나누다 정색빠는거보고 왜이러냐는게 무서워서 벌벌떤건가

ㄴ 응 그래서 싸우지말라고 문서 제목 수정해뜸 ㅇㅇ

놀라고 두려위하며 라 써져 있는데 ㅋㅋ

ㄴ 결국 서황심리전에 고나우 걸려서 좆된 거 아니냐 ㅋㅋ 서황이 친한 척하면서 처음에 노가리 까니까 관우 병사들이 어 뭐야 하면서 좀 긴장 풀고 있다가 갑자기 고나우 죽여! 하고 자기 대장이 어 형 왜 그래 하면서 놀라는 거 보면 사기가 어떻게 되겠냐? 고나우 ㅄ 서황한테 농락당함

삼국지 갤러리에서의 위상[편집]

삼갤는(은) 사실 관우에게 깊은 사랑을 품고 있습니다!
삼갤는(은) 사실상 관우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존나 싫어한다면서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싫어하면 관심을 주지 마 병신들아 ㅉㅉ
"삼갤는(은) 세계의 그 누구보다도 관우을(를) 사랑하면서 왜 본심을 숨기는 것일까?"

제갈량과 함께 인기 투톱을 찍는다.

전체글 지분의 40퍼를 담당하고 있으며 매일같이 까인다. 참고로 나머지 40퍼는 제갈량 까이는 내용

ㄴ 최근에는 혼자 80퍼 찍음

ㄴ 그쯤되면 이제 삼갤이라는 이름 때려치고 관우갤러리로 이름 바꿔야 하는거 아니냐, 무슨 어둠의 관사모도 아니고.

20퍼는 뭐 조조나 유비가 까이는 내용이겠지

삼갤러는 그 누구보다도 관우를 사랑하면서 왜 본심을 숨기는 걸까?

역병신[편집]

관우는 형주, 즉 지금의 우한에서 죽었다. 이후 관우랑 싸운 장수들은 죄다 병사했다

그리고 지금 우한은 관성대제의 뜻을 잇는 박쥐들이 전 세계에 역병을 퍼뜨렸다.


요즘은 관우가 고나우 밈으로 조선 한정 거의 병신취급을 받아서 키배 뜰때 한국말쓰는 조선족 검거가 편해졌다

계집아이같은 비명이나 삼삼 얘기할때 한새끼만 불편해하면 그새끼가 조선족이기 때문.

같이 보기[편집]


삼갤 병신[편집]

파일:장판파의 응디 운장1.jpg 파일:장판파의 응디 운장2.jpg 파일:장판파의 응디 운장5.jpg 파일:장판파의 응디 운장7.jpg

  1. 관우의 후손인 관충운이 6.25전쟁때 중공군으로 참전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