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조무위키

대문으로 가기

주의! 잦은 주작이 일어나는 문서입니다!!
이 문서는 관련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계속 수정되며 날아오르고 있는 문서입니다.
곧 모 마주작의 금칙어로 설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날아오르라 주작이여!! 주작작 주주작 주작작 주주작!
파일:마주작정사각형.JPG
이 문서에서 다루는 대상은 국제적으로 나라 망신만 시키고 다닙니다.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나라 망신으로 국격을 떨어뜨리는 리버스 두유노클럽 회원을 다룹니다.
당신이 외국에서 이 새끼를 만났다면 당황하지 말고 외국인과 손에 손잡고 이 새끼를 조져주세요.
안 그러면 당신도 같이 응징당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OECD 포럼에 나가서 머한민국에선 초등학생이 매일 강간당한다고 구라친 배리나
도쿄올림픽 중계에서 외교도발 광역기를 날린 엠빙신이 있습니다.


개요[편집]

광주사태는 빨갱이 김대중으로부터 사주를 받은 광주지역 불순분자들이 국가 전복을 목적으로 선동하여 일으킨 내란 폭동이며 김대중으로부터 거사자금을 받은 정동년이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켜 학원소요 사태를 민중봉기로 유도 발전시켰다.

 
신군부, 1980년 5월 21일 사건 발표 중

신군부가 20여 명의 민주화 운동가들이 북한(또는 김대중)의 사주를 받아서 내란음모를 계획하고, 이윽고 광주 사태를 일으켰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

이 사건으로 김대중은 사형 판결을 받고 안기부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 자백을 강요 당하다가 저승 갈 뻔했지만 일본의 스즈키 젠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바티칸 시국의 교황 바오로 2세 등 이름 좀 있다시피 했던 인사들이 그의 처벌, 사형을 정지하라는 서한을 전두환 정부에게 전달하는 등의 수고를 들이면서 김대중은 말 그대로 죽다가 살아났다.

구속에서 풀어주는 조건으로 김대중은 두 번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 전두환의 체제를 인정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서약서(앙망문)를 작성하고, 1983년 1월에 미국으로 강제 추방 당한다.

1995년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자 관련자들의 재심 청구로 명예회복이 이루어졌고, 김대중은 대통령 임기를 마치는 2003년에 재심을 청구해 2004년 무죄를 선고받았다.

상황[편집]

1979년 10.26 사태박정희가 사망한 이후 그해 12월 12일 전두환을 두목으로 하는 하나회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면서 정권을 찬탈하여 신군부로 들어섰다. 이듬해 대학가에서는 본격적으로 학생 단체, 시민 단체가 하나둘 탄생했다. 그들은 비상계엄 해제와 신군부 퇴진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상황을 반길 리 없는 전두환은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으로 있었던 이학봉에게 배후에서 해당 시위를 조종하는 정치인들을 체포하도록 했다. "으~데서 감히 비상계엄령을 씹고 시위하노? 이렇게 사회 혼란 조장하다가 북한 쳐들어오면 우짤끼고? 18년 동안 대한민국의 황금기를 이끌어내신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하루아침에 고인이 된 이런 시국에 머하는 짓들이가? 에헴!"라며 말이다.

이 상황을 지켜본 김대중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신군부에게 꼬투리를 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북한 공산집단이 우리의 과도기를 이용하여 남한에 대해 폭력에 의한 그들의 야욕을 성취하려는 음모를 획책하려는 일이 절대 없기를 엄중 경고한다."면서 "국민과 학생, 근로자들은 질서를 지키고 사회 안정을 유지하여 북한공산집단이 오판할 계기를 주지 말아야 한다."라고 발언한다.[1]

5월 16일에는 '국민연합'이라는 재야정치단체가 '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향후 정치 일정 구체화'를 정부가 18일까지 실행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김대중은 국민연합에 5월 20일에 예정되어있던 임시국회 소집을 이유로 '18일까지'라고 하는 초안을 '22일'로 연장할 것, 그리고 '계엄군은 상관 명령에 복종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조항은 내란 선동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이유로 삭제할 것을 당부하면서 수정본이 발표되었다.[2]

그러나 다음 날에 난데없는 비상계엄 전국확대로 인하여 국회의원이 영장도 없이 대거 체포되는, 사사오입 개헌이나 하던 시절에나 겨우 볼 법한 사태가 발생한다. 이날 김대중은 동교동 자택에서 수도경비사령부(現 수도방위사령부) 헌병단에게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됐다.

전개[편집]

이 문서는 확고히 검증된 진실일 수도 있고 교묘하게 거짓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문서의 내용은 얼핏 봐서는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의 내용이 있습니다.
이 문서를 읽을 때는 안심하셔도 되니 마음껏 편안하게 보셔도 됩니다.
하지만 만약 이 내용에 낚여서 피해를 볼 경우 원 작성자를 굴다리로 불러내서 존내 패버릴 것을 추천합니다.
"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응?? 사실인가??? 시발 모르겠다."

60년대 말부터 감옥의 문턱과 죽음의 문턱을 자주 넘나들던 김대중은 사실 깜빵 생활을 하면서 마냥 놀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옥중 폐관수련을 거듭하면서 사실 텔레파시를 보내는 초능력을 갖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서 김대중은 감옥에 있으면서 광주 시민들에게 소요를 일으킬 것을 지시한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깔끔하게 진압한 신군부는 안기부 지하에서 설렁탕, 두루치기, 전기구이, 통닭구이, 라면국물, 볼펜심 등을 김대중에게 선물하면서 텔레파시의 정체를 밝혀내는 수완을 보여주었다.

이후[편집]

1980년 9월 17일 군사재판(군법회의)이 열리면서 김대중에게 내란음모와 국가보안법, 반공법, 계엄법, 외국환관리법위반한 죄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계엄법에 따르면 당시 군법회의는 계엄법 위반 여부를 심사할 권한이 없었지만 법은 멀고 사형대는 가깝기 때문에 상관없는 일이라 카더라.


정의가 구현되었습니다!
이 문서에서는 사실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정의를 존나 드물게도 구현한 보람찬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김대중은 법정 최후 진술을 하는 자리에서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 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라고 말을 남겼는데 이게 국제사회에게 큰 감동을 선사해준 덕분에 김대중은 순식간에 씹인싸가 되었고 가톨릭 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간청, 전두환 자기가 지지했던 미국의 차기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김대중 사형 극구 반대 및 사면 요청과 박정희가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을 일본에 진사 사절단으로 보내고, 한진그룹 회장 조중훈을 시켜 사죄금 3억 엔을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갔다 바치고, 김대중이 일본에서 했던 유신반대활동 건은 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한일 정부끼리의 정치적 합의를 했는데 이것을 전두환이 위반했고 그 계기로 일본 집권여당 자민당 중도파, 공명당과 야당인 사회당, 공산당 등 일본 국회의원들, 일본 국민들이 김대중 구명운동을 거세게 벌였으며 일본 총리 스즈키 젠코가 주일 한국대사 최경록과 면담에서 김대중이 극형에 처해지면 한일 교류가 완전 끝장나고 북한과의 수교 여론이 커질 수 있다며 전두환 정권을 압박했다. 사형을 하지 말라는 압력을 온갖 세계 지도자, 종교인, 인권 단체로까지 받게 되었다. 이걸 견디지 못한 전두환 정권은 결국 무기징역, 얼마 안 지나서 20년 형으로 감형시켰다.

이 사건으로 씹창이 나버린 국가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 당시 안기부장 노신영은 김대중에게 미국 망명을 권유했고 그 조건으로 서약서를 제출할 것을 걸었다. 김대중은 거절했으나 측근들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자 마음을 바꿔 수락한다. 여기에서 생겨난 것이 바로 앙망문 되시겠다. 앙망문을 쓰고 김대중은 ㄹㅇ 미국으로 망명해버린다.

복귀[편집]

미국에서 요양하던 김대중은 이 썰을 미국 정치인들에게 풀어냈는데 좋게 말할 리가 있겠나. 결국 김대중은 12대 총선을 겨냥하여 한국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발표를 했다.

당시 미국 측은 김대중이 귀국한다는 말에 기겁해서 만류했지만 총선을 앞두고 그대로 미국에만 눌러있을 수 없던 김대중은 결국 귀국한다. 다만 미국의 저명인사들을 함께 보내 김대중에게 해를 가하지 못하게 하려 했으나 우리의 병신 안기부 요원들은 미국인이고 뭐고 죄다 내팽개치면서 김대중을 끌고 가서 가택 연금을 때렸다. 덕분에 전두환 정권은 다시 빡친 미국에게 도게자를 해야 했다. 병신 문어 새끼

김영삼은 2년 만에 돌아오는 절친을 만나겠다고 외출 준비를 했지만 대문 앞을 지키던 경찰들에 의해 저지당하고 만다. 이 당시 경찰들과 그 배후의 전두환에게 날린 일갈이 유명하다. 자세히 보면 간부를 포함한 경찰들이 김영삼이 일갈을 할 때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듣기만 하고 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