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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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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기록문화의 끝판왕.

조선왕조실록도 승정원일기가 다 번역되는 그 순간부터 조선후기사 연구에는 승정원일기에 자리를 내줘야 할 정도로 내용이 많다. 근데 글자 수만 2억 4천만자가

이거 어느 세월에 다 번역할지는 미지수. 게다가 이게 현대로 따지면 속기록이랑 비슷한 거라서 흘러 쓴 초서체가 많아 조선왕조실록보다 번역이 더 어렵다.

거기다 지금은 쓰지 않는 사어가 워낙에 많아서 번역이 더 어렵다. '싸이에서 파도타고 들어가서 일촌맺었다.'를 400년 뒤에 인간들이 보면 무슨말인지 못 알아처먹는거랑 마찬가지다.

중간중간 태워먹은거랑 없앤 기록을 다 합쳐도 이 정도이다.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들어간다.

인조 즉위 때부터 순종 때까지 총 287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 전 기록은 왜놈들과 뙈놈들이 처들어오는 바람에 다 날려 먹었다.

현재까지 번역된 왕은 인조와 고종 정도고 이제 영조 시기를 번역하고 있다.

이걸 얼마나 집요하게 기록했냐면 왕이 신하들이 했던 말 토씨 하나 안 빼먹고 다 기록하는 수준이다.

정조임금 시절에 죽은 사도세자 명예회복 시켜달라고 유교충들 1만명이 시위했을떄 그놈들의 이름을 죄다 적어놨다.

그날 당직선놈 이름쓰다 뒤졌을듯.

이제 한 3100권 정도 남았다고 한다. 이거 번역한다고 첨단 기술 써서 총 번역할때 27년 단축할거라 한다. 앞으로 18년만 더 번역하면 끝장을 볼 수 있을거라고. 이것도 중간에 태워먹고 남은거다. 한권도 소실 안됐으면 백년은 훌쩍 넘었을거다.

조선왕조실록과의 비교[편집]

   임금이 말씀하시길
   "저번에 광충교를 보니 금년 들어 더욱 흙이 메워져 있다. 가히 걱정이 된다.
   홍봉한이 말하길
   "하천 도랑의 준설이 매우 시급합니다. 만약 홍수를 만나면 강가의 집들은 대부분 떠내려 가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
(중략, 이후로도 계속 홍봉한하고 하천 관리 관련으로 말이 끝없이 이어진다)
   임금이 말씀하길
   "서울의 백성들을 불러 물은 후에 실시하는 것이 옳은 듯 하다. 설령 하천을 준설한다 해도 모래와 흙을 둘 곳이 없지 않은가?"
   홍봉한이 말하길
   "어떤 이는 배로 운반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수레나 말로 실어 나른다고 하는데, 한번 시험해 보면 알맞은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웃으며 말씀하시길
   "한성 안으로 배를 들일 수 있는가?"
   홍봉한이 말하길
   "배로 운반한다는 것은 큰비가 내린다면 가능한 방법인 듯 합니다."
   임금이 말씀하시길
   "사관들은 의견이 다를 수도 있으니 각자 소견을 말해 보라."
   ㅡ 《승정원일기》 영조 34년 5월 2일.
   임금이 준천의 가부를 물었다.
   ㅡ 《조선왕조실록》 영조 34년 5월 2일.


   (홍국영이 "자객이 새나 짐승이 아니면 궁궐 담장을 넘지 못했을 터이니, 대궐 안을 두루 수색하길 청합니다."라고하자)
   임금이 말씀하시길
   "조금 전에 별감들에게 먼저 차비문 안밖을 수색하게 하였는데 경의 말이 매우 옳다. 
경은 금위대장도 맡고 있으니 금군 20명을 인솔하여 승헌문에서부터 무덕문에 이르기까지 두루 수색하고, 
또 연화문에 숙직하는 군사 20명에게 궁궐의 담장 안을 순검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홍국영이 말하길
   "그러면 연화문에 숙직하는 군사는 표신을 풀어 보냅니까?"
   임금이 말씀하시길,
   "일이 급박하니 지체할 수 없다. 경이 영전으로 인솔하면 되겠다."
   ㅡ 《승정원일기》 정조 1년(1777) 7월 28일
   (홍국영이 "자객이 새나 짐승이 아니면 궁궐 담장을 넘지 못했을 터이니, 대궐 안을 두루 수색하길 청합니다."라고하자)
   임금이 그것을 옳게 여겼다.
   ㅡ 《조선왕조실록》 정조 1년 7월 28일.

기타[편집]

이른 아침에 김류, 이홍주, 최명길이 청대하였다. 주상이 침전(寢殿) 안으로 들어올 것을 명하여 밀담을 나누었는데,
승지와 사관은 문 밖에 있었으므로 밀담을 기록하지 못하였다. 상이 이경직에게 명하기를,
“오늘 한 말은 중요한 일이 아니니, 사책에는 쓰지 말라.”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눈앞의 위급한 일은 인보(印寶)와 가도(椵島)에 관한 일이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인보를 잠시 가지고 가서 말하기를, ‘엄한 위엄에 몰려 어쩔 수 없이 가져오긴 했지만 조종(祖宗)에서 전해 온 구물(舊物)을 차마 하루아침에
마멸할 수가 없으니, 조묘(祖廟)에 보관해 두고 새로 새 인보를 받기를 원한다.’라고 한다면 저들도 혹 옳게 여길 것입니다.”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백관들이 여울물을 건널 수 없으니, 오늘 가는 것은 반드시 배가 있어야 가능할 듯하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어제 이미 말했지만 오늘도 청하겠습니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척화한 사람은 지금 이영달(李英達)을 시켜 보내되 저들과 수작하는 일이 반드시 처리되기를 기다렸다가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밀담이므로 기록하지 못하였다.

그러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