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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당적을 이전할 때 한 선택들이 매우 천재적인 결정이었다. 1932년 2월 25일 ~ 2015년 12월 14일 (향년 83세)

대한민국 前 국회의장.

개요[편집]

이만섭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6, 7, 10, 11, 12, 14, 15, 1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제14대 국회와 제16대 국회의 전반기 국회의장 직을 지냈다.

일생[편집]

1932년 경상북도 대구부(現 대구광역시)에서 출생했다.

중딩 때 체육슨상으로 부임한 김재규와 친해진 적도 있다. 실제로 김재규가 매우 아낀 제자였다.

1958년 헝가리 혁명 때 반소반공반독재 운동을 펼치러 헝가리에 가려 했지만 아무리 반소반공운동이라도 시대적 한계 때문에 공산권에는 갈 수 없었다.

같은 해에 동아일보에 취직해서 이승만자유당 반대 운동을 벌였다. 이때 김두한과 인연을 맺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의 민정이양 문제에서 트러블이 생겨 감옥에도 다녀왔지만 이때 박정희와 친해지기도 했다고 한다. 덕분에 대한민국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에 나갔다.

이때 짬지털이 국회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횡포를 벌였다고 증언했다. 참고로 김두한이 자지철에게 맞장뜨자고 하자 자지철이 쫄아서 물러났다는 일화가 있다.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불러일으킨 사카린 밀수 사건 때 정부를 비판했다가 샘쑹의 높으신 분들에게 견제를 당했지만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3선 개헌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반대, 후 찬성으로 돌아섰다. 이때 박정희에게 김형욱이후락의 경질을 조건으로 찬성했다고 한다. 김형욱은 훗날 힘도 못쓰고 숙청당하지만 이후락은 빽이 세서 70년대 내내 이만섭 의원을 끌어내리려고 했다. 결국 7, 8대 대선에서 낙선하면서 10월 유신 이후 정치인 생활은 잠시 그만뒀다.

대한민국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서 부가가치세를 까다가 간사한 차지철이 고의로 박정희에게 잘못된 보도를 하는 바람에 쫓겨날 뻔 했지만 김계원김재규 등의 만류로 살아났다.

신군부가 집권하자 박정희 정권 때의 여야당 모두를 정치규제시키는 일이 있었지만 이만섭 의원은 다행히 피해갔다.

민주화 이후에는 1993년에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맡았고 신한국당에서 이회창이 머통 후보로 당선되자 이인제와 함께 당을 박차고 나왔다. 그런데 피닉제와 다른 것은 이분은 양심적인 정치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2000년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2002년에 국회법이 개정되어 국회의장은 무소속이 되어야 하는 원칙에 따라 최초로 의무적 무소속 국회의장이 되었다.

노무현 탄핵 사태 때는 노무현 탄핵에 찬성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의 행보가 마치 자기를 버렸던 유신정우회와 비슷해서 노무현에 대한 반감이 컸던 탓이다. 친위정당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다. 이분이 열린민주당이라는 당 꼬라지를 보면 통탄하실 것이다.

2004년에 정치를 은퇴했고 2015년 서울 서대문구의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했다.

야인시대에서[편집]

김두한을 기자 자격으로 방문하면서 김두한과 연을 맺고 국회 오물 투척 사건 직전에 사카린 밀수 사건 비판 연설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