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역사 속의 인물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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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 백의사
단장 염동진
단원 유진산 박용직 백관옥 김후옥 상하이 조


김후옥(金厚玉)
출생 1908년 전라남도 광주군 공수방면, 기례방면(現 광주광역시 동구 수기동)
사망 1981년 서울
국적 대한제국, 일본제국, 대한민국
본관 미상
소속 광주YMCA,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 대한민청
담당배우(야인시대) 송금식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 제1 공화국시기에 활동한 한국의 체육인이자 정치깡패. 본래 수기동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숭일학교와 서울 경신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서울 경신학교 3학년때 일제에 항거하여 동맹휴학을 하면서 학교를 중퇴했고 이후 연희전문학교 수물학과에 진학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서울 중앙YMCA 체육관에 다니며 유도, 권투, 검도, 역도를 익힌 스포츠맨이 되었다.

1929년, 광주 항일학생운동이 발발했을 때 이에 참여했다가 6개월의 옥고를 치뤘고 1930년 10월 출옥한 뒤 광주 숭일학교에 체육관을 설립했다. 하지만 강사 자격증이 없었기 때문에 불법운영으로 면허가 털렸고 그는 자격증을 얻기위해 다시 서울로 올라가 피똥을 싸는 노오력을 했다고 한다.

자격증을 취득한뒤엔 다시 고향에 내려가 1931년 기독교성향의 보이스카우트였던 소년척후대를 조직, 녹성상회 건물주[1] 광주 YMCA 체육부 간사로도 활동했는데, 당시 광주의 유일한 조선인 유도사범이었다고 했던 것을 보면 엄청나게 잘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수양동우회사건 + 흥업구락부 사건등으로 기독교, 우익계열 항일단체들이 개작살나면서 좆본에 투옥, 고문을 받은뒤 8.15 광복이전까지 광주 방림동에서 칩거했다.

광복이후 서울로 올라가 대한민청과 유사한 우익계열 정치깡패단체인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에서 활약했고 6.25 전쟁에서도 활약했다가 전후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으로 내려간 뒤 광주YMCA가 금남로 1가에 지금의 회관을 재건하고 1971년 체육관을 설립하자 1981년 죽을 때까지 광주 YMCA의 체육관장으로 지냈다.

야인시대[편집]

55화에서 상하이 조와 유도 대결을 하면서 첫등장했다. 상하이조가 발리면서 아아아아앍♂ 졌수다!같은 깊고 어두운 대사를 했던 그 유도씬이 맞다. 하지만 실제 김후옥의 전투신은 여기서 끝이다.

실제인물이 연희전문학교출신에 광주에서 체육관을 운영했던 것과 달리 여기선 서울에서 보성전문학교출신에 서울에서 유도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유도강사로 있으면서 김무옥(고향후배 + 제자)과 같은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고 한다.

김두한이 전향한 뒤 대한민족청년단을 만들자 훈련과장으로 임했고 74화에서 우미관패가 포천 산정호수에서 혹부리우스를 암살하러 갔을 때 가이드로 활동하기도 했다.

출처[편집]

[1]

  1. 광주 사직공원 방송국 입구에 있던 2층건물로 거북선표 고무신을 팔았으며 뒤편에는 체육관을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해당 건물의 2층은 광주 높으신분들의 사교장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