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문서는 누군가의 최고존엄을 다룹니다.
드립치는 건 좋지만 추종자 새끼들에게 살해당해도 디시위키에서는 일절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이 문서는 몇 안되는 개념있는 금수저에 대해 다룹니다.
이 문서는 서민들을 위해 돈을 쓰며, 돈을 벌고 그 돈을 서민들을 위해 , 정당한 방법으로 축적하는 개념 금수저에 대해 다룹니다. 죽창으로 찌르면 안 되는 대상입니다. 우리 흙수저들 편이기 때문입니다.

"We are the 1%..We stand with the 99%"

일본 역대 덴노
124대 쇼와 덴노 125대 아키히토 126대 나루히토
아키히토
明仁 / Akihito
인물 정보
생년월일 1933년 12월 23일(1933-12-23) (90세)
출생지 일본 도쿄 지요다구
국적 일본의 기 일본
직위
일본국의 천황
(1989년 1월 8일~2019년 4월 30일)

←이전 천황다음 천황→
일본국의 상황
(2019년 5월 1일~ 현재)
연호 헤이세이(平成/평성)
부모 히로히토(아버지)
나가코(어머니)
형제 시게코(큰누나)
사치코(둘째 누나)
카즈코(셋째 누나)
아츠코(넷째 누나)
마사히토(남동생)
타카코(여동생)
배우자 미치코(1959~)
자녀 나루히토(장남)
후미히토(차남)
사야코(장녀)

우리 일본에 의해 초래된 불행한 시기,
귀국의 사람들이 겪었던 불행을 생각하며,
나는 통석(痛惜)의 념(念)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1990년 5월 24일, 아키히토 덴노

자꾸 이 발언에 진정한 사과 의도가 없었다며 까려 드는 놈들이 있는데, 이때가 1990년으로 아직 위안부 문제도 뭣도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 상황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 등이 없었다는 애미뒤진 입장인데 천황이 직접 그런 일이 있었다니 유감이다라고 한 것만 해도 오히려 일본 쪽에서 난리가 났으면 났지 한국에서는 다들 좋게 받아들였다. 저 발언 이후 일본 극우놈들이 없었던 일을 어떻게 사과하냐며 빼애액거렸다고 한다. 돌려서 사과해도 저 정도인데 일본이 부정하는 사건들에 대해서 사과했으면 어떤 꼴이 났을까?

개요[편집]

일본의 전임 천황(덴노). 다만 현대일본 덴노답게 실권은 없다. 굳이 비교하자면 안동김씨 세도정치기(사실상 안동김씨왕국)의 철종 처럼 정치에서의 법적인 권한은 얼굴마담(바지사장)이라고 보면 된다.

연호헤이세이(平成)이다. 일본 동전을 보면 한자로 平成 이라고 박혀있다. 쇼와(昭和:한국식 발음으로 소화)라고 되있는건 조오온나 오래된 동전이다. 그때는 히로히토가 살아있었다.

연호로 살아있는 을 지칭하는 것은 고인취급하는 것이라 무척 실례되는 행위이지만 메이지 유신 이래로 혹은 그 이전부터 일본국 국왕의 정치력은 시망한 상태이므로 식물인간과 다름 없으니 사실 헤이세이라고 칭해도 별 상관은 없다.

일본인 앞에서는 함부로 쓰지 말 것. 린치 당할 수도 있다. 일본 곳곳에서 소음으로 민폐를 주면서 좆본으로 만드는 스피커를 주렁주렁 매단 검은색 승합차들(우익) 앞에서는 더 안된다! 일본인들에겐 최고존엄이다.

얼굴이 대장 김근태와 똑같다. 병장 김근태와 헷갈리지 말것.

어렸을때 군 전략가에게 돌직구를 날린 것이 유명하다. 1945년에 아키히토가 12살이었을 때 가미카제 자폭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쓸데 없는 짓 아니냐며 팩폭했다.

'금수저'틀이 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누가 아키히토를 금수저라고 틀 붙였는데, 일본 왕을 포함한 일본 왕족은 재산이 0원이다. 따라서 아키히토는 절대로 금수저가 아니다. 돈을 1원이라도 쓰고 싶다면 일본 정부에 허락 일일이 받아야 함. 결론적으로 일본 왕을 포함한 일본 왕족은 똥수저만도 못한 존재다."라고 의견도 있으나, 현실적인 생활수준이나 모습을 무시하고 원리적인 규정이나 발언 몇마디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일본이 민주제이면서 덴노(왕정)의 이중성이 모두 남아있는 독특한 모습으로서, 명목상 재산이 많다 적다의 문제를 떠난 부분으로, 그래도 왕족이라 일본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저택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알아서 제공받으며 걱정없이 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맨손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하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감히' 자국왕에 우리같은 흙수저 집에서 사사건건 마누라가 바가지 긁듯 가타부타 하는 사람도 없다. 극우화 추진 때 아베vs궁내청 대립때도 보면 덴노는 찍소리도 안하는데 알아서 궁내청계열 공무원과 관료들이 기면서 맞춰가며 총리실(+행정부)와 대립하며 호위무사 해가는 모습. 즉 무재산과 무한재산(그리고 권력적인 측면에서도 무권력과 무한권력의 존경의 대상)의 중간쯤 섞인 양면성이 있는 그 경계라고 생각하면 된다. 일본 국내 하층민들에게서는 예전에 왕세자들 사진공개 때 국민세금으로 평일에도 놀면서 호의호식한다는 덴노가에 대한 비판도 있었던 지경. 차남 조차도 결혼 전 수시로 동남아 섹스관광을 했느니 별 소리가 일본 국내서부터 나오는 마당에, 감히 국왕(덴노)에게 돈한푼 쓰는데 사사건건 트집? 현실과 전혀 다른 미성년자 수준 뇌내망상에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일본왕이 일반적인 국왕 이미지나 권력에 비해서는 허수아비 느낌에 핫바지라고는 해도 일본 특유의 사회분위기를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다.

다만 이사람의 행적으로 볼 때 금수저일지언정 자기 아버지랑 달리 개념금수저 틀을 붙여도 무리는 없다. 이사람이 일본 주류 정치귀족들의 최근 극우클릭질에 동조(혹은 묵과)했다면 지금보다 동아시아 정세는 많이 쫄깃했을테니까.

애비가 싼 똥을 치우느라 나름 고생하는데 정부라는 새끼들은 별 역사왜곡에 옆나라에 도발이나 해대고 자칭 애국자라는 씹뜨억 방구석 여포들은 애국이랍시고 망신이나 시키고 있으니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도 못 듣는 불쌍한 분이시다.

치세[편집]

선황인 쇼와 천황의 후임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 얼마안가 헤이세이(平成/평성) 연호를 개원한다.

1989년 4월 1일, 소비세법(消費税法)이 통과된다.

1989년 6월, 리쿠르트 사건에 의해 다케시타 총리가 사퇴하고 동시에 우노 소스케(宇野宗佑)가 75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동년 8월에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가 76/77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1989년 12월 29일, NIKKEI225가 일본 역사상 최대 수치인 38915.87엔을 달성해 거품 경제도 최절정에 도달했다.

1989년 11월 4일, 옴진리교가 자신들을 조사하던 변호사 일가족을 살해한다.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사건/坂本堤弁護士一家殺害事件).

1990년 4월 1일, 오사카에서 국제 꽃과 초록의 박람회(国際花と緑の博覧会)가 개최된다.

1991년 3월 14일, 히로시마 신교통 교항이 붕괴하여 23명이 사망한다(히로시마 신교통시스템 교항낙사하고/広島新交通システム橋桁落下事故).

1991년 5월 8일, 육아휴업법(育児休業法)이 통과된다.

1991년 11월,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가 78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1992년 5월 15일, 폭력단대책법(暴力団対策法)이 통과된다. 그리고 이 즈음에 거품경제가 붕괴하기 시작하며, 결국 미야자와 내각의 불신임안이 가결된다.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이 위안부를 인정하는 담화를 발표한다(고노 담화/河野談話).

1993년 8월 9일,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가 79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며, 55년체제가 종결된다.

1993년 11월 19일, 환경기본법(環境基本法)이 통과된다.

1994년 4월, 정치자금 문제로 호소카와 총리가 사퇴함과 동시에 하타 쓰토무(羽田孜)가 80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그러나 내각불신임안이 가결되면서 2개월 뒤에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가 81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1994년 6월 27일, 나가노현 마쓰모토시에서 옴진리교가 사린가스 테러를 일으킨다(마쓰모토 사린사건/松本サリン事件).

1995년 1월 17일, 효고현 남부에 대지진이 일어나 6,300여명이 사망한다(효고현 남부지진/兵庫県南部地震).

1995년 3월 20일, 옴진리교가 도쿄 지하철역에 사린가스 테러를 일으킨다(지하철 사린사건/地下鉄サリン事件). 이 사건으로 14명이 사망한다.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총리가 한국의 식민지배를 사죄하는 담화를 발표한다(무라야마 담화/村山談話).

1996년 1월,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가 82/83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동월 19일에 일본사회당이 사회민주당(社会民主党)으로 개명한다.

1996년 9월 29일, 현 입헌민주당국민민주당의 전신인 민주당(民主党)이 창당된다.

1996년 10월 30일, 알 수 없는 이유로 미타케정의 정장이 습격당한다(미타케정장 습격사건/御嵩町長襲撃事件).

1997년 6월 11일, 일본은행법(日本銀行法)이 통과된다. 이 법은 일본 경제불황이 지속되는 원인으로 꼽힌다.

1998년 2월 7일, 나가노 올림픽이 게최된다.

1998년 7월,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가 84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동시에 자유민주당공명당이 연립정권을 수립한다.

1998년 10월 8일, 한일공동선언을 채택한다.

1999년 3월 3일, 일본은행이 금리를 0%로 내린다.

1999년 9월 30일, 도카이촌 방사능유출사고(東海村放射能漏出事故)가 일어난다.

1999년 8월 9일, 국기국가법(国旗国歌法)이 통과되어 일장기와 기미가요가 정식 일본의 국기 및 국가가 된다.

2000년 4월 5일, 모리 요시로(森喜朗)가 85/86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2001년 4월 9일, 일본 문부성이 역사왜곡 중학교 교과서를 통과시키면서 한일관계가 일시적으로 악화되었다.

2001년 4월 26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가 87~89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2001년 8월 13일,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에 참배한다. 이후에도 여러 번 참배하면서 한중에게 어그로를 아주 제대로 끈다.

2001년 11월 1일, 도쿄증권거래소(東京証券取引所)가 주식회사로 개편된다.

2002년 5월 28일, 일본경제단체연합회(日本経済団体連合会)가 발족한다.

2002년 5월 31일, 2002 FIFA 한일 월드컵이 개최된다.

2003년 9월 3일, 국회의사당(国会議事堂)에 낙뢰가 떨어진다.

2004년 1월 9일, 대한민국의 디시인사이드와 일본의 2ch 간에 전쟁이 발발했다.(갑신왜란)

2004년 10월 23일, 주부 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난다(니가타 주에쓰 지진/新潟県中越地震).

2005년 3월 25일, 나고야에서 일본국제박람회(日本国際博覧会)가 개최된다.

2005년 8월 15일, 고이즈미 담화(小泉談話)를 발표한다.

2006년 9월,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90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그러나 지병으로 인해 1년만에 사퇴하고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가 91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2008년 9월, 아소 다로(麻生太郎)가 92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그리고 2009년 총선에서 자민당이 대패한다.

2009년 9월,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가 93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그러나 정치자금문제로 1년만에 사퇴하고 간 나오토(菅直人)가 94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2010년 8월 10일, 간 담화(菅談話)를 발표한다.

2011년 3월 9일, 도호쿠지방 태평양충 지진(東北地方太平洋沖地震)이 일어나며, 이로인해 3월 12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福島第一原子力発電所事故)가 일어난다. 이후 간 총리가 책임을 지고 사퇴하며, 동년 9월에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가 95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2012년 12월,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96~98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2013년 즈음, 아베노믹스(アベノミクス)가 시작되며, 이후 일본이 경기침체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한다. 참고로 이걸 박근혜가 초이노믹스라는 이름으로 따라했다가 망했다.

2013년 4월 19일, 공직선거법(公職選挙法)이 개정되어 인터넷 선거운동이 가능해진다.

2013년 4월 28일, 주권회복 및 국제사회복귀기념식전(主権回復・国際社会復帰記念式典)을 개최한다.

2013년 12월 5일, 특정비밀보호법(特定秘密保護法)이 통과된다. 동월 26일에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한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이 타결된다. 그러나 여러 문제로 인하여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는 중이다.

2017년 2월 16일, 모리토모 사학비리사건(모리토모 학원문제/森友学園問題)이 발생한다. 동년 7월에 일어난 도쿄 도의원선거에서 자민당이 대패한다.

2019년 5월 1일, 1황자 나루히토(徳仁)에게 양위한다.

정치성향[편집]

헬본의 극우들로부터 가장 후빨을 받는 사람인데 정작 누구보다 극우들을 싫어한다. 본심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평생의 성향을 보면 반우익 맞다. 게다가 전후피해를 목격한 세대라서 애비 히로히또가 탑제 못한 개념과 양심을 혼자 2인분씩 탑재했다.

자기 아버지가 전세계를 상대로 맞짱을 뜨다가 나라가 한번 제대로 망하고 집안 쓸려갈 뻔 한 사태를 본 기억탓인지 전쟁의 '전'자만 꺼내도 기겁을 한다.

그도 그럴것이 프랑스, 독일, 한국, 중국 등등 대다수의 왕정은 한바탕 전쟁에 휘말리고 사라졌기 때문에 일본도 만약 또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왕가가 아예 폐지될것을 우려한 이유도 있다. 실제로 히로히토도 전범으로 낙인찍혀 사형당하고 황실이 폐지될 뻔 했는데 미국이 일본을 제대로 통치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덴노만큼은 살려준 전례가 있다. 패전 후 히로히토는 매카서 앞에서 오줌지릴 예스맨 상태였지만. (우익 새끼들도 히로히토탓 하며 왕 죽이고 자기들 빠져나갈려던 차에 살려준게 어디냐)

A급 전범들이 합사되어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몹시 싫어한다. 하긴 지 아버지 때까지는 현인신취급 받고 있었는데 야스쿠니에 있는 개객기들이 사실상 인간으로 신분을 격하시켰으니 싫어할만도 하다......

농담이고,

자신의 아버지이자 인간쓰레기이자 방사능 폐기물에 개좆씹병신새끼인 히로히토에 대한 반발심 때문인지 혹은 패전국의 수장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잘 자각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포함하여 일본이 타국을 침략한 역사를 전혀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키히토는 천황이 되자마자 즉시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등에 가서 2차 세계대전의 전쟁범죄에 대해서 공식 사죄했으며, 비록 한국에는 방문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한국에 와서 직접 사과를 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 사실은 우익이자 전쟁광 인생을 반성하지 않은 애비 히로히토도 A급 전범들이 야스쿠니에 들어왔을 때 존나 싫어했다고 알려져있다. 사실 일본에 대해 극도로 치를 떠는 독립운동가 겸 대통령 이승만 때문에 한국에 못들어오게 되어 한국에 방문하지 못한 것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도 방한 이야기가 나왔으나, 대신 그의 사촌동생인 노리히토가 방문했었다.[1]

극우성향이 뚜렷한 인물이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일본국 국왕의 정치력은 (수십년간 무시당해온) 시망인 상태이므로 시원하게 내지르지는 못한다. 나이먹고 몸도 아프고 힘든데 우익 국가행사판도 강제로 얼굴마담으로 따라다녀야 했고. 극우가 정치판을 꽉 잡고 있으니.

이러한 반극우적인 표현이나 언동들은 혹시라도 정치개입 트집잡힐까봐 완곡~하게 에둘러서 하고 있고, 극우뽕맞은 새끼들이 수시로 참배를 권해도(사실상 압박) 그건 (실권은 없지만 그래도)국왕이자 국가통합의 상징이라는 권위를 이용해서 무시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조슈번 계열 우익 주류 파벌들의 성지이지만 민간시설이지 정부시설이 아니다.)

2013년 4월 28일, 아베 신조가 주최한 행사에서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덴노 헤이카 반자이가 나왔는데 이때 썩은 표정을 짓고 그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이거 잘못하면 아베가 또 우경화짓 하다가 전쟁이라도 났다 지기라도 하면 책임 덤터기쓰고 목이 간당간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개인으로서도 왕가로서도 똑똑한 선택.

아마 아키히토 할아버지 입장에서 일본의 극우파는 사생팬으로 느껴질 것이다. 다만 이 시점에서 이미 대중여론은 상당히 우경화로 기울어져 있었음. (한국인이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본인들이 반전성향이거나 하는 것 과는 상관없이 일본 국내의 전체적인 여론)

2mb 시절. 마침 집권말이라 여론전 할 필요도 있고, 게다가 역대 정권 중 슨상시절 이후 특이하게 집권초 일본에 우호적(+ 정도를 넘어 상당수 저자세 외교) 태도를 보여오던 쥐박이 정권은(일본 오사카 출신이라서 그렇게 고향 일본에 양보하고 우호성이냐는 비이냥조차 들을 정도였다), 우호적 상황에서 일본 방문 중 갑자기 진행된 후쿠시마 오이먹방(먹어서 응원하자) 이후 똥썩은표정을 못숨기고 (이후 밥먹을 때 마다 후쿠시마 오이가 생각나며 딥빡함을 느꼈는지) 대통령이 직접 강경발언을 쏟아내며 이승만이나 김영삼 시기급 반일로 정부정책이 180도 돌아선다.

해당 시기에도 노련하게 사과할 기회가 있으면 한국와서 사과하겠다고 발언하며 이후 일본 국내용 연설등에서도 반전, 반제국주의, 식민지배사과, 패전후 평화번영의 가치 등을 언급하는 등 반성하는 모습을 많이 보이고 일본 국내 정서나 우익등의 부추김이 있던 상황에서도 친 우익적 색채를 단한번도 드러내지 않았다.

무개념 일제뽕 우익 수꼴 일본원숭이(고이즈미), 망언제조기(아소 다로), 코알라(아베 신조) 트리오랑은 확실히 선을 그어온 모습.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는 평이 좋은편이다. 맨마지막 댓글을 보자. 보통이었으면 존나게 반대 먹힐만한 댓글인데 용캐 추천수가 반대를 압도한다.

아키히토가 평화주의자로 성장한 가장 큰 이유가 태평양 전쟁의 경험때문이다. 이미 아키히토는 10대 초반에 불과하던시절, 카미카제 공격을 병신짓이라고 까내릴만큼 정신이 멀쩡했고 도쿄핫을 당한 직후 벙커에 숨어있던 일왕일가가 외부로 나왔을때 세상은 그야말로 지옥이였고 도쿄시민들이 왕가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기도했었단다.

당시 10대 초반에 불과했던 아키히토 입장에서는 그러한 기억들이 뇌리에 깊게 새겨졌을것이다.

그 밖[편집]

스타크래프트로 치자면 발레리안 멩스크다. 실제로 일뽕자드가 일부 설정들을 차용한 모델이라고 함.

KOF로 치자면 아델하이드 번스타인다.

패전 직후 그랬듯 일본 왕족들이 뜬금없는 분야로 학계에 진출하곤 했는데 히로히토처럼 어류학 연구에 힘썼다.

주로 연구한 건 망둥어라고 한다. 자기 이름(Akihito)이 들어간 망둥어가 두 종이나 된다.

이미 10년 전에 일본의 모든 도도부현을 한 번씩 순방하기도 했다.

1959년 아키히토의 결혼식을 계기로 일본 전국에 텔레비전이 보급되었다.

최초로 평민[2] 과 결혼한 왕족이다. 아키히토 할아버지랑은 테니스 치다 눈 맞았다고 한다.

시엄마에게 평민이라고 미친듯이 갈굼당했다고 한다.

선왕 히로히토와 같이 장어를 정말 좋아한다고 한다. 그 외엔 교자, 히야시멘, 바나나 베이컨말이, 오차즈케(일반적인 오차즈케 맞다)를 좋아한다고 한다.

최근에 아베 신조 내각 총리 대신 측근이 일왕의 역할이 제사에서 기도하는 것 말고는 무슨 역할이 있냐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현재 그 말을 들은 충격이 큰 상태라고 한다.

그러면서 "덴노는 (야스쿠니)신사참배해라 빼애액~!" 하며 우익들이 떠들었는데, 노령이라 아프다는 핑계로 야스쿠니신사는 안가더니 코마 신사(고려신사, 고(구)려신사 라고 일본에서 오래된 도래인 신사임. 우리가 아는 한반도 국가 고구려 맞다. 소원이 잘 이루어진다고 유명한 곳이고 원래 왕귀족들은 이따금 여기에 가서 평화를 기원했다고 함.)에 보란듯이 갔다. 그리고 고구려 역사를 물어보며 대놓고 한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표현해서 우익들이 뒷목잡았다고 한다.

즉, 자민당 조슈계 우익 카르텔의 간판짓은 안하겠다는 선언이다. 일본식 가식이 아니고 진짜 반전+평화교류 성향인 사람이다.

<youtube width="380" height="210">sHp94dQqEL0</youtube>

2002 월드컵 폐막식때 슨상님한테 악수를 청했다가 거절당했다고 한다...라고 혐한선동하는 넷우익 새끼들이 많은데 걍 아키히토가 더 들어가라는 손짓을 머중이가 못 본거다. 애초에 악수는 오른손으로 하는건데 아키히토가 병신도 아니고 대놓고 악수하자고 왼손을 내주냐?

가족관계[편집]

그의 아들 중 한명이 차기 일본국의 국왕이 될 것이다.

다른건 중요치 않다. 이것 하나 확실하다.

본래대로라면 장남인 황태자가 잇는 것이 맞지만, 황태자는 우익들의 입맛에 맞는 인물이 아니다(반대를 무릎쓴 평민과의 결혼, 우익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커버) 무엇보다 황태자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있는데다 본처는 이미 노산이라 부를 수준도 지나서 임신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 결국 황태자 본인이 덴노 자리를 잇는다 해도 다음 자리는 차남의 자식이 잇게 된다. 게다가 히로히토의 차남의 사생활은 지저분해도 우익들한테는 인기가 많어서 극우들 사이에선 황태자가 이어받은 직후 곧바로 자기 동생에게 자리를 물려주기를 바라는 측도 있는 듯.

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네덜란드의 빌럼알렉산더르 국왕이 반대를 무릎쓰고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정권 따까리인 호르헤 소레기에타의 딸 막시마 소레기에타와 결혼했는데도 불구하고 왕위에 성공적으로 올랐다. 게다가 빌럼알렉산더르는 딸만 3명이다. 어느 나라든 간에 우익이고 나발이고 왕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간들이 아니다.

웃긴 새끼들인게 여자는 무조건 덴노가 되지 못한다는 씹봉건적인 규범을 내거면서 정식황태자의 계승을 위협하고 있다는거다. 하기사 덴노제 자체가 씹봉건적이긴 하다.

ㄴ 근데 역사상 여자덴노가 8명이나 나왔었다. 여자는 무조건 덴노가 되지 못한다는 건 개소리다

ㄴ 그놈들이랑 야후에서 대화를 해봤는데 역사상에 존재하는 여성덴노들은 남자덴노가 자리를 차지할때까지 의자 댑혀놓는 난로 취급이더라. 그리고 황실규범에 여자는 잇지 못한다는게 있긴 한듯. 말할때 마다 황실규범 지랄이었음.

ㄴ 덴노질 몇달 하고 쫓겨난 뒤 덴노 자격 박탈당한 고분덴노의 꼬라지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디? 반면 고교쿠 사이메이 덴노는 자기가 직접 병력을 지휘하기까지 했는데 뭔 이세상에 어떤 의자 뎁혀놓는 난로 역할의 덴노가 지 스스로 병력을 직접 지휘하디? 십라와 일본군이 존나 박터지게 맞붙은 백강 전투는 고교쿠 사이메이 덴노 혼자만의 명령으로 일본군이 파병되어 치른 전투이며 거기서 일본군은 전멸할때까지 싸웠다. 이래도 의자 뎁혀놓는 난로?

ㄴ 실제로 어떤 일을 했는지 상관 없이 현대의 인식이 그렇다는 거 아닐까? 백 번 양보해도 야후충들 사이에서는 말이다. 여성 덴노가 아무리 실권이 강했고 중대사를 처리했다 하더라도 슬쩍 무시하고 넘어가는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덴노제는 봉건적인 현대 일본의 시각으로 구성되어 돌아가고 있다는 것.

여자 덴노 중 유명한 편에 속하는 고교쿠 덴노/사이메이 덴노. 백제를 살리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다.
  • 스이코 덴노(593~628)
  • 고교쿠(642~645)/사이메이 덴노(655~661): 덴지 덴노와 덴무 덴노 형제의 어머니. 황산벌 전투가 백제의 패배로 끝나자 백제를 도와주기 위해 3만 병력을 파견했다. 알고보면 존나 대인배 덴노다.
  • 지토 천황(690~697)
  • 겐메이 덴노(707~715)
  • 겐쇼 덴노(715~724)
  • 코켄 덴노(749~758)/쇼토쿠 덴노(764~770)
  • 메이쇼 덴노(1629~1643):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증손녀다.
  • 고사쿠라마치 덴노(1740~1813)

ㄴ연도까지 써놨으면서 왜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여자 덴노는 그나마 덴노가 실권 행사했던 고대에 집중되어 있다. 신라에 여왕 있었다고 그걸 한국사 전체에 확장 적용할 거냐? 근세 이후에 즉위한 메이쇼 덴노랑 고사쿠라마치 덴노는 그냥 다음 후계자가 어리거나 해서 임시로 앉혀둔 거다. 그리고 규범 있는 거 맞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여자한테 덴노 계승권을 박탈함. 황태자가 딸만 있으니까 이거 바꾸려고 했는데 동생이 아들을 낳아버려서 무산됨.

에휴 씨바새끼들아 여자 황족도 당연히 덴노 오를수 있다 병신들아. 다만 여자 덴노가 낳은 자식들이 덴노에 오르지못하는것일뿐 그니깐 여자가 덴노가 되더라도 무조건 남자황족의 후손이 차기 덴노가 되어야하는거다.

ㄴ오 소오카.

ㄴ 위에 안 읽었냐 옛날에는 그랬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에 여자 황족은 계승권 박탈됐다고.

그래서 극우파들이 엄격한 헌법 들먹이면서 차남편들잖아. 여기서 존나 이중적인건 아베 본인은 자위대땜시 헌법개정하고 싶다는거 ㅋ.

현 시점에선 장남의 딸이 일본내에선 얼굴도 평타고 학교생활열심히 해서 인기가 많은 편이다. 차남은 아들내미있긴한데 장애끼가 있고 이지메당한다는 설이 있어서 평이 그닥 좋진 않다. 장남쪽은 더이상 애를 낳을 수 없어서 장남이 덴노가 된다면 후계자 문제가 곤란해질 것이다. 차남쪽은 아들이 있어서 물려줘도 되는데 차남이 워낙 극우에 아들도 병신이라 국민들한텐 인기가 낮다.

여기서 아베새끼가 헌법 좀 고쳐보려고 입맛 다시니까 아키히토 할배가 비장의 수로 퇴위선언을 한 것. ㄹㅇ 천재다.

결과적으로는 장남이 보위를 이어가기로 결정났다.

부인으로는 미치코 황후가 있다. 일본 최초의 평민 출신 황후이다. 말이 평민이지 부친은 닛신 제분이라는 대기업 창업주 (당시 닛신제분은 아시아 최대규모의 제분회사다.) 외가는 백작가였다. 평민출신이라는 이유로 시어머니에게 40년동안 내리갈굼을 받아 1년 동안 실어증에 걸렸으며 시어머니인 나가코 황태후가 사망 후 회복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부친이 남긴 88억원 규모의 재산을 상속받는 것을 거부했다. 이유는 아무래도 부친의 재산을 상속받으면 이것은 국가 예산인 황실재산과는 별개로 사적재산이 되기에 논란을 피하려고 유산 상속을 거부한 것으로 추정된다.

퇴위 선언[편집]

이 문서는 신의 한 수를 다룹니다.
이 문서는 최고의 선택으로 길이 남을 이득을 얻은 사례 또는 당시에는 존나 욕을 처먹었는데 후대에 재평가된 것을 다룹니다.

헌법에 정해진 '상징'으로서의 의무를 충분히 감당할 사람이 덴노에 있어야 한다. 연로한 내가 공무를 대폭 줄이거나 대역(섭정)을 세워가며 덴노에 머무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기 애비처럼 뒤지고나서 왕위를 물려주는게 아닌 생전에 물려줄 것이라고 선언했다.

덴노가 살아있을때 왕위를 물려주는 전례는 200년동안 없어서 일본이 어찌할 지를 몰라 발칵 뒤집혔다.

후계자로는 왕세자인 나루히토가 유력한데 가능성이 적지만 차남인 후미히토에게 왕위가 물려진다면 동아시아는 걍 좆망이라는 의견도 있다.

장남인 나루히토는 아키히토처럼 평화주의자이며 온건파에 군국주의화에 대한 지속적인 반대로 일본 밖 타국 외교가에도 인정을 받고 있다. 근데 차남 후미히토는 예전부터 일제뽕 막가파 우익들하고 어울리고 놀아나던 국수주의자로 만약 이양반이 덴노가 된다면 일본 극우세력과 짝짜꿍해서 2차세계대전의 악마 히로히토 2탄이 될 수도 있다.

평화주의자인 아키히토가 생전에 왕위를 물려주려는 이유가 자기가 죽고나서 왕위를 계승하면 극우세력들이 짝짜꿍해서 후미히토에게 왕위를 줄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첫째한테 주려고 하는것도 있다. 실제로 왕실 주변은 딸만 낳은 첫째보다 아들 낳은 둘째일가에 (또 왕위욕심이 예전부터 많이 보여 활동범위도 넓었던) 힘이 실린 모습이다. 이전같으면 일본왕실같은 유교 보수문화에서 차남이 설치는 건 상상할수도 없는 일.

2016년 8월 8일 오후 3시 공식적으로 퇴위를 준비 할 것이라며 일왕의 현 상황 상 정치에 개입이 불가능 하기에 국회에 빙빙 돌려서 퇴위 절차를 준비해 달라고 요구하는 대국민 담화를 생방송으로 하였다.

일본 국민들의 일왕의 건강상 문제로 퇴위를 요구하는 것에 대다수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크고 작은 수술을 받은지라 공무를 수행하기 힘들다는 주장을 몇차례 해왔다고 전해진다.

2018년 12월 31일에 퇴위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

허수아비에 실권은 종범한 상태로(마치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허수아비한 철종처럼 왕이지만 실권이 없다.)왕이 되었지만 똑똑한 인물이고 정치고단수라고 볼 수 있다. 우경화질 하다가 왕조 날아간 나라가 한둘이 아닌데 이전부터 극우세력과는 벽을 쌓는 모습을 보여 만일의 사태때도 왕실위치에 책임이 갈 소지를 싹 없애버리고, 생전양위로 아베 신조 코알라새끼 개헌보다 황실특별법 먼저 손봐야 되게 생김. 아무런 정치력을 행사할 수 없는 바지사장위치에서 개헌세력을 견제했다. 그리고 동시에 온건파인 나루히토를 생전양위하여 극우인 후미히토에게 양위를 해주려고 압박하던 극우세력을 엿먹었고 또한 "헌법 정신에 따라 연로한 본인이 물러난다"고 헌법은 천황도 물러나게 한다는것을 만천하에 알려 헌법의 절대성을 강조함으로써 개헌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 과정에서도 혹시몰라 우익세력이 미쳐돌아가서 말꼬투리 잡을까봐 정치개입 여지로 말 꼬투리 잡힐만한부분은 다 빼고 빙빙 돌려서 말하면서 실질적인 요소는 다 전달함.(연설 하기전에 왕실 담당하는 궁내청과 아베내각의 사이에서 협의를 빙자한 시간끌며 연설막기와 사사건건 반대가 심했다고한다.) 캬 장수왕처럼 오래살고 초건강하지 못한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리고 근왕파 혹은 보수주의지만 우익은 아닌 중도성향 등 일각에는 최근 자신이 밀어붙이는 우익행사에 아키히토를 심심하면 동원한 아베에게 '지 우경화 집권 욕심에 나이먹고 몸아프고 힘든 노인왕을 무리한 일정으로 혹사시켰다'는 이미지를 은근하게 주게된 것도 덤. 이렇게 결과적으로 보면 확실히 법적인 정치권한이 없지만 확실한 정치고수다.

그리고 아키히토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바로 여성 천황의 가능성이다. 극도로 희박한 확률이지만 나루히토가 천황이 되면 여성 천황이 탄생할수도 있다. 나루히토는 아들이 없고 딸밖에 없어서 후계자가 없다. 기존의 황실특별법에 따르면 나루히토는 동생 후미히토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해야 한다. 하지만 아키히토가 물러남으로써 황실특별법을 손봐야 하는데 황실특별법을 개정한다면 여성천황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실제로 과거 일본에서 여성 천황이 나온적이 여러번 있다. 또 천황의 조상인 아마테라스는 여성이므로 여성이 천황이 안될법은 없다. 아니면 일본은 사촌간 결혼이 허용이므로 나루히토 딸이랑 후미히토 아들이 근친섹스해서 애새끼싸지르면 된다.

ㄴ얼굴 평타치고 학교 잘 다니는 나루히토 딸이랑 존나 못생기고 정박아에 이지메 당하는 후미히토 아들이 사귄다고? 나루히토 딸은 뭔 죄..

ㄴ이대호 공주가 얼굴 평타 친다는건 뭐임; 나루히토도 디씨하냐

하지만 현실적으로 메이지시대 이후의 법률상 그렇지 않더라도 다행인게, 둘째의 아들이 이제 차기 왕 순위권에 들게 되므로 어린 나이부터 아키히토의 둘째처럼 방임식 교육이 아닌 왕도정치를 교육받게 되며 조슈번 계열 우익집단의 우경화에 이용당하는걸 경계하는 궁내청 등 왕실 내 입김과 교육방침이 인격을 형성하는 성장기부터 제대로 교육받게된다. 내놓고 자유로이 키우다가 저렇게 물든 자기 아버지랑 달리 차후의 왕 세습순위자 이므로. 그러므로 자기아버지처럼 막(?)자라지 않고 우익과 거리를 두는 것이 (설사 본심은 우익이더라도) 왕실차원의 유지와 이익에서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될 가능성이 높게 되는 것.

ㄴ근데 히사히토라고 어린 남자 황족 있던데....?(하기사 걔가 아들 못낳고 죽으면 여성 덴노 말고는 방법이 없다)

아키히토의 퇴위는 이래서 신의 한수였다. 마치 바보인척하고 세도정치 딸랑이짓 할 것 같았던 흥선대원군이 마음속으론 칼을 갈다가 기회가 오자 세도정치 파벌정치를 날려버린 정도의 좆쩌는 큰 그림. 왕실을 자기들 이익에 얼굴마담으로 이용하려는 초슈파 우익 주류세력에 좆쩌는 뒷통수 한방. 업적획득 성공.

2019년 4월 30일날 진짜로 나루히토 천황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하셨으며, 연호도 헤이세이(平成)에서 레이와(令和)로 바뀌었다.

둘러보기[편집]



일본 덴노 목록
취소선은 실존여부가 불확실한 인물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진무
(기원전 660년~기원전 585년)
스이제이
(기원전 581년~기원전 549년)
안네이
(기원전 549년~기원전 511년)
이토쿠
(기원전 510년~기원전 476년)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고쇼
(기원전 475년~기원전 393년)
고안
(기원전 392년~기원전 291년)
고레이
(기원전 290년~기원전 215년)
고겐
(기원전 214년~기원전 158년)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가이카
(기원전 157년~기원전 98년)
스진
(기원전 97년~기원전 30년)
스이닌
(기원전 29년~70년)
게이코
(71년~130년)
제13대 제14대 섭정/제15대 제16대
세이무
(131년~191년)
주아이
(192년~200년)
진구
(201년~269년)
오진
(270년~310년)
닌토쿠
(313년~399년)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리추
(400년~405년)
한제이
(406년~410년)
인교
(411년~453년)
안코
(453년~456년)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유랴쿠
(456년~479년)
세이네이
(480년~484년)
겐조
(485년~487년)
닌켄
(488년~498년)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부레쓰
(498년~506년)
게이타이
(507년~531년)
안칸
(531년~535년)
센카
(535년~539년)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긴메이
(539년~571년)
비다쓰
(572년~585년)
요메이
(585년~587년)
스슌
(587년~592년)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스이코
(592년~628년)
조메이
(629년~641년)
고교쿠
(642년~645년)
고토쿠
(645년~654년)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사이메이
(655년~661년)
덴지
(661년~672년)
고분
(672년)
덴무
(672년~686년)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지토
(686년~697년)
몬무
(697년~707년)
겐메이
(707년~715년)
겐쇼
(715년~724년)
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쇼무
(724년~749년)
고켄
(749년~758년)
준닌
(758년~764년)
쇼토쿠
(764년~770년)
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고닌
(770년~781년)
간무
(781년~806년)
헤이제이
(806년~809년)
사가
(809년~823년)
제53대 제54대 제55대 제56대
준나
(823년~833년)
닌묘
(833년~850년)
몬토쿠
(850년~858년)
세이와
(858년~876년)
제57대 제58대 제59대 제60대
요제이
(876년~884년)
고코
(884년~887년)
우다
(887년~897년)
다이고
(897년~930년)
제61대 제62대 제63대 제64대
스자쿠
(930년~946년)
무라카미
(946년~967년)
레이제이
(967년~969년)
엔유
(969년~984년)
제65대 제66대 제67대 제68대
가잔
(984년~986년)
이치조
(986년~1011년)
산조
(1011년~1016년)
고이치조
(1016년~1036년)
제69대 제70대 제71대 제72대
고스자쿠
(1036년~1045년)
고레이제이
(1045년~1068년)
고산조
(1068년~1073년)
시라카와
(1073년~1087년)
제73대 제74대 제75대 제76대
호리카와
(1087년~1107년)
도바
(1107년~1123년)
스토쿠
(1123년~1142년)
고노에
(1142년~1155년)
제77대 제78대 제79대 제80대
고시라카와
(1155년~1158년)
니조
(1158년~1165년)
로쿠조
(1165년~1168년)
다카쿠라
(1168년~1180년)
제81대 제82대 제83대 제84대
안토쿠
(1180년~1185년)
고토바
(1183년/1185년~1198년)
쓰치미카도
(1198년~1210년)
준토쿠
(1210년~1221년)
제85대 제86대 제87대 제88대
주쿄
(1221년)
고호리카와
(1221년~1232년)
시조
(1232년~1242년)
고사가
(1242년~1246년)
제89대 제90대 제91대 제92대
고후카쿠사
(1246년~1260년)
가메야마
(1260년~1274년)
고우다
(1274년~1287년)
후시미
(1287년~1298년)
제93대 제94대 제95대 제96대
고후시미
(1298년~1301년)
고니조
(1301년~1308년)
하나조노
(1308년~1318년)
고다이고
(1318년~1339년)
제97대 제98대 제99대 제100대
고무라카미
(1339년~1368년)
조케이
(1368년~1383년)
고카메야마
(1383년~1392년)
고코마쓰
(1392년~1412년)
제101대 제102대 제103대 제104대
쇼코
(1412년~1428년)
고하나조노
(1428년~1464년)
고쓰치미카도
(1464년~1500년)
고카시와바라
(1500년~1526년)
제105대 제106대 제107대 제108대
고나라
(1526년~1557년)
오기마치
(1557년~1586년)
고요제이
(1586년~1611년)
고미즈노오
(1611년~1629년)
제109대 제110대 제111대 제112대
메이쇼
(1629년~1643년)
고코묘
(1643년~1654년)
고사이
(1655년~1663년)
레이겐
(1663년~1687년)
제113대 제114대 제115대 제116대
히가시야마
(1687년~1709년)
나카미카도
(1709년~1735년)
사쿠라마치
(1735년~1747년)
모모조노
(1747년~1762년)
제117대 제118대 제119대 제120대
고사쿠라마치
(1762년~1771년)
고모모조노
(1771년~1779년)
고카쿠
(1780년~1817년)
닌코
(1817년~1846년)
제121대 제122대 제123대 제124대
고메이
(1846년~1867년)
메이지
(1867년~1912년)
다이쇼
(1912년~1926년)
쇼와
(1926년~1989년)
제125대 제126대 - -
아키히토
(1989년~2019년)
나루히토
(2019년~)
- -

각주

  1. 노리히토는 한국 방문하고 몇 달 뒤에 48세에 급사했다.
  2. 말이 평민이지 대기업 재벌 딸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도 귀족출신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