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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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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여동생을 찾은 어떤 아저씨(지금쯤 할아버지)가 "전쟁이 얼마나 무섭다는 걸 알아야 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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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6.25 전쟁 중에서 1.4 후퇴가 많지만 그 외에도 미군정 체제, 일제강점기의 징용, 휴전 이후 금전 문제 때문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등 헬조선의 역사 때문에 생겼던 별의별 슬픈 사연이 다 나온다.

생방송의 전설로, 1983년 6월 30일 오전 10시 15분 부터 동년 11월 14일까지 총 453시간 45분 간의 연속 생방송의 긍지에 이르러서 최장 기간 생방송으로 기네스북을 찍었다. 그리고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품목도 사진자료, 생방송 녹화 원본 테이프, 사연이 적힌 피켓, 당시 PD들의 업무수첩등 다양하다.

시작[편집]

KBS에서 6.25전쟁 휴전 30주년을 기념하여 아침 방송으로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위해서 이산 가족 찾기를 몇 명 해보려고 했다. 그래서 이산가족을 찾는 광고를 했을 뿐인데...

사실 1983년 이전에도 KBS는 중궈 땅이었던 연변, 쏘오련 땅이었던 사할린의 이산가족들과도 라디오 통신을 연결해서 이산가족들 주선해주는 노력을 했다. 그중에서도 노력의 보람은 있어서 몇 식구 정도 주선 성공하긴 했지만 국내에서 조직적으로 해보자는 건 이게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연을 모았다. 모았는데, 수없이 많은 이산가족들이 생겨서 이때가 아니면 못 만나겠다고 엄청나게 많은 이산가족들이 모여들었는데, 처음엔 150명만 모아서 사연 듣고 그럴 생각이었다고 한다. 근데 눈더미처럼 불어나서 수만 명의 이산가족들이 헤어진 가족을 만나기 위해 여의도 광장에 모여들었다. 그래서 여의도 광장엔 전화번호 주소, 이름, 한자까지 다 적은 피켓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 결과 첫 계획을 대거 수정하여서 올타임 24시간 생방송으로 453시간 동안 방송을 하였고 10000명이 넘는 가족들이 재회했다.

전설적인 사연[편집]

넌 김 씨가 아니라 허 씨라고![편집]

<youtube width="480" height="240">9kk11wIkCB0</youtube>
주소

1983년 7월 5일 허현철, 허현옥 남매의 재회와 관련된 사연이다. 두 분은 전쟁통에 부모는 어디로 떠난 뒤 소식이 끊겨서 고아 아닌 고아(사실 6.25때 부모만 군머에 끌려가거나 피난 가는 도중 헤어져서 엄마, 아빠가 죽은 건 아닌데 헤어져서 고아가 된 아이들이 매우 많았다. 때문에 이 아이들은 방송 시기 성인이 되었고 전쟁 통에 헤어진 부모를 찾기 위해 이산 가족 찾기 방송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전쟁통에 자식과 헤어진 부모도 마찬가지였다)가 되었고 오빠였던 허현철 씨는 고아원에 가고 여동생 허현옥 씨는 이발소에 양녀로 입양되었다.

그렇게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허현옥 씨는 입양된 뒤 '김정애'라는 이름으로 살았다고 한다. 오빠는 어린 나이에 찾아보려고 했는데 이발사가 이사를 가버리는 바람에 포기하고 이 방송 중에 이번 기회가 아니면 절대 못 찾는다고 자동차에 TV까지 달고 여동생이 있나 눈에 쌍라이트를 키셨다고 한다.

여동생은 매우 어린 나이에 입양되어서 자기 본명도 모르고 '김정애'로 수십 년을 살다가 이때 오빠를 만나면서 자기 본명도 알게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남매가 울면서 이야기하는 동안 스태프들이 전쟁 때 피난 장면과 슬픈 음악을 세트로 곁들이니까 제작진만 아니라 당시 세트장에 있던 이산 가족 분들도 울고 시청자도 우는 진짜 눈물 바다를 만들어냈다. 이 사연으로 허씨 남매는 일약 전국구 스타가 되었다고 한다.

재회한 뒤로는 매우 행복하게 잘살고 계신다는 게 30주년 기념 방송에서 밝혀졌다.

세상은 나 혼자다[편집]

<youtube width="480" height="240">MFo4IEnojDw</youtube>
주소

1983년 8월 27일 임신우, 임돌(김광옥) 형제가 재회한 사연이다. 형제는 원래 여수가 고향이었으나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동생인 임돌 씨는 영등포의 철도 차장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가 몇 달 지나지 않아 전쟁통에 양부모와도 헤어져버렸고, 형인 임신우 씨 역시 9살 때 부모와 헤어진 상황이었다. 임돌 씨가 너무 어릴 때 양자로 가는 바람에 가족에 대한 기억은커녕 본명조차 몰라 양어머니가 지어준 김광옥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던 상황이었으나 두 형제의 얼굴이 너무 닮아있었고(동생의 얼굴이 나오자마자 형이 동생임을 확신할 정도) 형인 임신우 씨가 임돌 씨의 신체 특징(옆구리에 화상)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극적으로 재회할 수 있었다.

확인 후 형에게 부모님 안부를 물은 임돌 씨는 감정이 올라온 나머지 "'여지껏 세상은 나 혼자다.'라고 생각했다."며 흐느껴 울었고 시종일관 무뚝뚝하던 형도 그 한마디에 눈물을 흘렸다.

임돌 씨가 상봉하기 전에 낳은 아들 김대현 군은 이에 따라 임대현으로 성이 바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