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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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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훗날 등장하는 여진족의 조상이 아닌가 하면서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퉁구스인계통의 부족.

애초에 이들의 조상격이라는 숙신, 읍루, 물길모두 이들이 동북지역 이민족중 얼굴마담인 애만보고 고구려, 듕귁등이 우덜식으로 통친것에서 비롯되었다보니 말갈또한 고구려송화강유역과 흑룡강성일대에서 살던 여러 이민족집단을 말갈로 통쳐 부르면서 사용되기 시작되었다.

근본이 근본이다보니 고구려듕귁뿐아니라 신라, 백제, 그리고 좆본에서 자기의 행정력 바깥에 있던 집단들을 숙신, 말갈로 부르게 되었다.

필자는 이 문서를 작성하는데 靺鞨7部의 實體와 渤海와의 關係라는 논문을 참고했다.

고구려시대 말갈[편집]

말갈이전에 있던 물길부터 부여를 공격하고 기존의 거주지였던 하얼빈지역에서 길림과 북류 송화강일대에 정착하기 시작했다.[1] 하지만 수서 <말갈전>에서 "읍락마다 추장이 따로 있어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라는 기술이 증명하듯 송화강유역에 물길만 있는게 아니고 구복불(具伏弗), 욱우릉(郁羽陵), 일련(日連), 사려이(匹黎尒)등 별의별 부족들이 산재했고,[2][3] 이들이 자체적을로 듕귁에 사신을 보내 조공까지 했다.

지들 머리통위에 있던 말갈을 본 고구려는 당연히 이새끼들의 행동을 예의주시했고 리즈시절이던 5세기 후반에 이들을 후드려패고 간접지배, 그러니까 고구려의 2중대로 만들고자 했다. 말갈하면 언급되는 속말(涑沫), 백산(白山), 안차골(安車骨), 백돌(白咄), 불열(拂涅), 호실(號室), 흑수(黑水)의 7부라는 개념은 고구려가 이렇게 말갈을 간접지배하면서 말갈포함 송화강유역, 흑룡강성일대의 부족들을 7개의 지역집단으로 구분하여 인식하면서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4] 일단 이새끼들을 지리적으로 보면 요렇다.

  흑수부


           안차골부
  백돌부   불열부     호실부
  속말부
  고구려   백산부

여기서 고구려와 비교적 가까웠던 6부는 직간접 지배를 했다. 어떻게 지배를 했는지 디테일에 대해서 자료가 부족하고 여러 썰이 있어서 그렇지. 하지만 과거 숙신, 읍루의 거주지에서 살던 흑수부는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서 지배못하고 내비뒀다. 그렇다보니 기존 읍루, 물길하면 언급되던 흉폭한 기질을 그대로 유지했고 고구려를 비롯해서 근처 국가들에게 중요한 군사적 위협이 되었다.[5]

지리적 문제때문에 조용히 혼자 남았던 흑수부와 달리 고구려의 2중대/고구려인으로 동화테크를(속말, 백산한정) 거친 6개지역집단의 군머는 '말갈군'으로 편제되어 운영되었는데, 저 집단에서 바가지를 박박 긁어서 수만단위 대군을 고구려 말기 신라, 당나라, 수나라와의 전쟁에 동원했다. 이때문에 말기부터 이러한 말갈의 지역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지면서 고구려에 동화되었고, 결국 고구려가 망하면서 그들의 사회는 완전히 붕괴되었다.[6] 멸망이후 말갈족들은 고구려유민들따라 어딘가로 사라지거나, 당나라로 압송되거나, 신라로 월남했다.

발해시대의 말갈[편집]

초기[편집]

좆망한놈들은 발해에 바로 흡수됬고 안망했던 놈들은 발해의 빵셔틀이 되었다.

고구려가 망하면서 말갈중 기존 6개부족은 고구려유민과 함께 영주로 압송당하거나 어딘가로 이주했다. 영주로 끌려온 고구려의 옛 장교 대조영은 고구려유민과 말갈잔당을 이끌고 돈화현으로 이주하여 발해를 건국했다.

한편 고구려가 멸망한 뒤 30년동안 기존 부족중 용케도 살아남았던 불열부, 그리고 씹듣보였다가 갑툭튀한 철리부, 월희부, 우루부는 동모산에서 발해가 건국되자 발해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근데 뱃지만 바꿨을 뿐이지 발해 중앙정부와는 대등한 위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발해의 속사정은 뤼순에 있었다가 러일전쟁좆본군이 슬쩍해서 지금은 고쿄 건안부(建安府)앞 뜰에 있는 '홍려정석각(鴻臚井石刻)'에서 잘 드러난다.

홍려정 석각은 당나라의 관료 최흔(崔忻)이 발해 대조영에게 좌효위원대장군발해군왕(左驍衛員外大將軍渤海郡王)으로 봉하면서 또 선로말갈사(宣勞靺鞨使)로 파견되었던 것을 기록한 비석이다.

본래 말갈이 자체적으로 조공할 때 현대기준으로 조양(朝陽)찍고 통요(通遼)의 시라무렌강 찍고 조아하찍고 송원(松原)찍고 말갈까지 갔다.[7]그런데 먼저 찍고가야할 조양이랑 시라무렌강지역의 도로가 거란, 해족, 돌궐때문에 털렸다. 그런데 발해는 또 족쳐야겠으니 발해가 통합하려던 우루, 월희, 철리, 불열등의 말갈로 후장을 뚫어보겠다는 실로 북괴중공스러운 생각을 해서 선로말갈을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흔은 대조영을 책봉하는 임무도 맡았으니 부업으로 바로 처리하면 될일이었다.

암튼 이런 의도로 시작된 최흔의 말갈선로는 발해의 지원아래 별일없이 조용히 끝났다고 한다. 이런이유로 발해국왕은 월희, 불열, 우루, 철리등의 말갈세력들을 빵셔틀로 거느린 담당일진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한동안 발해말갈(潑海靺鞨)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발해의 무왕은 아래 후술할 흑수말갈토벌이후 인근 말갈들을 다시한번 담구면서 지역집단을 붕괴시키기 시작했고 결국 철리, 월희, 불열, 우루등은 740년대를 기점으로 독자적으로 조공단을 보내는 세력에서 읍락 추장들이 좆본으로 가는 사신 따까리나 하는 발해인으로 완전히 편입시켰다.

한편 지리적 문제때문에 독자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흑수말갈의 경우,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부족사회가 붕괴되기는 개뿔 부족이 더 번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호재에서도 정치적 통합이나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 나아가는 개혁따윈 없었다...[8]

하지만 흑수말갈을 방치하다시피했던 고구려와 달리 발해는 외교활동을 할때는 아예 못하게 막거나 설령 하더라도 통보하고 발해사신도 같이 따라가 감시하는 방식으로 흑수말갈을 통제했다.

무왕의 말갈토벌 이후[편집]

빵셔틀도 아니고 이젠 발해가 갈아버렸다.

그런데 발해의 국부 대조영이 죽고 아들인 발해 무왕이 즉위할 때 국제정세가 완전히 바뀌었다. 내부부족이 이탈하고 묵철가한이 지쟈스만나러 가면서 잠깐 쇠퇴하던 돌궐은 후임이었던 비가가한의 신들린 수습으로 예토전생에 성공하고 다시 당을 공격했고, 이때문에 후방안전을 위해 발해에게 고막해와 거란을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말갈을 확실하게 제압시키고자했던 무왕은 당의 요구를 씹어버리고 '발해말갈'이라 불리던 발해내 말갈세력들을 제압하는 쪽으로 갔다. 때문에 원군요청도 씹히고 그동안 했던 말갈선로도 물거품이 되어 분노한 당나라는 후방에서 번성하던 흑수말갈을 통해 뒷치기를 하고자 했다. 그리고 흑수말갈은 726년, 발해에게 아무런 통보도 하지않고 직접 당에게 조공한다.

안그래도 말갈토벌에 열이 올랐던 발해무왕은 이걸로 제대로 빡쳤고[9] 주제를 넘었던 흑수말갈을 작살내버렸다. 그리고 월희, 우루, 철리, 불열등 미리 숙였던 발해내부의 말갈세력도 이후에 수도를 불열부의 땅이던 상경으로 옮기면서 지대로 쳐맞고 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발해내 말갈은 741년, 흑수말갈은 762년의 조공을 끝으로 조공이 끊기다가 나중에 다시 조공을 재개했지만 조공단은 발해왕족이 감시원으로 동행하고 부족의 수령이 좆본으로 가는 사신 따까리역할만 하는 수준으로 좆망했고 발해는 족친 말갈의 땅에 여러 주현을 설치하여 5경 15부 62주 100여개현이라는 행정체제를 정비했다.

말기[편집]

어느왕조든 좆망테크를 타면 행정력도 약해지는법. 당연히 발해도 좆망테크를 타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극도로 약화되었다. 그동안 발해앞에서 숨죽이고 있던 수많은 말갈부족들이 고개를 들고 깽판을 치기 시작했다. 발해말갈로 분류되었던 말갈족들중 일부였던 철리말갈은 철리국을 세워 거란시대에도 활동하는등 존나 답이없어졌다. 흑수말갈은 이때부터 일부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낼 정도로 세력을 키웠고[10] 일부는 내전으로 개판난 신라, 특히 가장 북쪽에 있던 삭정군천정군지역을 공격, 약탈하거나[11] 신라로 들어가 그 내전에 개입했으며 다른 일부는 여타 말갈의 잔당과 함께 스까되어 여진이란 새로운 세력을 만들기도 했고 철리부의 경우 존나 운좋게 예토전생해서 독자세력을 만들기도 했다.

이중 여진으로 개편된 말갈제부족의 잔당들은 발해멸망이후 거란이 만주지역 민족들을 여진을 중심으로 인식, 통치하게 되면서 동북지역 민족들의 얼굴마담이 되었다.

부족[편집]

위에 언급된 부족들중 고구려의 일방적인 분할등으로 인식된 7개부족과 철리, 월희, 우루등 발해때 흡수된 부족들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1. 속말부(涑沫部) : 지금의 길림을 비롯하여 북류송화강 유역에서 살았다. 494년 부여가 장수왕에게 나라를 상납하게 만든 주범으로 6세기까지 바로 밑에 있는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고구려가 땅끄로 밀어버리고 직접지배하면서 이근행의 애비인 돌지계따라 요서로 이주한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고구려에 동화되었다. 발해의 국부인 대조영은 속말부출신의 고구려인이라고 하는데, 속말말갈이라는 것에 오르가즘을 느낀 중공에 의해 짱깨가 되부렀다. 8ㅅ8 말갈의 고고학발굴역사에서 흑수부와 함께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이들의 흔적이 남은 유적으로는 길림성 장춘시 유수현 노하심 유적과 대해맹유적, 길림시 영길시 사리파 유적을 예시로 꼽을 수 있다.
  2. 백산부(白山部) : 지금의 백두산일대와 연변지역, 즉 함경도, 육진, 혼춘, 그리고 로씨야 연해주의 크라스키노, 라즈돌나야강유역에서 살았다. 관구검에 의해 옥저가 완전히 초토화되자 고구려가 그 지역을 재건시키면서 함경도지역에 들어왔다. 속말부처럼 고구려의 직접지배를 받았고 고구려 말기엔 고구려인으로 완전히 동화되었다.
  3. 안차골부(安車骨部) : 지금의 하얼빈, 그일대에 흐르는 하천중 하나인 아십하(阿什河)유역에서 살았다. 이들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아십하 하구에 있는 황가외자 유적, 황산 남북산성자 유적, 묵리가 유적, 고태자 유적이 있다.
  4. 백출부(汨咄部) : 만주족의 일파인 백도눌(伯都訥)부족이 거주했던 지금의 송원시 영강구, 부여현, 길림시 유수현등 북류 송화강과 납림하사이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듣보인데 상기한 유수 노하심 유적을 그들의 유적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5. 불열부(拂涅部) : 지금의 목단강시계서시일대 평야지역에서 살았다. 뭐... 거주지 보면 알 수 있듯 상당히 외진곳에 살아서 고구려멸망이후에도 사회가 완전히 붕괴되는 것을 면한듯 하다. 발해초기 발해내 유력 말갈세력중의 하나였지만 흑수말갈토벌이후 발해가 뚜들뚜들하고 수도가 자기땅인 영안시 동경성일대로 옮겨져서 망했다. 그리고 발해는 상경을 개발하고 남은 그들의 옛 땅에 동평부를 설치했다.
  6. 호실부(號室部) : 최고의 듣보잡으로 어디서 살았는지에 대해서도 아주시발 개판이지만 수서 말갈전에서 언급된 지리적 위치를 고려해서 지금의 가목사등 흑룡강 하류지역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중이다. 딱히발굴된 것도 비중도 없어서 씹듣보.
  7. 흑수부(黑水部) : 지금의 흑룡강성의 중,러국경지역과 러시아 아무르강 하구지역에서 살았다. 가장 외진곳에 있어 고구려의 통제를 거의 받지 못했고 덕분에 고구려가 망할때도 기존사회가 굳건히 유지될 수 있었다. 발해시대에는 발해의 머리통위에 있으면서 발해의 후장을 위협했고 발해는 연례행사로 이들을 두들겨패야했다. 무왕때 한번 두들겨패면서 통제한뒤에 잠깐 망했다가 중간에 부활했지만 선왕대 다시 두들겨맞고 버로우를 탔고 일부가 여러지역으로 이주되었다. 하지만 발해가 좆되니까 예토전생해서 본진에 남은 새끼들은 당나라에 조공하고 남해부, 압록부지역, 즉 지금의 평안도, 함경도지역으로 이주된 이들은 신라의 군벌들과 부대끼면서 후삼국내전에 참여했다.
  8. 철리부(鐵利部) : 발해시대에 기록에 등장한 부족으로 지금의 하얼빈시 의란현지역에서 살았다. 불열, 월희, 우루와 함께 발해의 관리하에 조공하러댕기다가 741년이후 발해에 완전히 흡수되었다....는 개뿔 발해멸망이후 예토전생해서 다시 날아다녔다가 망함 ㅎ
  9. 월희부(越喜部) : 고구려가 망한뒤 당나라가 설치한 안동도호부관할 속주중 하나인 월희주(越喜州)로 첫등장한다. 발해시대에 잠깐 활동했다 발해의 말갈통제로 좆망했다. 발해는 그들이 살던 땅에 안원부(安遠府)를 설치했다. 근데 문제의 안원부가 어디있는지를 몰라서 소재지는 몰라시발.
  10. 우루부(虞樓部) : 발해시대의 말갈인데 이새끼도 발해의 말갈통제로 망했다.

병림픽[편집]

만주족은 애초에 문자가 없었고, 여진족은 향찰처럼 문자가 존재했다. 하지만 이말을 하면 환빠나 가생이환돌이들은 거품을 물고 달려든다. 왜나면 한국인과 만주족은 비슷하므로 여진족또한 한민족이여야 하기때문

ㄴ향찰은 신라가 만든것 아님?

임란뒤에 지역명으로 불려지는 여진부족들이 통합해서 만주라는 말이 통일됨

옛날의 여진족이 만주족과 같다면, 뭐 야인여진족 계통은 비슷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주족으로 통합한 건주여진, 해서여진과는 거의 관련없다.

ㄴ 사실 요동에 사는 한인, 몽골인도 많았다. 대충 문재인이가 경남에 사는 전라도인, 조선족을 다 합쳐서 남조선국을 세웠다고 보면 적절할지도 모른다.

얼굴이 갸늘고 안와상융기와 가는 눈을 가졌고 광대는 몽골족과 같이 튀어나오진 않음

왜관상 한족이랑 차이가 나지 않는다.

만주족은 그냥 중국인처럼 생겼다.

실제로 만주쪽 중국인들은 생긴건 물론이고 DNA도 만주족이랑 거의 비슷하다.

한국사람 몇몇은 조상중에 만주족이 있다는 개소리를 지껄이는데,그건 함경도에 거주한 야인여진족이고,애초에 만주족은 조선인보다 몽골족과 가깝게 지낼려는 행동밖에 없었다.

ㄴ그런걸 떠나서 일단 만주족(여진족)과 한국인들이 유전적으로 그 어떤 외국 민족보다도 가장 가까운 민족인것은 맞다. 뭐, 어차피 2000년전쯤에 서로 갈라져 살아왔으니 유전적으로만 그렇지 이젠 생판 남이지만. ㄴ애초에 언어 분류군 자체가 다름. 한국어와 만주어는.

ㄴ유전적으로야 가장 가까울수밖에 없지. 고구려, 발해한테 지배당했고, ㄴ 그건 만주족이 아니라 말갈족이다. 직접적인 만주족과 연관은 고려나 조선으로 존나 이민오고, 병자호란때 조선인을 수십만이나 쳐잡아갔으니 안가까워지고 배겨?


ㄴ 말갈이 여진으로 여진이 만주로 바뀐거야

ㄴ말갈족은 고구려,발해 패망하고 흑수말갈이 금나라 세운뒤에 몽골한테 패망하고 대량학살 당하고 나머지가 우데게족됨. 금나라는 향찰이고 만주는 딱히 글자가 없었음.

ㄴ우데게족은 금나라를 세운 애들이 아니라 금나라한테 지배받은 애들 아니었나

ㄴ 여진이 말갈 계승한 것도 맞고 만주가 여진 계승한 것도 맞는데? 당연히 100% 계승한건 아니지만

ㄴ 누르하치 서적 읽어봤는데 그냥 누르하치 본인이 계승하고 싶어 계승함. 사실 위구르도 돌궐과 적대적 상황인데 둘다 언어 분류군이 투르크어고, 위구르는 힘을 얻기 위해 후돌궐 칭한거라 비슷한 류가 보면 됨. 스토리 텔링이지. 막상 송나라 명장 악비는 만주족 선조였고, 동일어군정도로만 보면 된다.

ㄴㄴ ㅋㅋㅋㅋ 말갈이랑 여진은 한문 변형시켜쓰고 만주는 몽골문자 변형시켜서 써서 다른 놈들이라고? 그럼 니새끼가 말한건 뭐가 되냐? 향찰쓰던 신라의 후손인 조선새끼들은 (약 20세기 전반부터) 한글을 주로 쓰는데? ㅋㅋㅋㅋ 그리고 말갈, 금 이전의 여진족이 한문을 기반으로한 독자 문자 만들어썼다는 기록도 있었냐? ㅋㅋㅋㅋㅋㅋ(☆★☆★☆★)

ㄴ인터넷에 검색하면 그냥 나오는데. 금나라 문자 검색해라 환빠시키야. 답답하다. 그렇게 엮이고싶냐?

만력삼대정,임진왜란,이자성의난,이괄의난으로 개꿀빨꼬 빈집털어서 대륙에서 짱먹게됨.

ㄴ 이전부터 조금 쎄지긴햇다. 원래 명초에는 몽골 견제용으로 이새끼들을 지원해주면서도 아골타 전례를 생각해서 존나 잘게 나눠놨었는데 그러니까 이새끼들이 몽골한테 쳐발렸다. 그래서 덜 잘게 나눴더니 건주가 만주로 진화

ㄴ 사실 여진족은 그냥 퉁구스계 민족들이 동화된거라 보면 적합하다. 옛날의 흑수말갈은 아님.

사실 고구려인과 여진족은 공통 조상에서 갈려 나왔다는 개소리는 환빠들이 존나 하악하악거림.이새끼들은 청나라황제들이 여진족이라는 말자체를 증오하는거 모르나...

ㄴ 근데 왜 구만주당 같은 초기 사료에는 '여진'이란 말이 나오냐? ㅋㅋㅋㅋㅋㅋ(☆★☆★)

ㄴ 역알못새끼야,홍타이지가 여진을 금기시키는건 어떻게 설명할래?니말대로면 여진족 김함보는 고려나 신라에서 왔다고 쳐믿어야하나???(☆★☆★)

ㄴ애초에 여진은 지역명으로 통쳐서 불르기도 하였음. 말갈, 물길 이런것처럼. 그리고 송나라 명장 악비의 후손이 만주족이였는데 그럼 금나라인간들과 왜 치고박고싸움? 같은민족이면

건륭제의 만주원류고에서도 고려와 조선 그리고 몽골 코빼기도 안보임.대신에 강희제의 흠정몽고원류는 존재함.한마디로 만주족은 조선인자체를 관심가지지도 않았음.

(언어적으로도 만주어가 여진어랑 존나 비슷한데 뭔 개소리야... 이딴식이면 현대 한국어도 고대, 중세 한국어랑 다른데(☆★☆★☆★☆★)

ㄴ 내가 간략히 정리해준다. 말갈-여진-만주로 계보가 이어진다고 흔히 알려져 있는데, 큰 틀에서 보면 맞는데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다르다. 로마 시절에 게르만족처럼 말갈이니 여진이니 하는 것도 다 싸잡아 부르는 명칭이다.(애당초 말갈이니 여진이니 하는게 지들 스스로 부른게 아니라 한족이나 한민족 같은 타자가 부르던 명칭)

게르만족이라 해도 그 안에 프랑크,앵글로-색슨,주트,기트,고트,롱고바르드 등등 졸라 다양하고 민족공동체 의식도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된다. 말갈도 두만강에서 기까운데 사는 새끼들은 어느정도 문명화 되고 농경-수렵체제이고 저 멀리 아무르강 이딴데 사는 새끼들은 흔히 아는 유목민에 가까웠다. 또 생활양식만 다른게 아니라 요동과 두만강 일대 애들은 한족 또는 한민족과 혼혈이 꽤 되고 아무르강쪽 애들은 주로 동호계열(몽골)과 혼혈이 되어 핏줄도 좀 다르다. 당연히 '우덜'이라는 의식도 없어서 홍타이지가 조선왕에게 두만강 근처의 여진족들 즉 '우랑카이(오랑캐)'들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하는데 이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따먹은 후에조차 아직 통합되지 않은 여진족이 있음은 물론이고 '우랑카이'라는 멸칭에서 보듯 민족의식도 없었음을 잘 보여준다.(이 당시 여진족은 조선 국경 내부 즉 함경도에도 꽤 살았다고 한다. 심지어 강원도에도 사는 놈들이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졸라리 퍼져 살던 애들임)

즉, 말갈-여진-만주는 전부 퉁구스 계열인건 맞는데 그 안에서는 서로를 동족이라 여기지 않는 여러 부족들이 있었고, 당연히 금 건국을 주도한 부족이랑 청 건국을 주도한 부족이랑 다르다. 물론 퉁구스 계통이라는 큰 틀에서는 같고 때문에 청나라도 퉁구스 계통부족들의 역사를 통합하려 만주원류고 등의 역사서도 편찬하나 아무튼 부족단위 계보가 직접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것임.

참고로 몽골족도 오이라트와 준가르를 몽골애들로 아는 애들이 많은데 칭기스칸의 부족이랑 후대의 오이라트, 준가르가 다 다르다. 그나마 위에는 같은 퉁구스 계열이기라도 하지 이쪽은 아예 몽골vs몽골화된 투르크로 계통부터가 다르다.

각주

  1. 이때 털린 부여는 서풍현 성자산산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지금의 동요하유역에 정착했다.
  2. 皇興元年 二月,高麗、庫莫奚、具伏弗、郁羽陵、日連、匹黎尒、于闐諸國各遣使朝貢(467년 2월, 고려, 고막해(庫莫奚), 구복불(具伏弗), 욱우릉(郁羽陵), 일련(日連), 사려이(匹黎尒), 우전(于闐)의 각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위서 효조기 제6
  3. 其傍有大莫盧國、覆鍾國、莫多回國、庫婁國、素和國、具弗伏國、匹黎尒國、拔大何國、郁羽陵國、庫伏真國、魯婁國、羽真侯國,前後各遣使朝獻(그나라 근처에는 대막로국(大莫盧國), 복종국(覆鍾國), 막다회국(莫多回國), 소화국(素和國), 구불복국(具弗伏國), 사려이국, 발대하국(拔大何國), 욱우릉국, 고복진국(庫伏真國), 노루국(魯婁國), 우진후국, 전후 각각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공물을 바쳤다.) - 위서 물길전.
  4. 이런배경때문인지는 몰라도 고고학발굴자료에서 나름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은 속말말갈(대해맹유적, 유수노하심 상층유적과 같이 각종주요 고고학 유적이 많이 발굴되었다.)과 발해중기까지 버티던 흑수말갈뿐이다.
  5. 而黑水部尤爲勁健。自拂涅以東,矢皆石鏃,即古之肅慎氏也。(흑수부가 가장 굳세고 건장하였다. 불열에서부터 동쪽지방은 화살이 다 돌인데, 곧 옛날 숙신씨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 수서 말갈전
  6. 其白山部,素附於高麗,因收平壤之後,部衆多入中國。汨咄、安居骨, 號室等部,亦因高麗破後奔散微弱,後無聞焉。縱有遺人,並爲渤海編戶。唯黑水部全盛,分爲十六部,部又以南北爲稱。(그 가운데 백산부는 본래 고려에 부용되어있었는데, 평양성이 함락된 뒤 많은 무리들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백출부, 안거골부, 호실부등의 부족들도 고려가 함락된 뒤로는 뿔뿔이 흩어지고 미약하여져 뒤에는 활동이 알려지지 않고 더러는 고구려 유민과 함께 발해에 편입되었다. 오직 흑수말갈이 땅을 16부로 나누고 남부와 북부로 구분하여 일컬었다.) - 구당서 199권 열전 제 149 말갈전.
  7. 去洛五千里。自和龍北二百餘里有善玉山,山北行十三日至祁黎山,又北行七日至如洛瓌水,水廣里餘,又北行十五日至太魯水,又東北行十八日到其國。國有大水,闊三里餘,名速末水(낙양에서 5,000리 떨어져있는데, 화룡(和龍)에서 북으로 200여리를 가면 선옥산(善玉山)이 나오고, 그 산에서 북으로 13일을 가면 祁黎山에 이른다. 다시 북으로 7일을 가면 강폭이 1리 남짓인 여락양수(如洛瓖水, 現 시라무렌강?)에 이른다. 거기서 다시 북으로 15일을 가면 태노수(太魯水,現 조아하?)에 이르고 다시 동쪽으로 18일을 가면 그 나라에 도달한다. 나라에는 폭이 3리 남짓인 큰 강이 있는데 이름은 속말수(速末水)이다. - 위서 물길열전
  8. 唯黑水完强,分十六落,以南北稱,蓋其居最北方者也。人勁健,善步戰,常能患它部。(오직 흑수부만이 완강하여 땅을 16개부락으로 나누고 남부, 북부로 일컬었으니, 이는 그 위치가 가장 북쪽이었던 탓이다. 사람들이 거세고 전쟁을 잘하여, 늘 다른 부족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신당서 219권 열전 제 144 북적 흑수말갈
  9. 十四年,黑水靺鞨遣使來朝,詔以其地爲黑水州,仍置長史,遣使鎮押。武藝謂其屬曰:「黑水途經我境,始與唐家相通。舊請突厥吐屯,皆先告我同去。今不計會,即請漢官,必是與唐家通謀,腹背攻我也。」(구당서 199권 하 북적 발해말갈전) - 726년, 흑수말갈이 사신을 보내와 조공을 하니 조칙으로 그 땅을 흑수주로 삼아 장사를 두고, 사신을 보내어 진압(鎭押)하게 했다. 발해 무왕 대무예가 부하들에게 이르니“흑수말갈이 우리 국경을 거쳐 처음으로 당과 통했다. 과거 돌궐에게 吐屯(관직)을 청할 때도 모두 우리에게 먼저 알리고 함께 갔었다. 이제 뜻밖에 바로 당에게 벼슬을 청하니 이는 반드시 당과 공모하여 앞뒤로 우리를 치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10. 同光二年,黑水兀兒遣使者來,其後常來朝貢,自登州泛海出青州。明年,黑水胡獨鹿亦遣使來(신오대사 74권 흑수말갈전) - 924년 흑수의 올아(兀兒)가 사신을 보내왔다. 그 이후로 항상 와서 조공했는데 등주에서 바다를 건너 청주로 왔다. 그 이듬해에는, 흑수의 호독록(胡獨鹿)도 사신을 보내왔다. 올아, 호독록 및 그 2부의 추장들이 각각 사신을 보내왔는데, 그 부족, 세차, 즉위년, 사망연도등을 사관이 기록에서 빠뜨려버렸다.
  11. 靺鞨別部達姑衆 來寇北邊 時太祖將堅權鎭朔州 率騎擊大破之 匹馬不還 王喜(삼국사기 신라본기 12권 경명왕 5년, 921년) - 말갈의 별부인 달고(達姑) 고려사에선 달고은(達姑犾)이라 나오는데, 이들 171명이 등주(안변)을 거쳐 신라도에 침입했다고 나온다. 사람들이 북방 변경에와서 약탈했다. 이때 왕건의 장군 견권이 삭주를 지키다가 기병을 이끌고 공격하여 대파하니, 말 한필도 돌아가지 못했다. 경명왕이 기뻐하여 사신, 편지를 보내 왕건에게 사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