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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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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관이 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한 역사.

1차 자료로서 팩트 팩트 지랄거리는 역덕후들의 가장 큰 무기다.

왕이 똥을 싸는지 멀하는지 일일히 다 기록함.

그냥 좋은점만 기록하는 기존역사서들과 달리 왜곡할 만한 아주 딥다크한것도 기록한다 이말이다.

왕이라고 해도 조선왕조실록을 절대로 볼 수 없었다. 세종이 유일하게 태조실록을 읽어봤다.

임금이 도승지 신인손에게 이르기를,

"옛날 제왕은 친히 조종의 실록을 본 사람이 제법 많았고, 또 공자도 《춘추》를 지으면서 정공(定公)·애공(哀公)까지 이르렀고, 주자도 《중용》에서 신종의 소목(昭穆) 제도를 논하면서, ‘역사를 상고해 보면 신하들도 또한 당대 사기를 보는 것이 당연하다. ’고 하였는데, 오직 당 태종이 국사를 보려고 하자, 저수량(褚遂良)과 주자사(朱子奢) 등이 불가하다 하였고, 문종도 국사를 보고자 하니, 위모(魏謩)와 정랑(鄭朗)이 또한 불가하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당시 사기를 보려고 한 까닭에 신하들이 불가하다 한 것이나, 조종의 실록을 보는 것이야 무엇이 해로우랴. 옛날 우리 태종께서 《태조실록》을 보고자 하니, 변계량(卞季良) 등이 이르기를, ‘《태조실록》은 편수(編修)하기를 매우 잘하여 사실을 모두 바르게 썼는데, 이제 전하께서 나아가 보신 뒤에 내려 주신다면, 후세 사람들은 모두 믿지 못할 사기라 하여 도리어 의심할 것입니다.’ 하므로, 태종께서 보시지 못하였다. 내가 즉위한 후에 《태종실록》을 편수하고자 하니, 대신 중 어떤 이가 말하기를, ‘사초(史草)만 갖추어서 전해 두면 후세에 자연히 사기를 편수하게 될 터이니 반드시 급급히 할 것이 아니고, 또 재상이 감수함은 옳지 못합니다.’ 하였으나, 나는 이 일을 중하게 여겼던 까닭에 마침내 재신에게 편수하도록 명하였다. 나는 또 ‘자손으로서 조종의 사업을 알지 못하면 장차 무엇으로 감계(鑑戒)할 것인가.’ 하고, 《태조실록》을 보고자 하여 여러 신하에게 상의하였더니, 유정현(柳廷顯) 등이 ‘조종이 정해 놓은 법에 의거하여 조종의 사업을 잘 계술(繼述)하는 것이 실상은 아름다운 뜻이 된다.’ 하므로, 이에 볼 수 있었다. 지금 또 생각하니, 만약 당시의 사기가 아니면 조종이 정한 법을 보는 데에 있어, 조와 종에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이미 《태조실록》을 보았으니 《태종실록》도 또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지니 여러 겸춘추(兼春秋)에게 상의하라."

하였더니, 대신 황희·신개 등이 모두 말하기를,

"역대 임금으로서 비록 조종의 실록을 본 사람이 있더라도 본받을 것은 아닌가 합니다. 당 태종이 사기를 보고자 하니, 저수량과 주자사(朱子奢) 등이 ‘폐하께서 혼자서 본다면 일에 손실이 없지마는, 만약 사기를 보는 이 법이 자손에게 전해지게 되면, 후세에 그른 일을 옳게 꾸미고 단점(短點)을 장점으로 두호(斗護)하여, 사관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면 여러 신하들은 임금의 뜻에 순응하여 제몸을 완전하게 하려 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니, 천년 후에는 무엇을 믿겠습니까.’ 하였으니, 신 등의 논의는 바로 이 말과 같습니다. 이 두 신하는 모두 명신이라고 이름난 사람이니 그의 말은 반드시 본 바가 있을 것이고, 또 태종의 일은 전하께서 친히 보신 바이니, 만약 태종의 일을 본으로 삼아 경계하고자 한다면, 역대 사기가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지금의 실록을 보아야 하겠습니까. 하물며 조종의 사기는 비록 당대는 아니나 편수한 신하는 지금도 모두 있는데, 만약 전하께서 실록을 보신다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반드시 편하지 못할 것이며, 신 등도 또한 타당하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은 마침내 보지 아니하였다. 라고 적혀있다.

ㄴ이걸 봤다가 쫒겨난 왕이 연산군이다.

ㄴ 정확히는 워낙 좆감작을 많아해서 쫓겨난거지 실록 봤다고 쫓겨난건 아니다.

태조부터 철종까지 기록했다.

고종부터 기록한 건 좆본새끼들이 조선을 식민지배할 때 편리하게 하기 위해 고종을 병신 왕으로 만들어서 조작질을 했다. (너희 나라에 이런 병신같은 왕이 있으니 조선이 망한거다. 우리 대일본제국의 역대 천황 폐하께서는 매우 먼치킨스럽기 때문에 조센은 갓본의 식민지가 되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그런즉 고종실록은 좆본새끼들이 조작질한거다. 뭐 그렇다고 고종이 병신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참고로 명나라인들이 조선인들에게 그게 먼 개짓거리냐며 디스하기도 했다. 명나라 애들도 조선왕조실록 비슷한걸 쓰긴 썼지만

왕 중심으로만 서술했지 조선왕조실록처럼 다방면으로 자세히는 안 썼거들랑.

객관성을 중요시한다카지만 사관의 주관적 해석도 들어가 있고.

사관이 기록 적을 때 실증적으로 적었는지 아닌지 알 수도 없다.

전산화된 조선왕조실록은 사실 발번역이 많고 오타가 많다는 썰이 있는데 실록사이트에서 간간이 오류신고 받고 교정했다는 게시물이 올라오긴 한다만

실록사이트 들어가는 애들도 그런 거에 당연히 관심없겠지

조선왕조실록이 전산화가 되면서 역사의 '역'자도 모르는 새끼들이 책 싸지르기가 쉬워졌다. 그냥 전산화 사이트에 들어가서 쓰고 싶은 책 주제를 검색하면 끝이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왕조실톡이다.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승정원일기가 있다.

북괴새끼들이 먼저 번역을 했다. 혹부리가 6.25때 서울에 입성해서 갖고온 판본으로 1980년 <리조실록>이라고 400권의 책을 내놨다. 근데 얘들은 대중성을 지향한다고 말을 존나게 많이 바꿨다. 예를들어 '주상'은 '왕'으로, '종친'은 '가족'으로...

우리는 1994년부터 번역을 시작해 1995년 CD롬 초판이 나왔고, 1997년 1차 개정판, 1997년 보급판이 나왔다.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를 만들어놨다.

판본[편집]

조선 초에는 4본을 동시에 만들었는데, 1몬은 서울 춘추관, 2본은 충주, 3본은 전주, 4본은 성주에 있었다. 근데, 지방에 있는 판본은 죄다 읍치랑 가까이 있어서 소실되기 너무 쉽다고 양성지가 사고를 깊은 산속으로 옮기자고 상소를 올렸으나, 그 상소는 씹혔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양성지의 예상대로 몇개본이 그대로 불타올랐고 전주본이 뜻있는 선비들의 희생과 노오력덕분에 실전되지 않았다. 그래서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이 사고를 편찬하면서 5본을 동시에 만들어 깊은 첩첩산중에 꽁쳐뒀다. 그중 몇개본이 왔다리 갔다리 했다.

  • 춘추관 사고본 - 이괄의 난 때 불타버리고 현재 타다 남은 몇권이 남아있다.
  • 정족산 사고본 - 임진왜란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전주본은 내장산에서 보관되다가 묘향산으로 옮겨지고 강화도 마니산으로 갔다가 병자호란때 300권이 불타버리고 효종때도 2권이 불타버린 뒤 현종때 복구가 되고 숙종 때 강화도 정족산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있다.
  • 태백산 사고본 - 일제시대에 경성대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있다. 광해군일기는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등으로 인해 나라에 돈이 없어서 인쇄를 하지 못하고 원래는 없애야 할 중초본<ref>중초본에서 뺄 내용은 줄을 긋고 추가할 내용은 여백에 적어넣은 다음 그것을 바탕으로 정초본을 만든다.</ref> 을 그냥 태백산 사고에 보관하고 정초본을 2부 더 손으로 베껴써서 각각 정족산, 적상산, 오대산 사고에 보관했다.
  • 적상산 사고본 - 일제시대에 황궁 장서각으로 옮겨졌는데 광복후 일부가 도난당하고 625때 북괴가 전부 가져가서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 때려박았다.
  • 오대산 사고본 - 일제시대에 좆본도쿄대로 가져갔는데, 관동 대지진으로 대출 중이던 책을 빼고 전부 불타버렸다. 74책이 살아남았는데 27책은 경성대로 반환되고 47책은 2006년에 반환돼서 서울대 규장각에 임시로 보관되다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하지 마!
하지 말라면 제발 좀 하지 마
하지 말라는데 꼭 더 하는 놈들이 있어요 ㅉㅉ

오대산본은 도쿄대 도장과 서울대 도장이 찍혀있다. 2006년에 반환된 직후 서울대 규장각에서 문화재보호법을 무시하고 기록 문헌의 이동 경로를 나타내는 표시라는 개헛소리를 하며 냉큼 도장을 찍어놨는데 처벌받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파일:Odaesanbon.JPG

2022년 판교 데이터 센터 화재로 카카오가 거대한 똥을 싸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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