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치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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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근대 중국의 저술가, 사상가, 저널리스트, 교육자, 정치인이다. 한국식으로 읽으면 양계초

세계 4대문명이라는 좆같은 개념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원래 같으면 다른 문명에 비해 한참 늦는 짱깨문명은 끼워주면 안 되지만 이 새끼가 짱깨 문명도 넣자!라고 씨부린 바람에 4대 문명이라는 기괴한 개념이 탄생했다.

생애[편집]

~변법운동[편집]

1873년 광둥성 구석 어느 깡촌의 향신+소농 집안 출신이다. 어릴때부터 대가리 좋다고 소문난지라 집은 가난했지만 일가 전체가 이새끼한테 몰빵했고, 량치차오 역시 이에 보답해 11살에 과거 1차시험을 통과하고 16살에는 2차시험까지 통과한다.

여기까지는 범생이였지만 캉유웨이를 만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당시 30대 초반이던 캉유웨이는 유교 탈레반 중에선 매우 이단적인 새끼였다. 비록 과거는 2차시험도 통과 못했지만 당대 중국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고 허구한날 상소를 올려 개혁을 주창하던 새끼였다. 현대 한국의 사시 떨어진 로스쿨 폴리페서, 행시 떨어진 행정학과 폴리페서라고 생각하면 된다. 근데 캉유웨이가 워낙 아가리를 잘털었던지라 량치차오도 캉유웨이의 아가리질에 넘어간다. 그리하여 캉유웨이의 밑에서 20살이 되는 1893년까지 4년간의 허송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가 1895년에 2차 시험에 합격한 캉유웨이와 함께 최종시험을 보러가는데 여기서 재밌는 일이 발생한다. 캉유웨이는 이단으로 낙인찍힌 놈이어서 시험 감독관들도 이 개새끼 합격시켜주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캉유웨이가 쓴것으로 보이는 시험지를 갖다 버리고 합격자 발표를 했는데 이게 왠걸? 알고보니 갖다 버린게 량치차오꺼라서 캉유웨이가 합격해버렸다. 사실 과거는 페이크고 캉유웨이와 량치차오가 베이징에 올라온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이새끼들은 또 상소를 쓰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래서 몇달을 머물며 상소를 쓰고 학회를 만들고 신문을 발행한다. 이는 만주 귀족 틀딱들에 의해 중단되었지만 변법파가 광서제의 지원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여담으로, 변법파에게 우호적이던 리훙장도 지원금을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변법파는 '너같이 나라 말아먹은 병신 매국노가 주는 돈은 안받음 ㅅㄱ'라면서 꺼지라고했다.(사실 상소의 주된 내용도 청일전쟁 말아먹은 리훙장 탄핵하라는거였다. 그런데도 지원하려한 리훙장이 대인배인듯)

이후 2년동안 고향 광둥에 내려가 선생질을 하는데 이때 만난 제자 중 차이어가 있었다.[1] 1898년이 되자, 베이징에서 공무원을 하던 캉유웨이[2] 가 량치차오를 추천했고 둘은 함께 변법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물론 변법운동을 주도한건 캉유웨이였고 당시의 량치차오는 개쩌리였다. 그러나 100일도 못되어 만주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캉유웨이도 쿠데타 움직임을 알았지만 문제는 막을 수단이 없다는거였다. 당장 리훙장을 운지시킨데 한몫 거든게 변법파 아니었던가? 그래서 캉유웨이는 변법파 강학회에 한발 걸치고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역쿠데타를 제안했지만 문제는 위안스카이는 만주 귀족한테도 줄을 대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위안스카이의 통수로 인해 변법운동은 운지했고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좆본으로 망명했다.

좆본 망명~신해혁명[편집]

좆본으로 런한 변법파 일당은 1900년의 의화단 폭동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염치없게도 지들이 실각시켰던 리훙장에게 광서제 복위, 변법파 복권을 요청했다. 이것이 거절당하자[3] 청이 자기들의 애국심을 몰라준다는 생각에 분노한 량치차오는 공화주의+연성자치로 전향했으나, 미국 여행[4] 을 다녀온 후 '중국인은 아직 너무나도 부족하다. 중국인의 계몽을 위해 점진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다'라면서 입헌주의자로 다시 전향해 캉유웨이와 함께 보황회를 이끈다. 다만 혁명파의 주장도 일부 수용해 광서제를 총통으로 하는 공화국 체제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이때부터 량치차오는 전형적인 계몽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주도한건 교육, 언론을 통한 계몽+민권 신장과 이를 위해 현실에서 말하는것처럼 글을 쓰자는 '백화문', '언문일치'운동이었다. 이때 량치차오가 글을 쓰던게 당대 짱깨 넘버원 신문이었던 신민총보다. 또한 계몽주의자긴 했지만 왕징웨이같은 꼴통은 아니었다. 미국사회의 빈부격차, 인종차별에도 주목하고 서양이 사회, 국가관은 우수하지만 개인의 수양, 가족관은 중국보다 못하다고 보는 등 동서양 각각의 장단, 문화적 차이가 있는거라고 보았음. 중화문명도 훌륭하지만 생존을 위해선 근대화가 불가피하다는 정도?

또한 이 시절부터 캉유웨이와의 관계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량치차오가 각종 번역서를 읽고 미국에 다녀오면서 계몽주의자가 된 반면 캉유웨이는 여전히 유교탈레반이었다.[5] 캉유웨이는 제자의 연성자치 주장+혁명파와의 교류를 띠꺼워했고 수시로 파문하겠다며 협박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근대적 사제관계를 부정할 수 없었던 량치차오는 캉유웨이가 지랄떨때마다 죄송하다며 빌었다. 제자가 의심스러웠던 캉유웨이는 별 개좆같은 건수들을 들어 시비를 걸었는데 심지어 량치차오가 헤어스타일을 서구식으로 바꾼거까지 트집잡고 지랄했다.(캉유웨이는 귀국하면 바로 변발할거라며 스킨헤드 유지했다) 게다가 둘 사이에는 경제적 문제도 있었다. 경제관념이 부족했던 유교 탈레반 캉유웨이는 망명 생활중 돈을 존나게 썼고 쓸데없이 사업을 벌이다가 싸그리 말아 먹었는데, 이거론 모자랐는지 이게 다 량치차오 때문이고 자기는 책임 없다며 선동하고 다녔다. 이리하여 사제관계는 점점 씹창이 났다. 신해혁명 직후쯤 되면 복벽을 주장한 캉유웨이에게 량치차오가 그만 은퇴하시라고 권하는 지경까지 간다.

혁명파와도 좋지 않은 관계였다. 혁명파는 청조의 존속을 주장한 량치차오를 '니 종만주족 적폐 아님?'이라면서 욕하기 시작했다. 사실 사상 차이도 차이지만 량치차오가 쓸데없이 문제를 만들었다. 원래 쑨원이랑은 첨엔 제법 친했는데 둘이서 한창 연대할까말까 하던 시절에 량치차오가 쑨원의 대표적 지지기반이던 하와이 차이나타운을 보황회로 전향시켜서[6] 쑨원이 분노한것.(쑨원이 김대중이라면 하와이는 목포, 신안이었다) 쑨원 입장에선 자기 본진을 빼앗아간 것만으로도 존나 열받는데, 그놈이 앞에서는 연대 주장하면서 뒤로는 텃밭 빼앗는 통수를 시전했다고 생각하니 더 열받았다. 덤으로 나이도 쑨원이 7살 더 많아서 어린놈의 새끼가 상도덕이 없다며 또 한번 분노했다고 한다. 이에 정알못 량치차오는 자기는 단순히 연대목적으로 그런건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거고 앞으로도 선의의 경쟁을 계속 하자고 답했다. 이에 개빡돈 혁명파는 량치차오와 키배를 벌여 항복 선언을 받아낸다. 그런데 이걸 승리라고 하기도 뭐한게 이 키배는 6명이 량치차오 하나를 다굴깐거였다. 또한 혁명파는 논리로 승부하기보단 반만주족 감성팔이를 시전하고 보황회의 정치자금 횡령[7] 을 물고 늘어졌다. 게다가 신민총보 사무실들에 의문의 화재사고[8] 가 일어났고 일부 혁명파 당원들이 연설하는 량치차오를 찾아가 폭행했다. 이후에 량치차오가 ㅈㅈ친것

캉유웨이, 쑨원 모두에게 욕을 쳐먹었지만 아무튼 중국 국내의 향신층(얘넨 어쨌든 기득권이라 청조 멸망으로 인한 혼란까진 원하지 않았다)은 량치차오의 주장을 제일 그럴싸하다고 여기며 밀어주기 시작했다. 이에 때가 되었다고 직감한 량치차오는 좆본령이던 타이완으로 이주해 각을 보기 시작했으며 사실상 입헌파의 거두가 된다. 량치차오의 주장=청말 향신층 입헌파의 주장이라고 봐도 무방함. 이때의 량치차오는 그야말로 청말 입헌파의 전형으로, 만주족 주도로 1906년부터 시행된 신정은 복고적이라며 반대했고 향신층의 보로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신해혁명 당시 윈난 독립을 주도한게 그의 꼬붕 차이어였고 쓰촨, 후베이의 신사층한테 독립하라고 선동한 것도 량치차오였다. 다만 연성자치론을 주장한 것뿐이지 이때까진 입헌주의자였다. 그가 공화주의자로 돌아서는건 신해혁명 이후 청조정의 권위가 완전 상실되고나서다. 다른 입헌파들처럼 신해혁명 이전까진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북양정부 시절[편집]

1911년에 신해혁명이 터지자, 간보던 량치차오도 중국으로 돌아온다.[9] 혁명파도 그랬지만, 량치차오 역시 위안스카이 독재 정권 성립에 기여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량치차오가 훨씬 적극적이었다.[10] 량치차오는 '위안스카이가 변법운동을 통수친 개새끼인건 사실이지만 혼란한 시대상황을 정리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수행할 수 있는것도 그뿐이고, 국민당은 너무 과격하며, 중앙집권이 필요하지만 내전을 벌일수는 없으니 연성자치론이 최선'이라면서 온건 계몽주의자들과 온갖 떨거지들을 모아 진보당을 결성해 위안스카이 정권에 적극 협조한다. 심지어 쑹자오런이 암살당했을 때도 위안스카이에게 협력한다. 쑹자오런은 (혁명파 중엔 몇안되는) 량치차오와 뜻이 비슷한 의회주의자였고 개인적인 친분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안스카이를 지지한 것이다. 이로인해 량치차오는 원씨네 개새끼라는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게 된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계속해서 깽판을 쳤고 결국 줄곧 그를 옹호하던 량치차오마저 돌아서게 된다. 위안스카이는 량치차오가 야심차게 만든 '인재 내각'을 바지사장으로 만들고 의원들을 감금, 협박하는 부정선거를 통해 독재를 했다. 여기에 좌절한 량치차오는 정계에서 은퇴한다. 아무튼 위안스카이의 깽판은 계속되어 량치차오 은퇴 이후에도 일본의 21개조 요구 수용과 황제 참칭같은 무리수를 뒀고, 이에 량치차오는 차이어를 앞세워 탕지야오와 함께 호국전쟁을 일으킨다.(1915년) 양광 지방 총독들이 반원파로 돌아선것, 진압하러 왔던 펑궈장이 반원파로 돌아선 데에도 량치차오의 말빨이 한몫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당시 위안스카이가 캉유웨이에게 제자를 설득해라고 요청했는데, 캉유웨이는 이걸 들어주는 척하면서 량치차오를 찾아가 이참에 청조 복벽을 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량치차오가 이걸 거절하면서 사제관계는 더더욱 씹창남

위안스카이의 운지가 확실해지자, 승기를 잡은 량치차오와 차이어는 돤치루이와 리위안훙을 수장으로 하는 정부를 요구했고 북양군벌들도 이를 수용했다. 이때부터 량치차오는 돤치루이와 붙어먹게 된다. 리위안훙은 의회주의를 지지하는 특이한 군벌이었지만 실권이 좆도 없었다. 애초부터 량치차오랑 펑궈장의 지지 없었으면 그 자리까지 가지도 못했을게 리위안훙이었다. 반면, 돤치루이는 실권이 컸고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에 크게 반발한걸로 인해 당시까지만 해도 개념인 취급받는 인물이었다. 량치차오는 아직도 '과격한 국민당을 냅두면 또 다시 내전이 일어날 확률이 높을 것이고 차라리 북양군벌로 제어하는게 낫다'[11]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번엔 돤치루이 편에 섰다.

그는 돤치루이 정권에 협력하여 국민당과의 정치투쟁에 앞장섰고, 서구식 헌법 제정을 시도했으며, 독일은 병신이고 영미가 짱이라면서[12] 연합국에 가입하라고 부추겼다.(당시에는 열강들 싸움에 중국을 팔아먹는다고 매국노 소리 들었지만 이 덕분에 중화민국은 1차대전 승전국이 된다. 명목만 승전국이고 실제취급은 병신이라는게 문제였을뿐) 국민당 견제와 연합국 가입까지는 좋았다. 반면 돤치루이 역시 독재 유망주 군벌 매국노였던지라 헌법 제정은 시원하게 망했다. 이때부턴 단씨네 개새끼 소리도 듣게된다. 여튼 헌법 제정이 좆망으로 끝난 후, 량치차오는 슬슬 방향을 돌려 정치 문제에서 손을 떼고 재정관련 업무를 맡게 된다.

그러다가 1917년 7월, 리위안훙은 돤치루이 견제한답시고 장쉰[13] 을 불렀는데, 장쉰 이새끼가 뜬금없이 청조복벽을 시도했다. 이에 복벽에 반대했던 량치차오는 복벽주의자들을 존나게 깠는데 이중엔 옛 스승 캉유웨이도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스승님께 빌빌 기었겠지만 이미 시대는 달라져있었다. 그는 '강가에서 노니는 노인네가 의기양양 강경하게 대들며 인민을 배반하고 도적의 앞잡이질을 한다'[14], '허풍을 떨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늙은 서생은 정국의 고충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복벽파는 위안스카이와 똑같은 매국노이니 복벽파를 타도하는건 위안스카이를 타도하는 것과 같다'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캉유웨이를 강력하게 디스했다. 이걸 들은 캉유웨이는 당연히 틀니를 딱딱대며 '어린놈이,,, 웃어른도,,,스승도,,, 모르느냐~~'하면서 격노했고 결국 둘은 죽을때까지 화해하지 못했다.[15]

아무튼 장쉰의 복벽은 다른 군벌들의 다굴을 맞고 망했다. 심지어 리위안훙도 장쉰을 줘팼다. 장쉰이 운지한 후, 리위안훙은 장쉰을 부른 책임을 지고 하야했으며 그를 대신해 펑궈장이 전면에 나섰고 돤치루이의 권력이 더욱 확고해졌다. 원탑이 된 돤치루이는 장쉰 진압에 공을 세운 량치차오를 재정장관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북양정부의 막장스러운 재정은 량치차오가 해결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군비가 예산을 초과하는데 지가 뭔수로 해결하겠는가? 그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이걸 해결하긴 불가능했고 결국 '호국전쟁보다 더 어렵다'라고 한탄한다. 이에 돤치루이는 '서생 주제에 실제 정치에 대해 뭘 알겠나'라며 능욕했다. 이러던 와중에 이번엔 쑨원이 매국 독재자 돤치루이와 그 시다바리 량치차오를 타도하겠다면서 호법전쟁을 일으켰고(1917년 9월) 이로 인해 돤치루이가 사퇴하게 되면서 덤으로 짤린다. 얼마 후 쑨원을 역관광 보내고 복직한 돤치루이가 그에게 복직을 제안했으나, 량치차오는 매국노 취급 + 군벌정치에 환멸을 느껴 결국 다시 한번 정계은퇴를 하게된다.

정계은퇴 이후[편집]

여튼 은퇴한 량치차오는 유럽으로 떠났다. 1차 대전의 참상을 본 량치차오는 서구식 계몽주의의 결과가 전쟁인 것에 대해 아이러니를 느꼈고, 이때부터 무분별한 서구화에 반대하고 중국의 전통, 문화, 가치를 옹호하기 시작한다. 또한 소련이 신경제 정책을 실시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딴식으로 할거면 차라리 영미식 자본주의하라며 본격적으로 공산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한다.[16] 마지막으로, 돤치루이 정권이 강화조약 병신같이 맺는걸 직관한다.(돤치루이가 파리 강화회의 참관자격을 던져줬다. 참전에 공이 있다고 던져준건데 결과적으로 악수였음)

귀국한 량치차오는 주특기를 살려 돤치루이의 강화조약을 신문에 폭로했다.(1919년) 그리고 이게 5.4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신보를 통해서 5.4운동을 주도했다. 량치차오는 5.4운동에 굉장히 우호적이었는데 5.4운동이 주창한 신생활, 계몽주의, 백화문운동이 죄다 량치차오의 입맛에 딱맞는거여서 그랬다. 사실 량치차오 사상이 5.4운동에 많이 영향준 것도 있었고...[17] 5.4운동 이후에는 역시 대중 계몽을 주장한 내가 옳았다며 교육에 올인 + 가끔씩 국민당 디스하다가 1929년에 죽었다. 정치는 날로 개판이 되어갔지만 이쯤되면 포기한듯하다. 연성자치론자에다가 국민당이랑 원수였던지라 사후에는 찬밥 취급당했다. 그래도 만주사변은 안보고 죽어서 다행이려나?

여담[편집]

저술가, 사상가, 저널리스트, 교육자로서는 ㅆㅅㅌㅊ가 맞았지만 정치인으로는 영 아니었다. 나도 량치차오가 근대 중국 사상가 중 원탑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치경력은 병신짓한게 워낙 많아서 쉴드 못친다. 야인일때는 어마어마한 유망주였지만 실제 정치에서는 죽쒔다. 괜히 정치질하다가 사상가, 저술가, 교육자, 저널리스트로 쌓은 기반, 명성 다 무너졌다. 그나마 잘한게 있다면 반원전쟁때 앞장선거 정도. 사실 반원전쟁을 잘만 이용했으면 짱깨 원탑이 될 수도 있었을거다. 그러나 정치적 감각이 부족했던지라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돤치루이 밑에 기어들어갔다. 차이어가 위안스카이 따라 뒤져버려서[18] 군사적 기반이 전무했다는 문제점도 있지만 끝까지 돤치루이랑 놀아나다가 매국노 소리까지 들은거 보면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량치차오의 정치력 부재였다. 솔직히 차이어 요절 안했어도 달라지는건 없었을듯.

당대에도 철새라고 욕 존나 먹었다. 하지만 자기 영달을 추구한적은 없기때문에 철새라고 비하하기는 거시기하다. 사실 미국 여행 이후로 계몽주의자+온건 개혁파 한길만을 걸었다. 최대한 갈등을 줄이고 주어진 상황에서의 최선을 추구했다고 보면 될듯. 청조 지지했던거, 공화주의 지지했던거, 연성자치론 지지했던거 전부 비슷한 맥락으로 보면 된다. 근데 솔직히 량치차오가 하자는대로 했으면 중국 근대사가 그렇게 혼란스럽진 않았을거다. 뭐 너무 이상적이긴했지만

짱깨 본국에선 평가가 박한 편이다. 재평가가 되는 중이긴한데 아무래도 경력이 경력인지라 어쩔 수 없긴하다. 청조 지지+군벌(위안스카이,돤치루이) 지지+ 쑨원 비판+연성자치 지지+공산주의 비판+서구식 의회주의자까지 6연타석 홈런인지라... 당장 신해혁명도 최소 보로운동~위안스카이 축출까진 량치차오>쑨원인데도 그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받고 있다.

정치 빼고 다 잘했다. 좋게 말하면 다방면의 전문가였고 나쁘게 말하면 아무래도 전문성은 떨어졌다고 한다. 물론 전문성이 떨어진다는건 쩡궈판, 캉유웨이, 옌푸, 후스같이 한 우물만 판놈들에 비해 떨어진다는거고 좆문가새끼들이 비빌건 못된다.

급식 역사책에도 나온다. 아마 변법운동 나올때 한번, 5.4운동 나올때 또 한번 언급될거다.

짱깨에겐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조센진들은 망국노라면서 심심할때마다 욕했다. 마지막으로 량치차오의 조선인 비하를 보고 가자(사실 굳이 따지면 당대 짱깨중에선 친한파에 가깝다고 한다. 조선인 깐건 중국도 개혁 못하면 저꼴 난다고 경고한 것)

조선인들은 남에게 의존하는 근성이 매우 강하며, 주권의식이 박약하다.

조정에 벼슬하는 자는 오직 사당을 키워 서로 끌어 주고 서로 밀치며, 자기 자신만 알고 국가가 있음을 몰랐다. 좋아하는 자는 비록 사악한 악당의 무리라고 하더라도 모두 추천하여 높이 올려 주고 미워하는 자는 비록 공정하고 선량한 사람이더라도 멀리 보낸다.

조선 황제는 기지가 조금 있으나 독단으로 처리하기를 좋아하고 정해진 의견이 없으며 오직 그럭저럭 버티는 데에만 힘쓰고 사람들의 이목을 막으려고만 했다. 또 늘 외국에 기대어 그 지위를 보존하고자 했다.

조선 인민은 양반 관리들을 마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며 미천한 관직이라도 더 없는 영광으로 여겼다. 자기 자신만 알고 국가가 있음을 몰랐다. 그 일반 백성은 국사를 자신과 아무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고 줄곧 정치 분야에서 운동을 하지 않는다.

조선의 양반이라는 자들은 모두 높이 받들어지고 넉넉한 곳에 처하며, 교만하고 방탕하여 일하지 않고, 오직 벼슬하는 것을 유일한 직업으로 삼았다.

다른 나라에서 관리를 두는 것은 국사를 다스리기 위함인데, 조선에서 관리를 두는 것은 오직 직업 없는 사람들을 봉양하기 위함이었으며, 이들은 사리에 어두워 세계의 대세를 몰랐고 정치가 어떤 것인지도 몰랐으며 또 논의하지도 않았다. 배운 바를 빌려 관직을 구하는 도구로만 삼았다.

고고한 양반들은 이제부터 영원히 멸망하여 종이 되는구나. 아! 저들은 백성의 상전이 되어 구차하게 눈 앞의 안일을 탐했으며 나라가 망해도 나는 부귀하고 편안하다고 하는 자들이다.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개인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는 조선이 그 으뜸이다. 조선 사람은 말하기를 가장 좋아한다. 2,3인이 서로 만나면 하루종일 이야기로 날을 보낸다.

외국 사람으로 조선인의 성격을 조금 아는 자는 말하기를 "조선 사람이 말하는 것은 하나도 충심에서 나오는 말이 없다"고 한다. 조선 사람은 화를 잘 내고 일을 만들기를 좋아한다. 한번 모욕을 받으면 곧 팔을 걷어올리고 일어난다. 그러나 그 성냄은 얼마 안 가서 그치고 만다. 한번 그치면, 곧 이미 죽은 뱀처럼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는다.

조선 사람은 미래의 관념에 대하여 매우 박약하다. 소민은 한번 배부르면 서로 두셋이서 짝을 지어 차를 다리며 나무 그늘에 쉬면서 한담으로 날을 보낸다. 다시 내일은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할까 하는 생계문제를 계획하지 않고 유유한게 고대 태평시대의 사람과도 같다.

벼슬한 사람들도 또한 그러하다. 다만 오늘에 벼슬을 하고 권세가 있으면, 내일에 나라가 망하더라도 그러한 것은 관심 밖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한 후로부터 모든 사람은 다 조선의 운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조선 사람들이 스스로 이것을 알았는지 여부를 나는 감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정권 쟁탈하는 것을 보면, 진하고 좋은 술처럼 지극한 맛이 있어 하는 것 같다.

이번에 합병조약이 발표되자 이웃 나라의 백성은 오히려 조선을 위해 흐느껴 울며 눈물 흘렸는데, 조선 사람들은 술에 취해 놀며 만족했다. 고관들은 더구나 날마다 출세를 위한 운동을 하고, 새 조정의 영예스러운 작위를 얻기를 바라며 기꺼이 즐겼다.

대체로 조선 사회에서는 음험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자가 늘 강한 자가 되어 번성하는 처지에 놓였고, 정결하고 자애하는 자가 쇠멸하는 처지에 놓였다.

갑오 이후로 조선 황제는 일찍이 군신을 이끌고 조목에서 맹세하며 홍범 14조를 반포했다. 그 조목을 고찰해보면 우리나라의 헌법 강령 9년 주비안 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크고 사려가 주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단 맹세한 이후로 그 임금은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벌써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당시 조선을 유람했던 사람의 기록에 의하면, 단지 높고 커다란 약간의 건물들이 한성 안에 요란스럽게 세워져있고, 문에 크게 무슨 부 무슨 부라고 쓰여 있는데, 그 안에는 공문서 하나조차 없어 보였다고 한다. 대신들이 회의를 할 때는 탁자 하나에 둘러앉았는데,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한담이 끝이 없어 한마디도 정무를 논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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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량치차오와 차이어는 죽이 매우 잘맞았다. 량치차오가 좆본으로 망명가니까 차이어도 따라갈 정도였음
  2. 사실 관직엔 이름만 걸어뒀고 또 상소로 지랄하다가 탄핵먹은걸 광서제가 복권시켜준거임
  3. 어차피 실각했으니 돕기도 어려웠다. 근데 안도와줬다고 변법파 또라이들한테 또 욕먹었음
  4. 이게 사실은 캉유웨이가 보낸거였다. 량치차오가 쑨원이랑 가까워지려고 하니까 훼방놓을라고 보낸거임
  5. 오히려 광서제의 은혜를 갚아야한다면서 이전보다 심각한 수준의 친청주의자 유교탈레반이 되었다
  6. 그리하여 1905~1910년엔 혁명파가 하와이에서 걷은 정치자금이 보황파의 5%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쑨원은 그의 자서전에 이 당시가 신해혁명 이전의 가장 큰 위기였다고 적었다.
  7. 물론 이것도 캉유웨이가 사업한다고 날려먹은거다
  8. 자꾸 쑨원놈이랑 엮이는 량치차오를 띠꺼워한 캉유웨이 휘하 탈레반들이 벌린 일이라는 썰도 있다
  9. 사실 신해혁명 이후에도 한참 더 간보다가 쑨원-위안스카이 회담이 끝나서야 겨우 입국했다. 혁명 극초기에 입국거부 당한 탓도 있고
  10. 위안스카이와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권한건 캉유웨이였지만 그거 갖고 량치차오 쉴드쳐주긴 좀 그렇다
  11. 뭐 북양군벌이 분열되지 않았다면 나름 일리있는 말이다
  12. 근데 초기엔 독일 편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아무리봐도 답안나오니까 돌아섰음
  13. 하진이 십상시 견제한다고 동탁 데려온거랑 비슷하다
  14. <이거 때문에 캉유웨이의 별명이 '의기양양 강경하게 대드는 강가 노인네'가 된다
  15. 캉유웨이 뒤지기 1달전에 편지 써서 용서를 구했지만 답장을 못받았다
  16. 량치차오가 좋아한건 미국식 자본주의였고 그외에는 중국 경제 발전을 위한 노사협력, 국산장려 정도까지만 옹호했다. 국공합작 훨씬 전부터 쑨원한테 공산주의 색깔 빼라고 함
  17. 5.4 주도한 후스, 천두슈 모두 량치차오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8. 사실 차이어 장군님은 반원전쟁 때 이미 와병중이었다. 치료가 급했지만 매국노를 잡겠다며 전장에서 떠나지 않은 것. 이때문에 병이 악화되었고 얼마 못가서 죽은 위안스카이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