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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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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편집]

제갈량(諸葛亮)
생년월일 181년
사망일 234년
국적 후한,촉
출생지 서주(낭야)
별명 제갈공명(諸葛孔明), 충무후(忠武侯), 무향후(武鄕侯),

제갈무후(諸葛武侯), 와룡(臥龍)<ref>복룡(伏龍)이란 뜻과 같은 뜻</ref>, 천하의 기재, 제갈건담,지절, 부채도사 등등

직업 상국, 승상, 책사, 화가<ref>천하삼분지계라는 미완성의 큰 그림을 그린 화가</ref> 등등

세계 최고의 능력, 인성, 충성심 소유자<ref>능력:이거 거부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한니발,이순신 데려와라</ref><ref>인성:가까운 자라고 챙겨주지 않고, 먼 자라고 소외 시키지 않는다. 매사의 공정하고 품행이 올바르다는 정사기록 까지 있음 심지어 한나라의 권력 2인자인 상국이면서도 집엔 뽕나무 800그루와 척박한 뽕나무 심을땅 밖에 없고, 그래서 나라의 재물로 장례를 보내게 되어 황송하다고 유언을 남겼다</ref><ref>충성심: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몸을 굽혀 모든힘을 다하며 죽은후에 그만둔다. 심지어 유비유선이 능력이 부족하면 대신 나라를 다스리라고 말했는데도 유선을 따랐다</ref> 중국 삼국시대의 인물. 자는 공명(孔明). 촉한승상이자 상국으로 정사 삼국지에선 오나라의 육손과 함께 단독열전이 할애되어 있는 두명의 신하 중 하나이다. 한 사예교위 제갈풍(諸葛豐)의 후예다. 먼 후손중에 머한민국 대통령이 있다고 한다?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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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사전[편집]

부친은 제갈규로 한나라 말 연주 태산군 군승을 지냈는데 제갈량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이에 숙부인 제갈현이 제갈량 형제들을 수습하여 키웠는데 이후 제갈현이 원술에 의해 예장태수로 임명되자, 제갈량과 제갈량의 동생 제갈균을 데리고 부임했다. 때마침 한나라 조정에서 다시 주호를 에장태수로 뽑아 제갈현을 대신하게 하자 제갈현은 친분이 있던 유표의 도움으로 형주로 이전하였다.

사실 제갈량은 서주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조조서주대학살을 일으키는 바람에 제갈씨 일족도 피난을 가야만 했는데, 제갈근은 손책에게 취직해서 손책의 가신이 되었고 제갈량이 일족의 수장이 되어 일족들을 이끌고 제갈현이 있는 형주로 피난갔다. 위빠 놈들은 왜 제갈량이 그 좋은 조조를 버리고 유비 나부랭이한테 취직했는지 의아해 했을 건데 조조가 저딴 개짓을 저질렀으니 누가 제갈량이라 하더라도 조조와 불구대천이 되는 건 필연적이었다.

이때 제갈량의 일가가 채모같은 채씨가문, 괴씨가문, 황씨가문, 방씨가문같은 형주호족들과 통혼하면서 제갈량의 형주 인맥이 형성되는데 이거 가지고 제갈량의 족보가 존나 짱짱하다고 하니 제갈량 가문빨이라고 한다. 근데 시발 과거제도 없고 오직 천거제와 군공으로만 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한나라 시절은 출세하려면 결국 자기 PR 존나게 잘하고 명성 올리고 혼맥을 다져서 유력 인사에게 천거를 받아야 관직에 오를수 있는 시대였다. 괜히 날이면 날마다 허소의 집에 선비들이 엄청 길게 줄서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허소는 인물평을 전문적으로 해줬는데 여기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 그걸 들고 유력 인사에게 제출하면 즉각 천거를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게 일종의 보증 제도라서 천거 한 번 할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했다. 자기가 천거한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면 문제 일으킨 사람과 그 사람을 천거한 사람이 같이 처벌받게 되어있었다. 일례로 손견이 죽은 이후 환계는 혼자 목숨 걸고 유표에게 찾아가서 손견의 영구를 찾아왔는데 이는 손견이 환계를 효렴으로 천거했기 때문이고 환계는 이런 손견이 미치도록 고마워서 죽음을 무릅쓰고 손견의 영구를 찾아온 것이다. 물론 뼛골까지 선비(士)인 유표는 손견의 영구를 그냥 내주라 해서 비교적 쉽게 찾아오긴 했다. 게다가 후한 말기에는 거의 대부분 천거로만 관직에 올랐고 군공으로 관직에 오른 이가 장거 장순의 난을 진압한 바 있는 유비나 구성의 난, 허창의 난을 진압하고 해결사로 명성이 자자했던 손견 정도에 불과했다. 무슨 후대처럼 과거제도로 올라가는 시대가 아니었다고. 거기에 제갈가문은 근본이 서주에서 탈탈 털려 도주하고 예장군에서 도주한 떠돌이 집안이다. 형주 호족들이 이런 외부에서 굴러들어온 가문을 뭐 좋다고 무조건 하하호호하고 받아들였을거라고 생각함? 형주로 굴러들어온 제갈량 형제의 숙부 제갈현이 그만큼 사바사바를 잘했고 제갈량 장인 황승언이 그만큼 형주 제갈가문의 후계자격인 제갈량을 유망하게 보지 않았다면 성립할 수 없는 일이다. 양주로 간 제갈량의 형 제갈근이 괜히 오나라 양주 호족들의 눈치를 존나게 보면게 아들인 제갈각 새끼한테 '씨발놈아 제발 쟤네들 눈밖에 나게 나대지 마라' 한게 아니다. 그만큼 토착 호족들에게 좋게 보이지 않으면 찍히기 쉬운 굴러들어온 돌이라서 그렇다는 거다. 어쨌거나 당시 인맥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채풍에게는 1남 2녀가 있었다. 순서대로 큰채씨, 작은채씨, 채모다.
  • 큰채씨는 황승언에게 시집갔다. 슬하에 황씨라는 딸을 낳았다.
  • 존나못생긴황씨는 존나잘생긴제갈량에게 시집갔다. 제갈량이불쌍하다... 사실지가원해서간거긴하다
ㄴ 근데 사실 황씨는 그렇게까지 못생긴 건 아니다. 그냥 피부가 시커멓기만 할 뿐이었다. 당대에는 미의 기준이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 색깔이었을 뿐이다. 실제로도 하진의 여동생 하태후는 진짜 시체처럼 피부가 창백했고 키가 매우 컸다. 그래서 영제가 하태후를 황후로 삼은 것이다. 오늘날 기준으로도 마찬가지로 못생긴, 모든 시대 통털어 다 못생긴 가남풍과는 다르다.
  • 작은채씨는 유표에게 시집갔다.

여기까지만 종합해보면 채모가 제갈량의 처외삼촌 유표가 제갈량의 처이모부이다.

  • 제갈규에게는 3남 2녀가 있었다. 순서대로 제갈근, 제갈량의 큰누나, 작은누나, 제갈량, 제갈균이다.
  • 제갈근은 손권의 가신이다.
  • 큰누나는 방덕공의 아들인 방산민에게 시집갔다. 방산민과 방통이 사촌형제다.
  • 작은누나는 괴기에게 시집갔다.
  • 괴기는 괴량, 괴월 등 형주의 유력자들과 친인척이다.

하여간 제갈현이 죽고 청년이 된 제갈량은 몸소 밭이랑에서 농사지었으며, 양보음(梁父吟)이라는 노래를 부르기 좋아했다. 제갈량은 신장 8척으로 얼굴이 준수하고 영웅의 그릇이었으며 늘 자신을 제나라의 재상 관중과, 연나라의 악의에 비교했으나 당시 사람들은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 오직 친한 벗으로 지내던 기주 박릉군 출신의 최주평, 예주 영천군 출신의 서서(자 원직)들만이 그를 인정해 주었다. 참고로 위에 볼드체 친 제갈량 외모 미남-위너 인증은 정사 삼국지 쓴 진수 오피셜 인증임, 비슷하게 정사 공식 미남 참모로는 위나라의 순욱, 오나라의 주유가 있다.

삼고초려 부터 유비 황제 즉위까지[편집]

207년 유표의 객장으로 형주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고 있었던 유비는 사관을 요청한 서서를 만나보고 그를 군사에 임명하여 중하게 기용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서서가 제갈량을 와룡이라며 추천한 것을 듣게 되었다. 유비는 서서에게 제갈량을 데리고 와 달라고 요청했지만 서서는 유비 본인이 스스로 몸을 낮추어 만나야만 한다고 간언했다. 이에 유비가 제갈량의 초려를 세번 방문하여 마침내 제갈량을 만나니 이를 후세에 삼고초려라고 한다.

유비는 제갈량을 만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한실을 부흥할 수 있을지 물었고 제갈량은 손권과 동맹하고 형주익주를 얻어 국력을 닦고 중국을 침범하는 오랑캐들과 화친하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중원의 변란을 틈타 형주에선 한명의 상장으로 진군하게 하고 익주에선 유비 본인이 진천(관중)을 노려 진군하여 천하를 평정할 것을 진언하니 이 계책이 후세에 유명해진 천하삼분지계이다.

이를 듣고 유비가 마음에 들어하여 그를 신하로 삼아 중히 여기니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였는데 유비가 다독이며 공명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것과 같다하니 이들이 불평을 멈추었고 이를 후세에 수어지교(水魚之交)라고 불렀다. 이후 유표의 후계자 자리에서 멀어진 유표의 아들 유기가 목숨을 구할 계책을 얻기 원하자 제갈량이 살 방법을 알려주고 유기는 이를 따라 강하 태수가 되었다.

208년 유표가 죽고, 그 뒤를 이은 유종은 싸워보지도 않고 조조에게 항복한다. 당황한 유비는 번성에서 이 일을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피난했는데 제갈량도 동행하였다. 이때 서서도 함께 뒤따랐는데 조조가 추격해 격파하고 서서의 모친을 붙잡으니 서서가 어쩔수 없이 유비에게 작별을 고하고 조조에게로 떠났다. 이후 유비가 강하태수 유기가 머무는 하구에 도착하자 제갈량이 손권과 동맹할 것을 주장하였고 마침 손권도 유비와 동맹할 목적으로 유비에게 노숙을 보냈으므로 제갈량은 노숙과 함게 동오로 떠나 같이 손권을 설득하였다. 결국 유비와 손권은 동맹을 맺어 조조와 싸우길 결의하였다.

이후 유비와 손권 동맹군은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크게 무찔렀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뭐 동남풍을 부르고 신선노릇 난리 부르스를 쳤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여기서 외교관 노릇한게 끝이다. 연의에 안 나오는 에피소드 가운데는 주화파의 리더 장소가 의외로 제갈량을 높게 봐서 '님 유비 버리고 손권님에게 출사하는게 어떻겠음?' 라고 했는데 제갈량이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화용도에서 조조 잡으라고 한거? 그딴거 있지도 않았고 강릉 뒷치기 해서 뺏은건 연의 드립이고 실제로는 유비와 주유가 같이 싸운 이후 오나라가 유비에게 양도한 것이다. 뭐 연의가 뻥튀기를 존나게 하긴 했지만 주유의 미인계를 간파하고 유비를 말린건 어느정도 사실이다. 어쨌든 이때 유비는 형남 4군을 취했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으로 삼아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감독하며 부세를 거두어 군대의 무기와 양식을 채우게 했다. 이때 방통을 추천하고 유비한테 뒤질뻔한 장완을 구해 자기 심복으로 삼았다.

이후 유비가 익주에 들어서자 유비가 떠난 형주를 관우와 함깨 다스리면서 후방을 지켰고, 손부인유선을 데리고 동오로 떠나는 것을 막았다. 화용도에서 관우에게 기세 등등했던 연의와 달리 제갈량은 개인적으로 관우에게 쩔쩔 맨건지 마초가 항복하자 '그 새끼 어느정도임?'이라고 물은 관우에게 '님이 더 쩔고여 님하텐 안됨' 이라고 하거나 유비가 황충을 사방장군으로 임명할때 '황충이 하후연을 때려잡았긴 했지만 관우가 황충을 인정 안할텐데 관우 배려해 주시져.'라고 유비에게 간언하기도 했다. 하긴 유비군 입사 초창기에 관우, 장비에게 쪼인트까였으니 몸 사릴만도 했을것이다.

ㄴ 그럼 법정이 장비 쪼인트 깔 때 살살 달래던 건 뭐임? 아무리 법정이 익주 주요 인사였고 성격 개꼬장이던 놈이라도 주군 의형제하고 동급이냐?
ㄴ 장비 쪼인트 깐놈은 유파지 법정이 아니다. 그리고 장비는 기본적으로 사대부를 존중했는데 유파가 개꼬장부려서 나중엔 유비까지 "개새끼야 조조한테 그렇게 가고 싶냐? 니 써줄 사람은 나밖에 없어"라고 빡쳐서 화내기까지 한 사건이다. 이건 유파가 개또라이 새끼라 그런거고 장비가 사대부를 공경했고 제갈량이 특별이 유파의 재능을 아껴서 발생한 일이다.

어쨌거나 유비가 가맹관에서 유장을 공격하니, 제갈량은 장비, 조운 등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군현들을 나누어 평정하고, 유비와 함께 성도를 포위했다. 성도가 평정되자 유비는 제갈량을 군사장군으로 삼고 자신의 벼슬인 좌장군부의 일을 대행하게 했다. 이후 유비가 밖으로 출병하면 제갈량은 늘 성도를 진수하며 식량과 병사를 대었다. 그러니까 한중공방전에선 제갈량은 후방에 처박혀서 군수물자를 댄거고 실제로 한중에서 유비의 난리부르스를 도운건 황권법정이다.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이후 후한이 멸망하자 유비가 황제에 오르라는 제신들의 요구를 거부했는데 제갈량이 황제에 오를것을 권하였고 유비는 황제에 올라 제갈량을 승상 녹상서사(錄尙書事), 가절(假節)로 삼았다. 장비가 죽은 후엔 사례교위를 겸하게 했다.

223년 봄, 관우의 복수를 위해 일으켰던 이릉대전에서 패배한 유비는 영안(永安) 백제성에 머물다가 병이 깊어져 성도에 있던 제갈량을 불러 뒷일을 부탁했으며 제갈량에게 '그대의 재능이 조비의 열 배에 달하니 필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대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시고, 그가 재능 있는 인물이 아니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도록 하시오.' 라는 유언을 남기니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신하로서 헌신하여 유선에게 충성을 다할것을 맹세한다. 이에 유비는 유선에게 제갈량을 아버지처럼 여기라는 말을 남기고 승하한다.

남만 정벌과 북벌[편집]

유비가 죽은 이후 촉한은 유비의 입촉 이후 잠잠했던 크고 작은 반란에 시달렸는데 이중에선 익주 남부 여러군이 일으킨 반란의 규모가 컸다. 이에 225년 봄, 제갈량이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고 그해 가을에 모두 평정했으며 남만으로부터 군수물자가 나오니 나라가 부유하고 넉넉해졌다. 이에 군무를 다스리고 병사들에게 무예를 닦게하며 크게 군사를 일으킬 때를 기다렸다. 이때 아직 유망한 젊은 관리인 비의를 향후 장완의 후계자 감으로 점찍는다. 이후 위나라의 황제 조비가 죽은 227년에 제갈량은 마침내 북벌을 결심하고 촉한의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한중에 주둔했다. 출병에 즈음하여 상소했는데 이것이 바로 출사표(出師表)이다.

신 량은 아뢰옵니다. 선제께서 창업한 후 반도 이루시기 전에 중도에 붕어하시고, 지금 천하가 셋으로 나뉘고 익주는 피폐했으니 이는 실로 위급, 존망의 때입니다. 그러나 주위를 지키는 신하가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스런 장수가 밖에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선제의 후은을 잊지 못해 폐하께 보답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실로 임금께서 귀를 열어 널리 들으시어 선제께서 남긴 덕을 빛내고 지사들의 의기를 넓히셔야 하며, 함부로 스스로를 비루한 사람이라 낮추고 대의를 잃은 비유를 들어 총언과 간언이 들어오는 길을 막으셔서는 안 됩니다.

궁중과 관부는 모두 한 몸이니 선행을 상주고 악행을 벌함에 서로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간사하게 죄를 범한 자와 충성스럽고 착한 일을 한 자가 있다면 의당 해당 관원에 회부해 그 형벌과 상을 논하도록 하여 폐하의 공명정대한 이치를 밝혀야 하며, 사사로움에 치우쳐 안팎의 법이 서로 달라서는 안 됩니다.

시중, 시랑인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은 모두 선량하고 성실하며 뜻과 헤아림이 충성스럽고 깨끗하니, 이 때문에 선제께서 이들을 뽑아 쓰고 폐하께 남긴 것입니다. 생각건대 궁중의 일은 크건 작건 모두 이들에게 물으시고 그 연후에 시행하신다면 필시 부족한 점을 보충해 널리 보탬이 될 것입니다. 장군 상총은 성품과 행실이 맑고 공평하며 군사에도 정통해 예전에 선제께서 처음 써 보시고 유능하다고 칭찬하셨고, 이 때문에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상총을 독으로 삼으셨습니다. 생각건대 진영의 일은 모두 그에게 물으시면 필시 행진을 화목하게 하고 그 우열에 따라 사람들을 적소에 둘 것입니다.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한 것이 바로 전한이 흥성한 까닭이고, 소인을 가까이 하고 현신을 멀리한 것이 곧 후한이 기울고 무너진 까닭입니다. 선제께서 생전에 매번 신과 더불어 이 일을 논하실 때마다, 일찍이 환제, 영제 때의 어지러움을 탄식하고 통한해 하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시중, 상서, 장사, 참군은 모두 충성스럽고 선량하며 죽음으로 절의를 지킬 신하들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이들을 가까이 하고 믿으신다면 한실의 융성은 가히 날을 헤아리며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본래 무명옷을 입은 평민으로 남양에서 몸소 밭을 갈며 그럭저럭 난세에서 목숨을 보전하려 할 뿐 제후에게 이름이 알려져 등용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제께서 신을 비루하다 하지 않고 외람되게도 친히 몸을 낮추시고 신의 초가집을 세 번 찾아 당세의 일을 물으시니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를 위해 분주하게 힘쓸 것을 약속드렸습니다. 그 뒤 기울어져 뒤집히는 위험을 당하자 군이 패할 때 임무를 받아 위난 속에서 명을 받들었고 그 이래로 21년이 지났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이 삼가고 조심함을 아시고 이 때문에 붕어하실 때 신에게 큰일을 맡기셨습니다. 명을 받은 이래 밤낮으로 근심하고 탄식하며, 부탁받은 바에 힘쓰지 못해 선제의 밝음을 상하게 될까 두려워하니, 이 때문에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이제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고 병기와 갑옷 또한 넉넉하니 응당 삼군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해야 합니다. 미련하고 둔함한 재주를 다해 간악한 흉적을 물리치고 한실을 부흥해 옛 수도(즉 낙양, 장안)로 돌아가려 합니. 이것이 선제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하는 신의 직책과 본분이며, 손익을 헤아려 극력으로 충언을 올리는 것은 곽유지, 비의, 동윤의 임무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하는 일을 신에게 맡기시고, 만약 성과가 없으면 신의 죄를 다스리고 선제의 영전에 고하십시오. 만약 덕을 흥하게 하는 말이 없으면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태만함을 꾸짖어 그 허물을 분명히 드러내십시오. 또한 폐하께서는 스스로 깊이 생각하시며 바른 도리를 물으시고, 좋은 말을 살피고 받아들여 선제의 유조를 깊이 새겨 따르신다면, 신은 그 은혜에 감읍해 마지않겠습니다. 이제 먼 길을 떠나며 표를 올리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제갈량, 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1차 북벌[편집]

그리고는 출병하여 한중군 면양현에 주둔했다. 이 과정에서 맹달을 회유해서 북벌을 뚜룩치려고 하나 사마의가 재빨리 맹달을 처죽이는 바람에 실패. 228년 봄, 제갈량은 야곡도를 거쳐 미성을 취하려 한다고 일부러 소문내고 조운, 등지를 속이는 군사로 삼아 기곡을 점거하게 하여 위나라의 대장군 조진을 유인하는데 성공한다. 이 기회를 틈타 제갈량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기산을 공격했는데, 군진이 정돈되어 가지런하고, 상벌이 엄숙하며 호령이 분명하니 남안, 천수, 안정 세 군이 위나라를 배반하고 제갈량에 호응하여 관중이 진동했다.

위나라의 2대 황제 명제 조예는 이에 장안에 머물면서 진수하고 장합에게 명하여 제갈량을 막게 했다. 이에 제갈량은 요충지인 가정을 먼저 선점하여 마속에게 요충지를 지켜 장합과 싸우게 했는데 이때 주변 제장들은 오의나 위연을 보낼것을 주장했으니 제갈량이 굳이 마숙을 보내고 부장으로 왕평을 보낸다.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고 요충지를 버리고 산에 올라 장합을 상대하는 바람에 대패했으며 전후 수습도 안하고 도망가다가 잡혔다, 병신. 이 똥은 왕평이 천여명의 군사를 가지고 피똥을 싸면서 간신히 수습. 어쨋거나 제갈량은 천수군 서현의 천여 집을 뽑아 한중으로 되돌아오고 마속을 죽여 군사들에게 사죄했으며 유선에게 표를 올려 자신의 벼슬을 깎았다.<ref>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읍참마속(泣斬馬謖)이고 다른말로 휘루참마속(揮淚斬馬謖)이라고 한다 둘다 법은 예외없이 엄격하게 집행돼야 하며 그래야 법의 위엄이 선다이지만, 현대에는 슬프지만 어쩔수없이 진행한다라는 뜻으로도 쓰인다.</ref> 이에 제갈량을 우장군 행승상사로 삼았다. 이때 투항자중에 강유가 있었으니 제갈량은 휘하의 장완, 장예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유를 '양주 최고의 인재'라고 평가하며 중하게 썼다.

2,3,4차 북벌[편집]

이해 12월, 제갈량이 진창을 포위했는데 조진이 이를 학소를 보내 막았고 제갈량은 군량이 다하고 공성병기를 많이 잃어 퇴각했다. 이때 위의 장수 왕쌍(王雙)이 기병을 이끌고 제갈량을 추격하니 제갈량이 더불어 싸워 격파하고, 왕쌍을 참수했다.(2차 북벌)

바로 다음해인 229년 1월에, 제갈량이 진식을 보내 무도, 음평을 공격하고 위의 옹주자사 곽회를 격파하니 마침내 두 군을 평정하였다. 제갈량은 두군을 점령하고 저, 강의 이민족과 서로 통했으며 촉한의 방위와 위나라 진출의 교두보를 닦은 공으로 다시 승상이 되었다. (3차 북벌)

이후 230년에는 위군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위군이 별 소득 없이 불러가자 위연과 오반을 보내 위군을 다시 격파하였다. 231년 2월에, 제갈량이 다시 기산으로 출병했다. 목우(牧牛)로 군량을 운송하면서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고 가비능을 부르자 가비능이 옛 북지의 석성에 도착해 제갈량에게 호응했다. 기산 북동쪽인 상규 일대에는 보리밭이 있었는데 제갈량은 곽회와 비요의 위군과 조우해 그들을 격파하고 보리를 대거 수확했다. 그러나 보리의 손실을 우려한 사마의의 본대가 급진해 험준한 곳에 이르자, 양군은 각기 진채를 정비하며 대치했다. 이후 촉군이 기산 방향으로 돌아가자 위군이 이를 쫓아가 5월 10일 경, 노성 부근에서 사마의와 제갈량이, 기산 남부에서 장합과 왕평이 크게 싸웠는데, 노성에선 제갈량이 사마의를 막고, 기산에선 왕평장합을 격퇴했으며, 이에 위군의 두 지휘관이 퇴각하여 본진을 지켰다.

이후 이엄의 거짓보고로 군량이 다 떨어져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릴수밖에 없었는데 사마의는 제갈량을 추격하게 했고 제갈량은 장수 장합과 교전해, 활을 쏘아 장합을 죽였다. 제갈량이 돌아온 이후 이엄의 속임수가 밝혀지고 이엄은 파직되어 서민으로 강등되었다.(4차 북벌) 이건 권모술수 쩌는 사마의가 장합을 일부러 사지로 내몬거라는 떡밥이 있는데 실제로 이 전투에서 장합은 출병을 꺼려했다는 사서 기록이 있다.

4차 북벌에서는 손권의 찐따짓 때문에 실패했다. 제갈량과 손권은 둘이 동시에 위나라를 쳐들어가자고 협의했다. 제갈량이 장안 방향으로 쳐들어가는 동시에 손권이 합비 방향으로 쳐들어가는 작전계획이다. 때마침 장료가 죽은 이후인지라 손권은 나름 기회라 생각했었지만 손권은 출병하자마자 만총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결국 제갈량의 4차 북벌도 같이 실패했다.

5차 북벌 및 죽음[편집]

234년 봄, 제갈량이 대군을 모두 이끌고 야곡을 거쳐 출병했다. 유마(流馬)로 운송하며 무공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의와 위수 남쪽에서 대치했다. 이후 무공수를 넘어와 거점을 만든 촉군의 영채를 사마의가 공격했으나 제갈량이 바로 다리를 만들자 영채 공격을 멈추고 퇴각했다. 한편 제갈량은 우회기동으로 위군의 허를 찔렀으나 곽회의 기지로 인해 저지되었다. 이후 사마의가 교전에 응하지 않고 굳게 지키니 전장은 대치 국면에 접어들었다.

오장원에서 촉군은 수비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으나 위군이 교전에 응하지 않으니 촉군은 오장원에 눌러 앉는다. 평소 제갈량은 늘 군량수송 문제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함을 근심하였으므로 이에 군사를 나눠 오장원에 둔전하고 오래도록 주둔할 기초를 만들었는데 이로서 제갈량은 위수 남부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촉군의 둔전이 시작되고 경작하는 군사들이 위수 강변의 위나라 백성들과 섞여 지냈으나 백성들은 편안히 지내고 군에는 사사로움이 없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 제갈량은 사마의 진영에 여성의 복장과 장신구를 보내 도발하였는데 사마의가 분노하여 싸우기 위해 명제 조예에게 청하니 조예는 신비에게 부절을 딸려보내면서 싸우는 것을 막았다. 이에 강유가 저들이 싸우지 않으려 할 것이라 탄식하니 제갈량은 '본디 사마의는 싸울 마음이 없고 단지 황제의 지지를 받아 장수들을 진정시키려는 것'이라 평했다. 한편 사마의는 제갈량이 식소사번<ref>食小事煩, 즉 식사는 적게하고 일은 과중하다는 의미로서 당시 평균수명을 따져보아도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닌 늙은 제갈량이 과로하여 스스로 수명을 갉아먹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ref> 한다는 것을 전해 듣고는 제갈량의 몸이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 여겨 수비를 굳건히 했다. 이렇게 서로 대치한 지 백여 일이 지나 그해 9월 제갈량이 질병으로 군중에서 죽으니, 이때 나이 54세였다. 이를 후세에 추풍오장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촉군이 퇴각하자 사마의는 이를 추격하다가 퇴각을 맡던 강유가 군을 돌려 공격할 태세<ref>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외모를 본딴 나무인형을 평소 제갈량이 타고 다니던 수레에 태우고 진군시켜 사마의를 놀래키는 장면이 나온다.</ref> 를 취하니 황급히 후퇴하는데<ref>정사의 기록으론 제갈량 사후 촉군이 군을 정돈하고 퇴각하자 사람들이 사마의에게 급히 알려 사마의가 바로 추격했는데 촉군을 이끌던 강유와 양의가 북을 울리고 마치 공격할 것처럼 대응하자 추격하던 사마의가 군사를 바로 물리고 감히 촉군을 핍박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 이에 촉군이 죄다 후퇴한 뒤에야 후퇴한 촉군의 영채를 살펴보았다고 나온다.</ref> 이런 모습은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내좆았다는 의미로 사공명주생중달이라는 고사성어로 남게 된다. 이후 사마의는 후퇴한 촉군의 영루와 처소를 둘러보고 말했다, "천하의 기재(奇才)로다!" 이후 사마의는 촉군의 영채에서 많은 책서와 양곡을 노획한다.

사후[편집]

제갈량은 한중 정군산에 매장하도록 유언했는데, 산에 의지해 분묘를 만들고 무덤은 관이 들어갈 정도로만 하며,평상복으로 염하고 기물을 쓰지 말도록 했다. 유선은 충무후(忠武侯)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제갈량이 죽기전에 표를 올려 "성도에 뽕나무 8백 그루가 있고 메마른 땅 열다섯 경이 있으니 자제들이 입고 먹기에는 스스로 넉넉합니다. 신이 밖에서 임무를 받들 때는 따로 조달할 것 없이 제 한 몸의 먹고 입는 것은 모두 관부에 의지했으므로 따로 생활의 방도를 차려 적은 양을 보태지는 않았습니다. 신이 죽었을 때 안으로 여분의 비단이나 밖으로 남은 재산이 있어 폐하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죽은 뒤에 보니 그 말과 같았다. 제갈량 가문은 이후에도 존나게 잘나가서 제갈첨이 유선의 부마가 되기도 했으나 촉이 망할때 위군 막으러 싸웠다가 뒤졌다. 언 놈이 삽질햇다고 하는데 중과부적 상태에서 한 번은 격퇴했는데 그게 삽질?

제갈량 사후에도 사천 지역 사람들은 제갈량을 수백 년 넘게 공경했는데, 각지에 세워진 제갈량 사당은 물론이고 제갈량 서거 당시 그를 추모하기 위해 머리에 흰 띠를 둘렀던 것을 대가 바뀌어서도 벗지 않아 나중엔 이게 사천 사람들 특색으로 굳어지게 됐을 정도다.

제갈량의 평가[편집]

진수, 배송지의 평[편집]

평한다. 제갈량은 상국(相國)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예법의 본보기를 보이고, 관직을 간략히 하여 임시 제도에 따르고, 성심을 열어 공도를 베풀었다. 충성을 다하고 보탬이 된 자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주고, 법을 어기고 태만한 자는 비록 친한 자라도 반드시 벌주었다. 죄를 인정하고 실토한 자는 비록 중죄라도 반드시 풀어주고, 헛된 말로 교묘히 꾸미는 자는 비록 가벼운 죄라도 반드시 죽였다. 선행이 작다 하여 상주지 않는 일이 없고, 악행이 작다 하여 문책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모든 일을 정련히 하여 그 근본을 다스리고,명분과 실질이 서로 부합하게 했다으며 헛된 것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마침내 나라 안 모든 이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경애하고, 비록 형정이 준엄했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그 마음 씀이 공평하며 권하고 경계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가히 다스림을 아는 빼어난 인재로 관중, 소하의 버금가는 짝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응변의 장략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던 것 같다.

 
— 진수, 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만약 중화(中華)를 거닐며 그 뛰어난 재주를 펼쳤다면, 중화에 선비가 많다고 하여 어찌 가리고 막혔겠는가! 위나라에 몸을 맡겨 그 기량과 재능을 펼쳤다면 실로 진장문(진군)이나 사마중달(사마의)도 능히 서로 대등하게 겨루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그 나머지 무리들이겠는가!"

 
— 배송지, 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주석

제갈량의 대한 평으로는 비판점 없이 거의 칭찬일색이라는 점이 놀라운 점이다 순욱,주유 같은 자들도 크게 단점을 부각하는 평이 많은데 제갈량은 웬만하면 단점이 나오지 않는다. 제갈량을 낮출때는 주원장이 자기 개국공신인 유기를 좀 변호 할때 제갈량이 통일 못 했다는 이유를 콕 집어서 이야기 한다

또 항우의 모사 였던 범증은 주인을 잘 못 골랐다고 비판 받고 평가절하 당할 때 제갈량은 당시 약했던 유비를 황제까지 오르게 한 공로를 인정한다

제갈량이 관중,악의,장량,소하보다 나은 이유는 이미 기타 항목 맨밑에 누가 써 놨으니 참고 , 간단히 말해서는 충성심, 내정 능력, 정치 능력, 인재의 쓰임, 군사 능력,대세를 보는 능력, 큰 그림 등을 종합 하면 낫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비교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관중,악의는 자신의 주군을 춘추오패로 만들었고, 장량과 소하는 통일제국을 만든 것에 비해 제갈량은 비교적 약소국인 촉한을 세운 일등공신이다. 하지만 위에 배송지의 평에도 나와 있듯이 제갈량을 약소국에 승상이라해도 무시 하면 안된다.

ㄴ애초에 진수가 말한 통일 관련한 평도 '제갈량 클라스는 관중, 장량, 소하 등 당대 먼치킨들 뺨칠 정도였지만 한신 급의 개쩌는 명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하늘의 뜻이 그런거면 사람이라고 별 수 있었겠나' 라 전혀 폄하할 거리가 안된다.

오히려 제갈량이 관중,악의,장량,소하 랑 비교되는 것부터 제갈량이 어째서 위대하냐에 좋은 근거가 된다.

제갈량의 능력 정리[편집]

충성심[편집]

제갈량은 논할때 빠져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것<ref>만약 빠져 있으면 그 평가는 잘못된 평가일 가능성이 높다</ref>

자신의 초려의 세번이나 찾아온 선주평생의 소원을 위하여서 수많은 유혹을 던지고 출사표를 올려 숙적인 조위를 친다 라는,

드라마틱한 인생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내인 제갈량

유비는 죽기 직전 유선이 무능 하면 대신 나라를 다스리라라는 말을 하였다

이말이 무슨 뜻인가 다시 생각해보면 제갈량에게 황제의 자리를 맡기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다

하지만 제갈량은 이런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선을 황제에 오르게 하였고 자신은 유비의 말대로 상국에 올랐다

제갈량 그가 쓴 출사표는 명문이라 할정도로 문장력이 뛰어나지만 가장 뛰어난 점은 그 글에서 느껴지는 제갈량의 심정에 있다

내정능력[편집]

제갈량의 업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분

이릉대전으로 싹갈린 촉의 국력을 적어도 조위를 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었다.

인선에 관해[편집]

이릉대전으로 인해 갈린 촉의 인재들을 보충하기 위해 직접 인재들을 찾아다니거나 중용 하였다.

이시기에 장완,비의는 물론 동궐,양완 등 좌천된 자들을 포함해 인성이 좋지 않아도 능력이 뛰어나면 중용하여서 촉의 내정에 힘쓰게 하거나 마충,장억 등을 파견해 민심을 달래게 하고, 유파에게는 화폐를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북벌 중에는 마속,이엄 제외하고는 언제나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여 불리한 싸움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힘쓰고,

위연양의가 계속 다투자 달래기 위하여 애를 썼다<ref>둘다 모두 능력이 뛰어나지만 성격이 안좋아 후에 비참한 결말을 맡게 된다</ref>

다만 제갈량에 탓이라기엔 뭐한게 황제 다음가는 상국에 말을 안듣고 계속 싸우는 거면 좌천되도 무방한것인데 제갈량은 끝까지 감싸주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에도 불구하고 촉은 인재가 부족하였고, 결국 필요한 요충지에 장서,마막 같은 졸장 중에 졸장이 들어가고 말았다.

논평 하자면 인선 방식은 뛰어났으나 그것을 뒷 바침해줄을 인재가 없었다

농업,상업,공업에 관해[편집]

당시 최고의 먼치킨 농업 시설 도강언을 보수하여 효과를 극대화 시키고, 촉에게 하늘의 창고라는 별명을 안겨다 주었다.

상업에 관해서는 앞서 서술했듯이 유파에게 화폐를 만들라 시키면서도 비단을 만들어서 돈을 충당하였고,

대장장이 포원을 시켜 검을 만들거나 소금(광염)을 채광하는 등 온갖 할만한 것들은 죄다 손 보았다.

이런 방식은 망해가던 촉을 5년만에 중흥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정치에 관하여[편집]

대채적으로 법 중심의 정치를 펼침(훗날 법가 제갈량설이라는 것에 근거가 됨)

아무리 뛰어난 인재여도 잘못하면 눈물을 머금고 좌천 시키거나 집에 보내버리거나 처형

ㄴ 길목지키라니 산으로 올라간 새끼가 뛰어난 인재인지는 아리송하지만

가까운 사람이여도 잘못한게 있으면 처벌, 먼 사람이여도 최대한 억울함이 없도록 판결을 내리면서도

원래는 황제인 유선이 해야할 일 하지만 능력이 부족하니 제갈량이 대신 하였다.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과로사 크리...

하지만 그에 정치는 기록이 별로 없는 촉이여서 대부분이 남지않고 다른 사람의 평가 같은 곳에서나 언급이 된다.

군재(軍才)[편집]

작성자 개인의 생각으로는 저평가 되는 부분

참모로써[편집]

남만 반란이 일어나자 직접 남정하여 반란을 제압하고 맹획을 탄복하게 만들었다. 칠종칠금은 정사기록이니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북벌 직전 치밀한 사전공작으로 맹달을 반란을 부추기나 실패하지만, 군을 일으키니 말그대로 조위를 경천동지 시켰다.

그리고 갖가지 전략을 세우면서 공성계(空城計)를 사용하여 사마의를 속게 하거나, 왠만한 촉에 전술 전략은 제갈량이 다 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ㄴ 공성계는 정사가 아니라 연의에만 나오는 거 아님?

ㄴㄴ 정사 출신 기록 다만 현실성 없다고 까는데 전혀 현실성 없는 일도 하는 사람인데 뭘 못하겠음?

ㄴ 가장 허황되보이는 팔진도도 기록에 있드라

촉을 만들어낸 천하삼분지계가 제갈량 작품이니 말 다했다.

사령관으로써[편집]

학소와의 싸움을 제외하고는 거의 진 적인 없다 모두다 후퇴 한 것뿐 물론 북벌을 실패 하엿지만 그 과정은 꽤나 서술이 갈리는 부분이 있다.

4차북벌 노성 전투에 싸움에서는 위연과 같이 사마의와 맞 부딪혔다는 데 한쪽에서는 제갈량의 대승 다른 한쪽은 사마의의 대승이였다.

하지만 후에 위연이 승격된 걸로 보아 노성 전투는 이긴 것이 맞다는 결론이 나온다<ref>제갈량은 1차북벌을 진 책임을 물어서 자신을 포함한 거의 모든 참전 장수를 1단계 강등 시키고, 승상에서 내려온다 , 다만 왕평은 마속에 군대를 수습한 공로를 인정 받아 관직이 높아졌다 그렇담 위연도 어디선가 이겼다는 것인데 그것은 노성전투의 승리를 반증한다</ref>

원래 4차 북벌은 알고 보면 손권 때문에 망한 거다. 제갈량과 손권이 양쪽에서 동시에 북상하기로 합을 맞췄는데 제갈량은 잘 하고 있었지만 손권 이놈생퀴가 만총에게 가자마자 바로 쳐발려버렸다.

제갈량은 충분히 군공을 올렸음에도 양동작전으로 계획된 4차 북벌이었던 탓에 손권이 망해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략에 대해서[편집]

언제나 정공법을 택하는 등 답답한 모습도 보이지만,

오히려 다른 묘책을 썼다가는 수적으로 불리하거나 패하거나 사마의,곽회,장합 등 답이 안나오는 이 트리오를 뚫지 못하는 경우가 나올 수 있다.

형주를 친다는 것은 더 말이 안되는게 알다시피 형주를 친다는 것은 오나라와 척을 지겠다는 것인데 촉은 혼자서 오와 조위에 공격을 버텨 내야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임기응변에 대하여[편집]

후퇴 도중에도 적 최고 에이스인 장합 사살, 마속이 뚫리니까 공성계 사용, 사마의가 존버 하자 2중3중으로 속이는 계략을 씀(근데 곽회가 알아챔...)

사실 임기응변이 약간 부족해 보이는 거지 부족한 것이 아니다

우선 상대부터 보면 사마의,곽회,장합,하후현,학소 등 기라성 같은 존버장인과 병법의 달인들이다.

전쟁에서 임기응변의 수란 예끼치 못한 상황이 나와서 원래 하려던 계획을 대신 사용하는 것인데,

예끼치 못한 상황은 앞서 말했듯이마속,이엄 이 두 상황에서 나오고 그것을 위에 결과로 피해를 최대한 줄였다.


진에 관하여[편집]

연의에서는 알다시피 변형 팔문금쇄진으로 사마의를 고통받게 하고, 팔진도를 사용하여 육손을 두렵게 만들었다.

물론 저런 일은 정사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꽤나 혁신적인 진법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팔진도라는 것은 제갈량 꺼가 가장 유명하지만 손자병법을 쓴 손자 같은 자들도 쓴 것이 확인 되었다.

다만 후에 이건 손자나 오자<ref>춘추전국시대 유명한 병법가 오자병법 저술</ref> 의 것과는 다르다라는 말을 한것으로 보아서 새롭게 만든 진법일 것이다.

대충 상산의 뱀같은 형태로 쉽게 말하면 공격받은 곳을 양쪽 군사들이 도와줘서 공격한다는 것인데, 말만 들으면 전쟁에서는 그정도는 해야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유기적으로 움직이면서 공격 받는 부분을 방어한다는 것은 쉬이 할일이 아니고 충분한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여러 작품에서 제갈량이란[편집]

워낙 인기스타이다 보니 여러가지 2차 창작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편집]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현재의 제갈량의 모습의 원본을 만들었다고 과언이 아닐정도로 유명하고 보편적인 제갈량의 모습을 완성시켰다.

제갈량의 죽음 장면에서는 60권 통틀어서 손에 꼽히는 명장면 중 하나


창천항로[편집]

창천항로는 특이한데 제갈량이 신선으로 나오고 후에 인간미를 더해서 나온다. 꽤나 제갈량을 잘 표현했지만 작가가 조조빠였다 보니 의도적인 너프를 받은 모습이 보인다

고우영 삼국지[편집]

특이하게 제갈량이 보추로 나온다. 누가 여자로 나왔다고 했는데 여자가 아니라 미소년으로 나온다. 만화안본 티내노?

참고로 고나우게이를 신경쓰다 못해 간접적으로 죽일 생각까지 했던 음모론은 이 양반 삼국지에서 처음 소개되어 헬조선 제갈량 관우 관계형성에 일조했다.

이때 독자들이 이 제갈량 캐릭터가 달려있다는게 맘에 안들었는지 현대에 나온 삼국전투기에선 아예 왕찌찌 미녀로 나온다.

이름도 제갈"양"

삼국전투기[편집]

삼국전투기는 작성자가 인정하는 최악의 제갈량을 표현한 작품

간단히 서술하면 제갈량 유언이 다시는 북벌을 논하지 마라 이다

ㄴ 시발 북벌 실질적 목적이 존버타다간 스노우볼 못막을테니 그전에 치고들어가자는건데

그걸 부정하면 그냥 항복해라라는거밖에 더되나

신삼국 등 기타 드라마에서[편집]

영원한 우리의 왕랑과의 명장면과 제갈건담에 짤과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라는 희대의 명짤을 배출해낸 드라마들

꽤나 재밌으니 한번 보아라

재해석도 많지만 왠만한 것은 걸러라 왜냐고? 재해석이란것은 현대의 관점으로 본것 뿐 당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안그럼 왜 재해석이 생기겠나? 정설이 아니면 왠만한 건 걸러라

ㄴ어차피 베이스인 연의부터가 소설인데 재해석해서 재밌게만들면 좋은거지 뭘 또 거르냐 이걸로 역사공부하는것도 아니고

ㄴ 문제는 역덕이 아닌 한 소설이나 창작물과 실제 역사의 차이를 구분하는 대중은 극소수라는 거다. 당장 삼국지 관련해서도 정사와 연의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코에이 삼국지 에서[편집]

전통적으로 지력 100인 최고치를 달고 나오고 다른 장수는 없다는 능력은 줄줄이 달고나오는 사기캐로 나온다 간간히 나오는 이벤트는 볼만하다.

스텟을 보자면 무력만 하빨이로 나오고 나머지는 전부 100이거나 90대 중후반 이상으로 찍혀 나온다.

게다가 시리즈 대대로 제갈량이 하는 조언은 100% 정답이다. 다른 군사들은 어쩌다 틀리기도 하지만 제갈량은 절대 안 틀린다.

삼3에서는 얼굴에 지력+15 보정이 붙어있다. 그래서 실제 지력은 100이 아니라 115이다. 손자병법이나 둔갑천서나 이런저런 잡다한 서적을 붙이면 지력 130을 볼 수 있다.

삼11에선 신산이라는 개사기 특기를 가지고 나온다. 책략이 무조건 크리티컬로 반드시 명중하고 자신은 책략에 면역.

삼12에선 팔진도라는 고무의 책과 복병의 책을 합친 개사기 전법을 들고 나온다.

토탈 워: 삼국 에서[편집]

역시 삼국지 최고의 유명인이라고 유비, 조조, 손권, 여포, 사마의, 유총과 함께 스탯 보너스 80짜리로 배정되었다.

그런데 출연운은 억수로 없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천명이건 군웅할거건 배신당한 천하건 갈라진 운명이건 재야 인물로 아예 나온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게 무조건 제갈량이 있는게 아니고 이벤트로 등장하는거라 제갈량을 한평생 못보고 플레이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제갈량의 부정적 평가의 관해서[편집]

일단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제갈량의 평가는 매우 희한한 형태인데, 까는 사람은 있는데 그것이 깔 만 한 근거가 아니다

또 보통 인터넷상에서 제갈량을 까는 놈들치곤 정신병 아닌 놈이 없다

밑에 어떤 사람이 똥을 싸지른것 만 봐도 궤변투성이 지만, 이럼 안믿을 거 같아서 몇가지 사례를 갖고 왔다

습착치 평[편집]

먼저 제갈량 후대의 명사 습착치의 평 요약

인재가 부족한데도 마속을 처형한것은 올바르지 아니하다

이것은 마속이 지은 죄가 보통이 아니란 것을 모르고 한평이나 다름없다

마속은 상관말 안들음+부하말 안들음+탈영+참패+뒷수습 안함+망명시도 인 군인이 저지를 최악의 그랜드슬램이였다

이런 죄를 공정하게 하지않으면 분명히 기강이 흔들릴 것이였다

유비도 유언할 때 마속에게는 큰일을 시키지마라고 했다. 이걸 잊은건지 안 들은건지 제갈량은 마속을 썼다가 가정을 빼앗기고 만다.

손성 평[편집]

명사 손성은 다음과 같은 평을 내렸다

제갈량은 공신 법정의 짓을 법으로 다스리지 않았는데 어찌 공정하다 하겠나?

여기서는 법정의 위치를 잘 못 이해한 평이였다

법정은 방통이 죽은 후 제갈량 다음가는 참모였다 게다가 촉한의 법인 촉과를 제갈량과 같이 만든 자였는데 다시 말해서 제갈량과 같이 유비의 총애를 받는 자였다

법정의 일을 처리할 자는 제갈량이 아니라 유비인 셈이다

당태종 평[편집]

사실 부정적이라 하기엔 뭣 하지만 당태종은 자신의 재상인 위징을 변호(?)하기위해 제갈량을 낮춘적이 있다

다만 또다른 명신인 잠문본의 말의 궁색한 변명만 한다....

결론[편집]

깔 상댈 보고 까자 결국 저 세사람도 후대에 명신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고금을 통틀어 가장 존경받는 신하이자 재상이자 충의 상징을 까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 할 수있다

+이순신도 자신의 능력은 제갈량에게 못 미친다는 말을 하였다

제갈량에 대한 이모저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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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모습은 초한지로 치면 한신보다는 소하에 가까운 포지션이었다. 그러나 능력으로 따지면 한신이나 소하는 커녕 종리말과 동급에 불과했다...는 되도않게 어디서 주워들은 소리 지껄이는 위빠들 망상이고 보통은 진수가 말한 대로 소하나 관중과 많이 비교된다.

유방의 한나라도 촉지방에서 비롯된 세력이긴 했는데 인재면에서 초나라보다 확실히 낫고, 군정과 내정이 확실히 분권됐었던 한과 다르게 제갈량은 내정과 군정을 혼자 다 해야했다. 라이벌인 사마의가 국방부 장관 노릇만 하면 됐다면 이 양반은 국무총리, 경제부총리, 외교부 장관, 국방부 장관을 동시에 해먹었다. 소하, 장량, 한신의 역할을 한몸에 하려다가 몸에 탈이나서 일찍 죽는다.

  • 대부분의 헬조선산 삼국지연의 작품들은 착한 유비와 제갈양 짱짱맨 스토리라 제갈양이 죽고나면 조루가 되는 특성이 있다...고 삼알못이 지껄였는데 개소리다. 애초에 나관중 삼국지부터 제갈량 죽고 나서 분량을 확 줄여버렸다.
  • 애초에 제갈량 죽은게 삼국지 역사에서 딱 절반분량인데 그거 확 줄여버린게 나관중인거 생각해보면 이놈을 먼저 까야 하는게 마땅하다...라고 하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좀 진지하게 다시 설명하자면 헬조선판 삼국연의는 아예 제갈량 사후 짤라먹거나 대충 짤라 먹는 작품이 존나 많다. 나관중은 제갈량 사후에 중요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어 대면서 한 2권 분량 정도는 뽑아냈다. 이건 나관중 삼국지 옮긴 황석영 삼국지 보면 알 수 있으니까 참고.

이후를 제대로 다룬 삼국지로는 쥐훈의 삼국전투기 등이 있다.

ㄴ 근데 쥐훈도 엄밀히는 끝까지 다루엇을 뿐이지 각 사건들을 좆문가식 서술로 개판쳐놓은 점에선 조루 엔딩보다 낫다고 하긴 그렇다.

ㄴ 최훈도 지 조때로 개판친건 있지만 그래도 XXX보단 낫지, XXX은 연의 삼국지 쓰면서 정사를 가장한 좆소리 늘어놓고도 아직도 30년째 오류 수정안하고 날로 인세 처 먹는데. 적어도 쥐훈 새끼는 정사 인용하면서 지가 실수했으면 사과라도 함.

원담 폐적당한 일 팩트 들이대도 끝끝내 인정하지 않고 아몰랑 거리던 게 제대로 된 태도였던가? 그거 말고도 지 생각하고 어긋나면 정사고 나발이고 인정 안 하고 생깐 게 좀 있음.

요상한 모자와 깃털부채, 지력백(휠체어 비슷한거), 그리고 레이저포가 트레이드 마크다.

ㄴ 이건 사마의가 보고 간지쩐다고 감탄해서 오피셜패션이다.

ㄴ 그 모자 조선시대까지 썼다.다만 말총이 재료임

디시의 화폐 만두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제갈량이 남만 정벌을 끝내고 어느 강을 건너려는데 갑자기 풍랑이 심하게 불어 건널 수 없었다. 그래서 현지인들에게 물어보니 49명의 머리를 베어 그걸 제물로 바쳐야 풍랑이 잦아들거라고 했다. 그러자 제갈량은 정벌하면서 이미 여러명을 죽였는데 다 끝난 마당에 또 죽일 수는 없다고 해서 밀가루피에 고기속을 넣어 가짜머리를 만들어 제물로 바치니 풍랑이 잦아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만두의 기원이라 한다.

제갈량의 직계 후손인 제갈재기(1983년~)는 중국의 모델로 키 173cm나 된다. 그녀는 홍콩의 이름난 재벌에게 시집가서 엄청 금수저가 되었다.

기타[편집]

제갈량이 까여야 하는 이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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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이 이엄, 요립, 유봉, 뭐 이런 새끼들 안 쓰고 마속, 위연이나 양의 같은 소인배 새끼들 처 쓴거랑 5번 북벌하면서 결국 장안 못먹고 무도, 음평만 얻고 뒤진거라든지 '하여간 제갈량은 병신임!'이라고 여기에 병신이 구구절절 써놓은 거 어느정도는 맞고 어느정도는 틀린것도 있고 아예 이 병신 새끼가 거의 날조에 가깝게 써져낀것도 있고 그렇다. 하여간 제갈량이 이런거로도 충분히 까일만 하지만 제갈량이 까여야 하는 이유는 사실 별 거없다. 음흉한 군벌새끼 유비를 도운거랑 그 난리 법석을 치고도 결국 중국통일 못하고 삽질만하다 갔다는거 이 두가지다. 근데 삼국지 인물들중 이거에서 자유로운 새끼는 단 한명도 없다. 그 난리법석 피운 조조는 중국통일 했나? 오히려 세상만 더 어지럽혔다. 단지 자기 야심만 채웠을뿐. 사마의는? 사마염은? 얘들은 통일이야 했지만 좆병신짓 쳐하다가 오호십육국이라는 개막장 시대만 열게 만들었다. 그나마 손제리새끼가 제리답게 난리 덜치고 구석에 조용히 있다 간 편이지만 이새끼 말년에 병신짓한건 유명하고.

후한 말엽은 그냥 솔직히 말하면 군벌들의 병림픽이다. 하도 병신 같은 새끼들이 줄줄히 사탕으로 늘어서 있고 그래서 정사 파던 새끼들 중에선 씨발 결국 삼국지라는거 군벌들이 병림픽 존나게 처하다가 다들 처망한 얘기 아니여 하면서 삼국지까로 돌아선 새끼들도 있다. 그나마 정상인이자 훌륭한 인품을 가진 유우 같은 새끼는 포악한 공손찬에게 뒤지는 그런 시대였으니. 하여간 이런 개 병림픽에서 그나마 살아남은 군벌 셋이 각자 나라 세우고 투닥투닥 병림픽 하다가 결국 다 병신되고 사마씨 서진이 통일하는데 그나마도 지들끼리 병신짓 존나게하다가 지들이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새끼들한테 처절하게 개털리고 다 좆망한 100년간의 좆지랄이라 결국 남는게 없다. 이래서 영미권의 학자들이 이 시대를 존나 시니컬한 시대라고 부르는거고.

하여간 이 시대 이후로 중국은 진한 시기의 역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본격적으로 중원의 주도권을 이민족에게 빼앗기고 지배를 받는 시기로 전환한다. 명나라가 등장하기 전까지. 어찌보면 중국 역사상 순수하게 이민족을 압도한 한족 통일 제국은 한-명 정도 밖에 없다. 당나라는 귀족세력들이 선비족에서 기인했고 돌궐이나 토번에게 털릴뻔하기도 했으며 송나라는 뭐 알다시피 이민족한테 삥뜯기는게 일상이었고 결국에는 중국역사상 최초로 전중국을 이민족에게 빼앗겼던 왕조다. 어찌보면 명나라 등장하기 전까지 이민족에게 주구장창 시달리게 만든 원흉을 제공했으니 통일못한 위촉오 새끼들과 이를 이어받은 사마씨 서진은 그 역사적 원죄가 완연하고 제갈량 역시 그 것에서 피할수는 없다는 거다.

ㄴ그저 비판하기위해 날조하는 말에 불가하다. 조위가 사마씨한테 넘어가기 전에 오환, 흉노, 선비 전부 바짝 엎드려 빌빌 기던거 모르냐? 하다못해 고구려도 가루가 되도록 털어먹었다. 이민족이 감히 엄두도 못내던게 조위다. 그렇다면 촉한은 어떠한가? 남만지방 이렇게 잘 통제한 시기가 몇이나 될까? 이민족을 털 때는 털고 포섭할 때는 확실히 포섭하던 나라다. 그렇다면 손오는? 얘들은 호족집단이어서 그런지 산월때문에 고생 좀 했는데 어찌되었던 산월한테 나라가 흔들린적은 없다. 베트남인 교지쪽도 여대가 삽질하기 전에는 사섭 포섭해서 잘 통제했고 여대덕에 이후에 소란스럽긴 해도 육윤등의 사례로 볼 때 어쨌든 결국 통제하고 영토화했다. 결과적으로 이민족한테 나라 털려먹은건 근본도 없이 역성 찬탈한 막장국가 사마씨 진나라 놈들이다. 하다못해 신나라 왕망도 찬탈 때 몰래 독살하는 정도로 그쳤는데 저 놈들은 중국역사 최초로 백주대낮에 황제 시해한것으로 보아 제정상인 놈들이 아니다. 이런 놈들이 한번도 안쉬고 병진짓만 하다가 중국 역사 판도를 바꿔놓은거다. 까고 싶어도 날조는 하지말자.
그럼에 이렇 좆망시대인 삼국시대가 중국인들에게 왜 아직도 회자되냐? 사실상 최초의 통일제국인 한나라의 그것을 이어 받은 자들이 어떻게 각자의 방식으로 이 무너져가는 통일제국을 재구축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스러졌는가 그런면을 보는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다 무의미한 짓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각자의 이상을 위해 발악하다가 스러지는 자들이 이야기가 삼국지 주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삼국지가 유명한건 이 시대 자체가 '이상을 쫒다 좆망한 패배자들의 역사를 다룬 로망스'라서 더 애잔하게 느껴지고, 그 때문에 계속 후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면도 있는 것이다. 괜히 짱개 오리지널 삼국지연의가 '천하대세는 흩어졌다가도 하나로 합쳐지고'로 시작하고 마지막을 '훗날 사람이 이를 보고 탄식할 뿐이네!'로 끝나는 줄 아냐? 짱개들이 다 애미뒤진 새끼들이라서 이 시대 인물들을 아직도 기억하는게 아니다.

적당히 까자[편집]

정사 삼국지를 지금과 같은 형태로 만든 진수와 배송지는 제갈량을 이렇게 평가했는데 이 때문에 애시당초 촉까와 제갈량까에게 진수와 배송지는 촉빠라고 개까인다. 애시당초 촉까 입장에선 '시발 제갈량이 뭐나 되냐고 이런 고평가냐 애미뒤진 새끼들!'이라고 하기 때문에 진수배송지도 평가가 존나게 좋지 않다.

연의에서 정사에 비해 과장된 측면도 많고 민담이나 설화를 적절하게 조화시킨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은 존나 시발 개 초인신선으로 묘사되었고 이런 연의의 과장된 묘사 때문에 오늘날 정사와 비교하면서 까는 새끼들도 많다.

ㄴ 초인신선이 맞긴하지 업무량이 시발, 같은일하던 후임중 과로사한놈도 있는데

애시당초 지금 촉까라고 하는 애들은 기본적으로 연의 제갈량의 신격화에 대한 반발과 더불어 정사에서 제갈량의 실책이나 군략의 부족함을 두고 '제갈량은 거품이며 무식한 새끼이다!'라고 까는 것이다. 존나 지들이 만든 망탁비량 같은 단어를 쓰면서 말이다. 그리고 자꾸 연의 반골타령 하면서 위연은 제갈량에게 팽당했다고 쌩 날조롤 하는데 실제로 위연은 제갈량이 위연과 유염이 싸우는데 유염만 돌려보낼 정도로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위연 새끼가 제갈량 뒷담화를 해도 '에휴 그래도 쟤만한 용맹이 어디있냐?'하고 썼다. 제갈량이 뒤지고 후퇴한 것도 '뒤는 위연에게 맡기는데 그 새끼가 억지로 싸우려고 하면 본대 퇴각이 우선이니까 일단 본대 먼저 출발해' 라고 했는데 위연 새끼가 아 시발 제갈량 죽었으니 내가 대빵인데 어디서 양의 따위 말을 내가 들어야 해! 라고 꼬장부려서 그 사단이 난거. 아 그리고 자꾸 왕쌍을 위연이 죽인거라고 씨부리는데 그건 씨발 그 새끼가 연의랑 정사랑 헷갈린거고 실제로 왕쌍은 제갈량군에 역습당해 뒤진게 끝이다.

하여간 결국 천하삼분지계라지만 겨우 익주 하나 손에 넣었을 뿐이고 그가 뽑은 인재들 가운데는 제갈량이 뒤지고 나서 지한테 권력을 승계하지 않았다고 찌질하게 불평이나 하다가 위나라로 도망이나 하려고 한 양의나 제갈량의 친구인 마량의 친동생이라 중용한 가정에서 애미뒤진 등산이나 처한 마속 같은 새끼가 있기 때문에 제갈량은 유비가 만든 인재를 제대로 쓰지도 못한 병신이라는 평가가 있고 탁고대신으로서 촉의 전권을 휘두른 권신이기도 하기 때문에 제갈량은 권력욕에 가득차 이엄을 조지고 촉나라를 휘어잡은 독재자이자 충성심 없는 권신새끼라고 까이기도 한다. 일찌기 유비는 마속을 평하기를 "쟤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할 뿐 실속은 없는 무능아라서 관직을 주면 안 된다"라고 평가했으며 양의는 이미 유비가 한번 한직으로 전임을 시켰던 새끼라서 제갈량이 인재를 잘못썼다는 평가를 듣는다. 또 모든 일을 자기가 처리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놈이라서 곤장 20대 치는 사소한 재판도 자기가 직접 국문해야 직성이 풀렸고 그래서 과로로 쓰러져 죽음.<ref>그리고 유비도 이 면에선 할 말이 없는게 이릉대전에서 말아먹은게 대체 얼마냐, 하다못해 황권이라도 남아 있었으면 좋았을것이다.</ref>

근데 요립? 지는 제갈량급이다 생각했건만 유비가 한직에 임명해서 결국 이엄보다 평가절하 당하신 요립께서 유비에게 불만을 갖고 유비를 비하하는 발언을 하며 제갈량과 싸웠답니다. 정작 익양대치 때 그가 관할하는 군현 버리고 도망친걸 유비가 구해줬는데도 그 지랄을 한 거. 유봉은 자꾸 제갈량이 유봉을 죽이고 유비랑 싸웠다고 날조를 하는데 정사에는 제갈량이 유봉이 사나운 인물이라 후일 제어가 안될거라 판단하고 제거를 권하고 유비가 이를 승낙한다. 또 양의 줄이 이놈이 삼국지를 허경영이 쏴주는 텔레파시로 들었나 의심가게 하는 줄인데, 제갈량 사후로 장완이 상서령으로 임명되어 정무를 승계한데 반해 양의 자신은 고작 중군사에 임명되어 여전히 한직에 머무르자 짜증나서 위씨(위나라)를 따를껄 그랬다!라고 한 것이다. 양의가 개병신같이 김칫국 먹다가 돌아온게 없어서 분노조절장애로 병신발언 한 것 조차 제갈량 잘못인지는 모르겟다. 쟤네 둘이 내쫒긴 다음에 제갈량이 써주기를 바라다가 제갈량이 죽으니 하, 시발 우리를 써줄 새끼는 제갈량 밖에 없는데 시발' 한건 유명한 일화. 그리고 제갈량이 유파랑은 싸운적도 없고 오히려 유비에게 유파를 쓰라고 추천한 것도 제갈량이다. 법정전에서는 유비와 제갈량이 싸웠다는 일화는 없고 제갈량이 유비가 법정을 좋아하니 법정이 막 나가는거 눈감아 줬다는 기록이 있고 제갈량이랑 조운을 비롯한 문무대신들이 다 반대하는데도 유비가 개빡쳐서 나간 이릉대전을 말리지 못하자 제갈량이 '아 법정 걔 있었으면 말렸을텐데, 설령 동족으로 갔어도 법정이 있었으면 주군이 개털리진 않았을텐데' 라고 한탄한것 뿐이다. 실제로 제갈량과 법정은 비록 좋아하고 숭상하는 바. 취향, 기호가 서로 같지 않았으나 공적인 도의로 서로 따랐고 제갈량은 늘 법정의 지모와 권술을 높게 여겼다고 되어 있다. 하여간 유비, 제갈량을 비롯한 촉나라 인원들이 똥을 쌌으나 결국 삼국중 최약체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물론 촉은 위나라 하나만 상대하면 되지만 위나라는 촉 말고도 오나라도 있고 저기 요동도 있다. 씨발 공손연 반란일으킨거 모자라 관구검 - 문흠 씨발 계속 난리가 난 것도 있다. 그러므로 연의처럼 촉나라에만 계속 포커스를 두는건 정사 전반을 읽을때 잘못된게 맞다. 근데 애시당초 9주- 1주 비교가 우스운것도 있고 자꾸 애미디진 새끼가 흉노가 왕창 킹왕짱이라고 지랄발광을 하면서 써놓고 엉망진창으로 오버한 것도 있어서 좀 수정함. 그 새끼가 탈탈 털린것은 흉노 문서에 가면 자세히 있으니 여기선 더 이상 논할 가치가 없다.

하여간 제갈량이 오늘날 병신이라고 많이 까이긴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시발 망탁비량 같은 없는 단어 지어내거나 무슨 위나라가 병주 하나를 손에 넣은 흉노한테 벌벌 떨었네 등등의 이 따위 개드립이나 지어내서 까진 마라. 진짜 병신 하나가 디시위키 삼국지 문서들 존나 씹창내던 시절 문서로 돌려놓은건 뭐하는 거냐 또 보다가 못해서 덧붙여 둔다. 일반인 평가는 왜 지우냐고 해서 걔네들 평가 다시 모아서 정리했다. 그리고 유비가 안 쓴 양의, 마속을 쓴 병신이라는 소리를 문서 내에서 앵무새처럼 계속 주어섬기면서 병신타령만 존나게 했는데 그걸 그냥 놔둘순 없지. 그 새끼 앵무새 질 줄이니까 문서 바이트 수가 엄청나게 줄었네 시발.

연의에서 구랏빨이 존나 들어갔다고 부당하게 까이는 감이 없잖은 인물. 나관중이나 모종강을 까야지 뭔 엄한 사람 까고 지랄이야. 이런 새끼들이 위나라나 오나라 인물 까면 또 풀발기하지.

내가 본 촉까중엔 손자병법에 이기는 싸움만 하랬으니 상대가 누구든 사마의가 성에 틀어 쳐박혀서 막는게 옳은 판단이라고 하는 정신나간 새끼도 있었다. 물론 사마의가 인생 거기서 끝내고 집구석 틀어박혀 놀면서 살려고 했으면 이게 맞는 말이지만 사마의는 야망이 있어서 결국 정권을 잡았고 지 아들래미는 황제 시해 지 손자는 찬탈하며 천하통일을 완수했다. 사마의가 자신의 특기인 빠른 행군속도를 이용해 제갈량 대가리를 깼다면 더욱 빠르게 진행 됐을 일이었고 이런 사마의가 제갈량 상대로 계속해서 수비를 갔다는 건 밖으로 나가면 제갈량한테 개쳐발린다는 걸 알기 때문이고 실제로 밖에서 두번 처발렸고 명장 장합마저 죽게 만들었다.

근대 이전까지는 다 제갈량을 높게 평가했는데[편집]

결국 이는 지나치게 현대적인 관점으로 제갈량을 까는거 밖에 안된다는 뜻이다.

중국 역사 최고의 군주라고 평가받던 당태종 이세민 역시 제갈량을 명재상으로 평가했고 강희제 왕안석등 중국의 인물이라는 인물들은 다 높게 평가했고 국내에서도 이순신 신숙주 정도전 같은 유명 장군이나 대신들이 제갈량을 까는 경우는 없다.

연의에서 나오는 너무 신선과 같은 모습에 반감을 가지는것은 이해가지만 좆만한 파촉을 제갈량 장완 비의 동윤 몇 안되는 인물로 하드캐리 했는데 너무 무시하는거다. 동윤은 비의의 직책을 이어받자 말자 과로사 했다는걸 봐도 제갈량이 온갖 업무를 겸직하면서 북벌까지 수행했다는 점에서 미친놈이다. 북벌을 실패한게 능력 부족이라고 까는것도 웃기는거고 북벌을 성공했다면 그야 말로 신인거다 신.

유방이 한신 장량 소하같은 괴물들이 있었다지만 상대가 항우 같은 돌머리니까 파촉과 관중으로만으로 씹어먹었던거니 제갈량하고 상황 자체가 틀리다. 제갈량이 위를 멸망시켰다면 아마 전세계 역사상 제갈량을 전술 전략의 신으로 올려 놓았고 한니발 바르카, 알렉산드로스, 곽거병, 한신, 이순신 이런 인물들은 제갈량 밑에 들어갈정도로 미친짓을 성공한거다. 아무리 이민족과 촉오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지만 당시 이민족은 독발수기능의 난 이전만 해도 위나라에 찍소리 못할정도로 약화 되어 있었고 오나라는 중앙집권이 덜 되어 있어서 촉보다 위에 대한 공격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다. 지방호족들과 남방 이민족을 철저하게 찍어 누르고 북벌을 실행하고 사마의가 공세보다는 방어로만 일관했다는것 자체만으로도 능력이 굉장한거다.

만약 정말 제갈량의 군재가 개판이었으면 사마의 곽회 장합이 그냥 찍어 눌러버리고 검문각을 순식간에 넘어겠지. 근데 결국 검문각을 넘은것은 제갈량 장완 비의 동윤이 전부 죽고 나서라는것만 봐도 촉의 저 4명이 굉장히 대단한 인물들이라고 봐야하는거다.

제갈량이 대단한 이유[편집]

일단 돌아다니는 유협집단 비슷해던 유비일행을 한순간에 조조,손권과같이 어깨를 나란히 놓게 만들어 놓는 천하삼붓지계를 생각해낸 제갈량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실행 시키는 것은 일단 적어도 간손미는 안된다. 그것을 실행시킨 제갈량도 대단한거다

익주라는 변방 땅에서도 중원에서오는 병력들을 상대하는 뛰어난 전략, 아마 세계 역사에도 이렇게 큰그림 사람 찾기 어려울정도로 뛰어난 구상 능력 위에서도 나왔지만 제갈량 뛰어난 책사 뿐만 아니라 최고의 명재상이기도 하였을정도인 정치능력

가상이라는 말이 많지만, 오의 책사<ref>장소,우번,보즐 등등</ref> 으로부터 말빨...아니 언변으로 이기는 군유설전의 장면

출사표에서 보여준 충성심 후에 이 출사표는 신하들이 올리는 표문에 모범이 되었다

왜 사람 들이 그토록 제갈량을 신격화할까? 아이러니 한점은 정사에서 그가한 행보도 인간이라고는 밑기지 않을 정도의 뛰어난 능력이 이였다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라고 비유하지만,

王佐奇才儒者氣象 왕좌기재 유자기상 伊呂之間管樂之上 이여지간 관악지상

왕을 보좌할 만한 뛰어난 재주가 있고 유학자의 기상이 있으니, 이윤과 강태공에 비길만하고 관중과 악의보다 낫도다.

 
— 주자, 근사록 관성현편

남송시대의 주희<ref>주자의 본명</ref> 는 이렇게 표현했다 왕좌기재와 이여지간은 재상과 모사로서의 최고의평가고 다시말해 제갈량은 어디서든 최고였단 거다.

죽은 이유도 병사나 처형이 아닌 과로사인걸 보면 이 인간이 얼마나 일했는지 알수 있다. 생각해봐라 지금도 중간에 문서 날조가 심한데 옛날 국정일은 얼마나 비리나 부정이 많을까? 이모든일을 제갈량이 판단하는것을 보고 사마의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하고도 사는거지?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한 다음 평가는 천하의 기재... 이정도면 사람정도가 아니다.

이게 바로 전무후무 제갈무후(前無後無 諸葛武侯)<ref>앞으로도 뒤로도 제갈량 같은자는 없다</ref> 의 위엄이다. 이런 사람이 신격화가 안되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 한것이다.

더 재미있는 점은 진수는 분명 임기응변이 부족 하다 했는데 정사에서 보여준 능력으로는 안부족하고 오히려 다른 인물보다 더 뛰어났다. 사마의 곽회 장합등을 상대하고 오히려 장합을 잡아내거나 강유를 데려오는 것에서는 놀라을 수준이 아니고 경악할 수준이다.

오히려 부족한건 그 임기응변의 작전을 해줄 장수들이였다. 2세대나 3세대는 그만큼 뛰어난 장수들이 없었다.

너무 치켜 세운것 같지만, 민간전승에서는 그냥 신이고 역사서에서는 이거보다 더한 기록도 많다.

그리고 강태공이랑 소하,장량은 자신의 군주를 이끌어서 천하를 통일 했다. 하지만 제갈량은 실패했다. 하지만 그의 대한 평가는 서로 동급 이였다.

북벌의 관한 이야기로는 북벌 도전 하는 것부터가 신의솜씨다. 이릉에서 말아먹고 다시 시작하는 촉을 다시 도전하게 만드는 능력도 뛰어나지만, 천하삼분지계의 계획에서는 형주와 익주를 아우르고, 오와 동맹하며 위를 친다인데, 형주는 오가 먹었고, 오는 언제라도 통수 칠 상황에서 익주만으로 북벌을 시킨다. 물론 오는 동맹을 맺고.

사실 보면 북벌에서는 사마의가 적수로 나왔지만, 거의 농락 수준으로 뚜드려 맞으면서 진식이나 위연이 말 안듯는 상황에서 이기거나 우주방어로 퇴각 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말이 좋아야 호적수지 사실은 엄청 당했다.

연의에서는 호로곡에서 사마의,사마소,사마사 3부자를 지뢰(당연히 저 시대에 지뢰가 있을리가 없다 나관중 븅신..)와 화공으로 죽일려다가 소나기 한방에 실패... 아궁이를 늘리는 우후지법으로 사마의를 속이고 퇴각. 천문으로 장마 예측 적재적소의 복병과 원군으로 사마의를 죽일뻔한 장면만 여러번 이거보고 사마의는 제갈량이 육정육갑지신(신의 호위무사)를 통솔 하고 귀신을 속인다고 하였다

한줄평으로는 신이내린 솜씨 하지만, 신이 질투한 남자

연의가 모두 거짓이라고 능력이 거짓이라지만,

모든 역사서들이 그렇지만 누락된 부분도 분명히 있을것이다. 그런 누락된 부분이 오히려 민간전승되어 오면서

그것이 연의 재탄생 된것일수 있으니, 소설이라고 무시 하진 말자,

진수나 다른 장수들의 평가는 현재나 과거나 볼수 없을 정도로 최고의 평가였다 현대나 근대의 육군 장교들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생각해봐라.

그러면 자신과 가깝다고 봐주지 않고 멀다고 무시하지 않던 제갈량이 얼마나 인간성이 뛰어난지 알수있다.

사실 제갈량이 뛰어난 이유는 동오를 보면 알수있다.

촉보다 못한 여건이 하나도 없었으면서 그 꼬라지다.

동오에서 그나마 있는 인재는 다 요절하고 남아있던 육손은 손권이 친히 자기 손으로 보내버렸다.

그래도 인간성 하나만은 최고였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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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에서 다루는 대상은 누구도 흉내내고 따라잡을 수 없는 인성갓입니다.
그러므로 인성드립이나 비방은 삼가도록 합시다.

이막이라고, 유장의 부하 문관이 있었다. 유비가 서촉에 입성하자 이막이 유비에게 내가 너를 섬기고 싶어서 섬기는 줄알아? 이 개씨발새끼야. 내가 힘없어서 너를 섬기는 거지 내 힘이 조씨나 손씨급이였으면 당장 너부터 쳐죽였다 이 새끼야!라고 말하는 바람에 유비가 인간이 빡칠 수 있는 최고 수준까지 빡쳤다.

그런데 이걸 제갈량이 "전하, 이막이는 그저 옛 군주를 못 잊어서 너무 서러워서 그런 거니까 제가 잘 달래보도록 할테니 저에게 맡겨주십시오"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유비는 이막을 제갈량에게 넘겨주고 생사여탈권을 줬다. 그런데 제갈량은 이막을 잘 달래고 교육시켜 줬다. 이후 유비가 살아있는 동인 이막은 쥐죽은 듯 조용히 지냈다.

양의가 자꾸 유파에게 시비를 털자 유비는 빡쳤는데 그래서 유비가 직접 양의를 죽이려 하자 제갈량이 살살 달래서 양의를 죽이지 않게 만들었다. 유비는 꾀를 하나 냈는데 양의를 홍농태수로 임명시켰다. 그 상태에서 유비가 양의를 임지로 보내려 하자 제갈량이 말렸다.

이엄요립이 문제를 일으켜서 파직당했다. 그런데 그 때 제갈량이 내가 기회를 봐서 반드시 엄청 중하게 쓰게 해 주겠다는 말을 매일같이 반복했다. 이엄과 요립은 제갈량의 그 말을 믿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꾹 참았다.

위연양의는 불구대천으로 유명했지만 제갈량이 보는 앞에서는 둘이 싸우지 못했다. 그런데 제갈량이 없으면 항상 싸웠다.

제갈량은 손권과 연합해서 북벌을 감행하니 이게 4차 북벌이다. 그런데 손권이 만총에게 시원하게 털려버리는 일이 발생했고 그것 때문에 제갈량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 손권이 합비를 점령하면 당연한 거고 그렇지 않더라도 시간이라도 끌어주면 제갈량은 북벌을 계속 할 생각이었으나 문제는 손권이 너무 초고속으로 털려버린지라... 손권은 여기서 너무 커다랗게 털린 나머지 위온제갈직을 시켜서 인간채집을 하러 다니라고 했다.

제갈량은 퇴각 준비를 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버렸고 다시는 못 일어났다. 이 때 위연이 자기가 없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이미 알고 있어서 위연이 돌격하면 설득해서 데려오라는 말까지 해뒀다. 과연 위연은 제갈량의 말대로 다 퇴각하는데 혼자서만 자오곡 계책을 하러 갔다. 그래서 비의가 제갈량의 말대로 양의에게 위연을 설득해서 데려오라고 했으나 양의는 지멋대로 위연을 죽여버렸다. 후일담으로 양의는 자기가 승상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위나라로 귀순하겠다고 했다가 걸려서 그나마 있던 중군사 마저 파직당했다.

제갈량이 사망하자 이막이 낄낄거리면서 제갈량 죽음은 쌤통이다!라고 외쳤는데 그걸 들은 유선은 배은망덕한 자는 살아있을 필요가 없다면서 본인이 직접 칼을 빼어들고 이막의 머리와 몸통을 분리시켜 하늘나라로 보냈다.

이렇듯 촉나라의 모든 문무백관들이 제갈량의 착한 성품 때문에 그 인격을 믿고 아무리 화가 나도 제갈량을 보면서 참을 정도로, 제갈량은 인간성 하나만은 갑이었다.

삼갤의 주적[편집]

삼갤에선 관우와 함께 죽어라 까인다.

제갈량이라 불리는 일은 없고 갈병신이라 불린다.

왜 삼갤이 촉까갤이 되었는지는 의문이나 확실한건 지나가는 병사 47번 만도 못한 새끼들이라는것이다.

토갤럼들이 삼탈워 발매 이후로 촉까만 가득하고 코삼이나 하는 삼갤 틀딱 아재 새끼들을 비웃고 있다.

삼국지의 기준[편집]

수 많은 삼국지 작가들이 딱 제갈량 사망하는 그 곳에서 연재를 멈춘다. 원래 제갈량이 사망하는 곳에서부터 삼국지 전체의 5분의 2정도 더 있는데

  • 문앙이 무쌍을 보여주는 거
  • 독발수기능이 반란 일으킨거 문앙이 진압한다.
  • 유선이 항복하는 거
  • 고평릉의 변이라고 사마의네 집안이 일으킨 쿠데타가 성공하는 거
  • 손호의 개지랄
  • 곽마의 난이라고 삼국지에서 벌어진 맨 마지막 전투
  • 손호의 항복
  • 천하통일 이후 유선은 고분고분하는데 손호는 개기는 거

이런 많은 내용들이 싸그리 생략된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삼국지는 유비가 탁현 누상촌에서 돗자리를 짜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해서 제갈량이 사망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두무와 진번이 환관들을 몰아내고 천자의 권위를 드높이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으로 시작해서 손호가 사마염에게 반말 찍찍 싸는 걸로 끝나는 김경한 삼국지 정도만 예외다.

사실 삼국지 연표를 보면 184년 황건적의 난으로 시작해서 280년 손씨 가문의 오나라가 멸망할 때까지가 중국의 삼국시대인데 제갈량이 사망한 게 234년이니 무려 46년이 생략된 것이다.

그나마 쥐훈의 삼국전투기가 제갈량 사후부터 진나라 통일까지 상세하게 그려두었다. 맨날 지각연재에 저작권따위 밥말아먹었고 편파투성이라 존나게 까이는게 삼국전투기지만

제갈량 사후부터 진나라 통일까지 제대로 묘사했는지라 이 부분만큼은 안까인다. 사실 정사 안읽고 연의 읽다가 삼국전투기 읽은 인간들중 제갈량 사후에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다는걸 그제서야 안 인간들 꽤나 많을 것이다.

플러스[편집]

킹우영센세께선 매우 곱상하게 그려놓으셨다. 쥐훈이 제갈량을 여자로 출연시킨건 이거때문이다.

1993년 중국에서 나온 84부작 삼국지에선 당국강, 2010년에 나온 신삼국에선 육의가 맡았다.

이중 1993년판은 왕랑과의 썰전으로 인해 짱개에선 필수요소가 되었다.

만두를 만들었다는 썰이 있다.

수경 선생 밑에서 배울때 시간이 다 가기 전에 이 방에서 나가라는 문제를 받고 바로 걸쭉한 쌍욕을 내뱉었다. 당연히 수경선생은 저새끼 끌어내를 시전했고 옆에 서서와 방통이 저희가 끌어내겠습니다. 라며 제갈량을 끌고 나갔다.

방에서 나갔으니 당연히 미션 성공. 역시 천하의 귀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