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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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996년 K리그의 주관 기관인 한국프로축구연맹대한민국 정부가 주도가 되어 서울 연고 3구단들인 일화 천마(현 성남 FC), LG 치타스(현 FC 서울), 유공 코끼리(현 제주 유나이티드를 강제적으로 서울에서 지방으로 연고지를 이전시킨 강압적인 정책으로[1]한국 프로축구 역사상을 넘어 한국 프로스포츠역사상 이해할 수 없는 최악의 삽질행정으로 평가받고 있다. 왜 삽질인지는 바쁘신 분들은 아래 박스만 봐도 금방 이해가 가실 것이다.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 얼마나 병신스러운인 것인지는 당시와 현재의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입장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1994년 7월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출범하면서 서울 연고 3개 구단(일화 천마,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을 서울에서 축출하는 것을 지상최대의 목표로 삼았고 결국 청와대의 강제지침을 이용해
1996년 서울 연고 3개 구단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제축출에 성공하자 프로축구 흥행을 가로막는 최고 난제가 해결되었다고 좋아했는데

2010년대부터는 서울 연고지에 복수 연고팀들을 만들고 서울더비를 만드는 것이
K리그 흥행 극대화를 위한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지상최대의 목표이자 최고 난제로 꼽히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한국프로축구연맹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최고 난제를 '해결'했더니
그 해결로 인해 도리어 다시 모든 역량을 동원해 해결해야 할 최고 난제가 발생하는 황당한 시추에이션이 이어지고 있다!

혹시 한국프로축구연맹은 고통을 즐기는 마조히스트 같은 변태 집단이라
최고 난제를 스스로 만들고 이를 해결하는데서 오는 어려움과 고통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병신스런 시추에이션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아마 다시 서울 연고 구단이 목표대로 3개 이상이 된되면 이제 또다시 최고 난제를 해결하는데서 오는 어려움과 고통을 즐기기 위해서
제2차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을 추진할지 모르니 K리그팬들은 방심하지 말고 지켜봐야 한다.

한국프로축구연맹 뵨태님들 K리그와 팬들 가지고 장난치지 말고 고통을 즐기고 싶으면 채찍을 사서 스스로 자해를 하세요

한국프로축구연맹과 정부가 주도가 되어 왜 강제적으로 시행한 정책인가는 리그베다 위키의 위키 게시판에서 있었던 서울연고공동화정책 허구론 논객들과 벌어진 끝짱토론 참고... 토론 장난 아닌게 기니 마음 단단히 먹고 정독하시고 괜히 디시 위키에서 이걸로 또 토론하고 그런 시간낭비 하지 마시길
토론 결과 정리 및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허구설 주장자 패배 인정 게시물
서울연고공동화정 정책 자발성 vs 강제성 끝짱토론 게시물

배경[편집]

때는 1994년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도 여전히 인기 없던 K리그에서 축구행정가들과 K리그 팬들의 유서깊은 종특이러 이러 해서 프로축구가 인기 없고 흥행이 안 된다는 대형 핑계거리가 스물스물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1994년 당시 K리그는 서울 동대문운동장을 연고로 한 일화 천마(현 성남 FC), LG 치타스(현 FC 서울), 유공 코끼리(현 제주 유나이티드)의 3개 구단, 영남권 3개 구단 대우 로얄즈(현 부산 아이파크), 현대 호랑이(현 울산 현대 축구단), 포항제철 아톰즈(현 포항 스틸러스), 전북 버팔로가 참가하여 호남권 1팀이 늘어 총 7개팀이 되었는데 빅마켓인 수도 서울에만 총 3개팀이 몰려 있어서 흥행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K리그에 대도시-빅마켁, 중소도시-스몰마켓 이렇게 비즈니스 관점으로 구단 프랜차이즈 연고지를 바라보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이후로 그 전까지 축구행정가들의 마인드는 프로야구와 안 겹치고 지방 중소도시에 문화적 혜택이 떨어져서 볼거리가 없어야 경기 한번 열리면 축구팬이 아니더라도 시골 마을잔치 마냥 사람들이 몰릴거라는 패배주의와 지방 중소도시 사람들은 볼게 없기 때문에 축구장을 찾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마인드는 아직까지도 남아 있어서 내셔널리그 홈페이지의 리그 소개문구를 보면 9번째에 아직도 아래처럼 지방 중소도시는 축구열기가 높다는 아무 근거 없는 얘기가 쓰여져 있다.
축구열기가 높은 지방중소도시는 언제든지 팀창단이 될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지금은 서울과 같은 대한민국 최대 빅마켓인 수도 서울에 연고팀이 2개밖에 안 되어서 K리그 흥행이 안 된다고 핑계를 되지만 당시에는 최대 빅마켓 수도 서울에만 3개팀이 몰려 있고 그 외에 당시 축구행정가들 말대로 문화적 혜택이 떨어져서 프로축구가 충분히 먹힐 수 있다고 여겨지는 지방 중소도시 연고팀들이 별로 없어서 프로축구가 흥행이 안 되고 망해간다는 핑계를 되고 있었다.(아마 다시 수도 서울에 3개팀 이상되면 또 서울에만 팀이 많아서 흥행이 안 된다고 다시 이 핑계거리를 될 수 있으니 잘 기억해 두자)

당시 이 핑계거리에 힘을 실어준 곳은 옆동네 일본으로 1993년 J리그를 출범시키면서 도쿄 연고지 구단 없이 즉 공동화된채로 J리그 붐을 일으켰었다. 그리고 이걸 한국축구 행저가들이 벤치마킹을 했는데 사실상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으로 보여지는 현상만을 보고 파악한 성급한 판단이었다.

왜냐면 1993년 J리그 출범시 도쿄 연고지 구단 없이 출범한 것은 지극히 당시 일본내의 특수한 상황으로 표면적으로 당시 도쿄에 프로축구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이 도쿄국립경기장 하나였고 국립경기장이라 특정 구단이 독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표면적 이유 이외에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갈등 때문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J리그 연맹의 수장이었던 가와부치 사부로가 당시 일본 프로야구의 흥행을 책임지고 이를 발판으로 리그 행정에까지 간섭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극협하던 사람으로 J리그에 '거인군은 필요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프로야구처럼 도쿄 연고지를 기반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처럼 전국구 인기 구단이 될려는 포부를 가졌던 요미우리 축구단 (현 도쿄 베르디)를 견제하였다. 또한 역시 기존 JFL 시절 연고지인 도쿄 연고지를 그대로 가져갈려고 했던 미쓰비시 축구단 (현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에 우라와 연고지를 추천하였다. 결과적으로 가와부치 사부로 의도대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처럼 전국구 인기 구단이 될 가능성이 있는 도쿄 연고지 구단을 만들지 않은채 1993년 J리그가 출범하는데 성공하였다.)

즉 J리그에서도 도쿄라는 일본 최대 시장의 빅마켓 연고지 구단을 당연히 만들고 싶었했다는 것이고 도쿄 국립경기장 규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쿄 연고지가 공동화 된 것으로 수도이자 최대 빅마켓인 도쿄를 아무 이유없이 공동화 시키는 그런 저능아스런 행정을 한게 아니었으며 일단 국립경기장 외에 J리그 기준(1부리그 15000명 2부리그 10000만명 수용구장)에만 부합하는 경기장이 생기면 그 때는 문제 없이 도쿄 이전이 가능했고 실제로 2001년 도쿄 스타디움이 개장한 것과 동시에 도쿄 베르디와 FC 도쿄가 도쿄 입성에 성공했다.

또한 1993년과 1994년 J리그 버블 시대의 인기는 도쿄 연고지 구단의 유무와 아무 상관없는 신장개업빨이었으며 도쿄 연고지 구단은 없었더라도 도쿄 국립 경기장에서 중립 경기로 매주말 J리그 경기 열렸기 때문에 도쿄 연고지를 공동화해서 J리그가 흥행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한국 축구행정가들이 J리그에서 무슨 대단히 전략적인 의사결정으로 도쿄 연고지를 공동화 시킨 것인 줄 착각을 하고 이것이 J리그 흥행을 일으킨 흥행요소라고 생각하고 벤치마킹을 한 것이다. 하물며 당시 서울에는 동대문운동장, 목동운동장, 잠실올림픽주경기장 이렇게 J리그에서 부러워할만한 경기장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었으니 얼마나 병신짓 중에 병신짓을 한것인지 알것이다.

그런데 이 미친 K리그 축구행정가들은 공동화 시키면서 조선으로 무려 축구전용경기장을 지으면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되도 않는 개씹소리를 시전했다. 머한 축구전용구장들 중에 그나마 작은 창원 축구센터, 숭의아레나가 1100억원이 들어갔는데 씨발 그나마 머한 프로스포츠들 중에 가장 자금력 빵빵하다는 빠따도 구장 지을 때 구단 부담금이 300~400억 선인 판국에(이것도 2010년대 중반 들어서나 가능) 뭐 씨발 대놓고 축구전용구장을 지어서 들어오라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체 이 병신새끼들은 공 대신 양심을 뻥뻥 차고 놀았던건가 싶다. 그러면 개축리그가 처음부터 병신같이 시작한 이유도 납득이 가지.

당시 J리그에 돈 벌로 온 지코, 리네커, 스토이코비치 이런 퇴물 스타들과 1992년 아시안컵 우승 그리고 미우라, 라모스, 나카야마, 다카기, 기타자와 등의 황금세대 출현으로 과거와 달리 부쩍 강해진 축구 대표팀 인기를 발판으로 한 거품인기가 존재했다. 한마디로 일본 수도이자 최대 빅마켓인 도쿄 연고지 구단이 없어서 J리그가 흥행 대박을 터트린게 아니고 당시는 거품인기로 K리그 원년에 했던것처럼 일본에서 전 구단 연고지 없이 유랑극단처럼 리그를 돌렸어도 인기가 있었을 시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거품을 제외하고 생각해봐도 인프라가 개좆망이라 그렇지 기본적으로 JSL 시절부터 지역연고제와 기업구단 참가라는 토대는 잘 갖춰졌던 게 일본 축구였다. 그렇게 기업들의 대대적인 참가가 있었으니까 퇴물스타들의 영입도 가능했던 것이고.

연맹+정부 vs 서울 연고 구단간의 갈등과 강제진압[편집]

위와 같이 2002 월드컵 유치 경쟁국인 일본이 어찌됐든 J리그가 인기를 끌고 있는 점이 2002년 월드컵 개최국 선정에 유리하게 작용된다고 하니, 전 국가적으로 월드컵 유치에 열을 올리던 한국 축구계와 정부는 후달리기 시작했고 일단 일본과 똑같은 리그 형태로 돌려보자고 1995년부터 전후기 리그제+챔피언결정전 그리고 1996년부터 서울 연고지 구단을 없애고 일본처럼 전 구단 지역명을 붙이는것으로 리그 개혁 목표를 정했다. 다른것이야 그렇다쳐도 그래도 명색이 프로축구리그인데 연고지를 개무시하고 서울팀들보고 서울에서 나가라고 하니, 당연히 서울 연고지 구단들은 반대를 했고 연맹과의 갈등을 초래했다.

이때 서울 3개팀을 모두 없애고 제로베이스로 만드는 것을 막으려고, 서울 연고 3개 구단들이 강북-동대문운동장, 강남-잠실올림픽주경기장, 강서-목동운동장 이렇게 서울 내에서 지역별로 나뉘어 각각의 경기장을 사용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연맹의 퇴출 명령을 저지할려고 했다.

쉽게 말해 현재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장기 비전인 비욘드(BEYOND 11)의 서울 연고팀 최소 3개까지 확대로 프로축구 흥행 극대화라는 목표는 1990년대에 이미 해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아무튼 계속해서 서울 연고 3개 구단은 안 나간다고 버티다 보니 연맹은 힘으로는 쫒아낼 수없다고 판단, 월드컵 유치에 도움 될려면 지방 중소도시로 프로팀들을 내보내서 축구 열기를 올려야 된다는 명분으로 정치권을 끌어들였다. 당시 김영삼 정부가 추진하던 지방 자치화 시대라는 정책에도 부합하기 때문에 별 거부감 없이 청와대에서 서울 연고팀은 모두 지방으로 이전하라는 강제 지시를 내리면서 갈등을 일단락 시켰다.

삽질의 대가[편집]

결국 1996년 이후 서울 연고 3개 구단은 서울 공동화의 결과 각각 안양(LG 치타스), 부천(유공 코끼리), 천안(일화 천마]) 등 서울과 그다지 멀지 않은 지역으로 자리잡았는데, 나중에 LG 치타스는 다시 서울로, 부천 SK는 제주로, 천안 일화는 성남으로 다시 한번 연고지를 이전하였다. 1996년 서울 3개팀을 한꺼번에 몰아내더니 이번에는 서울 연고지 입성금이라는 것까지 만들어서 서울로 들어오려면 돈을 내라고 하는 짓을 저질렀다.

한국 축구 인기의 정점인 2002년 월드컵 4강신화의 인기광풍 속에서 Kt, 금호그룹, 신한은행 등등 여러 대기업들에게 서울 연고권 줄테니까 입성금 내고 들어오라고 계속해서 입질을 보냈지만 모두에게 거절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결국 K리그의 시장가치로는 신규 대기업 서울 연고 구단을 유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식으로 하다가는 월드컵 한다고 아시아에서 제일 큰 축구전용구장인 서울월드컵경기장 지어놨더니 맨날 놀린다는 비난 여론이 생기고 벤치마킹으로 삼았던 일본마저도 거품 인기 꺼진 후 2000년부터 도쿄 연고 구단을 만들면서 흥행 돌파구로 삼을려고 했던 것을 보고 정신차린 연맹은 기존 구단들의 연고지 이전을 통해서라도 서울 연고팀을 하루라도 빨리 만드는게 낫다고 판단하고 전 구단에 서울 연고지 이전 제안서를 돌리고 공모를 하였고 이런 과정을 통해 결국 서울의 LG 치타스였다가 쫓겨났던 안양LG치타스가 다시 서울로 돌아 오면서 FC 서울로 이름을 바꾸고 마무리 되었다. 결국 연맹으로서도 새로운 대기업 구단 유치도 모두 실패해서 아무 소득도 없었으며 LG 치타스도 안양(안양이 아니었어도 서울 -> 타도시 -> 서울이라면 결과는 같다)에 괜히 발 담갔다가 패륜놀이 시발점 되고 순수하게 축구 좋아하던 팬들도 서로 상처를 입고 한국 프로축구 역사상 최악의 삽질의 결과는 너무나 참혹하였고 아직도 진행중이다.

한편 중견기업 이랜드가 (2016년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대기업집단)에서 제외됨) 서울 연고팀을 운영하면 K리그에 복수 연고팀 시대가 다시 열리기는 하였다.

그러나 통일그룹 일화는 제외하더라도 1996년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을 시행 안 했으면 당시에도 5대 대기업이었던 SK (현 재계서열 3위)가 계속 서울 연고팀이었을 것이고 일화도 서울 연고팀으로 서울 연고팀이 3개팀으로 이들 서울 연고 3팀의 서울 더비는 엄청난 스토리가 쌓여 흥행 컨텐츠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컨텐츠도 날리고 결국 LG가 GS그룹으로 분리되어 FC서울이 되어 2004년에 다시 돌아왔고 재계서열 3위의 SK와 K리그에서 나가기 전까지 자금력이 풍부했던 통일그룹 일화가 서울 연고팀에서 사라지고 이랜드라는 중견기업이 거의 20년만에 서울 연고팀이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서울 연고팀을 재계서열 3위의 SK를 날리고 중견기업 이랜드로 교체하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무 의미없는 병신짓거리를 한 것이다. 중간에 서울 축구 역사가 텅빈것까지 생각하면...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의사결정이 얼마나 세상물정도 모르고 경제관념도 없는 병신스러운지는 서울연고공동화정책이 입안되던 1994년의 재계서열과 프로축구단 운영 실태를 보면 알 수 있다.

1994년 재계서열 참고

1. 현대 - 이미 울산에서 프로축구단 운영 중
2. 삼성 - 1994년 미국 월드컵 이후 프로축구단창단 추진
3. 대우 - 이미 부산에서 프로축구단 운영 중
4. LG - 서울 연고 구단
5. SK - 서울 연고 구단

1990년대 한국에 프로스포츠단에 투자를 넉넉히 해줄 대기업들이 많았고, 그런 대기업들 중에서 LG와 SK가 중간 정도급밖에 안되니, 이들을 몰아내고 더 큰 그룹으로 서울연고팀 창단이 가능했다면 피의 쉴드라도 쳐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경제 상황에서 프로스포츠단 운영에 넉넉하게 투자할 대기업 집단은 10대 그룹정도였다. 그리고 당시 재계서열을 보면 LG는 4위, SK 5위 안에 든다. 그 위의 그룹들은 이미 프로축구단을 다른 연고지에서 운영을 하거나 할 예정이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당시 시점 아예 서울 연고팀을 몽땅 없애봤자 결국 나중에 더 후지고 돈 없는 기업들이 서울 연고팀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LG와 SK라는 5대 대기업이 운영해도 서울에서 축구 인기를 높이기가 어려운게 현실인데, "일단 LG SK 팀이 없어지는것도 아니고 서울 밖으로 몰아 내면 돈 많으니까 어디에 정착하든 투자하고 자리 잡겠지, 나중에 가면 거대도시 서울이니까 연고가치도 크고 설마 팀이 안생기겠냐? 뭐 어떻게든 되겠지 "정도의 아무 근거도 없는 그냥 자기들 바람을 담아 오늘만 산다는 식의 무개념 행정이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일화가 1989년부터, LG는 1990년부터, 유공(SK)는 1991년부터 서울 연고 구단으로 활약했으므로 공동화 정책이 입안된 1994년 기준 50년, 40년, 30년 정도 서울 연고 구단으로 활약한 것이 아니고 기껏해야 일화 5년, LG 4년, 유공 3년 정도로 한창 서울 연고지에서 씨를 뿌리는 시기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겨우 5년, 4년, 3년 정도 서울 연고 구단으로 활동한 구단들이 인기를 못 끈다고 공동화 추진을 했다는 것은 너무나 성급한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아래 자료를 보면 알겠지만 서울 연고팀 3개 없애겠다고 죽자살자 달려들다가 이제는 인구 천만의 서울에 축구팀이 4~5개 창단되어야 프로축구 흥행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 보면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고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덤 앤 더머[편집]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삽질을 1997년 출범한 한국 프로농구에서도 답습했는데 그래도 사람과 재화가 몰리는 서울이라는 연고지를 인위적으로 비워드는 것은 뻘짓이라고 그나마 빨리 판단하고 2001년 SK 나이츠와 삼성 썬더스를 각각 청주와 수원에서 서울로 올려서 K리그 보다 3년이나 빨리 서울 시대를 1년이나 빨리 그것도 두팀이나 만들면서 서울 더비의 경우는 14년이나 먼저 만들게 되었다.

프로야구는 그냥 상식적으로 흥행을 위해 최대 인구 수도 서울을 기본으로 사람이 많고 지역색이 뚜렷한 거점 대도시들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이런 대도시에 기반을 둔것이다. K리그는 대도시가 비어있는데도 포항제철팀이니까 대구경북 연고지 보유지만 그냥 포항으로 가버리고, 광양제철직원 복지를 위해 만든 구장을 홈으로 써야하니까 광양에 팀을 만들고, 그냥 공장이 있어서 등의 이유로 스스로 중소도시에 정착해버렸다. 막상 비판을 받자 문화적 혜택이 없고 볼거리가 없어야 축구장에 관중이 온다는 둘러대는 핑계를 대고 있다. 거기에 서울 공동화 정책으로 3팀을 몰아냈지만 그 3팀이 그렇다고 빈 곳중 가장 큰곳을 찾아 정착한것도 아니었다.

프로야구에 비유하자면 서울에만 3개팀이 몰려 있는것이 문제라고 내쫓아서 LG 트윈스가 안양, 두산 베어스가 부천, 넥센 히어로즈가 천안에 자리 잡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 불행히도 K리그에서는 지금도 K리그 행정가들이 대가리에 우동사리만 있는 것 아닌 이상은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하는 언빌리버블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한편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는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은 한국 프로축구 역사상 가장 큰 파급효과를 미친 삽질이지만 한국 프로축구 30년사를 통해 연맹 자신들과 정부과 2002 월드컵 유치를 위해 전국적인 축구 열기 확산을 위해 시행하여 서울 연고 3구단을 지방으로 연고지 이전 시켰다고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다.

한국 프로축구 30년사 2004시즌 307페이지

김현회의 살신성인[편집]

2017년 7월 김현회가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은 FC 서울팬이 패륜논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왜곡과 허구로 만들어낸 가상의 개념인데 이걸 병신같은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속아서 연맹 발간 한국프로축구 30년사에 내용이 들어가게 되었고 역시나 무지한 병신같은 축구 언론기자들이 베껴쓰면서 현재의 개념으로 세상에 알려졌다는 FC서울팬, 한국프로축구연맹, 동료 언론기자들을 모두 돌려까고 자기만이 진실을 말하는 참언론인냥 자화자찬하며 허위 날조 칼럼을 올렸다.

그러나 2017년 9월 FC 서울에서 아래와 같이 한국프로축구연맹에 사실관계를 요청하고 당시 이사회 전문을 까면서 김현회에게 팩트폭행을 시전해버렸다.

김현회의 이런 살신성인으로 인해 당시 이사회 전문이 세상에 공개되어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의 진실을 알리는데 크나큰 공헌을 하였고 이에 많은 축구팬들이 김현회가 저런 허위 칼럼을 빨리 썼다면 진실이 좀 더 빨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프로축구연맹-1995년 1월12일-이사회회의록
파일:프로축구연맹-1995년1월12일-이사회회의록-1.JPG
파일:프로축구연맹-1995년1월12일-이사회회의록-2.JPG

프로축구연맹-1995년 2월13일-이사회회의록

파일:프로축구연맹-1995년2월13일-이사회회의록-2.JPG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