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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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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그러나 끝내<발해사> 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할 일이다. - <발해고> 서문 中 -
“내 친구 유혜풍(유득공)은 박식하고 시를 잘 지으며 과거의 일도 상세히 알고 있으므로, 이미 <이십일도회고시주>를 지어 우리나라의 볼 만한 것들을 자세히 밝혀 놓았다. 더 나아가 <발해고>를 지어 발해의 인물, 군현, 왕의 계보, 연혁을 자세히 엮어 종합해 놓았으니,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고려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한 것이다.” - 1785년 박제가가 쓴 <발해고> 서문 中 -

유득공(柳得恭, 1748 - 1807)은 조선 후기의 북학파 학자이다. 서얼 출신임에도 정조의 중용에 힘입어 3사 언관직에 준하는 관직인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명되었고 유학자로서 활동하기 보다는 주로 시인, 역사연구가로 활동하였다<ref>조선 학자들이 초기를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글짓기(사서)보다는 성리학 경전 읽기(경학)를 중시하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조선 후기에 유득공 같이 시인이나 역사연구가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17C-18C를 거치면서 조선에 학문적, 사상적 경향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ref>.

발해사를 민족사로 인식하여 최초로 남북국시대라는 말을 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생애[편집]

아래 글은 해당 링크의 내용을 본 위키러가 축약한 것이다.

유득공의 생애는 순탄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5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였고 집안의 생계가 점차 어려워지면서 7세 때 외가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러나 아들이 학문하기 좋은 여건에 있기를 바랐던 어머니의 뜻에 따라 얼마 안가 다시 서울로 상경하였고 20세 무렵부터는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홍대용 등의 북학파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이러한 북학파 실학자들과의 교류는 유득공이 역사지리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된다<ref> 참고로 이때 유득공의 어머니는 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며 아들을 공부시켰다ㅠㅠ </ref>.

27세에 소과에 급제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암울한 나날을 보내며 시를 지었는데 이때 지은 시가 약 100여구란다. 아마도 지금 공시생들이 재수 삼수를 하면서 '씨발 헬조선' 하는것과 같은 마음이었지 않았을까??

그렇게 대과를 포기하고, 역사지리 연구에 몰두하던 그에게도 한줄기 빚이 찾아들었다. 정조 라는 깨우친 임금이 등장해 서얼들을 중용하면서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용된 것이다. 이때가 1779년으로 유득공 나이 32세였다. 관직을 갖게 되면서, 유아기때부터 지속되어온 만성적 생활고를 어느정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35세 때는 잠시 강화도에 머물며 외규장각 문서들을 조사, 관리하기도 하였다<ref>사실 규장각 본연의 역할이 왕실의 서적을 관리하고 수집하는 일이었다.</ref>

37세부터는 지방관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이 시기에 규장각 검서관 생활을 하면서 연구한 것들을 바탕으로 그의 대표적 사서인 <발해고>를 저술하게 된다. 풍천부사로 부임할 무렵에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1년여간 지방관 생활을 하다가 1801년(순조 1년) 지방관직을 사임하고 저술활동에만 몰두하였고, 1807년 9월 1일에 세상을 떠났다.

역사연구와 시 짓기에 특기가 있었던 학자 답게, 유득공은 서사시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발해고> 외 그의 대표작인 <이십일도회고시>는 위만조선의 멸망 ~ 고려까지의 역사연구를 바탕으로, 도읍지의 변천에 주목하여 그에 따른 사실들을 시문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십일도회고시>는 그의 이름이 중국에도 알려지는데 기여하였다.

기타[편집]

유득공은 전 생애에 걸쳐 3번의 중국여행을 하게 된다.

1778년, 첫번째 중국여행지인 심양을 방문하여 <동국지리지><ref> 17C에 초기 실학자로 평가받는 한백겸이 쓴 역사지리지. 중국 사서에 기록된 초기 국가를 서술하였고 우리 역사지리를 치밀하게 고증하여 고대 지명을 새롭게 증명하였다. 역사지리 연구의 효시로 불린다.</ref>에서만 보던 만주 땅을 직접 밟았다. 귀국하던 도중에 개성에서 우연히 북경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박제가와 이덕무를 만났는데, 이들이 북경에 가보지 못한 유득공을 보고 "넌 북경 안가봤지? 우린 가봄 ㅎㅎ" 하고 놀리자 유득공이 "..심양이든 북경이든 압록강을 건넜으니 그게 그거야.." 하고 정신승리를 시전하였다고 한다.

놀림에 한이 맺혔는지, 1790년에는 건륭제의 80세 생일 축하 사절의 일원으로 그가 가장 가보고 싶어하던 북경을 방문하였다. 1801년에는 왕명을 받아 2차 연행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