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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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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역대 군주
3대 태종 이방원 4대 세종대왕 이도 5대 문종 이향
파일:Coat of Arms of Joseon Korea.svg
조선 제4대 국왕
세종 | 世宗
묘호 세종(世宗)
시호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능호 영릉(英陵)
왕가 전주 이씨
왕조 조선 왕조
원정(元正)
출생지 한성 준수방 정안군 사저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부근)
사망지 한성 영응대군저 동별궁
부왕∙모비 아버지 태종
어머니 원경왕후
왕후 정비: 소헌왕후
재위 1418년 9월 9일 ~ 1450년 4월 8일
생몰 1418년 8월 10일 ~ 1450년 2월 17일
전임 3대 태종 이방원
후임 5대 문종 이향
자녀 문종, 세조, 안평대군 외

위 초상화는 김기창이라는 인간이 그린 건데 이 새끼는 친일파이다. 문제는 이 초상화도 본인 얼굴을 모티브로 해서 그렸다는 썰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 미화된 그림이라는 말도 있다.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 믿거나 말거나.

나랏〮말〯ᄊᆞ미〮 듀ᇰ귁〮(中國)에〮 달아〮 문ᄍᆞᆼ〮(文字)와〮로〮 서르 ᄉᆞᄆᆞᆺ디〮 아니〮ᄒᆞᆯᄊᆡ〮

이〮런 젼ᄎᆞ〮로〮 어린〮 ᄇᆡᆨ셔ᇰ〮(百姓)이〮 니르고〮져〮 호ᇙ〮 배〮 이셔〮도〮
ᄆᆞᄎᆞᆷ〮내〯 제 ᄠᅳ〮들〮 시러〮 펴디〮 몯〯ᄒᆞᇙ 노〮미〮 하니〮라〮
내〮이〮ᄅᆞᆯ〮윙〮(爲)ᄒᆞ〮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 여듧〮ᄍᆞᆼ〮(字)ᄅᆞᆯ〮 ᄆᆡᇰᄀᆞ〮노니〮
사〯ᄅᆞᆷ마〯다〮 ᄒᆡ〯ᅇᅧ〮 수〯ᄫᅵ〮 니겨〮
날〮로〮 ᄡᅮ〮메〮 뼌ᅙᅡᆫ(便安)킈〮 ᄒᆞ고〮져〮 ᄒᆞᇙ ᄯᆞᄅᆞ미〮니라〮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한자)로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이유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르고자 하는바가 있어도 
끝내 자기의 뜻을 잘 펴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내가 이를 위해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 여덟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쉬이 익혀
날마다 씀에 있어서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조서네↗ 궁궈레↘ 당도한거슬➡ 환영하오↗ 낯↘썬↗이➡여↘
나↘는↗ 나의 훌륭한 백성들을↘ 굽어살피는↘ 깨우친↗ 임금↘ 세↘종↗이➡오↘

지랄하고 자빠졌네!
- 세종, 글자창제를 포기하라는 반동분자를 보며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한국사 위인 투톱

조선 왕조 최고 군주이자 한반도가 배출한 최고의 성군이다. '대왕'이라는 칭호는 원래 의례적으로 붙인다고 하지만 하류층 흙수저들이 대중적으로 자연스럽게 '대왕'이라고 붙이는 사람은 광개토, 세종, 문무왕 등 얼마 안 되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다. 사실 이 셋밖엔 없다. 다만 요즘은 고려의 현종도 재발굴되긴 했는데 여전히 인지도는 처참하다.

SeJong the Great

우리에게 세계 제일의 임금<ref>쓰기 쉬운 한글이 없어서 짱깨나 좆본처럼 한자로 소리를 표현해야 했거나 동남아 국가들처럼 글자를 써야 된다고 생각해보자. 존나 불편한 데다가 우리 같은 하층민 흙수저들에게는 의사표현 하기도 힘들고 글자 몰라서 억울하게 사기 당하고 등 처먹히는 일도 지금보다 훨~씬 많았을 거다.</ref> 世宗大王

고기만 먹고 고기가 없으면 밥에 손을 안됐다고 한다.

현대 한글의 원본인 훈민정음을 창제한 갓-언어학자니뮤

"신하를 굴려야 백성이 평안하다." 이와는 반대되는 사람으로 능양군이 있다.

사실상 군주 국가의 가장 이상적인 군주다. 절대적인 권력을 소유한 군주(제왕)인데도 백성만 바라보고 신하를 개처럼 부려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참된 군주.

개요[편집]

착한 문서 인정합니다.

이 문서는 유익한 정보를 주는 아주 착한 문서입니다.
문서를 읽기 전에 모니터나 액정 앞에서 따봉각을 치켜 세웁시다.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백성의 눈을 뜨게 한 대가로 빛을 잃으셨다.

반도의 둘째 가라면 서러울 군주이다. 휘는 '도(祹)'.

현재 우리가 쓰는 글자의 창시자.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한자로 쓰였을 것이라서 더욱 소름끼친다. 어쩌면 일제강점기를 거쳐서 가나를 쓰게 됐을지도 모른다. 말이 문자를 따라가서 우리도 '맥도날드'를 '맥도날드'라 못 부르고 '마꾸도나루도'라고 하게 되는 걸 생각하면 닭살이 돋는다.

어쩌면 독립 후 로마자를 쓰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길디 길게 늘여 써 공간 차지를 심하게 할 것을 상상하면 약이다. 안녕하세요를 Annyeonghaseyo라고 써야 한다. 미쳤다. 다시 한 번 갓종니뮤께 경례.

그뿐만이 아니다. 아마 음절의 구별이 잘 안 갈 테니 하나하나 정성 들여 점이 찍혀있었을 가능성도 높으며, 로마자로 쓸 때도 많은 규칙을 지켜야만 할 가능성이 높다. 덜덜.

본래 묘호는 세종이지만 주로 세종대왕이라고 부른다. 원래 '문종'이라는 묘호를 받을 예정이었는데 그의 큰아들이 반대하여 세종이 되었다고 한다. 그 큰아들이 왕이 되어 사후 받은 묘호가 문종이다. 자기가 쓰고 싶었던 모양이다.

첫째 형 양녕세자가 공부 안 하고 담 넘고 도망가서 매 사냥이나 다니고 여자들을 범하고 다니다가 기생을 넘어 사대부의 첩까지 범하고 다니지 않았다면 세종이 이 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모두 양녕세자에게 고마워하자.

참고로 둘째 형은 속세가 싫다고 집을 나가서 자연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 타자인 셋째 '이도'가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정도전이 만든 교육법을 이방원이 받기 싫다고 정도전을 패죽였지만 세종은 이것을 잘 따라 훗날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한글의 창시자이며 사실상 조선 반도의 최고존엄 되시겠다.

나라 마약의 선두주자였으며 이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한자를 쓰고 있거나 베트남처럼 로마자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 Chữ Quốc Ngữ không thành vấn đề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점심 먹고 한 번 자기 전 한 번 대왕님께 오체투지의 예를 보이자.

단 하나 오점이 있다면 아들 교육이 신통치 않았는지 수양대군이 조카놈 지위가 부러워서 난을 일으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다른 아들놈은 다 훌륭하게 자랐는데 왜 정액 한 방울 흘린 게 일이 커졌는지 원...

ㄴ 원래 자식 농사가 잘 되는 때가 있고 안 되는 때가 있다.

보통 작품에서는 세종 시대가 태평성대처럼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나라 기틀도 덜 잡혔을 뿐더러 흉년에 천재지변까지 겹쳐 백성들은 유리걸식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그걸 보고 더 많은 노력을 하셨다고. 그건 또 스트레스성 폭식으로 이어지게 되고, 그건 또 살찐 사람 되는 폐해가 나타났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책을 매우 좋아했고 부부금슬도 좋았으며 정을 통하기에 환장하셔서 조선 왕 중 가장 자손이 많다고 한다.

문화, 군사, 음악, 과학, 제도 등 모든 곳을 정비하고 발전시켜 극단적인 학자들은 세종 시절에 조선의 발전은 끝났다고 하는데 세종 이후 조선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딱히 틀린 말 같지도 않다.

그나마 인좆을 비롯한 병신 같은 왕들 속에서 세종 이후에도 문종<ref>세종 치세의 절반 후반부는 마찬가지로 역대급 천재로 나온 문종이 씹하드 캐리하면서 아버지 세종의 명예를 드높였다.</ref> 성종, 정조가 등장하여 그나마 나라가 버텨갈 수는 있었다.

세종이 나오기 전 이미 발생해버린 여말선초 막장 상황 덕분에 왕조 시작 초반부터 학살질(왕씨대학살)에 장소 가리지 않은 내전에 인구도 존나 갈려나가고 병신 상태의 나라가 존나 씹하드 캐리 되고, 인조 같은 병신에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이 있었음에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버틸 수 있었던 까닭은, 세종대왕이 캐리하고 이후로도 나라 좀 잘 되고 너네들 잘 좀 살라고 다섯 수 앞서 만들어 놓은 정책들 때문이다.

식습관 때문에 당뇨병에 시달렸고, 어른들의 사정으로 성병도 앓았다고 전해진다. 재위 마지막 10여년 간은 당뇨 합병증으로 인해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때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도대체 어케 했노 ㄷㄷ

그러나 당뇨병은 야사로 전해지던 것이고,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말년이 되니까 머리가 깨질만큼 아팠다고 한다(전자통신 만화 사진첩왕조실대화의 고증오류를 정리한 것을 보자).

사서에 적힌 것을 조합하면 당뇨 증세 나온다고 하는데 당시 조선은 한의학 신봉국이라 당뇨라고 적히지 않은 것 뿐이지.(소갈증으로 적힌 것으로 기억한다)

건강이 좋지 못하니 아들 문종 또는 황희 등 재상에게 자주 국정을 대리하도록 하였다.

상세[편집]

조선의 궁궐에 당도한 낯선 이가 있으면 반갑게 환영해주시는 성군이며, 훌륭한 백성들을 굽어 살피는 깨친 임금이다.

ㄴ 실제 실록에서도 왜의 듣보잡 영주나 유구국 사람이 사신으로 왔을 때 외교적 절차 따위를 잘 모르고 함부로 굴어 신하들이 그냥 쫓아보내자고 해도 '얘들이 몰라서 그런 거지 즤들 딴엔 최대한 예의를 갖춘 듯?'이라고 말씀하시며 대접을 극진히 하라고 하셨다.

가엾고 딱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어리석은 소리를 참지 못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나라의 언어가 중국과 달라서 문자가 서로 맞지 아니하니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 있어도 능히 그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ㄴ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서문에 나온다. '보통의 사람이면 아침나절부터 저녁까지 배우면 쓸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다음 날이면 쓸 수 있다'고 적었다.

적국의 제안을 승낙할 때에도 "아주 좋소!"라고 밝고 흔쾌히 대답해 주시는 성군이며, 성가신 행패를 보면 집현전의 뜻을 모아서 과학의 막강한 힘으로 짓밟아 주시는 강한 군주이다. 인공지능으로 지정해 놓으면 고추가 발딱 설 만큼 강하시다.

이러한 성품 덕분에 두만강쪽 6진이 개척되고, 대마 왜구 정벌을 할 수 있었다.

ㄴ 사실 이건 태종 이방원이 했던 거다.

ㄴ 대마도 정벌만 그렇지, 사실 이것도 세종 재위 초반의 일이라서 시험 문제에선 세종 업적이라는 게 공식적인 답이니 조심하자.

ㄴ 4군 6진의 경우, 설사가 심해서 도저히 군사를 못 다스리겠다고 울며불며 사직을 청했던 (그러나 윤허는 못 받았다. 세종은 신하 과로사시키기 전문, 일명 연쇄과로마다.) 최윤덕과 설한풍에 고생으로 찌든 문관(무관 아니다) 김종서 그리고 이외 여러 신하들과 세종대왕의 합작품이다.

어쨌든 세종대왕께서 재위하실 때 했던 일임으로 감사하며 절을 올리자.

그의 할아버지는 요동 점령을 통한 '정복 승리'를 노렸으나, 할아버지를 기도원에 보낸 아들은 노선을 급 선회해 문화력에 투자하여, 손자대에 훈민정음 반포를 통해 '문화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만일 도전자 정의 요동 침략이 성공하고, 행운으로 영락제의 공세를 막아내어 요동이 우리 땅이 된다 하더라도, 과연 그 한글만큼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 해줄지는 미지수)

(시드 마이어의 문명5에서 발췌)

ㄴ 영락제가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 자체가 그냥 일고의 가치가 없는 뇌내망상이다.

ㄴ 근데 당 태종도 막아내고 요 성종도 막았잖아

근데 한글을 안 만들었으면 혹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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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제정신인 갓한민국의 애국자라면 이 글이 매우 역겨울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라무니다.
○○짱 카와이하다능... 쿰척쿰척

(이 자식이 누군진 몰라도 너무 역겨운 개소리를 하길래 지움. 대충 친일 같은 쌉소리였고 보고 속이 안 좋아졌을 말이니 이해해주길...)


ㄴ니미
ㄴ좆본은 한자 안 쓰는 줄 아는 파오후 급식이 망상
ㄴ일본어도 발음 같은 경우에나 가나를 쓰지 일본어로 된 만화책 보면 알 텐데 한자도 꽤 들어간다는 거
ㄴㄴ이놈은 마루마루에서 번역본만 봐서 모를 듯
ㄴ뭐 이런 병신 새키가 다 세상에 있나
ㄴ병신 새끼 영어와 로마자를 썼으면 일본식 영어와 일본식 로마자를 써서 더 좆 같았겠지
ㄴ개소리 박제됨 ㅅㄱ
ㄴ팩트) 쪽본어는 한자에서 변형되었고, 일본에서도 한자 존나 씀

이하 번역본만 쳐봐서 좆본은 한자 안 쓰는 줄 아는 일뽕 파오후의 망상이었습니다.

좆본 한자가 좆궈 간체자보다 더 씹노답인데 후리가나라고 해서 같은 한자인데도 발음이 제각각임 씨발

한글 안 만들었으면 그저 미개한 노예였다. 반박 불가 역사를 보면 안다. 미개한 암모니아 나는 헬본어나 노예겠지 병신아

아무리 소수 민족이라 할지라도 본인들만의 말이 있어서 구전으로라도 그 문화를 남길 수 있는 민족은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소수 민족으로서의 문화를 지키며 산다.(결혼식에는 머리를 이리 묶는다 이런 사소한 거라도) 그리고 다른 민족의 문자라도 차용해 와서 문서로 역사를 남기는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사료연구로 더 깊이 그들의 역사를 연구할 수 있고 그 문화를 후대에 계속 남겨갈 수 있다.

우리가 그런 민족이다. 말의 체계가 중국어와 전혀 다르지만 고유의 말이 있고 중국어를 음차했든 중국식으로 기록했든 역사를 기록해 뒀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세종은 아예 새로 문자를 만들어서 우리의 생생한 삶을 기록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일례로 조선왕조실록이 한자로 기록돼 있어서 번역문을 읽어보면 참으로 딱딱하고 말하는 자의 기분이나 뉘앙스를 읽기 어렵다. 그런데 한글로 쓴 용비어천가를 읽어보면 오글거리긴 하지만 진짜 빠돌이들이 썼네 싶게 분위기가 잘 느껴지고 시적표현들도 느껴진다.) 세종은 사대문서나 중국사신과의 대화에서도 그들의 말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말의 굽고 깎여진 부분이라고 표현하셨다.)를 몰라 벌어지는 오해에 대단히 통분해 했다. 그래서 역관을 중국에 보내 교육시키게 해달라고 했지만 중국에서 거부했고... 이런 사람이라 자국 백성이 문자(한자)를 몰라서 당하는 불이익 역시 대단히 불편해했다. 또한 본인 자체가 현대의 촘스키 따위를 능가하는 언어학자라 더더욱 그랬을 듯. 그래서 문자를 만들어버리신 거다.

지금 영어가 세계공용어니까 세종이 굳이 글자 안만들었으면 지금 한국은 영어를 쓰겠지라고 생각하는 애들은 좀 헛소리 그만하자. 말은 안녕하세요라고 하는데 글 쓸때 hello라고 적어야 하는 비극이 일어난다는 소리다. (이럴 경우 학교 교육도 겁나 복잡해지고 있는 집 애들만 어릴 때 유학 갔다 와서 주도권을 꽉 쥐게 될 수도? 상상만 해도 ㅅㅂ스럽다.)것도 아니면 음차로 annyunghaseyo라고 적든지... 이도저도 비극...

ㄴㄹㅇ, 그마저도 강점기 때 받은 영향 때문에 일본식으로 발음하겠지 어우 극혐

말이라는 것은 문화이고 그 말을 사용하는 이들의 사고방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 지킬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분이 세종임을 잊지 말자.

업적[편집]

사실상 모든 분야에 관여를 하셨다. 이 분 덕분에 당시 조선의 문화와 경제 수준이 몇 단계는 올라갔고,

조선왕조가 중간에 큰 전쟁을 겪고 정치적인 병폐를 겪어도 500년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게 어찌보면

이 사람이 국가의 기초를 잘 닦아둔 덕택이다. 어떤 사람은 기초는 세종 시절에 전부 완성되고 남은 500년은

그 내용을 재구성하거나 반복했을 뿐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한글처럼 이미 나라가 바뀐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업적이 있는 걸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성군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건 사실이지만 비판도 좀 있다. 물론 좋은 점이 너무 많아서 거의 묻히기는 하지만.


-아래부터의 내용은 세종의 긍정적인 업적을 다룹니다-


문자 - 한글을 새로 만들어내셨다! 덕분에 한자를 안 써도 된다. 빌어쳐먹을 한자를 안 써도 되게 한 건 정말 고맙다.

그 외에도 여러 을 했지만 우리에게는 이게 제일 중요한 거 아니겠냐.

이거 하나만으로도 아래에 나오는 각종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최고의 위인에 등극하신 거다.

ㄴ게다가 특허도 안 내셨다! 이 얼마나 고맙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ㄴㄴ 일국 만민이 써야할 문자에 특허를 내기도 하냐?

ㄴㄴ 다 둘째치더라도 그 시대에 법적인 특허따윈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한글의 우수성은 세계적인 석학들에게 칭송받는다. 나라 마약 들이킨게 아니라,

몇몇 유명한 언어학자들 중에서도 한글을 연구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한글을 찬양하기 바쁘다.


매우 지옥이었던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 가운데 가장 조선을 나쁘게 본 인물조차

'매우 쉬워 10살 이내에 깨우칠 수 있는 유용한 글자가 있다'고 공통적으로 수기에 언급한다.

그리고 이걸 활용 안하고 한자를 찬양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덤.

하나 예를 들면 그 유명한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의 제자 중 하나인 제임스 맥콜리는 한글날을 "전 세계인이 경축해야 하는 날" 이라고 할 지경이다.

한글이 만들어진 배경도 참 성은이 망극한데 백성이 글을 몰라 못 배워 뭐가 옳고 그른지 판단을 못하고

억울함을 하소연 할 방법이 없으니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를 창제하여 이들이 배우고 억울함을 상소문을 통해 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한글은 세종 혼자 만든 것이다.

(사실 문종세조안평대군등 자녀들도 일부 참여했다고 한다.

다만 딸내미들도 참여햇다고 하는 건 공주들이 시집간 가문에서 주작질햇다는 것이 통설.

그래도 거의 대부분은 분명 세종의 독자적 창안이 맞다.) 한글을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알려진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 작업할 때 즈음에는 서당의 밥을 축내는 벌레이었다.

<ref>안그래도 대신들이 글자따위 만들어 뭐하냐, 백성들이 뭐 다글타며 까는 찰나에 최만리가 한글창제를 반대하는 상소까지 올리자 세종은 완전히 빡치기에 이른다.

그래서 '너 글자가 뭔지는 알기나 하냐?? 내가 지금 눈도 안보이는데 이정도 해놨고 그럼 좀 짜져.

그리고 이런 문자 나 아님 누가 만드냐??'하고 극악하게 까버리셨다. 원래 그런 분은 아닌데 건강도 안좋은 마당에 언어학자로서의 자부심까지 곁들여져 확~~ 하심;; (잘하셨어요ㅋㅋ<>)

그리고 중국을 건드리기 껄끄럽다는 것도 한 몫 한 거 같다. 중국말 안쓰니

오랑캐 어쩌고 하는 소리에 대해선 한마디도 안했다

.</ref>

다만 훈민정음 만들 때 말단으로 들어간 것이 와전된 것이다.

애초에 왕이 시켜서 만든다면 기간에 급급해 열화되지,

이렇게 완성도 높은 글자가 나올 수 없다.<ref>요즘 말로 치면 책 서문이나 써보라고 하신거다.</ref>

세종이 한글을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 뭐 여러가지가 잇을 것이다. 우리 세종니뮤가 어리석은 백성을 가엾이 여겨서 ㅠ.ㅜ 이렇게 생각할 지 모르는데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 종모법을 만들고 북방에 간 무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기생을 같이 보내는 제도를 만들어?

종모법으로 인해 기생 어머니의 딸도 기생이 되는 법을 만든게 세종이야 종모법으로 노비의 수가 확 늘어나게 된다.

백성을 사랑해?

ㄴ세종실록 그냥 자면서 눈으로만 훑어봐도 이 말은 개소린데..ㅋ 사실 북방에 간 기생(을 보냈는지조차 기록이 몇장 없어서 사신이 사냥가면 딸려보낸 정도일걸???)이 고생이냐 북방까지 가면서 오만 물품을 수송하고 사냥하면 몰이하고 했던 남성노비가 고생이냐? 그리고 기생이라고 말해서 그렇지 일명 관기, 관노비다. 이 여성들의 직업 자체가 음악과 춤을 배워 국가의 공식 행사에서 공연하는 거였다.(물론 남악/무에 비해 폄하되긴 했다.) 이게 왜 나쁘지? 무슨 드라마에서처럼 기생이라하면 술따르고 남자들 비위나 맞추고 수청들고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쫌 싸그리 잊으소. 나름 국가가 교육시킨 전문예술가들이 관기들이었고 관기와 관계 잘못맺으면 철퇴맞고 최소 파면, 심하면 귀양크리였다.

종모법은 논란이 많지만 당시의 사정상 그럴수 밖에 없는 명분이 있었다. 중세시대에 장정이 몇사람씩 붙어도 흉년들면 꼼짝없이 굶어죽는 생산력으로 보건대, 아이딸린 여성 혼자 살아남을 수가 없어서 아무 남성과 같이 사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고, 당시 지배층이던 유학자들은 이런 사정을 알고있어서 여러 남성에게 시집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으나 그 소생들을 양인으로 인정할 수는 없었던 거다. 자손을 양인으로 만들려고(거꾸로 세도가의 노비로 만들려고도 했다.) 이 아이의 아비는 양인이라 우기며 진짜 아버지인 천인과 대질시켰을 때 아이가 아버지 뺨을 치고 쌍욕을 하는 일까지 생겼고, 심지어 정종도 후궁 중에 천인여성이 있었는데 이 여성이 낳은 아이를 본인 아이가 아니라고 딱 짤라 버린 일이 있을만큼 당시 결혼과 동거 그리고 이에 따른 자손의 문제는 왕실이라고 자유로울 수 없을만큼이나 어지러웠다. 지금처럼 DNA 검사 할수 있었으면 '다 검사해서 아비를 따르게 하자' 고 난리를 쳤을걸?? 부계중심의 승통을 목숨같이 생각했던 유학자들인데...

ㄴ 애초에 그전까지는 일천즉천이었는데 일천즉천보다 종모법이 노비 수가 확 늘어난다는 건 대체 무슨 소린지


음악 - 악보라고 할 수 있는 정간보를 만들었고, 편경, 편종 등의 악기를 발명하게 하였다.

이때 세종대왕이 절대 음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악기 소리를 처음 듣고 "이 음이 아니다."라 하시며

편경을 조사하시매 편경이 덜 갈려 묻은 먹을 발견하고 먹의 위치까지 돌을 갈게 한 뒤 다시 연주하자 그때서야 만족하셨다고 한다.

(이 음이 '파 샵'에 해당하는 음계였다 한다) 절대 음감도 절대 음감인데, 그 정도로 미세한 차이를 파악할 수 있다면 황금귀라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정간보가 나오기 전까지의 악보는 음의 길이, 높이를 나타내지 않아 정확히 연주할수 없었는데 정간보에는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어 정확히 연주 할 수 있었다.


농업 - 당시 조선 땅에는 맞지도 않는 훌륭한 개 농업 책을 수입해서 사용했는데

고추같다고 조선 땅에 맞는 새로운 농업서를 만들게 함(농사직설). 이후 조선의 쌀 생산량이 4배가 치솟았다.

물론 대비책을 해놓는다고 해도 기후가 안 따라주면 대기근이 발생하는지라 현종 때 소빙하기로 인해 경신 대기근이 찾아왔고, 숙종 때 한 번 더 찾아온다.

조세 -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공법과 조세법을 뜯어고침. 정확히는 조세법을 뜯어고치면서 공법을 시행하였다.

조세감면법인데 흉년으로 농사가 망하면 쌀을 조금 걷고 풍년으로 잉여 쌀이 남아돌면 쌀을 많이 걷는 방식이다.

지금으로선 당연한거 같지만 당시엔 획기적인 방안이였다 하더라. 이때 시행한 게 공법인데 이것이 국민투표이다.

물론 노비, 여자는 제외한 양인 이상 남성만 하였다. 학자들은 기록된 역사중에 세계 최초라고 하는데 알 게 뭐야.

투표하고 뜯어고치는데 10년이 걸렸다. 오랜 기간을 거친 만큼 이 제도가 조선 전기하고 중기를 거진 지탱하다시피 한다.

나중에 구한말에 일제가 조선 침탈에 앞서서 제도 조사하다가 자기들 생각과는 달리 조선이 상당히 발전한 조세제도를 가졌던 거 보고 경각심을 가져 조선을 더 옥죄기로 결심한다.


천문 - 농업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개 월력이 우리네랑 안 맞아서 몰래 만들게 했는데,

이는 당시 달력 수정이 훌륭한 개 황제만이 가능한 권위의 상징이었기에 그렇다.

아무튼 몰래 월력을 만든 게 지금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많은 발명품을 제작했는데

특히 '혼천의'라는 물건은 별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절기를 예측하는 기구였는데

최근 미국 박물관에서 매우 멋지다며 전시를 허가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과학 - 주로 장영실을 노예처럼 굴려서 해시계를 만들게 하였다.

물시계도 만들게 했는데 시간이 고추가 설 만큼 정확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측우기고추가 서게 만듦.

ㄴ 측우기는 엄밀히 말해 아들 문종이 만들었다.

ㄴ 세종대에 착수하여 문종대에 완성되었다....고는 하는데 사실 세종 말년은 문종치세라 보는게 타당해서 문종이 만든거 맞다.

우리는 일본을 기준으로 하는 135도 시계를 쓰지만 이미 세종 때 정확한 우리나라 127도 시계를 만든 거다.

고추가 발딱 설 만큼 대단한 거다. 시간 뿐만 아니라 절기까지 알리는 기구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135도 시계를 쓰는 것도 나름의 이유는 있는거다.

북한이 평양 시간을 만들었는데 별로 좋지 못한 평을 들은 이유를 상기해보라.


의학 - 세종은 이 되서 처음 본 딸을 극진히 이뻐하는 딸바보였는데

어린 나이에 천연두로 사망하자 울부짖으며 의학 서적을 편찬하였다(의방유취). 딸 죽어서 슬프니 나같은 아비가 없으라며 의학서적을 만드시는 위엄.


인권 - 죄수들이 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감옥에서 죽는 이 많았는데

항상 깨끗한 을 주게 하였고 주기적으로 목욕도 시켜주었다. 심지어 얼음도...ㅎㄷㄷ

또 어린아이와 노인에게는 죄목을 얼굴이나 에 새기는 형벌은 받지 않도록 하였다.

지금도 약간 남아있기는 하지만 도살업자는 예전부터 굉장히 천시받는 직업이었다

(그 전에는 이 도살업자를 화척, 양수척등 ㅇㅇ척이라고 부름).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세종께서 그 당시에 양인 백성의 호칭인 백정을 도살업자도 같이 쓰게 하셨다.

하지만 역시나 지옥조선의 조상답게 어떻게 저렇게 비천한 화척놈과 같은 명칭을 쓰냐고

사랑물을 빼 달라고 하며 백정이라는 명칭을 버렸고 결국 도살업자만 백정이란 호칭을 쓰게 되었다.

장애인 복지에도 힘쓰셨다. 세종 27년에 서운감이라는 걸 설치했는데 이 서운감이 뭐냐하면 맹인학교다.

당시 맹인새끼들은 그냥 천대받고 구걸이나 하기 일쑤였으며, 점복업이 허락되었다지만 점복업을 배워야

점을 쳐서 돈을 벌 것이 아닌가? 이런 전차로 맹인놈들이 불쌍하게 살자 우리 킹갓세종님은 직접 국립학교인

서운감이라는 장애인학교를 세워서 명과학(길흉화복을 점치는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특히

여기 졸업생들 중에 우수한 성적을 남긴 인원은 국가의 관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명과맹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 제도는 이제 침탈 시절 갑신정변으로 김홍집 등 친일 내각이 수립되고 나서 없어졌다.


복지 - 관노비는 여자가 애를 낳으면 100일 휴가를 주었다.

남편은 30일 휴가를 주었다. 이는 현대 지옥조선의 웬만한 기업들의 출산 휴가보다 많다.

<ref>이에 신하들이 '우린 왜 출산휴가 안주나요?'하고 개기자 세종 왈

'니네들 마누라는 애 낳음 혼자있니?? 보살펴 줄 사람이 천지면서 먼 헛소리심? 노비는 애낳으면

남편말고 누가 밥해주고 보살피냐?' 하고 일축하셨다. 요즘 세상 마초들보다 훨씬 진보적이시다;;</ref>

특히 집현전의 경우 당시 진상품이었던 고추가 설 만큼

귀한 집현전에 쌓아두고 먹게 하였으며, 한쪽 방에 항상 술상을 마련해 음주도 즐기게 하였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유급휴가도 주었다. 80세가 넘는 노인들은 날을 잡아 궁궐로 초대해 연회를 베풀었으며

100세가 넘으면 옷과 음식을 하사해 주었다. 근데 당시에 100살 넘게 산 거는 오늘날로 치면 150살까지 산 셈이다.

당시 위생과 의학 수준은 말할 것도 없다.

ㄴ 관노비라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지금도 9급 관노비나 공노비 등은 복지가 좋은 편이다. 사노비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딴거 없다. 뭐 없긴 한데 그러한 사노비라도 함부로 줘패고 죽이고 했다가 걸리면 귀양크리. 이건 조선조 전반에 걸쳐 그랬다.

ㄴ 아무리 관노비라도 결국 노비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에 노비를 위한 복지를 폈다는 걸 보면

시대를 초월해도 한참 초월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사노비야 당시 조선시대 상황을 감안해 보면 개인 사유재산인데 어쩔 수 없는 거고.


영토확장 - 세종이 '세'(世) 자 시호를 받은 가장 직접적인 업적. 오랑캐 새끼들이 자꾸 건드리니까

화나서 여진족을 쥐어박고 현재 함경도 지역을 제패했다(4군6진). 그 뒤 농사꾼들이 많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일부 백성을 그 지역으로 강제이주시켜서 개척한다.

물론 관직 부여, 신분 상승, 3년간 세금 면제 등 흙수저나 노비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남쪽에서 도적질하던 왜구 해적들을 소탕하며 대마도를 정벌했다. 당시 대마도주 입장에서는

이름뿐인 지역의 지도자고 반대파 왜구무리에 모가지 언제따여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는데 하늘이 도운 셈.

덕분에 남부 평야 지방등은 고려 말 조선 초 극심했던 왜구의 노략질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ㄴ 사실 이 과정에서 다소 강제성이 있었긴 했다. 죽어도 북쪽으론 안 가겠다는 백성들을

억지로 이주시켜서 원성을 샀다. 그런데 한반도 전체의 방위 안전을 위해선 이정도 자연경계 확보가 필요하다고 봐서 진행한 것.


-아래부터의 내용은 세종의 부정적인 업적을 다룹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 문서나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현재 병신들이 말도 안 되는 개지랄을 떨고 있습니다.
정상인들은 한시라도 빨리 이 문서를 정리하여 주십시오.

ㄴ역센징 아가들의 주장이 있다.


노비 제도의 확립 - 고려시대까지만 하여도 노비의 인구는 5% 정도에 불과하였으며,

신분이 세습되지 않고, 사고 파는 행위가 불가능하였으며, 쉽게 해방이 가능하였다.

노비는 고려시대때 까지만 하여도 현재의 '집사'의 개념이었다. 이는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 때까지도 이어졌지만,

세종 14년 노(노비의 노)가 양인 여자와 결혼하면 그의 자녀도 노비가 되며, 비(여성 노예)가 양인 남자와 결혼하는 경우

역시 자녀가 노비가 되도록 하는 법이 통과됨으로써, 이로 인해 17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노비의 인구가 4할에 육박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노비의 법적 권리의 박탈(세종 4년)로 인하여 노비를 죽이는 것은 범죄가 아니게 되었으며,

노비는 주인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고발할 수 없게 된다.

ㄴ 사견으로 변호를 하자면, 노비종부의 경우 발정난 양반놈들이 여기저기 씨를 뿌려 지체높으신 자제분들을

양산할 확률이 높기때문에 노비종모를 통해 제동을 걸어 볼 요량이였을지도 모른다.

마님이 돌쇠에게만 쌀을 주는 경우는 영화에서나 나올정도로 흔치 않으니까. 물론 사람의 속마음이야 누가 알겠냐만은.

세종은 조선 사대부들만의 성군이었다. 예를 들어 종모법 같이 조선의 민중들과 양반의 이해관계가 상충 했을 때 사사건건 양반 편을 든게 세종이다.

역사를 쓰는 사관도 결국은 유교적 성리학자였고 사대부였다. 신하들 입장에서 신하들 이익에 반하지 않고 주자학에도 부합하는 결정을 한 게 세종이었으니

사관들 입장에서는 성군이었겠지

ㄴㄴ 고려시대에도 노비는 세습됐다. 고려 초기부터 노비종모법과 같은 내용인 '천자수모법'이 법제화되어져 있었으며 고려 후기의 노비제는 부모 한쪽이라도 노비면 무조건 자식도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제였다. 이걸 태종 때 노비종부법으로 바꾸었다가 신하들의 반발이 너무 심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누군지 확실하지 않은 케이스들 때문에 사회적 혼란도 있으니 노비종모법으로 바꾼거다. 그리고 세종은 노비 수의 증가를 막기 위해 양천교혼을 금지하는 조치를 수차례 내리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노비 수가 늘었던 주요 원인이 양천교혼이며 세종이 실시한 노비제도가 고려시대의 제도와 큰 차이가 없는 점을 보면 조선시대 중기에 노비 수가 늘어난 것을 세종의 책임이라 하기는 힘들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데에는 양천교혼을 합법화하고 일천즉천제를 확립시킨 후대의 왕들의 책임이 크다.


사대주의의 확립 - 태종 때까지는 조선 자체적으로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동방을 지키는 하늘신에 대한 제사).

세종은 세종 10년까지 신하들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냈지만, 그 이후 이 제사를 폐지한다.

'어떻게 나라의 제후가 되어서 황제(명)의 뜻에 따르지 않고 우리끼리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가'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라에 심각한 가뭄이 들었을 때에도 하늘에 기우제를 지내지 않았다. 또한, 명이 상서로이 여기는 청매(해동청)라는 

새를 잡기 위해 한겨울에 사냥을 하도록 하였고, 청매 한 쌍을 잡아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명의 환심을 사기 위해 추가적인

청매 사냥을 지시하여 백성들을 고생시켰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아말로 지극정성의 사대였다.

세종 이후로 사대주의는 계속되었으며, 1897년에 이르러서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인 환구단을 재건함으로써 지성사대주의의 막을 내린다.


북방개척(사민정책 한정)-사실 전체적으로 보면 좋은 업적이긴 하나,

사민정책 한정으로 백성들의 원망과 분노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착출된 인원의 다수가 역질로 죽기까지 했다.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백성들이 가기 싫다고 자해하고 일부러 다리 장애인 만들면서까지 발악했는데 그런 얘들은 아예 엄벌을 처해놨다. 결국 고향을 떠나야한다는 생각에 자살했다는 백성도 있다. 지금은 고향은 고향일 뿐이지만 그때는 삶의 터전이고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이니 반응이 이럴 수 밖에.


화폐정책- 시장경제가 성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추진하였다.

강경한 조치까지 취해 애꿎은 사람들이 죽은것은 덤이다.


수령고소 금지법-보수꼴통 허조의 말을 들어서 시행한 정책이다.

당연히 수령을 고소할수 없다면 수령의 죄를 물을 방법이 없는데,

세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견인 허조를 따랐다.성종만큼의 태평성대일수 없었던 핵심 이유다.

ㄴ 이 법으로 인하여, 안그래도 미친 연기와 절차덕에 무용지물인 신문고가 개노답이 된다.

시발 수령때문에 억울해서 신문고를 때렸는데 고소는 안되고 나만 고소금지법으로 잡혀감 ㅋ.

참고로 수령 뿐 아니라 노비가 주인을 고소하지 못하는 등, 절대적 상명하복관계의 다방면에 걸쳐있는 법이다.

ㄴ 세종은 재위기간 내내 이 법이 대의로는 맞으나 실정에는 맞지 않다며 고민했다. 결국 대의를 택했고 이는 세종 스스로가 유학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세종의 한계라기 보다 조선이라는 국가가 유학을 기반으로 한 사대부들이 세운 나라라는 점을 고려하면 조선이 끝매 가질 수 밖에 없던 한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종 사후 5년, 왕을 폐한다. 수령이 아니라 왕이라 괜찮나보다.

이점 숙지하시고 문서 볼 때 거슬리니까 좆본 까였다고 풀발기해서 부들부들거리는 역센징 새끼는 제발 없길 바랍니다... 제에에에에에발-좀

여담으로 이 문서의 작성기록을 보면 예전엔 세종대왕의 오점을 설명하는 문단이 따로 있었는데

역센징 새끼들이 이때다 싶어 세종대왕에 대한 모욕과 욕설로 문단을 개판으로 만들어 놔서

지금 그 문단은 토론으로 옮겨진 것 같다. 보지 마라. 골때린다. 윗글이 훨씬 깨끗하네

(2016년 9월 15일 추가) 결국 토론 문서에 비로그인 제한 죽창이 들어왔다.

역사를 왜곡하는 조선인들 너희들이 자초한 거다. 병신들.

그리고 어휴 고추드립좀 그만좀 쳐라 좆같은 새끼들아

인간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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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능력 위주로 인재를 배치했다. 상놈이자 원나라 혼혈인 장영실이 뭐 만드는 재주가 좋다고 엄청나게 총애했으며(사실 장영실은 애비인 이방원때부터 궁궐로 스카웃되었으나 세종이 십분 활용하였다) 문관인 김종서가 싸울 줄 안다고 북방 수비의 총책임을 맡겼다.

ㄴ 장영실이 원나라 혼혈이라는건 그냥 '설'이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아버지가 소주, 항주 출신 중국인이라고 기술 돼 있다

이 때문에 세종 치세에는 모든 것이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아버지인 이방원이 왕위 찬탈을 하는 과정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양녕대군 등 두 형은 왕위 계승권을 스스로 내던졌는데 이에 대한 죄책감이 무겁게 자리잡고 있었다. 때문에 세종대왕은 자기 아버지의 죄를 씻기 위한 마음이 무의식 중에 있었고 그 때문에 백성들에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국왕이 되었다.

그러니 다른 나라에서도 명군을 일컬어 자기네의 세종대왕이라 평가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를 테면 류큐에 글을 도입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긴 순바준키를 류큐의 세종대왕이라 칭하기도 한다.

ㄴ 조선 후기 왕실 이미지 쌓기용 개소리를 그대로 받아들인 헛소리이다. 양녕이 폐출된건 양녕이 병신 강아지라 그런거지 그와 효령이 양보한게 아니었다. 아들바보였던 태종이 도저히 그냥 둘 수 없을 정도로 양녕이 병신이라 그랬던 것. 일례로 막내 동생 성녕이 오늘 내일 할때 충녕은 약을 짓고 있었지만 양녕은 술 마시러 돌아다녔다. 결국 양녕을 내쫓을때 태종은 대성통곡을 했고 "종묘사직에 방해가 된다면 죽여도 된다"라는 말까지 했다.

태종이 먼저의 3남을 잃고(아마 자식 키우시는 분들은 아실거다. 아들 3ㅅ을 다 앞세운 심정이 어떨지를..) 겨우 얻은 넷째이자 실제로는 장남인 사람이 양녕이었다. 아들 3을 다 앞세우고는 이 아들마저 잃을까 노심초사해서 외가에 피접보내 키웠다. 금지옥엽, 말그대로 금과 옥처럼 장중구슬같이 키웠건만 애새끼가 너무나 이상해서 그 태종마저도 지켜줄 수가 없었다.(피접가서 살아 참으로 친했던 외삼촌들도 어쩔수 없긴 했지만 본인이 살아야되니 골로 보냈다.) 폐세자 당시 실록 기록을 보면 태종같은 냉혈한이 매일 눈물을 줄줄 흘리고 목이 매여 어쩔 줄 몰라했다고 한다. 결국 성녕대군 사망에 이르러 '사람의 마음을 가진 것 같지 않다' 라는 말까지 한다. 말 그대로 아주 많이 이상한 놈이다.

또한 아버지의 죄를 씻고 싶은 무의식이 있었다는데 글 쓴 놈이 세종의 마음에 들어가봤던 건지 의문이다.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태종이 죽여버리고 가문을 박살낸 뒤에 세종은 태종이 죽고 얼마든지 장인을 복권시킬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슨 뜻이겠나? 아버지가 한 일이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자신도 인식하고 있었단 것이다. 세종의 치세는 태종의 치세를 부정하기보단 긍정하고 거기서 더 발전시키는데에 중점을 두었고 이는 세종이 아버지의 부패한 대신들을 그대로 기용한데서 나타난다. 대신들이 부패해서 투자는 좀 들지만 그래도 산출해낸 것들은 좋으니까 기용해서 잘 써먹은 것.

ㄴ 양녕이 병신인건 사실인데 그래도 양녕은 자기가 병신인 줄 아는 병신이었기에 세종이 왕위를 받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지 아비와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좋게 봐줄 만 하다. 그리고 세종이 자기 생각대로 여러가지 정책들을 펼친건 다 고추가 발딱 설 정도로 강력했던 자기 아버지 덕분인데, 당연히 그 따까리들을 거두는게 정치에 이로운 것 아니겠냐? 투자와 산출물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왕위 세습했다고 기존의 권력 구조를 다 갈아엎어버리면 잘도 정치가 되겠다?

ㄴ 양녕이 지가 병신인 줄 아는 병신이었다고? 풋 글쓴 놈 최소 역사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 듯.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난뒤에 단종 죽이라고 세조 갈군게 양녕이다만? 양녕이 세종 상대로 역모 못한 건 힘이 없어서지(힘이 없었다기 보다 제정신 박힌 신하라면 아무도 병신을 왕으로 추대 안해주니까) 왕위에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리고 세종대왕이 몇 년을 집권했는데 기존의 권력구조 어쩌고 하냐. 집권 초반기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거야 4,5년 얘기고 그 정도 지나면 어느정도 권력이 안정되었기 때문에 복권이던 권력 구조 재편이건 가능함. 세종이 자기 생각대로 정책 펼친 게 가능했던게 죄다 태종 덕인 거하고 따까리 거두는 거하고 무슨 상관? 애시당초 정치에 이롭다는 이유로 따까리를 거둬야 할 지경이었다면 그 따까리들의 기득권 때문이라도 자기 생각대로 정책을 펼칠 수 없었다.

양녕은 이방원이 총애하는 첫째였으나 세자로 책봉되고 나서 공부도 안하고 사냥이나 다녔다. 한 번은 이방원이 아들 불러놓고 시험봤는데 하나도 못 맞춰서 고추가 설 만큼 화가 났을 정도로 공부를 안 했다. 근데 공부만 안 했으면 되었는데 이 새끼는 지 애비 닮아서 성관계를 존나 좋아했다. 문제는 건들고 다니는 여자들이 지 큰아버지 정종이 총애하던 기생, 사대부 첩 등 일반 여자가 아닌 도덕적으로 고추가 설 만큼 문제가 될 만한 여자들을 건드린다. 아들바보인 이방원은 어떻게든 이 새끼 버릇을 고치려고 했으나 사대부 첩을 주기적으로 따먹고 애까지 낳은게 들켜서 당시 실세였던 사대부들이 들고 일어나 저새끼 폐위하라고 상소를 올린다. 결국 양녕은 폐위되고 세종이 왕이 된다.

ㄴ어떤 역알못이 정종이 양녕 할아버지라 적었는데 정종은 이방원의 둘째 형인 이방과였다. 그러므로 가족 관계상 아버지의 형이므로 큰아버지가 맞다(화나서 내가 할아버지 지우고 큰아버지라 수정했다).

위 위 위 놈이 고추가 설 정도로 웃기는게 어떻게든 양녕을 미화하려는게 눈에 보이는데 최소 양녕 후손인 듯? 태종이 이성계 몰아낼 수 있었던 건 일단 이성계가 이방석한테 왕위 물려주려는게 신하들 눈에도 워낙 가당찮아 보이기도 했고 이방석이 막내라 정통성도 없었고 업적도 없었고 워낙 태종이 유능한지라 태종이 왕자의 난 일으켜도 신하들이 "아 그래? 씁 어쩔 수 없지"하고 납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양녕 고추쌀이 능력도 없고 주변에 세력도 없고 인망도 없고 심지어 태종이 밀어주지도 않는데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자기 아버지와 같은 일을 저지른다고? 이 새끼는 반란이 혼자서 깃발 들고 일어나면 자동으로 되는 줄 아나보다. 당장 양녕이 깃발 들고 일어나면 동조할 병신은 있을것이며 하다못해 자기 처가도 다 망했는데 휘하 세력은 있냐? 이 새끼는 반란을 안 한게 아니라 못한 것이다 이 새끼 밑에 한 30명만 있었어도 반란 일으키다 거열형당했을 듯.

진짜 양녕 미화하는 수준하고는. 양녕은 문종 사후 수양새끼 지지했다. 그냥 태생이 멍청한 새끼야. 일화로 양녕이란 이놈이 수양한테 단종을 죽이라고 말하면서 수양이 머뭇거리니 '너같은 넘이 내 조카라니.!!!' 이러고 깠었다. 정작 지가 죽이란 사람은, 짐승축에도 못드는 본인을 죽을때까지 지켜 준 친동생의 손자였다.

아무튼 최악의 병신 형을 둔 세종이었지만 세종은 끝까지 양녕을 처벌하지 않았다. 지원금을 삭감하거나 거주지를 멀리 강제 이주시키는 정도가 다였다.

양녕대군이 세종에게 왕자리를 주려고 병신짓한 거면 세종이 왕이 된 다음에는 병신짓을 안 했어야 정상이다.

근데 세종이 왕위에 올라간 후에도 양녕은 이웃의 처를 강간해서 따먹거나 사냥 연습한다고 민간의 가축을 쏘아 죽이기도 했다.

심지어 자기 며느리를 따먹었다는 얘기도 있다. 졸라 미친 새끼다. 실록에 적힌 내용이라 빼박이다.

얼마나 말썽이 많았으면 양녕대군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끊이질 않았고 세종은 노이로제에 걸릴 거 같은 나머지 양녕대군 관련 상소를 제한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세종은 양녕을 크게 벌하지 않았는데, 이게 사실 지금 시점에서는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왕정시대에서는 엄청난 거다.

첫째라서 자기보다 적통있는 형이 있는데 왕이 그 형을 죽이지 않고 놔둔다? 이건 전 세계 역사에도 보기 드문 일이다.

당장 저 북쪽의 꿀꾸리우스 왕조만 봐도 형은 물론 고모부까지 죽이는 걸 보면 잘 알 수 있다. 왕정에서는 권력을 차지하지 못하면 죽는 게 진리다.

게다가 가만히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양녕은 졸라 말썽을 피우고 다닌다. 다른 왕이었으면 진작에 모가지 날라갔을 거다. 한 예로 소헌왕후의 상중에(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생 마누라 즉 제수씨다.) 소헌왕후를 위한 불사를 치르고 있던 절 경내에서 고기를 구우니 이를 말리던 효녕대군을 비웃었다. 이때 양녕이 필살 헛소리를 하나 날리는데 바로 '나는 살아서는 왕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거늘 거리낄 것이 없다' 이다. 예의랍시곤 눈꼽만치도 없던 놈임에도 살려둔 것은 아마 세종도 형이 얼마나 병신인지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죽일 명분도 충분한데 왜 안 건드렸는지는 네가 세종대왕이 아니라면 알 수 없다.

그래도 추측해보자면, 아무리 형 스스로가 병신이라 쫓겨난 거지만 자기가 형자리를 빼앗았다는 죄책감이 있었을 수도 있고,

지금은 처벌하라고 난리를 피우지만 정작 형을 죽이면 "형을 죽인, 천륜을 어긴 쓰레기"라고 뒤에서 손가락질할 씹선비들이 많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종이 했던 일을 보면, 세종이 진심으로 원했던 정치는 고려 말부터 자기 아버지 때까지 이어져 온 그런 권력 암투를 이제 씻어버리고 진정한 유교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끝끝내 형을 처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세종의 인성은 ㅆㅅㅌㅊ임이 틀림 없다.

문제는 이 양녕대군이 너무 오래 살아서, 자기 아들 문종이보다도 오래 살아서 자기 손자 단종을 내쫓는 선조반정에 결과적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ㄴ 계유정난 아니냐??

문종이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세종은 가족 복이 지지리도 없다.

가족 복...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헷갈린다. 아들을 많이 둔 것은 왕으로서의 역할을 다한 것이지만 그것이 사후에 불리하게 작용했던건 맞다. 그러나 세종은 이를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들이 다 좀 많이 잘났다.(누구 아들이라고 못났겠나..) 이래저래 까이고 죽고 해서 그렇지 안평대군, 금성대군 이 사람들이 때만 잘만나서 왕됐음 적어도 임란기 선조나 인조보단 훨 잘했을 사람들이다. 그런데 뭐 적장자이신 문종은 아버지를 빼다 박았는지 거의 완전체셨다. 이런 완전체 장남이 일찍 사망하리라고 어느 아비가 예측하겠음?? 수양따윈 형님앞에선 그냥 고개숙인 동생이었을 뿐이다. 영화나 드라마 등 미디어에서처럼, 수양이 문종치세때도 은근 당패를 만들어 설치고 다녔다고 알고 계신 분들은 실록 읽어보시길 바란다.(문종실록은 2년치밖에 안되서 짧다.)

다만 세종께선 맏며느리 복이 극악하셨다.... 문종의 첫 부인인 휘빈 김씨는 체구가 크고 박색이어서 당대의 꽃미남 스타일(진짜다. 키도 크고, 관우 스타일의 긴 수염에, 늘씬하셨다고 하는 당대 기록이 있고, 어진도 그러했다는 후대 기록이 있다.)인 문종이 관심이 없었다. 남편이 관심이 없으니 이상한 짓(그냥 미신적인 짓거리들;;;을 말함)하다가 걸려서 쫓겨났다. 두번째 부인인 순빈 봉씨는 아담한 미인이었으나 성정이 그닥 좋지않아 문종이 싫어했다고 한다. 이러다보니 대사건이 터진게, 레즈비언질을 하셨던 거다. 욕구는 있고 궁내에 남자는 내관과 남편 뿐이니 뭐... 거기다가 술먹고 행패부리는 일까지 있으니 알콜릭+레즈비언.... 이건 뭐 용서불가능한 상황이라 쫓겨났다. 마지막 부인인 이는 바로 단종의 어머니인 권씨인데 권씨는 원래 세자시절 후궁으로 승휘로 책봉되었다. 순빈봉씨 이후 세자빈으로 삼긴 했지만 단종을 낳곤 산욕으로 사망한다. 즉 생전에는 왕비인 적이 없다.

진짜 겁나, 독하게 며늘 복이 없으셨다. 며느리라도 든든한 집안 사람으로 살아있었다면 계유정난이 성공했을지 의문스러운 지점이다. 단종 즉위시 할머니도, 어머니도(심지어 문종은 마누라 문제로 넌더리가 났는지 권씨 사후 계비도 안들였다;;;) 안계셨으니... 안습 ㅠ

솔직히 부정적인 평가도 있는법이다. 노비종모법 확대시킨것땜에 백성들이 살기 힘들었음.

가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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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조선왕조 역사상 이분만큼 가족복도 지지리도 없는 인물은 손에 꼽을 것이다.

  • 아버지 이방원: 형제들, 그러니까 세종대왕의 숙부들을 죄다 살해한 뒤 스스로 외아들이 되었다.

(이방연은 요절) 그것도 모자라서 할아버지가 고려 장수 시절 고려의 충신인 정몽주철퇴로 때려죽였다.

ㄴ 정확히는 이성계는 정몽주를 나름인정하고 봐줄려했는데 이방원이 재멋대로 조진거다 그 기점으로 부자사이가 나빠짐

나중에 왕위 물려주고나서 장인 심온까지 아들을 위한답시고 쳐 죽였다. 물론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정도전을 죽인 것은 덤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적으로 자신이 숙부라고 부르던 사람이 2명, 자신의 형제들까지 죽였으니 괜시리 연쇄살인마가 아니시다.

그래도 이 사람은 세종을 위해 악역을 자처했고 또 세종 이전에 조선의 기틀을 닦은 분이다...

  • 큰 형 양녕대군: 조선 역사에 손에 꼽을 양아치이자 파락호. 솔직히 이 양반... 양아치 중의 양아치가 되실 분이다.
  • 작은 형 효령대군: 제위보다 불교를 택해 스님이 되어버렸다. 정확히는 석가모니를 섬기는 선비다.

조선이 어떤 나라인데 곱게 스님이 되게 만들겠는가. (효령대군 스님 아닌데 누가 스님이라고 하는 거야 ㅅㅂ)

  • 중전 소헌왕후: 훈민정음 배포 날 사망하셨다.
  • 며느리 휘빈 김씨: 못생겼다. 그걸 상쇄하려고 궁녀의 신발과 뱀을 가루로 빻아 섞은 것을 남편에게 먹이다 들켜 폐서인이 되었다.
  • 장남 문종: 세종대왕을 잇는 먼치킨 세자, 하지만 재위기간이 짧았다, 수양도 문종한텐 한낱 동생
  • 차남 수양대군: 조카 단종이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자기가 빼앗았다. 허허... 양녕대군이 그냥 제위에 올랐더라면 그냥 하찮은 왕족 나부랭이에 불과했을 놈이!
  • 4대손 연산군: 세조(수양대군)의 직계자손으로 한글을 혐오하며 2번의 사화를 일으켜 세종이 울게 하였다. 그리고 조선 사상 최악의 폭군이였다.

세종대왕 본인은 성자인데 그 가족들은 은근히 꼴통들이 많았다.

기타[편집]

비슷한 부류로 정조도 있다(대왕이라는 칭호를 붙이기도 하나 요절하여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진 못하였으므로 정조라고 칭하겠다).

ㄴ정조가 한 게 뭔데? 사실상 수원 새끼들만 대왕을 붙인다. 이게 진실.

ㄴ정조가 요절?? 도대체 몇살에 죽어야 요절이 아닌거냐?;;

그리고 세자 때 업적 다 이루고 왕위에 오르고선 요절해 우리에게 좋은 모습을 남기지 못한 문종도 세종에 버금가는 왕이었다.

아빠가 이방원이라고 한다.

만든건 문자인데 이상하게 자꾸 문법나치들한테 부활당한다.

예토전생 시전 그만하고 대왕님 좀 쉬시게 놔둬라.

실제로 문법나치들은 세종대왕이 만드신 극초기 한글 하나도 안쓴다. 나랏말싸미 뒹긱에달아라고 말하면 고추가 설 정도로 아무 말도 못하는 문법 나치들을 타도하자.

놀랍게도 절대음감이었다고 한다. 직접 작곡도 하셨다.

사실 당시에 워낙 중국 빨아대는게 심했기 때문에 훈민정음 자체를 집현전에 의뢰해서 만들 수 없어서 본인이 직접 다 만들어놓고 집현전이 숟가락만 얹었다는 의견도 있다.

진정한 고기사랑!! 1년 365일 매일 삼시 세 끼 고기 반찬 없이는 밥을 드시지 아니하였다.

고기를 안 먹으면 신하들이 걱정해줬다더라. 좋겠다. 나도 고기...

사실 아버지가 이 독서만 파는 걸 별로 안좋아했다. 태종은 말타고 빠따들고 공때리는 격구같은 스포츠를 좋아한 강한 신체를 지닌 남자인데 반해 세종은 책만 봤기 때문에 태종이 별로 안좋아했다. 심지어 '야 이새끼야 방에 자1지새끼가, 방에 틀어박혀있지 말고 좀 나가 놀아라 앂발'이라 그러면 몸종몇명데리고 산책하고 돌아와서 다시 책읽었다. 정 성화가 심하면 말타고 하는 격구 말고, 격구 채만 들고 마당에 나가서 노인네들 게이트볼 하듯 걸어다니며 공 좀 치다 다시 들어와서 독서삼매경...

ㄴ아버지 이방원도 17살때 과거 뚫은 초천재다. 그런 태종이 걱정하고 책을 뺏을 정도였다면...

한글 파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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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천국에서 격노할지도 모른다. 이유는 한국인들이 특히 청소년이 욕설과 비속어 등으로 언어파괴로 심각하기 때문이다.

ㄴ 언어 파괴라는것은 있을 수가 없다. 언어라는것은 시대와 함께 바뀌는 것인데 그게 바뀐다고 한글파괴 운운하는것은 개소리다. 한마디로 언어가 바뀌면 그게 새로운 언어이고 옛 단어가 다른 단어로 교체되는 것일 뿐이다.

ㄴ 이말대로면 나라말씨미 라고 안 쓰는 현대 한글을 보고는 거품물고 쓰러질 거다. 욕설 사용은 도덕성을 비난해야지 ㅄ 억지 환단고기 사랑 한글 벌레들의 주장이니 무시해도 된다.

ㄴ그런데 아주 억지까지는 아니다.

ㄴ 애초에 조선시대나 그 이전에도 비속어는 얼마든지 있었다. 세종대왕은 문자를 만들었지 언어를 만든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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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나라말씨미는 뭐냐 이 새끼야. 한글 파괴라는 뜻이 뭔지도 모르네 병신새끼가. 나라말싸미 하던 시절부터 해서 문화와 사용 용례들이 자리를 잡아가며 어법이 바뀌었고 한자 사용도 덜하게 되면서 더 우리말 답게 자연스레 사용하게 된 거를 한글 파괴라고 생각하냐? 아오 등신새끼. 한글 파괴는 어법을 무시해가면서 기존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의 한글 파괴를 말하는 거잖아 병신아. 중세 국어랑 현대 국어랑 300년 이상 차이나 병신아. 한글파괴는 최근 10년 정도 수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고. 아오 병신 새끼 세종대왕이 너처럼 병신일거라고 생각하냐.. 세종대왕 정도면 국어사 책 몇 개 읽어보고 "아 씨발 후손들이 참 경제적으로 한글을 잘 고쳐 나갔구나" 했을거야 병신아. 멍청하면 가만히나 있지. 세종대왕 모욕하지 마라.

ㄴ아따 이 분, 그래서 비속어 사용된 문장은 무슨 의미인지 떠올리지도 못한답니다. 그 자랑스러운 언어의 역사성도 결국 발음 편하게 하려고 맞춤법이 달라진게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옛 사람들이 한 건 낭만적인 사랑이고 인터넷에서 하는 건 불륜이다? 그리고 두산백과에서도 비속어는 slang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slang을 문자의 문제로 보는 놈들은 환단고기를 사랑하는 새끼들 밖에 없단건 아냐? 남간집단지능문서고에 너같은 새끼에게 일침을 가하는 문장이 하나 있네.

한글날 특집으로 대중 매체에서 욕설을 남발하는 실태를 방영하며 '세종대왕님이 노하실 일이다.'같은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드신 분이지 한국어를 만드신 분이 아니다. 그래서 학교사랑에서 세종대왕은 이렇게 반격을 날렸다. 물론 욕하는 건 자제해야 할 일이지만 한국어에 해당하는 욕설과 한글을 헷갈리지 말자.

설사 비속어를 한글파괴로 인정한다 쳐도 아오 씨발 새끼 등신 병신. 자기도 한글파괴 잘 하면서 이중잣대 엄청나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언어의 역사성은 좀 더 편하게 발음하려고 변한건데 넷슬앵은 (물론 줄임말의 목적도 있으나) 대부분 그저 재미용이니까 거르고 어쨌든 비속어는 언어파괴가 아니다 나라 마약새끼들아. 사전 지식도 없이 덤벼드는 꼴이 참. 그리고 세 번째 글 쓴 저새끼처럼 비속어 비판하는 새끼가 비속어 씀. 웃긴 ㅄ들

병신들아 싸우지 마라.

그런데 세종대왕은 한글만 만드셨는데 자꾸 한국어 구역의 문제까지 이 분을 끌어들이려 한다.

하여간 귀여니나 조선야구 사진첩 훈민정음 사용자, 초성 사용자들은 당장, 아니 적어도 이번 한글날에 세종대왕상을 향해 3000번 절해라.

그럼 현대 영국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식 고전 영어 거의 안 쓰니까 다 서당에서 음식만 축내는 벌레?


아주 기괴하게까지 한글을 활용하며 잘 쓰고 있다는 걸 아시면 좋아하시겠지 백성들이 자유롭게 언어를 표기하라고 만드신 건데 야민정음 수준으로 활용을 잘 하고 있으니 아주 뿌듯하실 거다

재평가[편집]

이 문서는 씹창 메오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을 다룹니다.
와... 메갈리아다!! 요즘 대세이긴 한가 봐. 엥?? 거기?? 완전 개 사이트 아니냐??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 문서나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현재 병신들이 말도 안 되는 개지랄을 떨고 있습니다.
정상인들은 한시라도 빨리 이 문서를 정리하여 주십시오.

메갈 신 김치 여자들에게는 그저 먼 옛날 한글이란 쓰잘데기 없는 거 만들고 성관계에 환장한 돼지 파오후 독재자 조선 수컷 벌레일 뿐이라고 한다. 사실 세종대왕은 실록에 쓰여 있을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중전이 죽었을 때 새로 장가 들지도 않았고. [1]

ㄴ 미친 페미잡것들... 아오... 실록이라도 좀 읽고 까든지... 여성 위키러로서 쪽팔리기 그지없다. 아오...

세종이 섹스광이라고 하는 건 일견 맞는 말 같지만 사실 파고보면 좀 오해가 있다. 세종은 소헌왕후와 너무 금슬이 좋아서 후궁이 없자 태종이 난리 쳐서 후궁을 뽑아서 앉혔고 그들에게 자식 낳을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한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 후손을 남기는 거 자체가 왕의 의무였고 왕의 방사는 왕실의 큰 일이라서 여러가지로 제약이 많았다.

드라마에서 나오듯이 왕이 궁녀한테 홀딱 반하면 밤에 바로 궁녀 방에 쳐들어가서 잔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그냥 연속극에서 나오는 거짓부렁이니까 잊도록 하자.

일단 상선이나 지밀상궁 등 왕의 침전수발을 드는 사람들이 먼저 동침할 여성의 건강검진부터 하고 대기시킨다. 왜냐면 왕이 제사 지낼 일이 있어서 재계 중일 땐 피하고, 날의 간지에 인같이 센 짐승이 들었을 때도 피한다. 한재, 수재 등 천변이 있어도 피했다. 요리조리 다 피한 후에 날짜를 정해서(것도 배란점액 상태를 봐서 임신 확률 젤 높은 날로 정한다.) 홀딱 벗긴 후에(혹시 왕 암살할 흉기라도 가지고 있을까봐 아예 아무것도 안 입히고 데려간다.) 침소에 눕혀놓고 나온다.

세종은 후대 왕들에 비해 그나마 제삿날이 적었던 왕이다. 그러므로 잠자리를 할 수 있는 날이 비교적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소헌왕후에게서 8남 2녀, 5명의 후궁들에게서 10남 2녀 총 22명의 소생을 얻었다. 일반적인 성욕을 가진 남성이면 누구라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것도 임신 확률이 가장 높은 날만 동침하니까 말이다. 그래봐야 자식 많은 조선 국왕 TOP 3에도 못 들어간다. 다만 아들을 가장 많이 둔 왕이긴 하다. 그래서 그런 개꼬라지가 벌어졌지만...

그리고 섹스에 미쳤다면 부인 죽고 또 간택령을 내렸어야지.

참고로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놈의 제사가 엄청 많아진다. 재계를 해야 할 날은 갈수록 늘어나고 간지로 피할 날짜마저 있으니 이거 뭐 한 번 하기가 무슨...;

그러므로 후궁이 많고 자식이 많다고 해서 섹스광이니 뭐니 하는 건 정말로 적절치 않은 말이다.

ㄴ 신종신신께서 훈민정음을 만들지 않으셨다면 어땠을까? 지금도 그 배우기 어려운 한문(한자) 교육을 받은, 지위 있고 교육 받은 남성들에 의해 지식이 독점되는 것은 물론이고 고위직 일자리 및 공직에도 99% 남성만 들어찼을 것인데 역시 머리에 쇳가루만 들어찬 신 김치 여성 분들은 사고 능력이 전혀 없는 것 같다.

글자 배우기가 쉽다는 것은 지식의 보급과 습득이 용이하다는 것이고, 그만큼 자칭 사회적 약자이신 우리 신 김치 여성 분들이 신분 상승할 기회도 많아진다는 소리다. 괜히 한글이 여성들에게 자주 쓰여서 '암글'이란 이름이 있는 게 아니다. 머리는 피해 의식을 키우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걸 메퇘지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ㄴ 그걸 알면 메퇘지 짓을 하고 살겠냐, 병신은 지가 병신인줄 모르니까 병신이지.

ㄴ 지가 병신인 줄 몰라서 병신은 아닌 듯? 일베를 봐라

ㄴ 그새끼들도 걍 쿨해보이려고 하는 소리지 실제로 병신소리 들으면 누구보다 더 입에 거품물고 지랄한다

메갈년들이 세종대왕님이 만든 한글을 쓰며 세종대왕을 욕하는 걸 보면 마치 일본을 사랑하고 한국을 까지만 한글을 쓰는 그분들이 떠오른다. 혹시...?

역센징들아. 세종대왕님은 욕하면서 한글을 쓰냐ㅋ 세종대왕님 없으면 한글도 없었고 우린 짱깨어 썼을걸? 개ㄴ들은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면서 하는건 ㅈ도 없는데 왜 욕하고 ㅈㄹ임?

세종대왕은 조선족이다 해 칭챙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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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인들은 한시라도 빨리 이 문서를 정리하여 주십시오.

짱퀴벌레 새끼들은 세종대왕마저도 지들 거라고 우긴다.

씹미개 언어 칭챙총 쓰는 새끼들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애초에 세종대왕은 15세기 사람이고, 조선족은 19세기에 등장한 개념이다.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만주로 넘어간 순혈 한국인이었으나 지금은 걍 짱깨인 애들을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건데 세종대왕이 느닷없이 조선족?

같이 보기[편집]

각주

<references group=""></references>

역대 조선 왕 목록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태조
(1392년~1398년)
정종
(1398년~1400년)
태종
(1400년~1418년)
세종대왕
(1418년~1450년)
문종
(1450년~1452년)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단종
(1452년~1455년)
수양대군
(1455년~1468년)
예종
(1468년~1469년)
성종
(1469년~1494년)
연산군
(1494년~1506년)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중종
(1506년~1544년)
인종
(1544년~1545년)
명종
(1545년~1567년)
선좆
(1567년~1608년)
광해군
(1608년~1623년)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능양군
(1623년~1649년)
효종
(1649년~1659년)
현종
(1659년~1674년)
숙종
(1674년~1720년)
경종
(1720년~1724년)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영조
(1724년~1776년)
정조
(1776년~1800년)
순조
(1800년~1834년)
헌종
(1834년~1849년)
철종
(1849년~1863년)

역대 대한제국 황제 목록
초대 (26대) 제2대 (27대)
고종 광무제
(1863년~1907년)
순종 융희제
(1907년~19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