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기자 (고조선)

조무위키

주의! 이 글이 다루는 대상은 존나 미스터리합니다.
씨ㅡ발 뭐가 뭔지 몰?루겟소요. 무섭습니다. ㅠㅠ
주의! 이 글은 자ㅡ랑스러운 헬조선의 현실을 다룹니다. 이런 것들과 살아가는 당신에게 탈조선을 권합니다.
이 문서는 역사 속의 인물을 다룹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상은 역사 속의 네임드 급 인물들입니다. 이 틀은 고인이 된 대상에게 사용하십시오.
기자조선의 역대 국왕
주무왕 조선후 책봉 1대 기자 자서여 알려지지 않음
/40대손 부왕 기부
(기자조선 인정시)
기자조선의 1대 국왕
왕호 기자왕(基子王)
시호 미상
왕가 자씨(子氏) (성)
기씨(基氏) (씨)
왕조 기자조선
서여(胥余) 또는 수유
재위 불명
생몰 불명
후임 알려지지 않음


기자기자조선의 창립자다. 사실 실존하는 사람인지도 의문인 사람이다.

ㄴ 실존은 한다고 봐야한다. 사기 논어 등등 여러 고대서에 계속 등장하고 있으니 실존한건 맞는데 다만 기자가 조선으로 갔는데 이게 한반도까지인지 요서지방인지를 두고 논란이 계속 되고 있다.

개요[편집]

본명은 서여(胥余)이며, 문정(文丁)의 삼남이자 제을(帝乙)의 동생이며, 은나라 31대 왕 주왕(紂王)의 셋째 삼촌이다. 기자는 기(箕) 지방의 땅을 봉(封)받고, 작위가 자(子)이기 때문에 기자(箕子)라고 일컫는다. 벼슬은 태사(太師)을 지냈으며 은나라의 운이 다하자 시서(詩書)·예악(禮樂)·의무(醫巫)·음양(陰陽)·복서(卜筮)의 무리와 백공기예(百工技藝) 등등.. 5천 명의 사람을 거느리고 기원전 1122년에 조선(朝鮮)으로 가서 현도와 낙랑과 평양에 도읍하였다. 동방군자국(東方君子國)을 건립했다. 이로서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 기자(箕子)가 조선에 살면서, 그 조선 백성에게 예의로서 가르치고 전(田)·잠(蠶)·직(織)을 일으켰으며, 백성을 위하여 8조금법(八條禁法)으로 다스렸고, 기자(箕子)는 주나라(周) 성왕(成王) 무오년에 죽었으니, 재위 40년이었고, 나이는 93세였다. 기자(箕子)의 40세손인 기부(箕否)의 시절 동방군자국(東方君子國)이 중국의 진시황(秦)에게 복속되었다가, 기부(箕否)의 아들 41대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쫓겨나서 기준(箕準)이 한반도의 한강 이남 지역인 대한민국 전라북도 서북부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익산)까지 도망쳐서 마한(馬韓)의 시조가 되었다. 이로서 동방군자국(東方君子國)의 현도(玄菟)와 낙랑(樂浪)과 평양(平壤)의 929년 통치 기간이 막을 내렸다.

존재의 논란[편집]

기자가 등장한 역사서중 가장 오래된 것은 '<상서>'에서 였는데, 여기서는 주무왕의 러브콜을 거절하고 조선으로 튀었는데, 그래도 주무왕이 이용은 해먹어야 겠어서 기자를 봉했다는 이야기로 등장한다. 그리고 '<사기>'에서는 주무왕이 직접 조선으로 보내서 기자가 나라를 일으켰다는 이야기로 등장한다. 기자가 조선에서 무슨일을 할 생각이었는지로 두가지의 이야기가 엇갈린다. 전근대시기, 한국은 이러한 내용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고구려, 신라는 기자를 신으로 숭배하였으며, 고려에서는 삼국유사가 편찬되기 전까지는 기자가 우리이 시조라고 생각했다. 이후 조선에서 사림, 실학자들과 같은 유림들이 기자를 고조선의 뿌리로 생각했다.

이러한 상서와 사기의 내용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주의 사학'과 '실증사학'의 대두되면서부터였다. 민족주의 사학에서는 중국인 기자가 한국의 뿌리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실증사학에서는 상기한 사기와 상서의 내용이 엇갈리고 고고학 발굴 결과를 보면 고조선의 초기 영역에 해당하는 요동반도는 기원전 3세기쯤 되야지 중국문화권에 들어오니 마니 하던데, 주나라초기 사람이 한국에 나라를 세웠다면, 요동반도에 서주시대 유물이 나와야 한다며 이의를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