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자유시 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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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두한아!! 상대는 공산당이다!!! 이 애비를 죽인 공산당이야!!

自由市慘變

1921년 6월 28일 현재 러시아 아무르 주의 스보보드니 시에서 러시아 적군과 한인 무장 독립군들 간의 분쟁 중 적군이 독립군을 포위, 학살한 사건이다.

2000년대까지는 자유시 사변(自由市事變)이라고도 했다.

배경[편집]

독립운동가들의 상황[편집]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이후 쪽본군은 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단행했지만 성과가 없자 민간인과 군인을 구별하지 않고 한인 수만 명을 집단학살하는 간도 참변을 터뜨렸다.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과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의 간도 한인무장부대들이 큰 피해을 입었다. 그들은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북쪽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 지역인 흑룡강성 미산 시에 집합했다.

그들은 미산 시에 모인 독립군 10개 이상의 부대를 통합 및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단에 통합된 조직은 다음과 같다.

  • 북로군정서
  • 대한독립군
  • 대한신민회
  • 대한국민회
  • 혼춘대한국민회
  • 군무도독부
  • 의군부
  • 혈성단
  • 야단
  • 대한정의군정사
  • 대한신민단

대한독립군단은 군단 휘하에 상급부대로 여단을 두고, 여단 아래에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병력은 3,500여 명으로 대규모 병력이 되었다.[1]

대한독립군단은 규모가 커지자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장과 피복, 군량 등 여러 지원이 더욱 절실해졌다.

빨갱이 로스케 상황[편집]

러시아 내전시베리아에서도 적군과 백군의 대립은 이어졌다. 그 중 연해주 일대에는 극동 공화국이라는 볼셰비키 괴뢰 국가가 세워졌고 체코슬로바키아 독립군이 동유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군분투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본군은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고 1918년 4월에 일본은 시베리아로 파병함과 동시에 독립무장투쟁을 하는 사회주의 독립운동 부대를 소탕하고자 했다.

이것 때문에 사회주의 독립군은 러시아 적군에 협조했다. 1920년 3월 12일에는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적군이 연합하여 일본군과 백군을 몰아내는 일까지 일어났다.[2][3]

일본군은 1920년 4월 4~5일 야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든 볼셰비키 관련 기관과 신한촌을 비롯한 한인 밀집 지대를 공격했했고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 기관과 적군이 일본군을 피해 북방으로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의 한인 무장부대도 근거지를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극동 공화국 소속 오하묵의 자유대대가 있는 극동 공화국의 스보보드니 시(자유시)로 향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 부대들은 자유시로 속속 집결하기 시작했다.

자유시로 간 대한독립군단[편집]

코민테른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사탕발림을 했고 지원이 필요한 대한독립군단은 만주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의 자유시로 향했다.

하지만 북로 군정서군의 백야 김좌진 장군님은 빨갱이들을 불신하고 다시 간도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볼셰비키는 사실 대한독립군단을 흡수시키고 백군과의 내전에 투입할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만 대한독립군단은 지원이 절실했기에 일단 연해주 이만(現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다.

극동 공화국 소속 자유대대의 오하묵은 자유시에 대한독립군단을 위한 군대 주둔지를 조만간 마련할테니 이곳으로 모이라고 했다. 1921년 겨울 동안 대한독립군단 소속 무장 독립투쟁 부대들은 자유시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러시아 적군 빨갱이들이 본심을 드러내고 우린 느그 개조센징들을 부르주아들 몰아내는 데 쓸 테니 독립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태세전환했다. 독립운동가들은 당연히 반발했지만 이미 포위되었고 얼마 후 배신자가 고려 공산당이라는 공산주의 단체로 드러났다.

다행히도 김좌진 장군은 눈치가 빨라 바로 중화민국으로 돌아왔다.[4]

독립운동 좌우 간의 통수권 갈등[편집]

자유시에 모인 한인 무장 군대는 주로 민족주의 계열의 대한독립군단과 사회주의 계열의 연해주 및 시베리아 한인 무장 세력이었다.

민족주의 우파인 대한독립군단이 되려 공산주의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는 입장이다보니 주도권은 공산주의 계열의 한인 무장 부대가 가지고 있었다. 공산주의 계열의 무장 세력은 2개로 나누어져 한인 연합부대의 통수권을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하고 있었다.

고려공산당도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갈리는데 상하이파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지했고 이르쿠츠크파는 연해주에 위치한 정부인 대한 국민 의회(1919년 3월 설치, 훗날 임시정부에 통합)를 지지했다.

한인 무장 부대들은 극동 공화국의 스보보드니 시에 왔으니 로마법을 따르라며 이르쿠츠크파의 자유대대에 편입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상하이파는 자유대대 편입을 거부하고 이를 극동 공화국 한인부에 알렸다.

당시 극동 공화국의 한인부는 대부분 상하이파 인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한국민의회나 자유대대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주도하고 한인 무장 부대를 이 밑에 두려 했지만 1921년 2월에 지휘권 행사에 실패하고 총사령관직을 사임했다. 간도에서 온 독립군들이 주축이던 대한독립군단도 자유시에서 쫓아냈다.

하지만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되었다. 자유대대는 극동 공화국의 지방수비대로 격하되어 강제로 편입되었다. 결국 한인 독립군 부대에 대한 통수권은 상하이파와 박일리아가 가지게 되었다.

그러자 자유대대를 이끌었던 이르쿠츠크파의 오하묵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이르쿠츠크에 있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서 한인무장부대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이르쿠츠크파와 오하묵의 편을 들었고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했다.

박일리아 등은 이에 맞서 한인군사위원회(전한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극동공화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921년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칼란다리쉬빌리는 자기가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임을 선포했다. 8일 박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로 들어오라고 명령했지만 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대한독립군의 홍범도와 안무의 군대는 명령에 따라 자유시로 들어갔다. 그러나 박일리아는 적군이 멋대로 만든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에 계속 저항했다.

사건[편집]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대한의용군에 접근했고 대장은 대한의용군 본부에 침입해 복종할 것을 명령했다. 대한의용군은 무장해제 명령에 불응했고, 결국 자유시수비대 29연대는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칼란다리쉬빌리의 적군과 오하묵의 자유대대가 대한의용군과 대한독립군을 강제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관총, 장갑차, 대포를 이용해 몰아부쳤다. 독립군 뒤쪽에는 강이 있어 도망가지 못해 피해를 더욱 키웠다.

독립군은 270여 명이 사살되고 31명이 익사했다. 250명은 행방불명이 됐고 970명은 포로가 되어 볼셰비키 혁명군으로 강제 편입당했다. 홍범도, 지청천도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하게 되었다.[5]

이후[편집]

걍 쉽게 말해서 고려 공산당이라는 공산당 단체끼리 권력다툼하다가 적군을 끌어들여서 비공산주의자들까지 학살당한 사건이다.

결국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자유시 참변의 책임으로 두 달 후 밀산에서 스스로 자결했다. 당시 이범석, 김홍일 등 일부 독립군은 만주에 남아 있었고 김좌진은 이만까지 갔다가 만주로 되돌아 왔기에 병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르쿠츠크로 이동한 지청천은 그곳에서 오하묵과 함께 고려혁명군을 결성하고 같은 해 10월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했지만 1922년 4월경 소련 당국이 지청천의 학교 교육방침을 문제삼아 체포되었다. 다행히도 7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고려공산당에서도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이 계속 심해졌고 결국 코민테른이 강제로 이들을 해체시킨 후 1922년 1월 극동총국 산하에 꼬르뷰로를 설치하여 한인 공산주의 세력을 모조리 단합시켰다.[6]

이때 피해를 입은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은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등을 돌렸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는 이동휘가 가담하고 있는 적기단도 적대시하였다.

각주

  1.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995년). 2020년 4월 4일에 확인. “총재는 서일(徐一), 부총재는 홍범도(洪範圖), 고문은 백순(白純)·김호익(金虎翼), 외교부장은 최진동(崔振東), 참모부장은 김좌진(金佐鎭), 참모는 이장녕(李章寧)·나중소(羅仲昭), 군사고문은 지청천(池靑天), 제1여단장은 김규식(金奎植), 참모는 박영희(朴寧熙), 제2여단장은 안무(安武), 참모는 이단승(李檀承), 제2여단 기병대장은 강필립, 중대장에는 김창환(金昌煥)·오광선(吳光鮮)·조동식(趙東植) 등을 선임하였다. 군단 휘하에 상급부대로 여단을 두고, 그 아래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병력은 3,500여 명이었다.”
  2. The destruction of Nikolayevks-on-Amur: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book review in the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Kim Young Sik, Ph.D. The Free City (Amur River – Hukgang) Incident The left-right confrontation in Korea – Its origin Association For Asian Research 11/13/2003
  4.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0년 3월 25일에 확인. “1921년 6월 2일 소련적군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는데, 이는 우리 독립군이 소련 공산당을 위하여 싸워달라는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소련 공산당을 위해 싸우라는 요구에 독립군은 항의하였으나 그들은 이미 독립군을 2증 3증으로 포위하여 무조건 수락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 때 소련군 배후에서 고려공산당(이르크츠크파)이 일을 꾸미고 있었으며, 김좌진은 이 때 이미 소련공산당의 이상한 눈치를 간파하고 극비리에 부하를 거느리고 흑룡강을 건너 중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5. "100년 전 그날, '자유시'의 급수탑은 피로 물들었다", 《뉴데일리》, 2019년 1월 30일 작성. 2020년 3월 25일 확인.
  6. 고려공산당. kr.wikipedia. wikipedia. 2020년 3월 25일에 확인. “양파의 파쟁이 극심해짐에 따라 코민테른은 화해와 통합을 권유했으나 실패하자, 1922년 12월 양파를 모두 해체시킨 후 극동총국 산하 꼬르뷰로를 설치, 통일된 공산당을 조직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