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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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귀한 베네치아 공화국
Most Serene Republic of Venice
Serenìsima Respùblica de Venexia
기본 정보
수도 베네치아
국가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알바니아,
그리스, 키프로스, 터키
대륙 유럽
인구 2,000,000(16세기)
추가 정보
언어 베네토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민족 베네치아인, 북부 이탈리아인
종교 가톨릭교

베네치아 공화국은 서기 7세기 혹은 8세기부터 19세기까지 現 이탈리아 북동부 베네토 주에 존재했던 공화국이다. 리즈시절때 지중해 동부를 주 무대로 하여 유럽의 무역과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강력한 도시국가이며 현재에도 베네치아에 그 영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역사[편집]

공화국 수립까지[편집]

서로마 제국의 쇠퇴는 이탈리아 반도 북동부 지방 주민들에게 엄청난 불안정을 초래하였다. 동쪽과 북쪽에서 밀려오는 똥내나는 야만족들을 로마의 황제니뮤가 어떻게 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주민들이 이탈리아 본토를 떠나 상대적으로 안전해보이는 이탈리아 북동부 연안의 석호지대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가 바로 베네치아의 기원이다. 베네치아라는 이름은 로마의 행정구역명인 베네티아에서 유래했다.

지금이야 그 석호가 세계 최고수준의 관광지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지만, 당시 석호엔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지반이 불안정하여 생활환경이 구렸고 눈앞의 바다는 수시로 자연의 갑질을 해댔으며, 모기가 판을 쳐댔다. 그랬기 때문에 본토의 상황이 한결 괜찮아질때마다 석호로 이주해 온 일부 주민들중 일부가 다시 되돌아가곤했다. 그러나 인간이 100여년 이상 이곳에서 거주하게 되면서 이 석호는 점점 도시의 형상을 갖추게 된다. 이미 이 석호의 집단거류지는 서로마 제국 멸망이후 이탈리아 지방에 정착한 야만족인 동고트족이나 롬바르드족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다. 베네치아 주변지역은 천혜의 어장으로 어족자원이 풍부했으며, 완만한 조류 덕택에 염전산업에도 호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앞바다에서 잡힌 물고기는 농장이 없는 베네치아인들의 식량이 되었고, 당시 귀중한 자원이었던 소금은 베네치아의 첫번째 수출품이 된다. 소금을 수출하면서 베네치아는 조금씩 성장해나가기 시작했다.

비잔틴 제국이 이탈리아에 무단침입한 야만족들을 때려잡고 그 세력을 확립하자 로마인의 후예인 베네치아 또한 자연스레 비잔틴의 세력권에 편입되어 이탈리아 본토의 라벤나에 위치해 있는 비잔틴 총독부의 관할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도시 고유의 자치권은 인정받았고 베네치아 또한 비잔틴의 응딩이 아래에서 안정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동쪽주인니뮤들이 성상파괴운동이라는 뻘짓을 벌이게되자 이탈리아 반도에서 반비잔틴 감정이 들끓게된다. 이는 베네치아도 예외가 아니었고 이와 같은 상황은 당연히 비잔틴의 지배를 부정하는 테크트리로 이어지게 된다. 석호의 여러 지도자들은 에라클레아에 모여서 연합총회를 열었고 여기서 파올루치오를 초대 총독으로 선출하여 비잔틴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고 카더라...지만 파올루치오가 아니라 다른 놈이 최초의 총독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성장기[편집]

성상파괴운동의 영향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이탈리아 냄비들이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냄비들이 식으면서 비잔틴에 대한 감정도 사그러든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비잔틴 세력은 이미 그 기반을 거의 잃어있던 상황이었다. 서쪽의 프랑크 세력이 막강해지면서 이탈리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전례없이 강해지자 당시 비잔틴 세력권과 프랑크 세력권의 접경지대에 위치해 있던 베네치아 또한 이에 위협을 받게 된다. 이 때문에 베네치아 내부에서 정치파벌이 친프랑크파와 친비잔틴파로 나뉘어졌고 서로 정치질을 시전하게 되었다. 프랑크 제국이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드 왕국을 청소해내버리자, 친프랑크파의 세력이 베네치아 정치판에서 그 세력이 막강해진다. 급기야 로마 교황이 자기를 거칠게 다루던 롬바르드족을 프랑크족이 응징해주고 상냥하게 다뤄주자 기모찌해진 나머지 프랑크 왕 샤를마뉴를 서로마 제국 황제로 임명하자 프랑크 왕과 잡것들이 로마제국 황제 설정놀이하는걸 못마땅해 하셨던 오리지널 로마황제가 딴지를 걸게되며 마찰이 빚어졌고, 결국 프랑크와 비잔틴 세력간 대결이 발생되게 된다.

베네치아에서 이탈리아를 장악한 프랑크의 응딩이에 붙어먹으려는 조짐이 일어나자 비잔틴 제국은 함대를 보내 베네치아를 점령해버리고 친프랑크파인 베네치아의 자칭 총독을 추방행시켰다. 대신 친비잔틴파 인사를 베네치아의 새로운 총독으로 앉혔고 공화국은 다시 비잔틴 세력의 속주로 편입되게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프랑크 세력의 침공대상이 된다.

서기 810년, 피핀의 군대는 용맹히 베네치아로 진격해 왔다. 그러나, 비잔틴과 베네치아 연합함대가 프랑크 해군(이라고 쓰고 수송부대라고 읽는다)을 박살내었고 프랑크 육군은 베네치아의 수상에서 소형선을 타고 석호의 거류지로 진군하다 베네치아의 습지대에 좌초되었고 결국 습지대에서 허우적거리던 와중에 베네치아 수비군의 집중포화를 맞고 고슴도치가 되었다고 한다.

어쨌건 프랑크와의 전쟁에서 베네치아가 듣보잡 취급하기 힘들 정도의 공을 세우고 이후 아드리아 해와 동지중해에서 비잔틴의 골치를 썩이게 했던 해적들을 처리하는데 또 공을 세우고 비잔틴이 전쟁을 치를때마다 해군력을 파견하여 어시를 올리자 베네치아를 쩌리 똘마니취급했던 비잔틴도 점점 베네치아의 능력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바실리우스 2세 황제로부터 금인칙서를 받고 조약을 통해 비잔틴 내에서의 무한상업권을 보장받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면세특권을 획득하게 되어 상업적 우위를 누리게 되었다. 다른 경쟁국들의 함선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기항하려면 30솔디 금화를 물어야 할 때 베네치아의 함선은 15솔디만 물어도 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조약에서 베네치아가 비잔틴에 속한다는 것을 명문화했지만 대신 완전한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비잔틴 측에서 베네치아 해군이 아드리아 해의 치안유지활동을 할 것을 조항에 넣었지만, 사실 무역국가 베네치아로서는 지중해를 통하는 유일한 관문인 아드리아 해의 해적소탕이 옵션이 아닌 필수이행사항이었기 때문에 전-혀 손해보는 일이 아니었다. 이 기념비적인 조약으로 베네치아는 서유럽 최강의 상업세력으로 부상할 발판을 마련하였다.

베네치아의 비잔틴 세력권에서의 특권은 약 1세기 후 더 강화되는데,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남단을 쳐묵한 노르만 족이 비잔틴 제국의 펠레폰네소스 반도 이피로스 지방을 공략하자 베네치아 공화국은 즉각 120척의 갤리선 함대를 보내 혁혁한 공을 세워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로부터 또 하나의 황금칙서를 받게된다. 이로 인해 제국 전체에서 무관세로 상업활동을 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베네치아는 당시 기독교 세계가 금지했던 이슬람 세력과의 무역도 주도적으로 수행하였다. 이미 베네치아인들은 9세기부터 이슬람과의 교역을 개시하였고, 이 덕분에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인 성 마르코의 유물도 이집트에서 도굴해 올 수 있었다. 이미 초창기부터 베네치아 상인들은 국제적인 활동을 해 온 것이다. 그러는 한편, 이슬람에게 '통'수를 시전하기도 하는데 이슬람 정벌을 메인 퀘스트로 하는 십자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 그것이다. 베네치아는 이미 1차 십자군 전쟁때부터 십자군에 참여하였고 그 공로로 아무짝에 쓸모없는 예루살렘 왕국의 명목상의 '통'치권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은 전면에서 나서지 않는 치밀함과 외교술수를 구사하여 이슬람과의 무역관계는 십자군 전쟁 도중에도 계속 유지하였다.

이렇게 동지중해 곳곳에 상업제국을 구축한 베네치아이지만, 주요 상업적 부의 원천인 비잔틴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122년 비잔틴 황제 요한네스 2세가 공화국의 무역특권을 부정하자 베네치아는 이에 빡치게 되고, 이로 인하여 비잔틴과 3년간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결국 이와같은 대결상태는 소강국면에 진입하여 베네치아와 비잔틴의 무역관계는 지속되지만 양국간 관계불화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의 사건에 의해 양국간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12세기 이탈리아 상업세력은 잡세력들이 정리되어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양강구도로 세력이 정립되어 있었다. 이에 필연적으로 두 나라는 라이벌-적대관계가 되었는데, 이 적대관계는 오늘날 헬조선-일본 관계가 양반으로 보일 정도로 험악한 관계였다. 비록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베네치아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제노바 또한 콘스탄티노플에서 적극적으로 무역활동을 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대규모의 베네치아인 조계와 제노바인 조계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계의 베네치아인들이 제노바인 구역을 침범하고 이에 공격을 가한 사건이 벌어지게 되고, 이에 열받은 비잔틴 조정은 베네치아인들에 대한 구금령과 자산동결령을 내리게 된다. 사실 이와 같은 라틴 지구의 폭동은 흔한 일이었다. 따라서 비잔틴의 이와 같은 조치는 참다가 쌓인걸 분출한 것으로 봐야한다.

어쨌든 비잔틴이 이와 같은 강경조치를 내리자, 딥빡한 베네치아 공화국 평의회는 대규모 선단을 꾸려 비잔틴을 공격했고, 이로 인하여 또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 상업으로 인해 축적한 부를 토대로 의기양양하게 비잔틴 제국령으로 진군하여 해상전과 상륙전을 병행한 베네치아이지만 해상전에서 비잔틴 제국해군에게 쳐발리고 상륙전에서는 베네치아군의 첩보를 입수한 비잔틴 제국육군의 매복에 걸려들어 대패하고 만다. 그러나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해군을 보내 지속적인 해적질 레이드를 벌이고 이탈리아 본토에 남아있던 비잔틴 떨거지세력을 공략하기 위해 잔머리를 굴렸지만 이마저도 막히고 역강간당한 끝에 결국 비잔틴에 항복해버리고 만다. 이로 인해 베네치아는 비잔틴에 막대한 전쟁보상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이후 베네치아와 비잔틴 간 무역관계는 재개되었지만, 이와 같은 불편한 관계는 지속되었고 얼마 후에 일어난 라틴인 학살사건은 그 불편한 관계에 쐐기를 박게된다.

118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대폭동이 일어나 베네치아인 거주지의 거류민들이 대학살당하는 참변이 일어난다. 그런데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권정부는 이를 대놓고 방관해버렸다. 이 때문에 학살의 피해가 눈덩이만큼 불어났음은 추기할 필요가 없을것이다.

이렇듯 비잔틴에서 엄청난 수모를 당한 베네치아지만 아직은 비잔틴을 당해낼 재간이 없어서 묵묵히 예전의 관계를 지속해나갔다. 하지만 뒤로는 베네치아인의 특기인 잔머리를 굴리며 칼을 갈고 있었다.

4차 십자군 전쟁[편집]

서방의 기독교도들은 100여년간 지속되어 온 십자군 전쟁을 통해 중동의 주요거점들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으나 1180년대에 접어들자 십자군 측은 그들이 차지한 거점들을 차례로 뱉어내기 시작하였다. 1187년 성지인 예루살렘이 이슬람 교도들에 의해 함락되자 교황 우르바노 3세는 이에 충격을 받아 요절하였다. 성지 이외에도 아크레, 시돈, 베이루트와 같은 주요 요충지들이 차례대로 이슬람의 손에 넘어갔고, 새로운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는 이슬람에 대항하여 기독교 왕국들의 연대를 주문하였는데, 이는 확실한 효과가 있어서 신성 로마 제국의 프레드리히 1세 바바로사, 프랑스 왕국의 필리프 2세, 잉글랜드 왕국의 리처드 1세 등 유럽의 쟁쟁한 국왕들이 직접 십자군을 이끌고 원정을 개시하였는데 이가 3차 십자군 전쟁이다. 이는 비록 1차 십자군 전쟁과 같은 성과는 내지 못했지만 살라딘의 파죽지세와 같은 진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유럽으로 복귀한 3차 십자군의 일원인 사자심왕 리처드는 이집트가 이슬람 교도들의 가장 약한 고리라고 언급하였다. 그의 조언은 3차 십자군의 뒤를 이은 4차 십자군이 공략목표를 이집트로 설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1201년에 4차 십자군이 출항지인 베네치아로 집결하였다.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미 이전 십자군 전쟁에서도 병사들을 수송하여 배삯을 받고, 아크레 등 십자군이 점령한 레반트 지역 거점도시의 조계를 할당받는 등 톡톡한 이득을 누려 왔으나 새로운 도제인 엔리코 단돌로는 4차 십자군 때 판을 크게 키웠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4차 십자군 측으로부터 4,500명의 기사들(&그들이 탈 말들)과 9,000명의 종자들, 그리고 20,000명의 보병들을 수송할 선단과 이들이 소비할 9개월어치 분의 군량을 요청받았고 공화국은 이를 수락하였다.

이는 일개 도시국가가 감당하기에는 매우 거대한 규모였고, 따라서 베네치아 공화국은 국력을 총동원하여 1년간 4차 십자군의 요청을 맞추기 위해 진력하였고, 그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막상 4차 십자군이 집결하자 문제가 생겼다. 제후들이 예상보다 많이 모이지 않아 베네치아 공화국 측이 요청한 품삯을 지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초 베네치아 공화국은 4차 십자군 측에 이와 같은 용역의 대가로 84,000마르크에 해당하는 은을 요구했었고, 베네치아에 모인 십자군들은 베네치아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그들의 무구를 제외한 전 재산을 내놓았다. 보니파치오는 그의 사적금고를 내놓았으며 다른 기사들이나 일개 병사들도 그들이 갖고 있던 것들을 전부 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34,000마르크 은이 부족했다. 엔리코 단돌로는 당황했고 그는 십자군을 한동안 베네치아에 체류시켰다. 그러나 그는 한가지 묘책을 떠올렸고, 그는 십자군이 채우지 못한 34,000 마르크에 달하는 품삯을 받지 않는 대신 출항하는 대가로 십자군에게 모종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십자군 측에서는 이를 탐탁치 않다고 여기기도 하였으나 배삯을 채우지 못해 출항하지 못하면 당초의 목적을 달성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들의 체면도 서지 못했으므로 이를 수락하였다. 십자군과의 합의에 성공한 공화국의 선단은 그들을 승선시키고 아드리아 해를 유유히 항해하기 시작하였다.


십자군 이전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은 사실상 동지중해의 교역을 독점하여 엄청난 부를 쌓고 있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수백척의 베네치아 함선이 도시 내에 베네치아인 거류구를 얻는다는 조건으로 팔레스타인의 해양 도시를 점령하여, 그들을 돕기도 하였다.

그리고 1202~1204년의 제 4차 십자군 원정에서는... 악마와 계약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1.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 교역 계약을 갱신하면서 숨은 조항으로 이슬람교도를 공격하거나 십자군에 참가하지 않는 다는 조항을 넣었다.
  2. 그 뒤 제 4차 십자군을 위해 프랑스의 제후들이 그들에게 접근해 왔고, 돈을 받고 그들을 당시 파티마 왕조가 점령하고 있던 예루살렘에 드랍해 주기로 한다.
  3. 제 4차 십자군이 그 돈을 못내고 있자[1]채무 기간을 유예해 준다는 조건으로 당시 가톨릭 교도였던 헝가리 왕의 통치하에 있는 자다르를 공격하게 했다. 다름아닌 십자군[2]
  4. 자다르를 점령한 뒤 동로마 제국에서 왕위 계승에서 밀린 왕자가 찾아온다.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부탁을 하는데 그 왕자가 부탁한 것은 다름아닌 같은 기독교도(정교회라 종파가 다르기는 했지만)이자 당시 유럽권 최대의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플의 공격
    • 도시 점령시 십자군이 베네치아에게 지고 있던 모든 빚을 동로마 제국이 대신 지불한다.
    • 도시 점령시 동로마 제국의 성지 수호를 위해 천 명가량의 기사를 십자군 국가에 파견한다.
    • 가톨릭과 정교회를 통합한다.[3]
  5.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콘스탄티노플의 육지 쪽은 대포 발명 전까지는 함락이 사실상 불가능하였지만 함선들을 이용해 금각만 쪽으로 공격한 것.
  6. 하지만 전임 황제가 돈을 흥청망청 써대서 빚 변제도 못하고, 군대도 못 보내고, 교회 통합은 사실상 불가능하였으니... 계약조건을 이행하지 않는 모습을 본 십자군은 베네치아 거류구와 군사 주둔지가 큰 화재를 당하자, 이를 명분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재점령 한다. 성 마르코 대성당 앞에 있는 네 마리의 청동말도 이때 가져온 것이다.
  7. 그 뒤 성립된 것이 라틴 제국. 제 4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베네치아는 크레타, 에우보이아, 코르푸 섬, 베네치아령 이오니아, 필로폰네소스 반도 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경쟁자였던 제노바나 피사 등의 나라를 동지중해 무역에서 격리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라틴 제국이 존속할 때까지 '동로마제국의 3/8의 주권자'란 칭호도 덤.
  8. 그렇게 베네치아는 동지중해의 여왕이 되었다.

15세기[편집]

15세기 초에는 이탈리아 내륙부와 달마티아 연안의 영토를 넓히는 데 주력했다. 밀라노 공국을 쳐서 포 강 연안을 따라 유럽행 교역로를 완성하는 한편, 헝가리가 내전에 휩싸였을 때 이스트리아 반도에서 알바니아에 이르는 아드리아해 동안을 장악하였다.

1489년, 십자군 왕국 중 하나였던 키프로스 왕국 전역을 흡수한다

15세기 말의 대 오스만 전쟁[편집]

1463년 필로폰네소스 반도 남단의 모도네에서 오스만 소속의 함선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오스만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아르고스[4]를 함락 당하였으나, 헝가리, 알바니아,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고 페라라 제후국의 에스테 후작을 고용하여 오스만을 공격한다.

하지만 1468년 알바니아 군의 지도자였던 스칸데르베그가 사망하고, 오스만군에 의해 1469년 베네치아의 영토였던 에우보이아가 함락된다.[5]

1472년에 사실상 용병화[6]되어 있던 헝가리 군이 오스만 제국과 강화 협상을 체결하였으며, 1473년에는 페르시아가 오스만에게 크게 깨지는 바람에 전선에서 탈출 하였다.

그 뒤 1474년에는 오스만군은 베네치아의 알바니아 거점이던 스쿠타리(오늘날의 알바니아에 위치한 슈코더르)[7]를 공격하나 실패한다. 동시에 이스켄테르베그가 이끄는 오스만군 기병대가 이탈리아 내륙부를 공격하여 프리올리(현 이탈리아의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 주)를 공격한다. 그 불길이 성 마르코 대성당의 종루에서 보일 정도였다고...

제1차 스쿠타리 공방전 이후, 1475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 간의 강화 협상이 진행되기 시작되었다. 처음에 그 결과로 6개월 간의 휴전 을 얻었으나, 그 도중에 오스만 제국이 흑해 연안의 타나(현재의 러시아 돈 강 삼각주에 위치했던 도시로 당시 베네치아령)[8], 카파(현재크림 반도에 위치한 페오도시야로 당시 제노바령)[9]가 오스만군에 함락되어 러시아-흑해 교역 루트가 막힘과 동시에 강화 역시 물 건너 가게 되었다. 1476년 헝가리가 재 참전하였다. 1477년에는 이스켄데르베그가 이끄는 오스만 기병대가 베네치아 본토 속령을 다시 유린하기 시작했으며 오스만군이 스쿠타리를 두 번째로 공격하나 실패하고 만다.

1477년 말 베네치아 공화국의 첩보는 중대한 정보를 얻었다. 이는 나폴리 왕국이 헝가리 왕국과 손을 잡아 오스만 제국과 강화에 나선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드리아해 서안을 장악하고 있는 나폴리 왕국에 의해 아드리아 해를 통한 교역이 막히게 되고, 또한 헝가리 왕국과 오스만 제국이 각각 에게 해 방면과 달마티아 방면으로 쳐들어오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과 단독 강화를 결정하게 된다. 협상은 1년 간 난항을 격었고, 중간에 오스만군이 다시 스쿠타리를 공격하였으나, 1479년 1월 25일 강화 협상이 타결되었다.

그 결과로 베네치아는

  1. 베네치아는 필로폰네소스 반도 내륙 지방, 에우보이아, 그리고 스쿠타리를 포함한 알바니아 지방을 오스만령으로 인정한다.
  2. 또한 오스만 제국은 코르푸, 모도네와 코로네(필로폰네소스 반도 남단에 위치한 도시, 각각 현재의 메소니와 코로니)[10]의 기지, 그리고 크레타를 포함한 에게 해 상의 섬을 제공한다.
  3. 베네치아는 과거 오스만령에서 발굴한 백반광의 전매료 미불에 대한 배상으로 15만 두카토 중 10만 두카토를 2년 이내로 분할상환으로 지불한다. 또한 관세[11]로 매년 1만 두카토를 지불한다.

엄청나게 굴욕적인 결과였다. 아직 빼앗기지 않았던 스쿠타리를 주어야 했고...[12]그리고 베네치아는 이교도와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욕을 오질나게 퍼먹는다. 자기랑 같이 평화협상을 준비하던 헝가리에게마저도. 그래도 베네치아로써는 동방 무역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었던 셈.

캉브레 동맹 전쟁, 키프로스 함락, 그리고 레판토 해전[편집]

1499년에서 1503년까지의 튀르크 제국과의 전쟁의 걀과로 코로네와 모도네를 상실하였으나 케팔로니아 섬[13]과 이타카 섬[14]을 얻었다.

그리고 1508년에 캉브레 동맹 전쟁이 발발한다. 기존의 로마냐 지방을 두고 교황령과 경쟁하다가 최악의 사태가 온 것이다. 돌린 적국만 해도 교황청,신성 로마 제국,.프랑스,스페인,페라라 공국 등. 당대 유럽의 슈퍼파워라 할 수 있는 나라들이 다 모여서 순식간에 베네치아는 본토 속령을 상실하였다.

그 뒤 베네치아가 외교력을 총 동원하여 먼저 아풀리아(현 이탈리아 풀리아 주)의 항구를 스페인에게 할양하여 전쟁에서 나가게 하였다. 그 뒤 교황청이 베네치아 공화국이 사라질 시 스페인과 프랑스가 교황청을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다시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는다. 그 결과 1509년에는 교황청,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를 공격하였고, 다시 본토 속령을 수복하게 된다.

그리고 1570년, 키프로스제 포도주가 너무나도 먹고 싶었던 셀림 2세는 당시 베네치아 령이었던 키프로스를 공격한다. 이에 넓은 키프로스에서 튀르크 군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베네치아는 파마구스타[15]를 중심으로 방어에 나선다. 그 뒤 유럽 국가들과 함께 신성 동맹[16]을 발족하여 터키를 공격한다. 주요 국가는 스페인과 베네치아 공화국, 그리고 교황청인데, 목표[17], 함대장[18], 함대수[19]로 대립하였고, 그 와중에 파마구스타가 함락되고 말았다. 2개월 후 오스만 해군을 레판토에서 무찌르기는 하지만 스페인에게 완전히 질려버린 베네치아는 튀르크와 단독으로 강화한다.

1575년에는 베네치아 전역에 흑사병이 돌아서 17만 5000명에 이르는 인구가 1581년에는 12만 4000명까지 줄어들게 된다. 이후 베네치아의 인구는 다시 수복하지 못하였다.

17세기[편집]

17세기 초에는, 주교가 베네치아 안에서 가지는 지위를 두고 교황청과 대립하게 된다. 당시 반종교개혁의 바람이 가톨릭 세계에서 불고 있었지만 베네치아는 세속적인 편에 속해 있었다. 예를 들면 종교재판소에 경우 판사 3명 중 1명은 성직자가 아닐 정도로 말이다. 당시 본토 속령에서 농업을 통해 세를 불리던 교회에 세금을 거둘려던 베네치아 공화국에 교황청은 베네치아에 성무 금지 명령을 내린다. 이에 베네치아는 강제로 성직자 들에게 성무를 하게 하는 것으로 응수하였고, 이 대립은 베네치아가 세금을 '소극적'으로 걷는 것으로 끝이 났다.

지중해 최후의 성채, 크레타[편집]

1644년 몰타 기사단이 동지중해에서 해적질을 한 뒤 크레타 남단에서 잠시동안 정박하고 간 것이 발단이 되어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당시 크레타는 동지중해(아드리아해를 제외한)의 최후의 기독교계 거점이었으며,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전략적 중요성은 매우 높았었다. 또한 베네치아 역시 이를 알았기에, 크레타에는 베네치아가 최대한 할 수 있는 방위시설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1645년 6월, 몰타 기사단을 치는 것처럼 꾸민 튀르크 함대가 크레타에 상륙하였다. 상륙지점에 있던 성 토데로 요새는 이를 공격하려고 달라붙은 터키군 500명과 함께 폭☆발함으로써 15년간 이어지는 크레타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8월 22일에는 칸니아(현 하니아)[20]가 함락되었다. 그 뒤 크레타를 차례차례로 정복하여 베네치아에게 남은 요새는 스피날롱가[21]와 수다[22] 그리고 그람보우사[23], 마지막으로 칸디아(현 그리스의 이라클리오)[24]만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요새들은 끝끝내 함락되지 않았다.[25]

한편 유럽에서는 30년 전쟁이 끝나고 지중해에서 싸우고 있던 베네치아가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럽에서는 스웨덴에서 몰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모여들었고, 또한 크레타를 지키기 위해 베네치아의 자유민들 역시 자원해서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몰타 기사단, 토스카나, 그리고 베네치아가 자체 보유한 함선들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였으며, 유럽의 주요 왕가에서는 기부금을 보내왔다. 한편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튀르크군은 베네치아령 달마티아를 공격한다. 하지만 크레타와 달리 주민의 지원을 무한정으로 얻을 수 있었던 달마티아에서는 되려 영토를 얻기까지 한다.

한편 칸디아에서는 1648년 5월부터 공성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요새에서는 매우 치열한 전쟁이 지속되었는데, 튀르크군에게는 이런 소문이 돌 정도로 매우 치열한 전투였다.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들은 저 요새 안의 사람만이 아니다. 그 동안의 전쟁에서 죽은 베네치아 사람들이 유령이 되어서 저 요새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26]

그럼에도 불구하고 1669년 9월, 이 성채의 수비대장이었던 프란체스코 모로지니는 '이 전쟁이 계속되어서 베네치아가 이기더라도 베네치아가 입을 피해가 더 클 것'[27]이라는 생각으로 오스만 제국에 항복한다. 처음에 시작할 때 민간인 포함 22,000 명 정도되던 요새 내부의 인구는 3,600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 참고로 이는 베네치아에서 야전 지휘관이 독단적으로 강화를 추진한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로 베네치아는

  1. 수다, 스피날롱가, 그리고 그라보우사를 제외한 크레타 전역을 튀르크군에게 양도한다. 단 위의 3 요새는 연공금을 바칠 필요 없이 유지되는 베네치아의 고유한 권리이다.
  2. 또한 베네치아가 달마티아에서 얻은 영토 역시 베네치아령으로 인정한다.

모레아 전쟁[편집]

크레타 전쟁이 끝나고 15년 뒤 1683년에는 크레타 전쟁 당시 칸디아의 수비대장이던 프란체스코 모르시니를 베네치아 해군사령관으로 선출하였다. 그 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폴란드랑 동맹을 맺고 터키 제국을 공격한다. 당시 유럽 쪽 국경에 전력을 집중하던 터키는 에게 해 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맥을 못 추렸다.

1684년 8월에 산타 마우라 섬(현 그리스 레프카타 섬)[28]을 점령한 뒤 차례로 프레베자[29]와 보니차[30]를 차례대로 되찾는다. 그 뒤에 모레아(현재의 필로폰네소스 반도)를 향해 발을 돌리는데, 1685년에는 모레아 남단의 모도네와 코로네를 되찾는데 성공하였으며, 같은 해에는 아르고스와 나우플리온(현 그리스의 나플리오)[31]를 다음 해에는 모레아에 위치했던 베네치아의 기지를 수중에 두는데 성공하였다. 모로시니가 이끄는 베네치아 군은 계속 전진하여 파트라스(현 그리스의 파트라)[32]를 함락하고 레판토도 되찾으며, 코린토도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1687년 8월 이 승리를 보고하기 위해 돌아온 모로시니에게 국회 심의를 중지하고 의원 전원이 마중을 나가는 전례 없는 기쁨을 보여주었을 정도다.심지어 이때야말로 에우보이아와 크레타 섬도 되찾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결국에는 다 일장춘몽이었지만

모르시니 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아서 미스트라[33]를 정복하고 스파르타를 수중에 넣는데 성공한다. 1687년 9월에는 아테네마저 손에 넣는데 성공한다.[34]

1688년 3월에는 모로시니가 베네치아의 도제로 선출되었고, 그 전에는 필로폰네소스인[35]이라는 칭호를 주었을 정도로 베네치아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여겼다.[36]

전쟁은 1699년에 카를로비치 조약으로 인해 끝나서 필로폰네소스 반도 전역을 베네치아가 손에 넣는 걸로 끝난다.

쇠퇴 및 멸망[편집]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는 결국 일장춘몽으로 끄탄게 된다. 1714년 시작된 전쟁으로 카를로비치로얻었던 땅을 다 잃었을 뿐 만 아니라 크레타의 수다와 스피날롱가 등의 크레타 쪽 영토도 잃게 된 것이다. 그리스에서 모든 발판을 잃은 베네치아는 그나마 코르푸 섬 공방전으로 아드리아 해를 베네치아의 만으로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점은 알바니아와 달마티아 쪽에서 영토를 늘릴 수 있었다는 점? 이시기에 베네치아 미술은 더욱도 고급지게 된다.

그 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베네치아군은 당시 질적이나 양적으로(특히 육군은)매우 뒤떨어져서 베네치아가 비무장 비동맹을 펴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만들었다. 1797년에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공화국군이 침공하였고, 중과부적이라 여긴 베네치아는 항복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캄포 포르미오 조약에 의해 본토 대부분과 그리스의 섬은 프랑스에게 본토 일부와 달마티아, 이스트리아 지방, 그리고 베네치아 시가는 오스트리아에게 넘어가게 된다.

멸망 이후[편집]

1814년에 베네치아 전역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가 되며, 이듬해 밀라노, 만투나 공작령을 합쳐서 '롬바르디-베네치아 왕국'이 되었고 오스트리아 황제의 공식 작위중 하나가 되었다. 1866년에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게 양도한다. 같은 해 11월에는 통일된 이탈리아의 일부로 편입된다.

그리고 현재 2014년에 유럽 전역에 불어 닥친 분리독립의 바람이 베네치아에도 미쳤다. 이탈리아가 경제적으로 좆망하고, 북부 지방이 상대적으로 가난한 남부 지방에 돈을 갖다 바친다는 생각도 있어서 그런 듯. 2014년의 조사에 의하면(스코틀랜드의 것처럼 공식적인 것은 아니며, 또한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베네토 주[37] 주민 전체 중 69.7%가 투표하여 약 88%가 찬성한다고 나왔다.[38]

정치[편집]

베네치아 도제 궁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세가지 정치유형 -군주정, 참주정(과두정), 민주정(다수 정치)- 을 융합한 정치체제를 갖춘 국가였다.

초창기 베네치아는 도제(Doge[39])에 의해 전제적으로 통치되는 정치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베네치아는 도시국가인만큼 일반적인 영토국가의 전제군주제와는 다른 점이 있었는데, 그 다른 점이란 바로 베네치아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비록 일반 시민들에게 정치권은 없었다 하더라도, 대중 집회(Concio)를 통해 정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고, 도제도 이를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초창기의 정치제도는 수 세기간 이어졌으나 도시규모가 전례없이 방대해 지고 국력이 신장한 12세기를 기점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체계는 보다 더 세련스러워졌다. 먼저 기존의 대중 집회는 잠깐 동안의 과도기인 현자 평의회 시절을 거쳐 대평의회(Maggior Consiglio)라는 상설기구로 진보하였는데, 대평의회는 베네치아 6개의 시스티에리(구역)에서 각각 2명씩 선출된 선거위원이 1인당 40명씩 선출한 시민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의회였다. 초창기의 정원은 물론 480명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원의 수는 증가하였는데, 이는 특히 제노바 공화국이나 오스만 투르크같은 적국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군자금을 확충하기 위해 황금의 서(베네치아 공화국의 귀족 명부) 빈칸을 팔아먹은 탓이었다. 대평의회는 훗날 정원이 2000명을 넘기기도 하였다. 대평의회가 도시의 다수 정치를 대표하는 기구였다면 각 시스티에리에서 한명씩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된 6인의 소평의회(Minor Consiglio)는 과두정치를 상실하는 기구로서 신설되었다. 소평의회는 엘리트 집단으로 도제의 자문역을 맡게 되었다. 여기에 14세기 초인 1310년 티에폴로의 난을 계기로 10인 평의회가 새로이 신설되어 이 두 기구가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의 자문기구이자 가장 가까이에서 도제의 권력을 견제하는 기구로 공화국이 멸망할 때까지 존속되었다. 한편으로 12세기 후반에는 공화국에서 사법권의 독립도 이루어져, 40인회가 현대의 대법원과 같은 역할을 맡게 되었다.

대평의회 의원으로 뽑힌 부유한 시민들은 도제직이 세습되는 것과 부정선거가 공화국에서 자행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따라서 대평의회의 도제 선출방식은 상당히 복잡해졌다. 대충 설명하자면 두칼레 궁전의 대평의원회실에 비치된 의원들의 수만큼 공이 들어있는 단자에서 의원들이 공을 뽑는 것으로 도제선출식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당첨 공을 뽑은 의원들이 선출인단을 뽑았는데, 이 선출인단은 도제 선출인단이 아니라 선출인단의 선출인단이었다. 이 선출인단의 선출인단들이 선출인단을 뽑고, 또 선출인단의 선출인단의 선출인단이 다른 선출인단들을 뽑는 것을 몇 번 반복한 끝에, 최후의 도제 선출인단 41인이 다수결로 도제를 뽑았다. 이 복잡한 선거제도는 13세기 후반에 도입되었는데, 도제선출과정에 다수결과 운빨 요소가 첨가되어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여하튼 이와 같은 일련의 정치권력구조의 개편으로 인해 도제의 권력에 대한 견제장치가 마련되어 공화국의 정치체제는 전례없는 안정성을 갖추게 되었고, 보다 더 국가기능이 유기적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부유한 시민들로 구성된 대평의회가 공화국의 실세가 됨에 따라 도시의 중하층민들이 총독 선출과정에서의 배제됨은 물론,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극도로 약해져 베네치아가 귀족 공화국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정치 개혁을 추진한 비탈레 미키엘 2세는 한 베네치아 서민에 의해 암살당했고, 대평의회 제도를 없애고 이를 초창기의 대중 집회 제도로 환원시키고자 한 마린 보코니오와 같은 정치적 불만분자도 등장했다. 이러한 평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의 일종으로 베네치아에서는 선거일에 정부 차원에서 시민들에게 부조를 베푸는 것을 골자로 하는 독특한 법률이 제정되기도 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정교분리국가로, 성직자들이 정치기구의 결정에 참견할 수가 없었다. 종교인들조차도 세레니시마의 정치에 입김을 뿜기 위해서는 정식절차를 거쳐 의원이 되어야만 하였다.

군사[편집]

베네치아 갈레아스

중세 이탈리아 도시국가 시민들은 다른 지역의 주민들보다 군사무기에 대한 숙련도가 높았다. 이는 베네치아인들도 다르지 않아서, 집집마다 석궁과 같은 무기들을 집집마다 하나씩 가지고 있었고 남성 시민들은 정기적으로 향토방위훈련을 받았기에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군사력을 상당부분 이탈리아 용병대(콘도티에리/Condottieri)에 의존했으나 베네치아 공화국은 그와는 별도로 공화국 시민들로 구성된 상비군대를 병행운용하였고, 전성기 베네치아 상비군의 병력은 2만여명에 이르렀다. 베네치아는 유럽에서도 최고 수준의 조병창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기생산량도 많았고, 또한 무기를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는 능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네치아 군사력의 정수는 육군이 아닌 해군에 있었다. 베네치아는 지중해 전역을 포괄하는 방대한 상업망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유지,보호하기 위해 대규모의 해군을 운용하였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지중해 세계에서 베네치아의 해군력에 대항하는 것이 가능했던 해군은 제노바 공화국 해군과 비잔티움 제국 해군 정도밖에 없었다.

16세기 말 레판토 해전 당시에도 기독교 연합해군을 승리로 이끈 건 다름아닌 베네치아 해군이었다. 기독교 연합군 함대 208척 중 106척이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함정이었으며, 특히 공화국의 해상요새인 베네치아 갈레아스 6척은 오스만 함대를 철저히 교란시키고 모랄빵을 내어 기독교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 전공을 세웠을 정도이다.

이 무렵 베네치아 해군은 또다른 혁신(?)을 일으킨 바 있는데, 바로 죄수들을 갤리선의 노잡이들로 쓴 것이다. 고대시대부터 갤리선의 노잡이들은 자발적으로 승선한 자유민들로 채워졌고, 이는 유럽에서 2천년 이상 이어진 전통이었으나 베네치아 갤리선의 이와 같은 혁신(?) 이후로는 갤리선 노잡이가 죄수, 부랑배같은 인간말종 포지션이 되었다. 사실 16세기에 베네치아 해군에서 이러한 부류의 인간들을 해군 노잡이로 쓰게 된 것은 이 시기 공화국의 사회문제였던 해상인력부족과 관련이 있다.

경제[편집]

화폐[편집]

베네치아 두카토

베네치아의 화폐는 베네치아 두카토(두카트)였다. 두카토는 라틴어 Ducatus(공작(의) 혹은 공국(의))에서 유래한 단어이며, 이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가 수반인 도제(Doge)가 라틴어 Dux에서 유래한 것과 관련이 있다. 즉 공작의 화폐 혹은 공국의 화폐라는 의미라고 보면 된다.

두카토의 하위 단위로는 리라와 솔도가 있었는데, 교환율은 1두카토 당 6리라, 1리라 당 20솔도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유럽의 경제패권을 잡고 있던 15~16세기 당시 두카토는 유럽의 기축통화으로 리스본에서 리가에 이르기까지 대륙의 모든 도시에서 통용되었다. 두카토는 비단 유럽에서만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 아니다. 아프리카 희망봉을 넘어 인도에 당도한 포르투갈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는 인도에서 베네치아의 두카토 화폐가 아무런 문제없이 통용되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이처럼 두카토 화폐는 베네치아 조폐당국의 신중한 관리 덕에 전 세계에서 최고의 화폐로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카토의 기축통화 지위는 17세기에 네덜란드 굴덴 화폐에 의해 대체당한다. 그래도 압도적인 생산량 때문에 19세기 후반까지 사용된다.

제염업[편집]

바다에서 제염된 천일염

소금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첫번째 수출품이자 석호의 어염업 공동체를 유럽 제일의 상업 중심지로 만든 일등공신 아이템이다. 소금은 바닷가에서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지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세계 소금생산의 주요 출처는 줄곧 암염 광산이었고, 오늘날도 전체 소금의 30%만이 바다에서 산출된다. 바다에서 천일염을 얻기 위해서는 바닷물을 증발시킬 수 있을 정도로 기후가 덥고 건조해야하며, 건기가 우기가 뚜렷하고 바람이 지속적으로 불어오는 지형이어야 한다. 또한 갯벌이 펼쳐져 있고, 적당한 조수간만의 차가 존재하여 계단식 염전을 꾸리기에 알맞아야한다. 중세 베네치아는 이러한 천일염 생산조건에 부합하는 지역이었다.

여기에 베네치아인들의 혁신성이 가미되었다. 베네치아에서는 7세기에서 9세기 무렵에 오늘날의 천일제염기술과 같은 획기적인 생산 메커니즘이 고안되었는데, 이는 여러 개의 염전을 만들고, 펌프와 수문으로 각 염전을 연결한 후 각 염전에서 물이 증발되어감에 따라 바닷물의 염도가 높아지면 다음 단계의 염전으로 보내 단계적으로 제염을 하는 방식이었다.[40] 이 방식은 연료 소모가 없기 때문에 생산비용도 다른 천일제염법 생산법들에 비해 현격히 낮았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소금무역 중심지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주요소금생산국가들과 독점교역을 추진하였고, 13세기에는 소금시장의 통제를 위해 소금세를 도입하였다. 베네치아인들은 이렇게 자국내에 생산,집적된 소금을 팔아 막대한 이윤을 취했지만, 한편으로는 공화국 정부가 베네치아 시민들에게는 생활필수품인 소금을 국제가격의 절반가에 파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중가격제도를 실시하였다.

아르세날레[편집]

베네치아 아르세날레

1104년 오르델라포 팔리에르 도제에 의해 설립된 거대산업단지인 아르세날레(Arsenale[41])는 베네치아 국력 및 군사력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고 공화국이 융성했던 14세기에 원래 규모의 4배 크기로 확장,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깨작깨작 확장되어 16세기에 오늘날과 같은 규모에 이르게 되었다. 아르세날레 지구는 베네치아 시가지 면적의 15%를 점하고 있으며, 현대엔 아르세날레 일부 지구에서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열리기도 한다. 아르세날레는 산업혁명 이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복합산업단지였고 16세기에 15,000명이 넘는 인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곳에서는 선박과 선박의 모든 부품 및 자재, 대포, 석궁, 총기류와 같은 무기류, 심지어 해상식량인 빵도 만들었다.

아르세날레는 베네치아 당국의 세심한 관리를 받았다. 공화국 대평의원회는 3명의 상원의원들과 3명의 후원자들을 이 곳의 관리책임자로 배치하였다. 공화국은 아르세날레 내부에 부속 기술학교를 설립하였고, 정부가 직접 명공인들의 기술 전수를 독려했다. 아르세날레 직공직은 공화국에서 높은 대우를 받았다. 일단 평생직장인데다 높은 급료를 받았으며 급료 지불대장에 이름만 등록되면 아파서 병가를 내도, 늙어서 은퇴를 해도 관계없이 죽을 때까지 급료를 지불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르세날레 직공이 되려면 높은 기술수준을 보유해야만 했으며, 작업에서의 실수는 큰 불명예가 되었고 따라서 높은 책임감을 필요로 하였다. 왜냐하면 아르세날레는 세계 최초로 체계적인 분업체계를 구축한 산업단지였고, 그런만큼 하나의 실수가 전체의 결함으로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세날레에서 돛 장인들은 돛만을, 목재 장인들은 목재만을, 키 장인들은 키만을 만들었고, 각 분업유닛들의 생산품을 조립하는 것으로 아르세날레의 공정이 마무리되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매우 효율적인 공정이었다. 프랑스의 국왕인 앙리 3세가 베네치아를 국빈방문했을 당시, 연회가 진행되는 한 시간만에 갤리선 한척이 완성되어 앙리 3세가 놀라기도 하였다. 1570년 오스만 튀르크가 키프로스를 침공했을 당시, 아르세날레는 불과 2개월 만에 전투함선 100척을 찍어내어 그 저력을 보여 주었다.

아르세날레는 선박과 무기류 이외에 빵으로도 명성을 누렸다. 아르세날레에서 구운 빵은 뱃사람들에게 최고의 음식으로 간주되었고, 베네치아에 기항한 선박들은 너도 나도 아르세날레에서 빵을 구입해갔다. 베네치아 빵은 그 유통기한이 매우 길었고, 결코 상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1821년 크레타 섬에서 오랜기간 방치되어 있던 구 베네치아 공화국 요새의 벽돌창고가 개방된 적이 있는데, 그 곳에서 엄청난 양의 아르세날레제 빵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그 빵들은 두 세기 가까이 지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먹을 수 있었다고 하며, 당시 가난했던 크레타인들의 배를 채워줬다고 한다.

이처럼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국영산업이 번영을 누렸지만, 사영 조선소들도 이에 못지않게 번창했다. 상선의 경우 전체 수량의 80% 가량이 사설 조선소에서 생산되었다.

인쇄업[편집]

파일:마르치아나 도서관.JPG
마르치아나 도서관

근세 인쇄술은 독일에서 발명되었으나 이는 이탈리아에서 꽃을 피웠고 그 중심에 베네치아가 있었다. 베네치아에는 독일 상인들에 의해 인쇄술이 전래되었는데, 이들은 단순히 기술 전수만 한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눌러앉아 산업을 차리기도 하였다. 초창기 베네치아에서 출판된 서적의 3/4 가량이 독일계 인쇄소에서 출간된 것이었다.

독일인들이 굳이 베네치아까지 와서 인쇄산업을 차리게 된 이유는 다음과도 같다 : 먼저, 베네치아 공화국은 포 강이라는 비옥한 강을 끼고 있는 베네토 지역과 롬바르디아 지역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들 지역은 유량이 풍부하여 수력으로 풍부한 양의 종이를 생산할 수 있었다. 또한 베네치아는 방대한 상업/정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기에 유럽의 다른 지역들, 심지어는 근동 시장에의 출판물 유통에 용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바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언론의 자유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였으며, 국력도 융성하여 그 악명높은 교황청의 검열에 어느정도 면역력 또한 보유하고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라면 지역 내 꼰대(특히 성직자)들의 눈치 때문에 절대 출간할 수 없는 유형의 서적들도 베네치아에서라면 출간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종교서적에 있어서 유럽 내 최고수준의 출하량을 자랑했지만, 한편으로는 야설, 춘화집 분야에서 경쟁상대가 없는 출판도시이기도 하였다.

여하튼 이러한 강점들에 힘입어 베네치아 공화국은 세계 인쇄업의 진앙지가 되었으며, 전성기인 16세기 중반 공화국은 유럽 전체에서 출판된 책의 절반, 전 세계에서 출판된 책의 1/3 이상을 찍어냈다.

이렇듯 베네치아 공화국은 세계 최초의 출판업 중심지로 군림하였고, 패권기에 다양한 혁신들을 창출하여 오늘날의 서적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례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인쇄공들은 최초로 필기체를 서적에 도입했다. 오늘날 영어권에서는 이 필기체를 이탤릭(Italic)체라고도 부른다. 또한 세미콜론과 어퍼스트로피, 악센트 등의 부호 등도 이 시기 베네치아에서 서적의 가독성 증진을 위해 고안된 부호들이다. 오늘날의 시리즈물과 같은 개념의 콘텐츠가 최초로 형성된 곳도 베네치아였다.

그 이외 베네치아에서는 세계 최초로 신문이 등장하기도 했다. 베네치아의 신문은 가체타(Gazzetta) 동전 한 개면 구입할 수가 있었고, 이 때문에 가체타(Gazzetta)라고 불렸다. 이는 단어 끝에 a음을 쓰지 않는 프랑스에서 가제트(Gazzette)라는 이름으로 도입되었고, 이가 다시 영국으로 전래되어 오늘날 영어권에서 신문을 가제트(Gazzette)라고 부르기도 한다.

베네치아의 출판업은 한 세기동안 호황을 누렸으나, 1558년 12월부터 시작된 교황청의 금서 탄압의 영향으로 인해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레판토 해전을 치른 16세기 후반부터는 베네치아와 로마 간의 관계가 긴밀해져 종교 탄압이 더욱 거세졌고, 결국 베네치아는 16세기를 끝으로 출판업 중심지의 지위를 잃게 된다. 17세기에도 여전히 베네치아는 주요 출판도시로 남기는 했으나, 이미 프랑스 파리의 절반 미만 수준으로 책 출하량이 감소하였고, 이탈리아의 다른 주요도시들에 대해서도 우위를 가지지 못하였다.

사회[편집]

귀족제도[편집]

베네치아의 귀족들은 대부분이 부유한 상인 출신들 혹은 전쟁, 외교 등 국가를 위해 큰 공로를 세운 영웅들의 후손들로 공화국의 '황금의 서'에 등록된 가문 일원들이었고, 대평의회 시대부터는 이들만이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어 공화국의 특권지배계층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귀족들은 귀족의 명성에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할 시 언제든지 귀족 지위를 박탈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귀족이라할지라도 전횡을 일삼을 수 없었으며 항상 행동에 책임을 져야만 했다. 베네치아의 계급제도는 유연했고 누구든 귀족이 될 수도 있고, 평민이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참정권 이외의 권리를 귀족이 더 갖는 것도 아니었기에 귀족제도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베네치아 시민들은 평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단지 가진 재력의 차이만 있었을 뿐.(물론 그게 엄청난 것이지만)

이들은 전통적인 베네치아 공화국의 주력 산업인 무역업에 종사하여 막대한 부를 거머쥔 상업 귀족들이나 16세기 후반부터는 테라 피르마(베네치아 공화국의 이탈리아 본토 영지)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전원 귀족화되었다.

여성[편집]

중세 이탈리아에서 여성들은 폭넓은 사회적인 규제를 받았었고, 베네치아 여성들도 이의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여성들은 사순절 축제나 남편에게 허락을 받고 장을 볼 때를 제외하면 외출을 할 수가 없었으며 극도로 순결을 강요받았었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경제패권이 시들해진 17세기 무렵부터는 환락적인 문화가 이 도시국가를 지배하게 되었고 여성들도 중세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정도로 문란해졌다.

이 시기 베네치아에는 매춘부들이 우글거렸고 그녀들간의 경쟁이 심해서 일부 거리에서는 남자가 옷소매를 뜯기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특히 크리스마스와 사순절 사이의 베네치아 카니발 시즌에는 전 유럽으로부터 (주로 남성)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도시 전체가 하나의 사랑과 출산의 광란클럽이 되었다. 베네치아가 낳은 세계적인 난봉꾼인 카사노바(Casanova)가 활약했던 시기도 이 시기이다.

유대인[편집]

베네치아 공화국은 상업국가답게 종교적으로 관대한 나라였고, 유대인들이 공화국령 곳곳에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수도이자 중심지인 베네치아 시가지에 한해서는 유대인의 입주를 엄격히 금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공화국이 유대인의 능력을 공화국의 국력 신장에 이용했지만 한편으로는 유럽의 상업을 주름잡던 베네치아인들조차 유대인들을 강력한 경쟁상대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네치아가 큰 타격을 입은 키오자 전투 이후인 1384년에 최초로 유대인들의 베네치아 시가지 입주가 허용되었다. 이 결정은 1395년에 번복되었으나 1516년에 다시 유대인들의 베네치아 거주가 전격적으로 허용되었다.

이 결정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의한 것이었다. 1492년, 그레나다를 정복하고 레콘키스타를 완수한 스페인은 자국령 내의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하였다.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 상업적인 기회가 많은 이탈리아로 대거 몰려들었다. 게다가 16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는 유럽의 양대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스페인의 군대가 판을 치고 있었다. 베네치아 군대가 이탈리아 본토의 롬바르디아에서 프랑스군에게 참패하자 이탈리아 본토의 유대인들이 대거 석호로 몰려들었다. 결국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수준이라고는 보기 힘든 숫자의 유대인들이 도심지에 들어왔고, 결국 공화국 당국도 이들의 베네치아 시가지에서의 거주를 공식적으로 허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신 베네치아 당국은 따로 유대인 거주지구를 설정하여 그 곳에서만 거주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먼저 요청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현대 기준으로 보면 격리수용이 단순히 차별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중세 시대에는 그것이 일종의 안보장치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베네치아인들은 유대인이 오기 오래 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나 알렉산드리아같은 이교도들의 도시에 유대인 거류구역과 비슷한 형태의 집단거주구역을 만들어 그곳에서 살아오곤 하였다.

베네치아에서 유대인들이 집단거류하게 된 구역은 과거 대포 주조공장들이 있어서 금속을 던지(gettava / 제타바('던지다'의 베네토어))곤 했던 지구였고, 그 역사에 유래하여 베네치아 유대인 거류구역을 제토(Getto)라 부르게 되었다. 베네치아의 제토는 세계 최초의 게토(Ghetto)로 알려져 있다. 게토(Ghetto)는 독일계인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이 연자음 발음을 하지 못해 Getto를 '게토'로 부르던 것에 그 어원을 두며, 훗날 비극의 단어가 된다.

유대인들은 주로 금융업과 제조업, 무역업에 종사하여 보신주의적인 투자활동으로 경제활동노선을 바꾼 베네치아의 기존 귀족들을 대신해 베네치아 경제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었다.

비록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가 유대인의 시가지 거류권을 인정했지만 그럼에도도 불구하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악감정은 존재했는데, 셰잌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당시 사람들의[42] 유대인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유대인들도 돈냄새 때문에 베네치아에 온 것이지 딱히 베네치아가 좋아서 온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무렵 공화국의 경제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유대인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였으며, 18세기 말엽 베네치아에서 유대인 공동체의 규모는 미미한 수준이 되었다.


여담[편집]

1600년경 유럽국가 인구규모
국가 인구
잉글랜드 왕국 4,200,000
베네치아 공화국 2,000,000
네덜란드 연합주 1,500,000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1,200,000
포르투갈 왕국 1,100,000
스웨덴 왕국 900,000

베네치아 공화국은 도시국가인가?[편집]

베네치아 공화국은 일반적으로 도시국가로 불리곤 하는데, 그 이유는 공화국의 도시국가적인 특성들에서 기인한다. 거점도시를 핵으로 한 국가권력 재편구조, 제한적이긴 하지만 민주화된 정체, 그리고 무엇보다 베네치아 공화국이라는 이름의 무역 제국이 일개 도시인 베네치아로부터 시작하였다는 역사적 사실 등이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은 단순히 도시국가라고 보기엔 힘든 점도 많다. 비록 공화국이 베네치아라는 유럽 3대 내지는 5대 대도시 중 하나인 거대도시를 축으로 한 국가라 할 지라도, 공화국은 도시국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방대한 영토와 많은 인구를 거느리고 있었다. 게다가 베네치아 공화국에는 도시가 베네치아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공화국은 당시 유럽의 20대 도시에 속해있던 트레비소와 베로나(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인 그 도시 맞다)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소도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당시 베네토는 네덜란드와 더불어 유럽에서 가장 도시화된 지역이었다. 이처럼 베네치아 공화국은 일반적으로는 도시국가라고 불리지만, 단순히 도시국가라고 불릴 수준의 국가 규모 및 국력을 이미 넘어선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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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 집권 (1219년) · 여몽전쟁 발발 (1231년) · 처인성 전투 (1232년) · 황룡사 9층 목탑 소실 (1238년) · 최항 집권 (1240년) · 팔만대장경 완성 (1251년) · 최의 집권 (1257년) · 최씨 정권 붕괴 (1258년) · 여몽전쟁 종료 (1259년) · 삼별초의 난 (1270년) · 제1차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1274년) · 정동행성 설치 (1280년) · 제2차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1281년) · 삼국유사 편찬 (1285년)
대표 인물 존 왕 · 필리프 2세 · 프리드리히 2세 · 인노첸시오 3세 · 오스만 1세 · 알라 웃 딘 무함마드 · 쿠츨루크 · 칭기즈 칸 · 수부타이 · 오고타이 칸 · 차가타이 칸 · 귀위크 칸 · 몽케 칸 · 쿠빌라이 칸 · 쩐흥다오 · 가사도 · 충렬왕 · 충선왕 · 최충헌 · 최우 · 최항 · 최의
관련 작품

13세기 14세기 관련 문서 15세기
14th Century / 14世紀 / 1301년~1400년
국가 포르투갈 왕국 · 카스티야 연합왕국 · 아라곤 왕국 · 마린 왕조 · 나스르 왕조 · 말리 제국 · 잉글랜드 왕국 · 프랑스 왕국(카페 왕조 · 발루아 왕조) · 신성 로마 제국 · 교황령 · 피렌체 공화국 · 베네치아 공화국 · 나폴리 왕국 · 킵차크 칸국 · 모스크바 대공국 · 비잔티움 제국 · 오스만 제국 · 에티오피아 제국 · 맘루크 왕조 · 룸 술탄국 · 일 칸국 · 티무르 제국 · 델리 술탄 왕조(할지 왕조 · 투글루크 왕조) · 크메르 제국 · 마자파힛 제국 · 쩐 왕조 · 호 왕조 · 차가타이 칸국 · 송원시대(원나라 · 북원) · 명청시대(명나라) · 고려 · 조선 · 일본(가마쿠라 막부 · 겐무 신정 · 남북조 시대 · 무로마치 막부)
사건 세계사
삼부회 소집 (1302년) · 아비뇽 유수 (1309년) · 신곡 완성 (1321년) · 이븐 바투타의 여행 시작 (1325년) · 발루아 왕조 수립 (1328년) · 겐무 신정 개시 (1333년) · 무로마치 막부 수립, 일본 남북조 시대 개막 (1336년) · 백년 전쟁 발발 (1337년) · 노트르담 대성당 완공 (1345년) · 14세기 흑사병 범유행 (1346년~1355년) · 홍건적의 난 (1351년) · 데카메론 완성 (1353년) · 멸망, 건국 (1368년) · 티무르 제국 건국 (1370년) · 피사의 사탑 완공 (1372년) · 교회의 대분열 시작 (1378년) · 와트 타일러의 난 (1381년) · 무로마치 막부남북조 시대 통일 (1392년) · 칼마르 동맹 결성 (1397년) · 명 건문제 즉위 (1398년)
한국사
공민왕 즉위 (1351년) · 병신정변 (1356년) · 문익점의 목화씨 반입 (1363년) · 전민변정도감 설치 (1366년) · 공민왕 암살 (1374년) · 직지심체요절 초판 인쇄, 최무선의 화약 개발 (1377년) · 황산 대첩진포 해전 (1380년) · 위화도 회군 (1388년) · 과전법 시행 (1391년) · 조선 건국 (1392년) · 한양 천도 (1394년) · 제1차 왕자의 난, 성균관 설립, 정종 즉위 (1398년) · 개성 환도 (1399년) · 제2차 왕자의 난, 태종 즉위 (1400년)
대표 인물 필리프 4세 · 필리프 6세 · 장 2세 · 이븐 바투타 ·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 오스만 1세 · 티무르 · 원 혜종 · 홍무제 · 건문제 · 고다이고 덴노 · 아시카가 다카우지 · 아시카가 요시미츠 · 충렬왕 · 충선왕 · 공민왕 · 문익점 · 최무선 · 신돈 · 우왕 · 창왕 · 공양왕 · 최영 · 정몽주 · 이성계 · 정도전 · 정종 · 태종
관련 작품 기황후 · 육룡이 나르샤

14세기 15세기 관련 문서 16세기
15th Century / 15世紀 / 1401년~1500년
국가 아스텍 제국 · 잉카 제국 · 포르투갈 왕국 · 카스티야 연합왕국 · 아라곤 왕국 · 마린 왕조 · 와타스 왕조 · 나스르 왕조 · 말리 제국 · 송가이 제국 · 잉글랜드 왕국 · 프랑스 왕국(발루아 왕조) · 신성 로마 제국 · 교황령 · 피렌체 공화국 · 베네치아 공화국 · 나폴리 왕국 · 킵차크 칸국 · 모스크바 대공국 · 비잔티움 제국 · 오스만 제국 · 에티오피아 제국 · 맘루크 왕조 · 티무르 제국 · 델리 술탄 왕조(투글루크 왕조 · 사이드 왕조 · 로디 왕조) · 크메르 제국 · 마자파힛 제국 · 호 왕조 · 후 쩐 왕조 · 제4차 북속시기 · 후 레 왕조 · 차가타이 칸국 · 북원 · 명청시대(명나라) · 조선 · 일본(무로마치 막부 · 센고쿠 시대) · 류큐
사건 세계사
감합 무역 개시 (1401년) · 정난의 변, 앙카라 전투 (1402년) · 베이징 천도 (1403년) · 정화의 항해 (1405년) · 사이드 왕조 수립 (1414년) · 얀 후스 화형 선고 (1415년) · 테노치티틀란 건설 (1428년) · 류큐 왕국 건국 (1429년) · 잔 다르크 화형 (1431년) · 잉카 제국 건국 (1438년) · 토목보의 변 (1449년) · 로디 왕조 수립 (1451년) · 백년 전쟁 종료,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453년) · 장미 전쟁 발발 (1455년) · 탈문의 변 (1467년) · 오닌의 난 (1467년) · 타타르의 멍에 종식 (1480년) · 희망봉 발견 (1488년) · 레콩키스타 종료, 아메리카 발견 (1492년) · 최후의 만찬 완성 (1498년)
한국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제작 (1402년) · 탐라국 병합 (1404년) · 호패법 실시 (1413년) · 세종대왕 즉위 (1418년) · 쓰시마 정벌 (1419년) · 집현전 설치 (1420년) · 혼천의 발명, 4군 6진 개척 (1433년) · 의정부 직계제 (1436년) · 측우기 설치 (1441년) · 훈민정음 제작 (1443년) · 칠정산 편찬 (1444년) · 용비어천가 편찬 (1445년) · 훈민정음 반포 (1446년) · 신기전 개발 (1448년) · 문종 즉위 (1450년) · 고려사 편찬 (1451년) · 단종 즉위 (1452년) · 계유정난 (1453년) · 수양대군 즉위 (1455년) · 단종 살해 (1457년) · 홍문관 설치 (1463년) · 예종 즉위 (1468년) · 성종 즉위, 경국대전 편찬 (1469년) · 경국대전 시행 (1485년) · 연산군 즉위 (1495년) · 무오사화 (1498년) · 홍길동 체포 (1500년)
대표 인물 엔히크 · 이사벨 1세 ·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 바스쿠 다 가마 · 크리스토퍼 콜롬버스 · 아메리고 베스푸치 · 리처드 3세 · 샤를 7세 · 잔 다르크 · 니콜로 마키아벨리 · 레오나르도 다빈치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 콘스탄티노스 11세 · 메흐메트 2세 · 티무르 · 건문제 · 영락제 · 아시카가 요시마사 · 아시카가 요시히사 · 태종 · 세종대왕 · 장영실 · 이종무 · 문종 · 단종 · 수양대군 · 유자광 · 한명회 · 김종직 · 예종 · 성종 · 연산군 · 홍길동
관련 작품 노틀담의 꼽추 · 홍길동전

15세기 16세기 관련 문서 17세기
16th Century / 16世紀 / 1501년~1600년
국가 아스텍 제국 · 잉카 제국 · 포르투갈 왕국 · 압스부르고 왕조 · 와타스 왕조 · 사드 왕조 · 말리 제국 · 송가이 제국 · 잉글랜드 왕국 · 프랑스 왕국(발루아 왕조 · 부르봉 왕조) · 네덜란드 공화국 · 신성 로마 제국 · 합스부르크 제국 · 교황령 · 피렌체 공화국 · 베네치아 공화국 · 나폴리 왕국 · 프로이센 공국 · 킵차크 칸국 · 모스크바 대공국 · 루스 차르국 · 오스만 제국 · 에티오피아 제국 · 맘루크 왕조 · 티무르 제국 · 사파비 왕조 · 델리 술탄 왕조(로디 왕조) · 무굴 제국 · 마자파힛 제국 · 후 레 왕조 · 막 왕조 · 북원 · 명청시대(명나라) · 조선 · 일본(무로마치 막부 · 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류큐
사건 세계사
포르투갈령 고아 설치 (1510년) · 유토피아 출간,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 수립 (1516년) · 맘루크 왕조 멸망, 95개조 반박문 반포 (1517년) · 마젤란의 세계 일주,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스텍 침략 (1519년) · 아스텍 제국 멸망 (1521년) · 무굴 제국 건국 (1526년) · 사코 디 로마 (1527년) · 1차 빈 포위 (1529년) · 잉카 제국 멸망 (1533년) · 캐나다 발견 (1534년) · 장 칼뱅의 종교개혁 (1541년) · 지동설 주장 (1543년) · 트리엔트 공의회 (1545년) · 경술의 변 (1550년) ·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1555년) · 포르투갈령 마카오 등장 (1557년) ·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1세 즉위 (1558년) · 스페인 마드리드 천도 (1561년) · 위그노 전쟁 발발 (1562년) · 네덜란드 독립전쟁 (1568년) · 레판토 해전 (1571년) · 무로마치 막부 폐지, 다케다 신겐 사망,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개막 (1573년) ·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세계 일주 (1577년) · 포르투갈의 나가사키 진출, 이베리아 연합 수립 (1580년) · 그레고리력 도입, 혼노지의 변 (1582년) · 잉글랜드-에스파냐 전쟁 (1585년) · 칼레 해전, 쇼군 직책 폐지 (1588년) · 부르봉 왕조 수립 (1589년) · 일본 전국 통일 (1590년) · 송가이 제국 멸망 (1591년) · 한 여름 밤의 꿈 집필 (1595년) · 낭트 칙령 (1598년) · 세키가하라 전투, 영국 동인도 회사 설립 (1600년)
한국사
갑자사화 (1504년) · 중종반정 (1506년) · 삼포왜란 (1510년) · 임신약조 (1512년) · 조광조의 개혁 (1515년) · 비변사 설치 (1517년) · 기묘사화 (1519년) · 백운동 서원 설립 (1543년) · 인종 즉위 (1544년) · 명종 즉위, 을사사화 발생 (1545년) · 양재역 벽서 사건 (1547년) · 을묘왜변 (1555년) · 임꺽정의 난 (1559년) · 정여립 모반 사건, 기축옥사 (1589년) · 임진왜란, 부산진 전투, 평양성 전투, 한산도 대첩, 진주 대첩 (1592년) · 벽제관 전투, 행주 대첩, 임진왜란의 휴전 협상 (1593년) · 칠천량 해전, 정유재란, 명량 해전 (1597년) · 노량 해전 (1598년)
대표 인물 카를 5세 · 펠리페 2세 · 마젤란 · 에르난 코르테스 · 곤살로 피사로 · 미겔 데 세르반테스 · 헨리 8세 · 앤 불린 · 메리 1세 · 엘리자베스 1세 · 윌리엄 셰익스피어 · 앙리 4세 · 마르틴 루터 · 장 칼뱅 · 니콜로 마키아벨리 · 레오나르도 다빈치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 라파엘로 산치오 · 그레고리오 13세 · 이반 4세 · 보리스 고두노프 · 셀림 1세 · 쉴레이만 대제 · 이스마일 1세 · 아바스 1세 · 바부르 · 후마윤 · 악바르 · 만력제 · 마테오 리치 · 이여송 · 진린 · 아시카가 요시테루 · 아시카가 요시아키 · 오다 노부나가 · 다케다 신겐 · 다케다 가츠요리 · 우에스기 겐신 · 아케치 미츠히데 · 도요토미 히데요시 · 고니시 유키나가 · 가토 기요마사 · 강항 · 후지와라 세이카 · 도요토미 히데요리 · 도쿠가와 이에야스 · 연산군 · 중종 · 조광조 · 인종 · 명종 · 선조 · 이순신 · 이순신(무의) · 원균
관련 작품 폭풍을 부르는 대단해! 전국대합전

16세기 17세기 관련 문서 18세기
17th Century / 17世紀 / 1601년~1700년
국가
사건 세계사
30년 전쟁 발발 (1618년) · 베스트팔렌 조약 (1648년) · 명예혁명 (1688년)
한국사
대표 인물 미겔 데 세르반테스 · 엘리자베스 1세 · 윌리엄 셰익스피어 · 제임스 1세 · 찰스 1세 · 올리버 크롬웰 · 찰스 2세 · 제임스 2세 · 메리 2세 · 윌리엄 3세 · 루이 14세 · 표트르 1세 · 아바스 1세 · 이자성 · 정성공 · 오삼계 · 천명제 · 숭덕제 · 순치제 · 강희제 · 마테오 리치 · 아담 샬 · 윌리엄 애덤스 · 강항 · 후지와라 세이카 · 하야시 라잔 · 소현세자 ·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 · 헨드릭 하멜
관련 작품

17세기 18세기 관련 문서 19세기
18th Century / 18世紀 / 1701년~1800년
국가
사건 세계사
7년 전쟁 발발 (1756년) · 플라시 전투 (1757년) · 파리 조약 (1763년) · 제1차 폴란드 분할 (1772년) · 프랑스 혁명 (1789년) · 바렌 배신 사건 (1791년) · 제2차 폴란드 분할, 루이 16세 처형 (1793년) · 테르미도르의 반동 (1794년) · 제3차 폴란드 분할 (1795년) ·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1799년)
한국사
대표 인물 조지 워싱턴 · 앤 여왕 · 조지 1세 · 로버트 월폴 · 루이 14세 · 루이 16세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장-자크 루소 · 볼테르 · 막시밀리앵 프랑수아 마리 이지도르 드 로베스피에르 · 프리드리히 2세 · 표트르 1세 · 예카테리나 2세 ·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 · 가경제 · 오규 소라이 · 모토오리 노리나가 · 스기타 겐파쿠 · 숙종 · 영조 · 사도세자 · 정조 · 홍국영 · 순조 · 박지원 · 박제가
관련 작품

2015 개정 교육과정 세계사
3단원 IV. 유럽·아메리카 지역의 역사 5단원
고대 및 중세 · 근대
고대 그리스 폴리스 아크로폴리스 · 아고라 · 올림피아 제전
아테네 솔론 · 참주(페이시스트라토스) · 클레이스테네스(500인 평의회 · 도편추방제) · 페리클레스
스파르타 아고게 · 헬롯
변화 페르시아 전쟁(마라톤 전투 · 살라미스 해전) · 펠로폰네소스 전쟁(델로스 동맹 · 펠로폰네소스 동맹)
문화 소피스트 · 소크라테스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 호메로스(일리아드 · 오디세이아) · 헤로도토스 · 투키디데스 · 파르테논 신전
헬레니즘 제국 필리포스 2세 · 알렉산드로스 3세 · 이소스 전투 · 알렉산드리아 · 셀레우코스 왕조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세계시민주의 · 스토아 학파 · 에피쿠로스 학파 · 밀로의 비너스상 · 라오콘 군상
고대 로마 로마 공화국 로마 왕국 · 호민관 · 12표법 ·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 · 호르텐시우스 법 · 포에니 전쟁(한니발 · 스키피오) · 라티푼디움 · 그라쿠스 형제 · 스파르타쿠스 · 삼두정치(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폼페이우스 · 크라수스 · 옥타비아누스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 레피두스) · 악티움 해전
로마 제국 아우구스투스 · 오현제 · 군인 황제 시대 · 콜로나투스 · 디오클레티아누스 · 콘스탄티누스 1세(밀라노 칙령 · 콘스탄티노폴리스) · 테오도시우스 1세 · 비잔티움 제국 · 서로마 제국
문화 12표법 · 시민법 · 만민법 ·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 콜로세움 · 키케로 · 베르길리우스 · 스토아 학파 · 리비우스 · 플루타르코스(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프톨레마이오스(천동설)
기독교의 출현 예수 · 카타콤 · 밀라노 칙령 · 니케아 공의회(아타나시우스파)
중세 유럽 프랑크 왕국 게르만족 · 오도아케르 · 클로비스 1세(메로베우스 왕조) · 카롤루스 마르텔(투르-푸아티에 전투) · 피핀 3세 · 샤를마뉴 · 베르됭 조약 · 메르센 조약 · 서프랑크 왕국 · 중프랑크 왕국 · 동프랑크 왕국 · 바이킹족(노브고로드 공국 · 노르망디 공국 · 노르만 왕조)
봉건제 바이킹족 · 마자르족 · 장원 · 불입권 · 삼포제 · 농노 · 카페 왕조 · 노르만 왕조
가톨릭의 성장 성상 파괴령(레오 3세) · 동서 교회 분열(동방 정교회 · 가톨릭) · 교황 · 대주교 · 주교 · 사제 · 클뤼니 수도원 · 카노사의 굴욕(그레고리우스 7세 · 하인리히 4세) · 보름스 협약 · 인노켄티우스 3세
문화 기독교 · 신학 · 교부 철학(아우구스티누스) · 스콜라 철학(토마스 아퀴나스 · 신학대전) · 파리 대학 · 볼로냐 대학 · 롤랑의 노래 · 니벨룽겐의 노래 · 아서왕 · 로마네스크(피사 대성당) · 고딕(스테인드글라스 · 쾰른 성당 · 샤르트르 대성당)
비잔티움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유스티니아누스 1세(유스티니아누스 법전) · 성 소피아 대성당 · 군관구제 및 둔전병제 · 십자군 전쟁 ·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 그리스어 · 슬라브족
중세 붕괴 십자군 전쟁(우르바누스 2세 · 클레르몽 공의회 · 예루살렘 왕국 · 라틴 제국) · 한자 동맹 · 길드 · 백년 전쟁 · 14세기 흑사병 범유행 · 자크리의 난 · 와트 타일러의 난 · 아비뇽 유수(필리프 4세 · 보니파키우스 8세) · 교회의 대분열 · 존 위클리프 · 얀 후스 · 콘스탄츠 공의회
잉글랜드 왕국
마그나 카르타 · 백년 전쟁 · 장미 전쟁
프랑스 왕국
필리프 2세 · 백년 전쟁(잔 다르크)
기타
신성 로마 제국 · 교황령 · 베네치아 공화국 · 피렌체 공화국 · 나폴리 왕국 · 아라곤 왕국 · 카스티야 왕국 · 에스파냐 왕국
근세 시대 르네상스 이탈리아
인문주의 · 페트라르카 · 보카치오(데카메론) · 니콜로 마키아벨리(군주론) · 보티첼리(비너스의 탄생) · 레오나르도 다빈치(모나리자)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다비드상) · 라파엘로 산치오(아테네 학당) · 성 베드로 대성당
알프스 이북
에라스뮈스(우신예찬) · 토머스 모어(유토피아) · 반에이크 형제 · 브뤼헐 · 미겔 데 세르반테스(돈키호테) · 윌리엄 셰익스피어(로미오와 줄리엣 · 햄릿)
과학기술
화약 · 나침반 · 인쇄술(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종교 개혁 마르틴 루터 · 레오 10세 · 면벌부 · 95개조 반박문 ·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 장 칼뱅 · 헨리 8세(수장법) · 엘리자베스 1세(통일법 · 성공회) · 트리엔트 공의회(종교재판소 · 금서목록) · 예수회(이냐시오 데 로욜라) · 위그노 전쟁 · 낭트 칙령 · 30년 전쟁 · 베스트팔렌 조약
대항해시대 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 · 나침반 · 포르투갈 왕국(바르톨로메우 디아스 · 바스쿠 다 가마) · 에스파냐 왕국(크리스토퍼 콜롬버스 · 마젤란) · 아스텍 제국(테노치티틀란 · 에르난 코르테스) · 잉카(쿠스코 · 키푸 · 프란시스코 피사로) · 삼각 무역 · 가격 혁명 · 상업 혁명
절대왕정 관료제 · 상비군 · 왕권신수설 · 중상주의
서유럽
에스파냐 왕국(펠리페 2세 - 레판토 해전 · 무적함대 · 네덜란드 독립운동) · 잉글랜드 왕국(엘리자베스 1세 - 성공회 · 영국 동인도 회사) · 프랑스 왕국(루이 14세 - 콜베르 · 베르사유 궁전)
동유럽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2세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7년 전쟁 · 폴란드 분할) · 러시아 제국(루스 차르국 · 표트르 1세 - 상트페테르부르크 · 네르친스크 조약 · 예카테리나 2세 - 폴란드 분할)

각주

  1. 그 돈의 량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프랑스 쪽에서 쪽수 계산 - 왕 급의 제후가 여러 명 참가한다지만 프랑스 왕이 동원 가능한 군데의 몇 배 가량은 되었다. - 을 잘못해서 생각보다 사람들이 덜 오자, 자연스럽게 낼 수 있는 돈이 줄어들었고, 그 결과 베네치아 인근의 섬에 틀여 박힌 채로 십자군이 공중해체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2. 이때 교황 특사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무것도 아닌 정보를 주고 로마로 보낸 뒤에 목적지를 알려주지도 않고 떠나버렸다. 찾아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3. 이 때문에 자다르를 점령하자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을 파문에 처한 교황도 이때에는 다른 가톨릭 도시를 점령하지 않는 조건으로 허가한다. 가는 길에 가톨릭교도의 도시는 없었으니 사실상 아무런 조건도 없었던 셈
  4. http://ko.wikipedia.org/wiki/아르고스
  5. 이때 베네치아의 수뇌부가 받았던 타격은 꽤나 되었었다.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적에게 오는 보급을 막음과 동시에 요새에 틀어박혀 방어전 때리면 상대가 먼저 GG하리라고 생각했었지만, 해군이 아무것도 못하고 후퇴만 하자, 그대로 함락되어 버린 것. 그때 해군 제독은 종신 추방형 및 전 재산 몰수를 받았다.
  6. 당시 헝가리는 이슬람 교도 침략을 막는 방파제라는 명목하에 베네치아와 교황청이 받는 돈으로 정예화되어 있었다.
  7. http://ko.wikipedia.org/wiki/슈코더르
  8. http://en.wikipedia.org/wiki/Tanais
  9. http://ko.wikipedia.org/wiki/페오도시야
  10. http://en.wikipedia.org/wiki/Methoni,_Messenia
    http://en.wikipedia.org/wiki/Koroni
  11. 사실상의 연공금이었다.
  12. 이때 스쿠타리 인들은 베네치아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로 가서 정착한다.
  13. http://ko.wikipedia.org/wiki/케팔로니아_섬
  14. http://ko.m.wikipedia.org/wiki/이타카
  15. http://ko.wikipedia.org/wiki/파마구스타
  16. 베네치아 공화국, 스페인, 제노바 공화국, 토스카나 대공국, 우르바노 공국, 몰타 기사단, 사보이 공국, 교황청
  17. 스페인의 북아프리카와 베네치아의 키프로스 구원이 대립하여 결국 튀르크 함대의 격멸로 결정 되었다.
  18. 스페인은 그들의 용병대장인 안드레아 도리아를, 베네치아는 또 그들의 해군제독인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를 추천하였고, 교황청은 대안으로 자기네 마르칸토니오 콜론나를 추천하였고, 결국 오스트리아 공 돈 후안으로 결정되었다.
  19. 당장 급하던 베네치아는 자기네 조선소를 총동원 하여 목표량을 맞추었으나 스페인은 당초 약속의 절반만 가지고 왔다.
  20. http://ko.wikipedia.org/wiki/하니아
  21. http://en.m.wikipedia.org/wiki/Spinalonga
  22. http://en.m.wikipedia.org/wiki/Souda_(island)
  23. http://en.m.wikipedia.org/wiki/Gramvousa
  24. http://ko.m.wikipedia.org/wiki/이라클리오
  25. 단 칸디아는 제외, 칸디아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나게 된다.
  26. 15년간 평생을 바쳐 싸워서 옷도 다 헤이해지고, 몰골 역시 유령 비슷하게 변할 정도였다는 의미로 해석가능하다.
  27. 당시 전쟁에 쓰던 돈은 베네치아 전체 세입을 넘었었다.
  28. http://ko.wikipedia.org/wiki/레프카다
  29. http://ko.wikipedia.org/wiki/프레베자
  30. http://en.wikipedia.org/wiki/Vonitsa
  31. http://ko.wikipedia.org/wiki/나플리오
  32. http://ko.wikipedia.org/wiki/파트라
  33. http://en.wikipedia.org/wiki/Mystras
  34. 이때 베네치아인이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공성하던 중 터키군이 파르테논 신전에 화약을 보관히 두었고, 베네치아 군의 대포가 명중하여 파괴되고 말았다.
  35. 로마 원로원이 대 스키피오에게 주어준 칭호인 아프리카누스(아프리카인)를 생각하면 편하다.
  36. 참고로 그는 1694년 나우폴리온 근처에서 죽는다.
  37. 구 베네치아령 본토 중 일부
  38. http://en.m.wikipedia.org/wiki/Venetian_independence_referendum,_2014
  39. 라틴어 Dux의 베네토어 방언으로, '공작'에 해당.
  40. 이 방식의 천일제염법은 국내에는 20세기 초 구한말에 일본인에 의해 보급되었다.
  41. 영어의 Arsenal과 같은 어원
  42. 당시 잉글랜드와 베네치아는 국가간 관계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