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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의 어린시절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 3남 1녀 가운데 둘째로, 아버지는 교사였고 어머니는 루츠가문 출신으로 가족 모두 개신교였다.
장군님 분신술 쓰신다

에르빈 요하네스 오이겐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 1891/11/15 ~ 1944/10/14

나치 독일의 장군

평민으로 태어나 원수까지 승진한 개천에서 용 난 인물. 엔지니어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영향으로 입대했다.

사막에서 영국군을 여러 차례 물먹이며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얻는다. 고군분투했지만 사막에 등판한 어린왕자 몽고메리에게 길들여지고 말았다.

사실 몽고메리 별명이 키가 존나 작아서 사막의 생쥐였는데...생쥐한테 발린거면...흠흠...

서부전선에서도 노르망디 수비를 담당했다. 항공기에게 공격받아 은퇴했지만 히틀러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자택에서 자살을 강요받고 청산가리를 마신다.

독일군의 패장이지만 넘치는 간지와 전쟁범죄와 크게 관련 없다는 이유 등으로 빨아제끼는 사람들이 많다.[1]

간지넘치는 일화로 영국 야전 병원에 물이 없다는 말을 듣고 엄청난 양의 생수를 영국군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보답으로 와인들을 받았다.

근데 사막여우 기엽따

어린 시절[편집]

롬멜은 남부 독일의 뷔르템베르크 지역의 울름에서 5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뷔르템베르크가 제2 제국의 구성원이 된지 약 20년만에 태어난 것.

18살 때 제124 뷔르템베르크 연대에서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아마 포병 장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후 1910년에 단치히의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정식 장교 훈련을 받았다. 1911년 11월에 졸업했다.

1912년엔 124 연대에. 이후 자리를 옮겨 1914년까지 제46 포병연대에 붙어있다가 전쟁이 시작하자 124 연대로 재배치받았다.

124 연대에 초콜릿이라도 숨겨뒀나보다.

제1차 세계대전[편집]

이당시 롬멜은 이탈리아랑 프랑스랑 닿아있는 국경지역... 어딘지 알지? 하이튼 그쪽에서 싸웠다. 그리고 가감없이 천재성을 드러내는데 참호전이 주력인 1차대전에서 과감하게 움직이고 전선을 넘어 적을 기습하는 등. 긴 이야기를 짧게 줄여서 전술의 천재 그 자체였다.

일례로 1917년 10월 24일의 12차 이손조 전투(카포레토 전투)가 있는데 롬멜중위의 꼴랑 150명인 대대가 이탈리아군 연대를 우회해 후방에서 공격하면서 이탈리아군은 독일군에게 포위됐다는 착각을 했고 1,500명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둔다.

롬멜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11월 9일에 또 같은 방식으로 이태리군을 공격해 제1 사단 10,000여명을 항복시키는 대승을 거뒀다.

카포레토 전투에서 20만 명이 넘는 이탈리아군이 포로로 잡혔는데 일개 소대장의 지분이 5%정도 된다는 것만 보아도 엄청난 사기캐라고 할 수 있다.

이 공로로 롬멜은 최고의 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를 받아야...했지만 다른 이상한 귀족 장교가 훈장을 수여받는다.

구글에 롬멜을 치면 푸르 르 메리트를 항상 달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후에 또 전공을 세워서 당당히 훈장을 타갔기 때문이다. 여기서 훈장쯤이야 받고 싶으면 받을 짓을 하고야 마는 롬멜의 사기성을 볼 수 있다.

1918년 1월엔 대위로 승진한다. 그리고 제44 군단으로 옮겨서 종전때까지 복무한다.

전간기[편집]

1차대전에서 보여준 사기성 덕분에 육군이 10만 명으로 감축되는 와중에 당당히 살아남은 롬멜.

그러나 귀족 장교[2] 에게 훈장을 뺏긴 사건을 계기로 삐딱선을 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롬멜이 평민 히틀러와 평민 친구들이 가득한 나치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롬멜은 히틀러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고 1934년 히틀러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을 어필하는데 성공했다. 히틀러도 유능한 롬멜을 알아봤고.

1939년. 대령까지 승진한 롬멜은 사관학교 선생을 거쳐 총통경호대 대장을 맡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편집]

1937년에 대령 1942년에 원수. 5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만에 대령이 원수가 됐다. 먼치킨.

폴란드전[편집]

폴란드전 당시 히틀러의 경호를 맡고 있었던 만큼 자연스럽게 히틀러의 옆에 설 기회가 많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히틀러는 전쟁에 대해서 아는게 1도 없었기 때문에 전선을 시찰하거나 전쟁상황을 브리핑 받을 때 롬멜이 옆에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하면서 설명을 해 주었다.

알다시피 롬멜은 총통조차 모욕하는 희대의 천재. 히틀러를 따라다니며 앞으로 전쟁을 전차가 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기갑부대 지휘관 자리를 따려고 엄청난 자기PR을 한다.

보병부대에서 복무했고 산악부대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지라 군대 인사팀은 롬멜을 산악부대 지휘관으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롬멜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기갑사단을 주게 된다.

프랑스전[편집]

그렇게 맡은 부대가 제7 기갑사단. 사단장을 맡으려면 대령으론 안되겠지? 베프 히틀러가 소장으로 승진시켜줬다.[3] 군대의 인사체계를 무시한 승진이었지만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히틀러가 롬멜을 신뢰했고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과감한 선물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제7 기갑사단은 하인츠 구데리안 휘하의 3개 기갑사단들 중 하나였고 따라서 롬멜은 1940년 5월 10일 구데리안의 지휘를 따라 아르덴 숲을 통과했다.

뫼즈 강가에 다다른 롬멜. 그러나 강의 다리는 전부 끊어져 있었고 프랑스군은 강 건너에서 독일군을 막아선 상태였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도하 준비에 사흘 도하에 이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롬멜은 예상에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

롬멜은 휘하 부대에게 근처의 집들을 태워 연기를 내라고 지시했고 강변이 연기로 가려진 사이 지원 폭격기가 폭격을 시작하자 보병들을 보트에 태워 포탄과 총알이 날라다니는 강에 밀어넣었다.

오후 3시까지 모든 보병들이 강을 건넜고 공병대가 가교를 부설해 4시 30분에 전차 도하가 시작됐다.

어찌어찌 강을 건넌 롬멜의 부대. 롬멜은 5월 16일 아베네스에 도착했다. 진군중지 명령이 내려왔지만 무시한 채 카투로 진격한 건 덤.

아라스 전투[편집]

5월 14일 오후. 독일 기갑부대가 랑에서 고작 19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는 정보가 프랑스군에게 들어왔다.

프랑스 국방장관 달라디에가 반격을 명령했지만 가믈랭 장군은 병력이 전부 마지노선에 갇혔기 때문에 쓸 병력이 없다며 거절한다.

이때 처칠이 독일군 남쪽의 프랑스군보다 북쪽의 영국 해외원정군이 더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반격작전을 수립한다.

그러나 전의를 상실한 프랑스군이 작전을 제대로 세운다거나 할 리가 없었다.

5월 20일 저녁 구데리안의 선봉대가 솜 강 어귀의 아브빌에 도착했다. 단시간에 빠르게 진격하며 전열이 가늘어진 독일군. 이 때가 유일하게 반격이 성공할 수 있는 때였다.

5월 21일 영국군 4개 보병여단과 1개 전차여단이 아라스를 출발했다. 동시에 비슷한 수준의 프랑스 전력이 치고 올라와 샌드위치를 만든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기갑여단만 토텐코프 사단에게 조금 스크래치를 냈을 뿐 나머지는 그냥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었다.

토텐코프 사단이 기갑여단을 맞아 싸우던 그 때. 한참 진격중이던 롬멜의 제7 기갑도 영국군의 기갑부대와 마주쳤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전차는 떡장이라 3호 전차의 물대포나 기타 대전차병기로는 흠집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굉장히 고전했다.

여기서 좌절하지 않은 롬멜은 공군의 88mm 포를 빌려다가 전차를 후려팼다. 격전 끝에 기갑부대를 물리친 롬멜. 롬멜은 영국군 부대를 제 자리로 돌아가게 한 다음에 포위한 채 뚜까팼다.

연합군의 반격을 격퇴하고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격하던 롬멜은 됭게르크 근처에서 멈추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 명령은 히틀러가 직접 내렸는데 아직도 무슨 정신으로 진격을 멈췄는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4][5]

어쨌든 모두가 알다시피 진격을 멈춘 사이 33만 명이 넘는 영국군은 배를 타고 튀었으며 공군은 폭격으로 결과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사실만 입증했다.

영국군은 배를 타고 도망갔지만 땅이 붙어있는 프랑스군은 도망갈 수 없었다. 얼마 후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했다.

북아프리카 전역[편집]

상대적으로 유럽산 강대국 라인에 늦게 낀 이탈리아는 늦은 만큼 열심히 식민지 개척에 노력했다. 그 시발점이 바로 에티오피아 전쟁. 이탈리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독일군이 영,프 군대를 복날 개패듯이 잡는 것을 보자마자 자신도 할 수 있다며 리비아를 점령하고 이집트 쪽으로 진격했다.

이집트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따까리가 되어 있었고 자신들의 이권이 두 눈 뜨고 날라가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영국군은 반격했다. 그런데 얼레? 이탈리아군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약했다.

강대국의 섭리에 따르면 진 나라는 식민지를 전부 뱉는 것이 원칙.[6] 북아프리카에서 털리면 에티오피아까지 뱉어야 하는 이탈리아는 똥줄이 타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솔리니는 자기 남친 히틀러한테 SOS를 요청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당시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계획하고 있었고 자기 땅도 아닌 북아프리카에서 전면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사단급 부대와 "유능한"장군 한 명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아프리카에 갈 유능한 장군으로 뽑힌 롬멜 장군. 롬멜은 중장으로 승진하고 장군참모 둘을 데리고 아프리카에 도착했다.

처음에 롬멜은 제5 경사단만 지휘했다. 공격이 아닌 현상유지가 임무였고 이탈리아군을 보조하는 역할만 해야 했다. 나중에 가면 병력과 권한을 더 받지만 그래도 공격 전에 이탈리아군 사령부의 결재를 받아야 했다.

롬멜은 3월 24일에 아지다비야로 이동했고 4월 3일에 그곳에 사령부를 창설했다. 직후 롬멜은 제3 정찰대대의 기갑차량을 타고 북쪽의 술루치로 향했다.

그때 영국군이 벵가지에서 철수중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롬멜은 재빨리 전군을 동원해 벵가지를 점령했다.

사막의 벌판에서 자유롭게 기동할 수 있게 된 롬멜은 모든 병력을 동쪽으로 밀어붙였다. 물량, 장비, 사기, 지휘관의 수준, 제공권 뭐 하나 빠지지 않는 독일군은 끝없이 영국군을 밀어붙였다.

4월 7일 롬멜은 데르나를 점령하고 메칠리를 포위했다. 다음날 독일군은 메칠리를 함락시켰고 그 다음날. 롬멜의 정찰대는 바르디아에 도착했다.

바르디아는 이집트의 국경에서 불과 몇km밖에 떨어지지 않은 도시. 즉 바르디아가 함락된다면 진짜 이집트가 추축국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인 것이다.

살아남은 영국군들은 이집트 국경을 넘어 불과 4개월 전 이탈리아군에게 반격을 시작했던 기지로 후퇴했다.

롬멜의 공격적인 작전으로 이탈리아군은 원래 땅을 죄다 수복했다. 당연히 이집트 국경을 넘어서 진격하기 시작하면 며칠 안으로 피라미드 위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수에즈 운하에서 물놀이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롬멜에겐 그런 실권이 없었다. 1943년 초반까지 북아프리카의 총사령관은 이탈리아인이었고 롬멜의 군단 부대들도 대부분 이탈리아군이었다.

더 심각한건 병력의 주축이 되는 이탈리아군이 굉장히 허접했다는 것. 사실 네덕들이 싸재끼는 똥군기나 지휘불량 같은 문제가 있던게 아니다. 뭐 있었기야 하겠지. 하지만 이탈리아군의 핵심은 사막전에 대한 이해도와 현대전에 대한 개념이 모자랐다는 데에 있다. 이탈리아군은 기계화 수준이 낮았고 자연스럽게 끝없이 펼쳐진 사막에서 작전하기에 부적합했다. 돌파력이 모자랐고 부대 마모에 따른 역습에도 취약했다.

반면 독일군은 모든 부대의 기계화 수준이 완벽했기 때문에 전선을 잡고 흔들고 집요하게 뚫고 다니는 것은 물론 오랫동안 교전할 능력도 갖췄다.

그래도 완전 망하리란 법은 없는지 이탈리아군의 에이스 아리에테 기갑사단과 트리에스테 차량화사단은 웬만한 네임드 사단만큼의 전투력으로 아프리카군단의 전과 확대에 기여했다.

한 술 더 떠서 싸워서 이기기 위해선 병력 증원과 보급이 필요하다. 롬멜은 이 문제를 이탈리아 해군의 수송선에 의존했는데 문제는 수송선단이 지나갈 지중해 항로를 영국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영국군이 열심히 수송선을 공격했기 때문에 1942년 말에는 수송선으로 물자를 운반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 침몰했기 때문.

그래서 독일 공군은 안 그래도 모자란 항공전력을 긁어서 항공기 보급을 해 줬는데 이마저도 제공권이 털리고 수송기가 격추당하기 시작하면서 독일군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7]

토브룩 전투[편집]

1941년 6월 이후. 영국군의 중동 사령관이 웨이벌 장군에서 오친렉 장군으로 교체된다. 우선 이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1941년 4월 10일. 롬멜은 토브룩의 항구를 공격하다 실패했다. 자신만만해진 웨이벌은 5월에 브레버티라는 작전명의 공격을 했다가 털렸다. 불굴의 사나이 웨이벌은 권토중래하여 영국 본토에서 신형 전차를 300대나 가져와서 배틀액스 작전을 개시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털린다.

이 승패는 사막전의 이해도가 승패를 갈랐는데 강력한 영국군의 기갑부대는 독일군을 찾아내서 기갑전으로 끌고가려 했지만, 천재 롬멜은 기갑전을 붙어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독일군은 잘 엄폐된 참호에서 다가오는 전차를 향해 88mm포를 발사했다. 영국군이 포격을 맞고 우왕좌왕하면 독일군 전차부대가 투입되어 상황을 정리했다.

사실 영국군은 88mm대공포보다 쪼끔 더 쌘 93mm 고속대공포를 가지고 있었지만 창의력 부족과 공군,육군이 사이가 나쁘다는 악재가 겹쳐서 써먹지를 못 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패장 웨이벌은 오친렉 장군에게 자리를 내줬다.

영국 본토에선 오친렉에게 토브룩의 독일군 포위를 풀라고 지시했다.

7월에 롬멜이 대장으로 승진했고 8월엔 아프리카군단이 아프리카 기갑집단으로 격상됐다. 그리고 그에 따라 병력과 물자가 증원됐다.

어쨌든 토브룩은 요충지였다. 독일군이 토브룩 항을 점령한다면 벵가지에서 도로를 타고 수 백km를 이동할 필요 없이 바로바로 물자 보급이 가능했다.

영국군은 독일군의 울트라 암호를 해독하여 토브룩 공세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11월 17일 독일군 참모는 영국군의 무선침묵을 롬멜에게 보고했다. 영국군이 곧 공격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롬멜은 이 보고를 무시했다.

다음 날 커닝엄 중장의 영국 제8 군이 토브룩 구원에 나섰다. 영국군은 독일군 기갑부대를 정리할 목적으로 넓게 퍼져 사막을 건넜다. 다음 날 영국군은 시디 레제흐에 있는 비행장을 점령하는 승리를 거뒀다.

롬멜은 토브룩 공격을 포기했지만 대신 제8 군을 공격했다. 11월 23일까지 양측 기갑부대는 시디 레제흐 앞에 펼쳐진 개활지에서 대규모 기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전선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양측 사령부와 보급부대, 예비대가 모두 난전에 섞였다.

11월 24일 롬멜은 해안도로를 따라 공격중인 영국군을 정면에서 막지 않고 영국군을 우회하여 후방에서 공격하면서 이집트 국경 쪽으로 향했다.

훌륭한 기동전술이었지만 이 때문에 롬멜은 며칠간 사령부와 연락이 끊겼다.

반면 영국군 본진엔 8군 사령관 커닝엄 중장이 귀환했는데 오친렉 장군은 겨우 죽다 살아나 몸만 보전한 커닝엄을 짜르고 참모장인 리치 중장을 8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결과적으로 롬멜의 이집트 국경지역 돌진은 영국군 주공 후방에 고립된 소규모 독일 부대를 구하는데 실패했다. 이는 성급한 판단과 눈 앞의 싸움만 본 근시안적인 태도가 불러온 실책이다.

독일 사령부는 제21 기갑사단에게 귀환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정작 지휘관인 롬멜은 전장에서 싸우느라 연락이 두절된 채였다.

반쪽짜리 승리[편집]

롬멜은 결국 패배를 인정하고 가잘라 방면으로 후퇴했지만 방어선이 없었기 때문에 시르데 만까지 후퇴했다. 진격하는 연합군은 엘 아게일라에서 크루세이더 작전으로 독일군을 끝내려 했으나 기상 악화와 바닥을 치는 사기 때문에 작전이 실패했다.

9개월 전하고 상황이 비슷해졌다. 영국군은 교전에서 이겼지만 계속된 진격으로 전열이 흐트러졌고 독일군은 자기 영토로 물러났다.[8]

롬멜의 토브룩 점령[편집]

1942년이 되면서 추축군과 연합군 모두 신형 전차를 수령했다. 롬멜은 남부지역 사령관인 케셀링 원수에게 부탁해서 4호전차 F2 모델을 받을 수 있었다. 반면 영국군은 M3를 받았다. 4호F2는 숫자는 적었지만 성능으로 밀어붙여서 맹활약할 수 있었다.

1942년 1월 21일 추축군은 영국군을 기습했고 영국군은 런했다.

2월 21일 롬멜은 토브룩에서 56 km 떨어진 곳까지 진입했다.

이 공으로 아프리카 기갑집단이 아프리카 기갑군으로 승격됐다.

전차의 성능 외에도 독일군이 승리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 있었다. 그건 바로 지휘체계.

아프리카 기갑군은 이탈리아 사령부와 남서부 육군사령부에서 차출한 병력들을 교집합처럼 모아둔 부대여서 시어머니가 둘인 당나라 군대였다. 하지만 롬멜은 자기 위의 지휘체계를 싹 쌩까고 자기 맘대로 병력을 굴려댔다. 반면 영국군은 휘하 부대를 통솔하고 작전을 결정할 배짱을 가진 장군이 없었다.

이 불안한 지휘체계는 토브룩 공격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났다. 영국군은 요새를 겹겹이 쌓아 사주방어진지를 만들어뒀었는데 상식적으로 전 병력을 요새에 집결시켜 유리한 위치만을 선점하고 공격을 퍼부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 했고 기갑사단 전력이 요새의 사방에 마구 흩어져 배치됐다.

3월달에 롬멜은 히틀러를 만나 새로운 공세를 허락받았다. 롬멜은 히틀러에게 토브룩 이상으로 진격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 전술적 승리를 확대시켜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를 점령할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공세를 반드시 성공하기 위해 공군의 BF109F 전투기까지 빌려온 상황이었다.

5월 26일 롬멜은 공격을 시작했다. 첫 교전 이후 롬멜은 작전을 수정했다. 원래는 영국군 중앙을 양쪽에서 공격하고 유인하여 예비대를 끌어낼 계획이었는데 영국군 기갑부대 지휘관들이 자기 말이 맞다며 갑론을박 하는 사이 롬멜 공격이 끝났다.

하지만 기어코 롬멜은 방어선을 돌파했다. 이때 영국군은 독일군을 포위했다고 생각했다.

현실은 포위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전선이 없었다. 전차들이 한데 섞여 난교파티를 벌이는 사이 점점 독일군이 승기를 잡았다.

6월 20일 롬멜은 토브룩의 남동쪽을 공격했다. 독일군의 야포와 제2 남아프리카 사단이 남서쪽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남서쪽만 방어를 한 상태였다.

게다가 가지고 있는 지뢰 수십만발을 전부 서쪽에 묻어둬서 롬멜의 본대를 막을 수단이 전혀 없었다.

제15 기갑사단이 방어선을 돌파했고 이어서 아리에테 사단과 트리에스테 사단이 전형적인 전격전으로 영국군을 포위 섬멸했다.

결국 다음 날 여단 사령부가 항복하면서 전투가 끝났다. 독일군은 이날만 30,000명이 넘는 포로를 잡는 대승을 거뒀다.

롬멜의 전성기[편집]

토브룩 점령의 공으로 롬멜은 원수로 승진했다. 롬멜은 나일강 삼각주와 수에즈 운하를 하루빨리 손에 넣고 싶어 했다. 케셀링 원수와 메세 원수는 너무 저돌적이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롬멜은 영국군의 상태가 심각하기 때문에 탁 치면 억 하고 죽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게다가 토브룩의 군수품 집적소에 있던 어마어마한 양의 군수품을 전부 노획했기 때문에 보급도 문제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롬멜은 작전회의를 열고 상부에 승인받을 필요를 못 느꼈다. 여기에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롬멜을 지지하자 더 그랬다.

심지어 영국군은 마트루흐 남쪽에서 독일군에게 반격하려다 역관광당했다.

중동사령관 오친렉은 누구나 하던 생각을 실행했다. 제8 군 사령관 리치 중장을 짜르고 자신이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

참 찌질하게도 오친렉은 이렇게 여태까지의 모든 패전 책임을 리치 중장에게 돌렸다.

1차 엘 알라메인 전투[편집]

지상전은 독일군이 확실히 우세에 있었다. 하지만 보급이나 항공전은 달랐다. 영국군의 폭격기와 전투기는 점점 늘어났고 안 그래도 부족한 독일군이 영국군을 정면에서 막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점점 드러났다. 지상군 입장에서 무시무시한 슈투카 폭격기도 전투기한텐 상대가 안 되기 때문에 슈투카의 손실도 점점 늘어만 갔다.

6월 29일 마트루흐를 지난 추축군은 해안도로를 따라 푸카를 통과해서 엘 다브로 진격했다. 독일군은 사막길을 지나가야 했다. 이 사막길은 남쪽의 막힌 길인 카타라와 엘 알라메인의 기차역과 주위에 만들어둔 요새까지 이어져 있었다.

롬멜은 저 요새를 부수라고 지시했다. 독일군이 4주간 진격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많이 지쳐있었지만 롬멜은 이 요새를 지키는 병력이 여태껏 쳐부순 영국군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었다. 영국군은 항공전력 관리가 잘 되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온갖 폭탄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반면에 독일군은 전투기 숫자가 한참 모자랐기 때문에 간간히 요격기를 출동시킬 수 있었다.

7월 1일 제90 경사단은 집중포화를 당했고 추축군 전체가 후퇴했다. 엘 알라메인 전투는 3주간 계속됐는데 전투가 끝난 시점에서 제8 군은 추축군을 10km도 채 밀어붙이지 못 했다. 이건 사실상 영국군의 패배를 의미했다.

완전히 지치고 제공권도 없는 상대를 끊임없이 압박해서 얻은 결과가 고작 10km라니. 영국군은 좀 재편과 훈련이 필요했다. 일단 나일 강이 함락당하는 참사는 막았지만 독일군은 아직 건재했다.

영국군 상층부에서도 이 전투를 사실상 영국군이 패전했다고 판단했고 8월 초 사령부를 방문한 처칠은 오친렉을 경질하고 그 자리에 해롤드 알렉산더를 임명했다.

몽고메리의 등판[편집]

여기서 양측은 한 달간 휴식을 취했다. 양쪽 모두 재보급을 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

8월 30일에 롬멜은 알람 할파를 공격했고 새로운 상대를 만나 패배했다. 처칠이 제8 군 사령관으로 몽고메리를 임명한 것이다. 몽고메리는 이때부터 연합군이 승기를 잡은 이유가 자신 덕분이라고 말하지만 남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친렉이나 알렉산더가 지휘했어도 이겼을 것.

진짜 승리의 이유는 공군 덕분이다. 영국군이 제공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아무런 방해 없이 군수품 집적소와 사령부를 폭격할 수 있었던 것.

이때쯤 롬멜은 건강이 안 좋았다. 1년 반 넘게 이억만리 타지 사막에서 싸운 1만 7,000명이나 되는 독일군도 마찬가지였다.

두뇌와 피지컬이 모두 업그레이드된 영국군은 더 이상 예전같은 짓을 하지 않았다. 대전차포에 뛰어들어서 자살하지 않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지휘 체계가 잡히자 군대의 결속도 단단해졌다.

롬멜은 일단 동방작전을 보류했다.[9] 휴가를 받고 베를린으로 날아간 롬멜은 괴벨스의 가족과 함께 휴양했다.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편집]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는 롬멜이 베를린에서 쉬고 있을 때 벌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는 몽고메리는 참호전같이 의미없는 싸움으로 병력을 소모하는 일이 얼마나 쓰레기같은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완벽한 작전을 추구했다. 바로 공격하라는 처칠의 지시까지 무시한 몽고메리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1942년 10월 23일 몽고메리는 엄청난 전력, 완벽한 보급선, 제공권, 작전을 편성해서 독일군을 공격했다.

8일 동안 미테이리야 능선을 따라 양측이 교전했다. 롬멜급의 현장지휘가 가능한 장군이 없던 독일군은 영국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예비대를 계속 투입했다.

원래 롬멜이 쉬는 동안 슈투메 장군이 롬멜을 대신해서 북아프리카를 지휘하기로 했지만 정찰을 나갔다가 행방불명되자 롬멜은 전선에 복귀할 수 밖에 없었다.

롬멜이 신속하게 복귀했지만 이미 영국군은 승리하기 직전이었다. 독일 공군이 완패해서 상황이 더 안 좋았다. 몽고메리는 시간을 계속 벌었고 기갑부대를 정렬해 11월 2일에 추가타를 날렸다. 하지만 이때 편성된 전차 100대는 독일군에게 거의 괴멸했고 롬멜은 반격을 서두르다 본인도 기갑부대를 전부 말아먹었다.

롬멜의 반격이 끝나고 움직일 수 있는 전차는 전체 기갑전력에서 단 35대 뿐이었다.

롬멜은 이 패배로 아프리카에서 패전했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남은 병력들을 살리려면 탈출밖에 없다는 사실도.

튀니지 전투[편집]

1942년 11월. 엘 알라메인 전투가 끝난 직후 북아프리카에 새로운 적이 도착했다. 영,미 연합군의 부대가 아프리카 서쪽에 상륙한 것. 이 작전이 토치 작전인데 이 작전으로 독일군은 동서 양면으로 적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 치달았다.

1943년 1월 23일. 트리폴리에서 북아프리카의 이탈리아 부총독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그와는 별개로 2월 13일 독일군의 마지막 부대가 리비아에서 철수해 튀니지에 도착했다. 롬멜은 마레트선[10] 에 있는 방어진지로 이동했다.

롬멜이 후퇴했지만 싸움을 포기하진 않았다. 독일군은 다음 날 갓 아프리카에 도착한 미 제2 군단을 공격하기로 했다. 제2 군단 참모들은 독일군이 튀니지의 가프사를 공격하리라 예상했다. 제1 군 사령관 케네스 엔더슨 중장은 독일군의 주공을 막기 위해 가프사를 지키기보다 더 뒤에 있는 페리아나 주변 언덕을 막는 편이 효율적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명령을 내렸다.

독일군은 먼저 공격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결론내렸다. 우선 가프사를 공격하고 서쪽 언덕에 진을 친 미군을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전력이 심각하게 부족했고 롬멜과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 상급대장은 기동부대 주공 방향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

아르님은 파이드를 지나 시디 부지드를 공격할 작전을 세워뒀기 때문에 롬멜의 공세를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

미 제2 군단의 예상대로 아르님이 먼저 공격했다. 오전 6시쯤 독일군 부대는 파이드 서쪽 약 8 km 지점까지 진격했다. 미군은 사전에 약속된 포격 지원을 받지 못 했지만 독일군은 항공기로 공습을 가했다. 미군은 싸웠지만 독일군은 오전10시쯤 시디 부지드 북쪽에서 집결했다.

아르님의 성공에 자극받은 롬멜은 2월 15일 가프사를 공격했다. 아까 말했듯 앤더슨 장군은 가프사에 있던 병력을 페리아나로 옮긴 뒤였고 가프사에 남아있던 C전투단은 독일군에게 참패하고 대대급 병력을 잃고 후퇴했다.

앤더슨 장군은 C전투단이 학살당하는 동안 반격하지 않고 미군 제2 군단으로 페리아나, 알 카스라인, 스베이틀라 세 곳을 수비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다음 날 페리아나와 스베이틀라가 독일군에게 함락됐다.

이날 오후 롬멜은 가프사와 토주르를 기어코 점령하고야 말았고 아르님도 시디 부지드를 따는 데 성공했다.

이탈리아 최고사령부는 독일군에게 북쪽으로 이동해서 제5 군단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롬멜과 아르님은 이 명령에 불복했다. 아르님은 북쪽으로 이동하다 적 예비대 주력과 마주치는 불상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롬멜은 명령을 완전 무시하는 대신 자기 휘하의 부대에게 알 카스라인 고개를 점령하라고 시켰다.

알 카스라인 고개 전투[편집]

롬멜의 지시에 따라 독일군은 2월 18일 알 카스라인 고개를 정찰했고 이를 본 미군은 알 카스라인 고개가 점령당하겠구나 하고 확신했다.

다음 날 독일군은 알 카스라인 고개에 총공격을 가했다. 실전경험이 없던 미군은 집중공세를 받은 지 하루만에 수비가 무너졌다. 미군은 대부분의 보급품을 남겨둔 채 제벨 엘 함라로 후퇴했다.

공군을 부르고 싶었겠지만 날씨가 나빠 부를 수가 없었다.

21일 롬멜군은 탈라와 제벨 엘 함라로 진격했다. 영국군 제26 기갑여단이 연합군 보병 진지를 지나가는 사이에 독일군 전차가 그 상황을 기습했다. 2개 기병연대와 2개 야포 중대가 방어한 뒤에야 독일군을 막을 수 있었다. 밤10시쯤 독일군은 돌아갔고 연합군은 영국군 미군 할 것 없이 부대를 모아 재편했다.

알 카스라인 지역에서 연합군이 패퇴하기 직전같지만 롬멜은 공격을 멈췄다. 롬멜이 보기에 연합군이 큰 상처를 입어 반격이 불가능해 보이기도 했고 날씨가 너무 나빠져서 기동전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

결국 독일군은 24일 제8 군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했고 연합군은 알 카스라인 고개를 탈환했다.

교대[편집]

아르님이 독단적으로 한 짓이라 따로 적진 않지만 메데닌을 공격하다 안 그래도 없는 군대를 싹 말아먹었다.

롬멜은 메데닌 전투를 보고 이제 진짜로 북아프리카를 포기할 때가 왔다고 확신했다. 3월 9일 롬멜은 병가를 내고 무솔리니를 만났지만 무솔리니는 상황 판단이 1도 안 섰다.

다시 베를린으로 날아가 만난 히틀러는 상태가 더 심각했다. 히틀러는 철수가 아니라 연합군을 몰아낼 카사블랑카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롬멜이 댕청이들을 상대하며 시간만 버리는 사이 몽고메리는 3월 20일로 잡힌 마레트선 돌파 작전을 세웠다.

롬멜은 돌아가서 마레트선을 지키려 했지만 판단 잘 서는 육군 상층부는 롬멜이 패전하고 원수가 포로로 잡히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결국 롬멜은 베를린에 남았고 북아프리카 전선은 아르님이 맡아 싸움을 치렀다.

아르님은 싸웠지만 잘 졌다.

서부전선[편집]

동부전선엔 원수들이 넘쳐나는 관계로 딱히 롬멜이 낄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군알못인 히틀러라도 언젠간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고 서부전선 사령관 룬트슈테트 옹 옆에 B집단군을 만들어 롬멜을 임명해 주었다.

언젠가 연합군이 상륙하기 때문에 방비를 해야 했는데... 룬트옹이랑 롬멜이랑 의견이 갈렸다. 룬트옹은 기갑부대를 내륙의 요충지에 배치해서 일단 상륙시키고 기갑부대가 힘을 쓸 수 있는 지상에서 쓸어버리자는 의견이었고 롬멜은 기갑부대를 해안가 주변에 배치해서 방비를 탄탄히 해서 아에 상륙시키지 말자는 쪽이었다. 룬트옹은 이탈리아 전선에서 연합군 상륙 막아보려다 연합군 함포사격과 항공전력 때문에 피본 기억이 있었고, 롬멜은 롬멜대로 아프리카 시절 제공권을 뺏기면 전차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그런 듯. 롬멜이 주장했던데로 되서 오마하나 골드같은데 티거몇대만 있었다고 생각해봐라 연합군은 지옥을 봤을거다

둘 다 원수였기 때문에 상급부대 지휘관이 있을 리가 없었고 의견 조율은 막장으로 치달았다. 그래서 둘은 베를린으로 날아가 유일한 직장 상사인 히틀러를 만났는데 히틀러는 상태 봐서 자기가 기갑부대를 투입하고 지휘하겠다는 헛소리나 했다.[11] 사실 노르망디 털린 건 둘 중 한 사람의 책임이라기보단 히틀러 군알못 새끼 탓이 가장 컸다. 룬트옹이나 롬멜 둘 중 한명의 의견대로 방어정책을 밀었으면 우리가 아는 그 수준의 대참패는 없었을 것.

의견충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연합군의 상륙지점을 특정하고 방어를 강화하는 일이 남았는데 룬트옹은 연합군이 파드칼레에 상륙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파드칼레는 해변이 안정적이고 영국과 가깝기 때문.

하지만 롬멜은 이탈리아의 해변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노르망디를 꼽았다. 많은 희생이 따를 수 있는 상륙이니만큼 아는 곳에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오오 혜안 오오...는 개뿔이고 이번에도 아프리카 전선에서처럼 겐또찍은 것.

이번에도 둘은 히틀러에게 결정을 요구했는데 히틀러가 룬트옹 편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이번엔 변명거리가 있는게 연합군이 기만작전을 펼쳤기 때문.[12]

어쨌든 노르망디에 연합군은 상륙했다. 하지만 이 때 롬멜은 독일에서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었는데 상륙 전날까지도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설마 상륙하겠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상륙했고 집단군 참모장 한스 슈파이델 중장[13] 은 지휘 경험이 없어서 휘하 부대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고 휘하 부대들은 자신이 서부집단군인지 B집단군인지 헷갈려서 움직이지도 못 하고 제자리에서 삭제당했다.

어쨌든 롬멜은 판단 미스로 서부전선에서도 1패를 적립했고 이후 1944년 7월 17일 차 타고 가다가 공격기에게 폭격을 맞아 다친 롬멜은 일선에서 물러난다.

이후 금수저 생활을 즐기던 롬멜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있었단 소식을 듣는다.

그런데 롬멜은 자신의 참모장인 한스 슈파이델이 암살단의 일원이고 그 외에도 암살단의 멤버와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반쯤 뜬금없이 암살단으로 몰렸다.

히틀러는 롬멜에게 명예로운 자살을 강요했다. 자살하는 경우 가족들의 안전과 미래를 보장해주고 장례를 원수의 예에 맞게 국장으로 치뤄주겠지만 체포되는 경우 공개재판 후 사형당할 것이고 가족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협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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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롬멜은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다.

총평[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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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공존합니다.
그 2가지 측면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술적으로는 천재지만 전략적으로는 모자란 인물.

북아프리카에서 모자란 보급 상황에 굴하지 않고 승리를 꾸준히 따낸 것은 롬멜의 신기에 가까운 야전 지휘 능력이 있어서 가능했다. 중대규모의 전차들이 뒤섞이고 승패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당장 눈 앞의 승리를 만들고 이를 이어내는 능력 덕분에 북아프리카에서 꾸준히 성적을 낸 것이다.

그러나 당장 북아프리카 전역의 독일군이 20,000명도 채 되지 않는데도 보급이 계속 위험했다는 점. 케셀링 원수가 이를 계속 지적했고 보급로 개척을 위해 몰타를 침공할 전력을 모으고 있었는데 그걸 싹 긁어다가 북아프리카에 꼴아박았다. 그 결과 몰타기지의 영국군 항공기들과 잠수함들이 자유롭게 추축군 수송선을 공격할 수 있었고 독일군 보급이 개판이 됐다. 큰 그림 못 그리는 것도 이 정도면 능력이다.

또 자신이 직접 전투 상황을 지휘하다가 적과 마주치고 본대와 연락이 두절된 상황이 한 두번도 아니다. 무용담이나 기행 정도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수 만명의 목숨을 책임지는 사령관으로서 바람직한 일은 절대 못 된다.

정리하자면 롬멜은 토브룩 전투 승리, 엘 알라메인 전투 판정승, 튀니지 전투 대승을 거뒀는데 토브룩에서 튀니지로 가면서 상황이 시나브로 불리해져만 갔다. 오친렉은 계속 패전했고 물자를 털렸지만 보급과 제공권을 잘 관리해냈고 이를 이어받은 알렉산더도 충분히 똑똑한 장군에다가 몽고메리라는 싸움 잘 하는 장군으로 모자란 딜링을 채워서 끝내 승리한 반면 롬멜은 계속 이겼지만 보급과 제공권 관리가 하나도 안 되었기 때문에[14] 어느새 불리한 상황에 처하고 자연스럽게 힘싸움에서 진 것이다.

사막에서 벌어진 최초의 현대전 + 천재적인 전술 + 몽고메리와의 대립구도 때문에 유명해지고 명장이라는 이미지가 붙은 것이지 수십만 단위로 회전하는 동부전선에 있었다면 희대의 졸장으로 남았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특유의 대박치는 도박성 작전술로 주코프 뚝배기 터트렸을수도 있고. 어쨌던 대규모부대를 이끌만큼의 빅픽쳐드로잉 능력은 없었다.


  1. 넘치는 간지는 좋지만 장교들에게 좋은 상관은 아니었다고 한다. 반면 사병들에겐 인기폭발이었다고.
  2. 이름에 Von 들어가는
  3. 당시 독일 육군엔 준장 계급이 없었다. 번역착오 때문인데 깊게 들어갈건 없고 간단하게 그냥 장군중 제일 똥짬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4. 가장 유력한 설은 새로 창설된 공군이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게 함으로써 공군의 위신을 세워주고 싶었다~ 는 것이다.
  5. 저명한 전쟁사학자 존 키건은 히틀러가 프랑스군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된 반격없이 이렇게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지자 프랑스가 함정이나 반격을 계획중일거라 생각해 기갑부대가 개돌하다가 포위섬멸당할까 쫄아서 최전방 기갑부대와 후발 보병부대간의 간극을 메꾼후 진격하려 했을거라 평했다. 실제로 전방에서 싸워보니 프랑스가 개좆밥인걸 알았던 전선지휘관들은 기갑부대의 최대한 빠른 진격을 요구했고, 히틀러뿐만이 아니라 독일에 앉아있던 브라우히치나 할더도 진격정지를 주문했다 ㄴ 이거는 너무 큰 그림으로 봤다. 됭케르크 코앞에서의 강제 정지는 공군설이 유력함.
  6. 민족자결주의
  7. 보급과 항공기 문제로 남부지역 사령관인 케셀링 원수와 반목한 것은 아니고 롬멜이 케셀링 원수 말을 지지리도 안 들어서 반목한 것이다.
  8. 이렇게 보급 때문에 사막에선 밀고 당기기식 전투가 계속되는데 이런 전투 양상을 벵가지 핸디캡이라고 부른다
  9. 총통이 승인한 동방작전은 육군 본대가 캅카스를 통과하고 아프리카군단이 수에즈 운하를 넘어 이라크 쪽에서 만난다. 두 전력이 연결되면 독일군은 일본군을 만날 때까지 동쪽으로 진격해서 소련의 산업시설과 극동군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다. 그야말로 울펜슈타인이 일어나는 것
  10.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프랑스가 이탈리아군 견제를 위해 튀니지 남부에 세운 요새. 토치 작전 이후에 추축군이 장악했다.
  11. 우리의 잠꾸러기 좆틀러가 잘 잠 다 자고 일어나서 반격명령을 내릴 때쯤 연합군은 중장비나 전차등 대부분의 물자를 하역한 뒤였다.
  12. 항공기로 알루미늄 쪼가리를 뿌리는가 하면 파드칼레와 가까운 영국 동남부지역에 풍선, 나무판자, 폐차직전의 똥차들을 이용해 '미군 1집단군'이라는 가짜부대를 만들어서 독일정찰기들이 대규모 부대가 주둔중이라는 오판을 하게 만들었다. 또한 부하죠패다가 쫒겨난 패튼을 데려와서 이부대 사령관으로 연기를 시켜 독일군에게 보여주었다. 히틀러는 미군장군중 패튼을 최고로 치고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 페이크를 철썩같이 믿었다
  13. 이 인간은 히틀러의 암살을 모의한 검은 오케스트라단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면죄부를 받고 종전 후 석방되어 나토 유럽사령관이 된다.
  14. 프로이센 군벌귀족들 때문에 엿먹은적이 한두번도 아니면서 프로이센계 애들이 하는거랑 비슷한 짓을 했다. 지상전에만 모든 것을 집중하고 비전투요소들 개무시하다가 전쟁을 말아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