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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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우연히 1971년 공주 송산리 백제고분의 배수로 공사 도중에 발견된 왕릉이다. 신기한게 왕릉도굴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무덤 주인이 무령왕이란게 떡하니 밝혀져서 유명한 무덤이다.

무덤은 중국의 제일 약했던 5대 16국의 (동진→송-제-양-진) 양나라의 벽돌무덤형식이며, 무령왕의 관은 일본의 왜송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제일 놀라운 일이다. 이는 백제의 국제적인 교류에 대해 알수 있는 유적이다.

이거 말고 나머지 백제왕릉은 백제멸망이후 신라의 반달 + 몽골 제국 + 임진왜란을 거쳐서 계속 파괴됬다가 가루베 지온이라는 쌍놈새끼가 대거 파헤치면서 99.9% 도굴당해버린 상태다.

발굴과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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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이 더 밀려오기 전에 어서 발굴을 끝내야겠다고 작정하고 밤을 새워 발굴작업을 진행시켰다. 매장(埋葬) 방식과 유물들의 원상(原狀), 무덤 내부의 세밀한 기록들이 그 바람에 크게 소홀하게 다뤄졌다. 말하자면 고분을 통해 알 수 있었을 수많은 정보들이 내 실수 때문에 영원히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고고학자로서 내 평생의 아쉬움 중 하나다. 아무리 잘 했다고 해도 고고학적 발굴은 유적이 가지고 있는 많은 정보 중 상당 부분을 절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때문에 무령왕릉은 1∼2년이 걸리더라도 모든 정성과 신중을 다해 발굴해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얻어냈어야 했다. 그래서 무령왕릉 발굴 실수는 비단 내 자신의 아쉬움에 그치지 않는다. 나라와 국민에게 큰 죄를 짓고 말았다.

 
— 발굴책임자 서울대학교 김원룡 박사
18.12.13일 방문당시의 무령왕릉의 모습이다.. 무령왕릉을 발굴당시 고대 무덤의 주인을 최초로 밝혔다는 점에서 최고라 꼽히지만, 엄청난 발견에 지나친 관심이 쏠린 나머지 체계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현장을 출입하는 기자들로 인하여 유물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해 지금은 무령왕릉 보호하기위해 따로 전시관을 만들었다.

진짜 씨발 한국사뿐만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자국 문화재"를 이딴식으로 발굴한 적은 거의 없다. 얼마나 엠창이었냐면 일본이 "니네 그딴식으로 발굴할꺼면 차라리 우리한테 발굴 맡겨라"라고 할 정도였다.

앞서 서술했듯이 발굴은 정말이지 우연히 발굴되었다. 1971년 7월 5일 충남 공주에 폭우가 쏟아졌는데 이때만해도 송산리 고분군은 내용물이 싹 다 털려서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다만 백제시대의 유물이다 정도로만 추정되는 고분군이었다. 그런데 이 유적중에 벽화도 있었는데 비가와서 물이 고여서 벽화가 무너지려고 하니까 고분군 관리자가 배수로를 파려고 공사를 하는데 그동안 구릉으로 여겨졌던 곳을 통해서 물길을 내던 도중 이상한 벽돌들이 발견되어서 그대로 문화재청에 신고하였다.

문화재청에 와서 보니 틀림없는 벽돌무덤이고 입구가 벽돌로 막혀있었다.

발굴조사팀은 당연히 다른 무덤들처럼 털렸을꺼라고 생각하고 무덤입구에 제를 지낸 후 벽돌들을 걷어냈는데 하얀 연기가 쏟아져나왔다. 이는 수천년동안 외부와의 접촉이 없었던 차가운 무덤의 내부의 공기와 외부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만나면서 수증기가 생기는 현상으로 이 무덤은 여태껏 단 한번도 도굴이 되지않은 처녀분이라는 증거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어디서 소문을 듣고왔는지 기레기들이 몰려왔고 발굴현장에 난입하여 마구잡이로 셔터를 눌러댔고 심지어 사진을 찍기위해 발굴조사팀을 살해협박까지도 했다 ㄷㄷ

기레기들은 아직 발굴중인데도 발굴현장을 무단으로 침입해서 발굴현장을 훼손했고 심지어 유물들을 발로 밟아 파손시키기까지 했다...

더이상의 발굴조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발굴조사팀은 발굴을 졸속으로 속행했고 단 17시간만에 발굴을 종료시켰고 현장보존을 할 여가도 없이 남은 유물들을 마대자루에 쓸어담았다. 현대 발굴에서는 있어서는 안되고 있을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때 얼마나 개판으로 쓸어담았냐면 발굴 이후 38년이 지나서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무령왕릉 유물들 정리하다가 무령왕의 유골로 추정되는 뼛조각이 처음 발견되었다...

정부의 반응[편집]

파일:무령왕비 은팔찌.jpg
반인반신이 접었다 폈다 했다던 팔찌(국보 제 160호)

당시 공주박물관 김영배 관장은 정권에 잘 보이기 위해 유물들 중 보존이 잘 된 황금유물을 간추려 청와대로 올라가 박정희에게 보여줬는데 박정희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이거 진짜 순금임?"이라며 왕비의 팔찌를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이걸 본 김영배 관장과 서울대 교수 김영춘 박사는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기겁했다고 한다. 박정희를 존경하는 틀딱들도 이 일화는 차마 쉴드를 못칠정도로 당시에는 유물 보존의 가치에 무지했다...

발굴 이후[편집]

그렇게 졸속으로 발굴을 끝내고 출토된 유물들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져가 감식을 하려고 하는데 멍청도 주민들이 "흐ㅡ미 서울놈들이 우리 고장의 유물들을 서울로 가져가려고 한대유!! 우리 유물을 지킵시다!!"라며 발굴조사팀을 막아섰고 그 과정에서 빨리 보존시켜야 하는 유물들이 훼손되기도 했다...

어찌어찌 발굴이 끝나고 무령왕릉을 민간에 개방하여 박물관으로 운용하니까 당시 미개하던 시민의식으로 유적지가 끊임없이 훼손되고 결국에는 무령왕릉 내부에 곰팡이까지 생기니까 결국 문화재청은 1997년 무령왕릉 및 송산리 고분군의 민간인 출입을 전면 금지했다.

발굴 의의[편집]

한국 문화재 발굴사의 결정적인 전환점[편집]

이전까지만해도 한국은 발굴 및 고고학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었다고 해도 무방할정도였고 발굴된 유물도 죄다 일제강점기때 일제가 도굴을 목적으로 파냈다가 나온 유물들이었기에 순수 한국인이 발굴을 해서 조사한 유물이 아예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처녀분인 무령왕릉을 발견하게 되고 최초 순수 국산기술로 발굴을 한 첫 작품이다. 근데 발굴이라기보다 거의 도굴에 가까울 정도로 개판을 쳐놨으니... 심지어 당시 현장이 어떻게 되어있었는지에 대한 실측 도면도조차 그린게 없다. 현재 도면도로 남아있는건 당시 발굴팀들의 기억을 더듬어서 그린 상상도이다.

하지만 이때의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 이후 경주에서 출토된 황남대총이라던지 천마총을 발굴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도 이때의 실수를 모면하기위해 문화재 발굴 사업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현재 역사 교과서에 실린 대부분의 유적지들이 발굴되고 수많은 숨겨진 국보들과 보물들이 출토된다.

한번 거하게 똥을 싸야 정신을 차리는 헬조선의 본성을 제대로 알게 해준 사건이었다. 사실 무령왕릉 사건 이전에도 헬조선의 문화재 보호 의식은 ㄹㅇ 1도없었다. 일제가 파괴시켰니 뭐니 하지만 실상은 국민들부터가 문화재를 보존해야한다는 의식이 1도없었고 그냥 지나가다가 흔히 보이는 돌덩이나 조각상 정도로밖에 보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석굴암만해도 일제가 파괴시켰니 뭐니 해도 일제가 발굴하기전까지는 그냥 버려져서 다 쓰러지기 직전이었고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일본이 공구리를 쳐서 망가트린건 맞지만 공구리로 임시방편이라도 안했으면 진작 무너져내렸을것이다. 실제로 일제가 공구리치기 전에는 석탑이라기보다 돌무더기에 더 가까울정도로 심하게 무너져있었고 방치되어있었다.

아무튼 이 사건 이후로 현재 역사책에 실리는 대부분의 문화재들이 박정희 정권의 전폭적인 압력 및 지원하에 전면 복원되었고 물론 숭례문이나 광화문의 경우처럼 당시 기술력과 자본력의 부족으로 야매로 복원된것도 수없이 많지만 문화재가 드디어 "문화재"로써의 가치로 인정받기 시작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며 고고학 및 사학의 현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역사적 가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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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사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현재 역사책에 기록된 모든 백제의 역사가 여기에서 시작되고 고대 한중일의 정치, 외교, 문화적 관계의 축약편이다.

출토된 유물은 기본이 보물에서부터 시작되고 국보만 12종 17점이다. 그냥 안에 있는 모든것이 곧 역사가 되는 수준이다.

게다가 출토된 황금유물들은 고대 황금 주조술의 극치로 주조기술이 발달된 현대에서도 현대식 장비로 주조해도 숙련된 장인들도 재현하기 힘들 정도로 고대 황금공예의 극치였다. 이 공예품들은 대다수가 누금기법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기술을 사용하려면 최소 1000도 이상에서 순간적으로 금을 녹여야하기때문에 1000도 이상의 온도를 만들어내는 기술에 그걸 순간적으로 식히는 기술에 그걸 또 금붙이끼리 연결시키는 당시로서는 하이테크놀로지 그 자체였다. 지금이야 가스토치로 하면 되지만 석유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또한 무덤 양식도 기존 표준적인 백제 무덤양식처럼 적석총(돌무지무덤)->횡혈식 석실묘(굴식 돌방무덤)이 아닌 중국 남조의 양나라 방식의 벽돌무덤이라는 매우 특이한 케이스의 무덤이다. 자고로 무덤이란 가장 보수적인 문화유산으로 왕조가 바뀌거나 나라가 뒤엎이지 않는 한 어지간해서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게 무덤양식이다. 오죽하면 찬란한 역사를 가진 이집트에서도 피라미드를 최초로 고안해낸 조세르와 현재 모양의 피라미드를 고안해낸 스네프루와 세계 최대 규모의 무덤을 만든 쿠푸가 추앙받겠냐? 그런게 무덤양식인데 여태껏 한국에서 발견되지않은 매우 특이한 케이스의 벽돌무덤이 그것도 도굴되지않은채로 발견되었다? 역사적 가치가 ㄷㄷ

실제로 무령왕은 중국 남조와의 동맹을 강화해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임은 물론이고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살해당한 이후로 침체된 정국을 가다듬어 다시금 고구려를 견제하려던 왕이다. 중국 양나라 무제에게서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이라는 직책을 하사받았는데 이는 중국이 고구려, 신라 왕들에게 하사한 직책중 가장 높은 직책이었다. 그만큼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왕이다.

또한 고대 무덤 중 무덤의 주인이 명확하게 밝혀진 유일한 무덤이자 백제 왕릉 중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고 완벽하게 보존된 무덤이다. 심지어 그 무덤 주인이 22담로를 설치하고 백제 부흥을 이끌던 무령왕이다? 이건 가치를 평가하는거 자체가 역사에 죄를 짓는거다.

근데 이걸 우리 손으로 파괴시켰다 ㅅㅂ

두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 사건을 오래오래 역사에 기록해야한다.

출토된 유물[편집]

총 출토된 유물을 108종 2,906점으로 그 중 12종 17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 국보 제154호 무령왕 금제 관식
  • 국보 제155호 무령왕비 금제 관식
  • 국보 제156호 무령왕 금귀걸이
  • 국보 제157호 무령왕비 금귀걸이
  • 국보 제158호 무령왕비 금목걸이
  • 국보 제159호 무령왕 금제 뒤꽂이
  • 국보 제160호 무령왕비 은팔찌
  • 국보 제161호 : 청동신수경
  • 국보 제161-1호 : 청동신수경
  • 국보 제161-2호 : 의자손수대경
  • 국보 제161-3호 : 수대경
  • 국보 제162호 무령왕릉 석수
  • 국보 제163호 무령왕릉 지석
  • 국보 제164호 무령왕비 베개
  • 국보 제165호 무령왕 발받침

같이보기[편집]

공주시

무령왕

백제

부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