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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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hn Changho.jpg
안창호(安昌浩)
이명 호 도산(島山), 산옹(山翁), 섬메, 신도생(新島生)
별명 안광택(安廣宅)
출생 1878년 11월 9일 평안도 평양부 초리방 초리7리 봉상도(도롱섬)
사망 1938년 3월 10일 경성부 경성제국대학부속병원
국적 조선대한제국, 미국
본관 순흥 안씨
학력 구세학당 보통부
가족 아버지 안흥국(安興國), 어머니 제남 황씨, 형 안치호(安致昊)
여동생 안신호(安信浩), 할아버지 前 통덕랑 안태열(安泰烈)
아들 안필립, 안필선, 안필영, 딸 안수산, 안수라
종교 성리학장로교


설명[편집]

우리가 나라를 잃은 것은 이완용 일개인 탓도 아니오, 일본 탓도 아니라 우리가 힘이 없어서였다. 그러하니 나라의 독립은 국민 개개인이 힘을 가질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점진적으로 힘을 키워나가는 방향으로 투쟁을 할 것.
성격이 모두 나와 같아 지기를 바라지 말라. 매끈한 돌이나 거친 돌이나 다 제각기 쓸모가 있는 법이다. 남의 성격이 내 성격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키: 175 cm (미국에서 밝혀진 기록이 있다.)

도산 안창호.

조선인의 실력양성론을 주장했으며 점진적 투쟁론자이다. 우리 민족 스스로 힘을 키워야 일제로부터 자립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한 것이다.

ㄴ 민족개조론으로 쓰여있길래 실력양성론으로 바꿨다, 민족개조론은 안창호를 방패삼아 자신들의 사상에 정당성을 주기 위해 친일파 새끼들이 쓰던 말이다.

ㄴ 민족개조론은 타협적 민족주의자인 좆광수 같은 친일 역센징 새끼들이 '왜 구지 우리 미개한 조센징들은 갓본으로 부터 독립하려 애쓰는가? 차라리 우리의 미개한 조센징 정신부터 개조해서 우리 모두 갓본인이 되자!'라며 씨부린, 욕도 안 나올 정도로 어이없는 개소리다. 갓창호 선생님이 주장한 것은 '아직은 우리 민족의 힘이 약하니먼저 착실히 실력을 길러 독립을 쟁취해 내자!' 하는 실력양성론 내지는 준비론 이다. 비교하는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웅변이 뛰어났다고 하며[1] 솔직히 조선인들 중에서는 양복 빨을 받는 편이었다. 얼굴이 잘생겼다. 진짜다. 존나 오지호 닮았다. 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수트빨도 엄청 잘 받는다.

다른 건 제어할 수 있어도 담배 피는 습관은 끊지 못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이 추서된 바 있다.

솔직히 현용 화폐에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들어가야 한다. 물론 다른 분들도 훌륭하지만 나라 독립 위해서 삶을 바치신 분들이 들어가야지 ㅇㅈ?

ㄴ '화폐'에 집어넣기에 적절한 것은, 그 나라의 사회, 문화 등을 대변할 수 있는 상징성 있는 인물이나 사물이 들어가는 게 더 적절하다고 한다. 독립운동가가 성인(聖人)이라는 걸 부정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화폐에 집어넣기까지 하는 건 부적절하고, 차라리 기념주화를 찍는 것이 더 낫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비폭력, 실력양성 같은 이미지가 많아서 투쟁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을 거라는 편견이 많지만 계획에 따라서는 폭력을 동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단, 의열단처럼 산발적이고 간헐적인 테러에서 머무를 것이 아니라 실력을 키운 뒤 보다 더 조직된 군사적 활동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일제 공공기관에 폭탄을 던지는 계획도 세웠던 적이 있지만 사전에 발각되면서 체포된 터라 결국 '투쟁혁명가'라는 이미지를 구축하지는 못했다.

생애[편집]

유년기[편집]

1878년 11월 9일, 평양 동촌(東村)에서 이주한 농부 안흥국과 제남 황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안치삼이었는데 10살에 학교를 다니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고 한다.

1892년, 그가 14살이 되었을 때 평양부 남제산면 노남리(現 북괴령 평양시 낙랑구역 송남리)로 이사하면서 노남리댁 셋째로 불리게 되었으며, 저명한 성리학자 김현진에게 한학, 성리학을 배우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2년 뒤 청일전쟁으로 평양이 초토화되는 것을 목격하고 동학농민운동까지 겪으면서 구국의 대열에 나서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온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홀로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로 올라간 뒤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운영하던 구세학당 보통부에 입학하여 산수, 지리, 세계사, 과학 등을 배우며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장로교도가 되었다. 1897년 보통부를 졸업한 그는 교사로 취직하고, 그 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 안태열의 강요로 안성 이씨 이석관의 장녀인 이혜련(당시 13세)와 혼인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안창호는 이런 중매결혼은 안 한다고 버텼으나 씹혔고 결국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그렇게 상경한 뒤 서재필, 이승만, 유길준, 윤치호 등이 주관한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이승만, 양기탁, 윤치호, 이상재, 이동녕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에도 참여했으며 곧 해당 대회의 관서지방 발기회에도 참여했다. 이후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조직, 책임자로 임하고 평양부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 관서지회를 개최했는데, 이때부터 그는 유명한 웅변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곧 진압당하면서 낙향하여 한동안 교육자로 활동한다.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웅변을 통해 청년들을 감동시키면서 모은 자금으로 1908년에는 평양에 대성학교를, 1909년에는 김좌진, 이갑 등과 함께 서북학회를 창립하면서 애국계몽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었고 서북 지역의 개신교 독립운동가들이 단체로 감옥에 들어가게 되면서 국내 활동은 더 이상 무리라고 판단하고 미국으로 가기를 선택한다.

미국 생활[편집]

1913년에 그는 민족운동단체(흥사단)를 설립했고 이후 박용만, 이승만과 함께 미국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리버사이드에서 오렌지 농장에서 일을 계속하다가 3.1운동으로 임시 정부가 설립되려고 하자 그동안 모은 성금을 챙기고 상하이로 옮겼다. 그리고 1919년 4월 13일에 선포(4월 11일에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다.

임정 활동[편집]

여운형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3.1 운동 직후 일본에 대한 국제 사회의 여론이 안 좋아지자 이를 환기하고 일본과 조선은 매우 우호적인 관계라고 선전하기 위해서 여운형을 일본으로 초청했을 때, 이동휘는 일본과 타협하는 일이라면서 극구히 반대했지만 안창호는 오히려 노잣돈까지 따로 챙겨주면서 그를 믿었다.

안창호: 적을 알아야 하니까니 가서 니야기를 들어보라우. 이거 얼마 되딘 않지만.[2]
여운형: 허나 임정 안팎에서 야단들입니다.
안창호: 괜티않아. 나라 팔아먹는다구 야단들이디만, 팔아먹을 나라가 이시야 팔아먹디? 하하하.

그리고 여운형은 이때 도쿄 호텔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외교적 1승을 챙겼다.

안창호는 이동휘처럼 급진전쟁론 수준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준비한 다음에 전쟁을 하자는 점진전쟁론을 내세웠다. 그 외에도 남탓할 시간이 있으면 자기의 부족함부터 탓해야 한다면서 이승만에게 일갈하는 발언도 임정에서 활동하는 동안 많이 냈다.

위임통치 청원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났을 때는 안창호도 여기에 어느 정도 가담했던 사실이 있었기에 당시만 하더라도 이승만을 변호하는 입장이었겠지만 미국에서 3.1 운동 소식을 접한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노선을 갈아탄 탓인지 이승만과 마찰을 많이 빚었다.

이승만이 당시 법적으로 제정되지도 않은 대통령 직함을 달고 대통령 행세를 하면서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는 모습에 그러지 말라고 전보를 보내기도 하였지만 이승만은 이에 대해서 떠들지 말라며 무시한다.

국민대표회의가 열릴 적에 그는 개조파로 있었는데, 덕분에 현상유지파였던 김구와도 사이가 썩 좋지 못했다. 윤봉길 의거 때 피신하라는 얘기도 안 건네는 덕분에 안창호가 체포된 일이 있었는데 이게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그런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지금도 간혹 나온다.

탈임정[편집]

안창호는 윤봉길의 훙커우 의거 직후 피신하지 못하고 체포되었고 국내로 압송되면서 5년 간 옥살이를 하다가 형량을 채운 그는 고향에서 청년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러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때문에 다시 체포되어서 옥살이를 다시 하게 되었지만 윤치호의 앙망문 덕분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고문 때문에 폐렴, 간경화를 앓았지만 치료 비용은 윤치호와 김성수가 납부해주기까지 했음에도 결국 병세를 못 이기고 세상을 뜬다.

가족[편집]

아들이 필립 안. 할리우드에서 알아주는 네임드였다고 한다. 최근 무한도전에서 도산 안창호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면서 한국에서도 유명해졌다.

딸은 수산 안. 미해군에 자원입대하여 미해군에 입대한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이자 첫 여성 포격술 장교가 되었는데 심한 인종차별에도 불구하고 암호해독가로 크게 활약하였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NSA(국가안보국)의 비밀정보분석요원이 되어 부하 300명을 거느리는 씽크탱크를 지휘하는 위치까지 올라갔던 인물이다.

安必立이라는 세 글자에서 도산 안창호의 독립에 대한 열정이 보인다.

막내아들은 1926년생이고 아직도 미국 LA에 살아계신다.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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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에 있는 노무현 나와라!

기일 79년 뒤 탄핵절이 일어났다. 게다가 동명이인도 있었고 한자도 같았다. 박ㄹ혜를 몰아낸 8명의 헌법재판소 재판관 중 1명이다.

하와이언 리와 기나긴 악연이 있었다. 리가 임정 대통령이 된 이후 상해로 한 번도 귀국하지 않아 대통령 업무처리를 전부 짬처리당했고 자기 외에 미국의 독립운동 세력들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동지회를 결성하여 국민회(하와이 한인단체)를 조져놓았다. 그 와중에 하와이 한인들의 모금과 국채 판 돈으로 운전 실력이 뛰어난 '백마(오스트리아산)를 탄 초인'이 되었다.

노동과 거리가 멀어보이지만 의외로 미국에 입국한 후 한동안 오렌지 농장,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둘러보기[편집]

  1. 훗날 독립운동도 하고 해방 후 정계로 진출한 여운형, 조병옥, 조만식, 장택상 모두 이 분의 연설을 듣고 광광 울었다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2. 당시 30원을 줬다. 조선 노동자들이 받는 월급이 5원(많아야 10원)이었던 걸 생각하면 적은 돈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