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중세적입니다.
중세 시대는 근세보다는 딸리지만 그래도 고대보단 낫습니다. 가톨릭, 이슬람, 불교 같은 종교와 믿음에 심취한 시대입니다. 또한 정복에 미친 몽골 제국과 셀주크 튀르크 같은 나라들을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에 역겨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문서를 탈출하시길 바랍니다.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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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근대 현대
모든 철학 사조들 가운데 진화에 관한 생각이야말로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진화 논의가 스콜라 철학에 손발이 묶인 채 1,000년의 세월을 칠흑의 지하에서 완전히 죽어 지내야 했다. 그러던 중 다윈이 나타나 고대의 그리스 사상 체계에 새로운 생명의 피를 수혈했으니, 비로소 묶였던 손발의 족쇄가 풀려서 오늘에 부활할 수 있었다. 환생한 먼 조상들의 생각이 그동안 인류의 사상계를 지배해 오던 그 어떤 법칙들보다 삼라만상의 우주적 질서를 더 잘 표현할 뿐 아니라 그 질서의 의미를 우리에게 더욱더 그럴듯하게 설명해준다. 70여 세대를 이어온 우리 후손들의 고지식함과 줄기찬 맹신 그리고 미신을 오늘에 탓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토마스 헉슬리

개요[편집]

희대의 병신 시대라고 오해받는 시대.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세는 좋은 시대는 아니지만 필요 이상으로 까이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슬람이 등장하고 유럽에서 교회 사회가 시작되며 당나라가 등장한 7세기부터 비잔티움이 완전히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며 대항해시대가 시작되는 15세기까지를 중세로 본다. 서로마가 멸망한 476년부터로 보기도 한다.

상세[편집]

고대보다 더 구려졌다고 착각속에 까이고 있다. 현실은 농업도 더 발전했고 교육도 약간이나마 나아졌다. 니가 하층민이라면 중세에 사는게 더 나았을거다. 다만 고머보다 미개한 부분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이 말은 노예제도가 사라져서 맨날 주인한테 학대당하는 노예 보단 농노의 삶이 그나마 나았다는 소리. 문맹률이나 삶의 질 수준은 고대 로마 시민이 더 낫긴 했다. 물론 로마 '시민'은 소수고 대다수는 노예였다만.

중앙집권이 안되서 왕은 영주라는 힘센 동네 깡패 우두머리에게 땅줘서 달래줬고 그 영주는 기사라는 동네깡패에게 땅줘서 달래줬다 .

기사라는 놈들은 농사를 지을 줄 몰라 농노들에게 삥뜯으며 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좆지랄 덕분에 유럽이 발전할 수 있었다.

사실 중세봉건이 있기에 시민사화도 가능했던 것이다.

기독교 만민평등사상 때문에 노예가 없고 농노들만이 있는데 나증에 장원경제 좆되고 얘들도 차차 시민이 된다.

그리고 신중심 사회에서 인본주의를 부르 짖은 것도 비잔틴 새끼들이 아니라 미개한 서유럽 새끼들이다.

과연 로마제국이 존속 됐다고 지금의 우리가 아는 과학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비잔틴 애들도 한건 고전 학문 보존한 것이지 뭘 새로 창조한건 아니다.

그리고 유럽이 발전할 수 있던 것도 잘개잘개 분열되서 이새끼 저새끼 싸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건축[편집]

고딕양식으로 대표되는 성당들이 유명하다. 뾰족하고 비대칭스런 기괴한 모습에 최대한 하늘 높이 짓는 식으로 세금낭비를 했는데 이건 이거대로 건축술 발달에 기여한다. 수원 화성 거증기 보다 큰게 중세 유럽 거중기다.

교육[편집]

또한 신의 섭리는 무엇인가? 를 연구하기 위해 논리학이 발달하고 대학도 세워졌다. 애초에 이론인 theory의 어원이 수도승들이 관조하는 것의 테오리아에서 생겨난 것.

그리고 사실 고대 로마의 라틴어 서적을 보존한 것은 이탈리아의 수도승들이다. 이 당시 비잔틴 제국은 라틴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를 썼다. 또한 필사본으로 성서 관련 내용이 주였지만 지식을 보전한 것도 중세 교회였으며, 수도원에 학교를 세워 애새끼들 교육 시킨 것도 교회였다. 중세 초기에는 귀족들 중에서도 글자를 쓸줄 아는 새끼들이 드물었지만, 카를로스 대제가 수도원을 필두로한 교육기관 확충으로 중세 중기까지 문맹률은 60%까지 떨어졌다. 물론 10명중 6명이 글을 못쓰고 못읽는 건 노답이긴 하지만 그건 지금 기준에서 보면 그렇고 당시에는 획기적으로 끌어올린거다.

중세 교회를 종교에 미친 씹미개한 병신들로 보고 그들이 이끌었던 중세도 미개한 원시 동굴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종교 미친 씹미개한 예수쟁이들이 너가 비싼돈 내고 가서 질질싸는 유럽문화유산에 막대한 돈을 댄것을 기억해야 한다.

중세 교회는 로마제국이 사라진 유럽에서 사회를 유지하는 등불이었다. 애초에 당시 공공기관들을 운영한 곳이 중세 교회였다. 각종 마을 업무들을 담당하는 분교부터, 도시부교회까지 전부 교회의 신부들이 담당했으며 정치인들 또한 종교인들이었다. 한마디로 동사무소, 구청, 병원, 도서관 같은 장소들을 교회에서 운영했으며 나아가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소리. 일 못하든 잘하든 생활속에 가장 밀접한 인물들이 교회였고 그들의 개입으로 대도시를 제외하면 사회시설망이 전혀 없던 중세 유럽이 그나마 유지가 되었던 거다. 당시에도 욕을 존나게 먹었지만 우리가 정치인 욕하는 거랑 같은 거다.

그리고 미국보다 더 영향력이 강했던 제국이 사라지고 집단 미개화가 발생한 유럽에서 싸우지마 미개한 병신들아라고 예수님이 그랬어라며 세기말 전투왕들의 폭주하는 아드레날린 분출을 자제 시켰던 것이다.

과학[편집]

그리고 어떤 좆문가새끼들은 과학이 발달 어쩌고 하는데 과학의 발달이 늦은 것은 분명하지만 아시아에 넘어온 과학기술들을 급속도로 개량한 것도 중세 유럽이었다.

종교적 교리에 의해 움직이긴 했으나 우리가 흔히 알듯이 자연철학(당시엔 과학자들을 자연철학자라 불렀다.)을 탄압한 것도 아니었다. 중세 중기까지는 실험 시설을 죄다 수도원에서 진행했는데 과학을 탄압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갈릴레오 갈릴레이 지구는 돈다 이지랄은 후세 창작이었고, 갈릴레이가 실험한 장소로 유명한 피사의 사탑도 수도원 안의 탑이다.

"지동설이 '참된 논증'을 통해 입증된다면, 성경에 근거하여 지동설이 틀렸다고 단정해서는 안 되며.
성경을 신중히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벨라르미노 추기경

천동설 지동설 논란도 현재로 치면 "기존의 A이론과 현재 새로이 발표된 B이론 중 어디가 맞는가"로 논의가 있었던 거였다.

상대성 이론이 처음에는 "니미 씹 개소리 자제좀."이라고 했지만 후에 증명이 이루어 지며 인정 받듯이, 초기엔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지동설이 과학적으로 옳다는 쪽으로 나가며 결국 중세 후기의 자연철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가 계산에 성공하면서 천동설은 폐기 되었다.[1]

미술[편집]

중세는 미술의 암흑기라 까이는 시대이다. 종교가 미술을 장악해 거의 대부분의 미술들은 종교를 소재로 다루어졌으며 조각의 퀄리티도 고대 그리스•로마 보다도 딸렸다. 딴건 몰라도 우상숭배라면서 그리스•로마시대 고전 조각들을 부숴버린건 유럽 예술가들과 미학자들에게 르네상스 태동 이후부터 주구장창 까이고 있다. 오히려 이슬람보다도 반달리즘에 앞장섰던 이들이 유럽인들이었다.

미술이라고 해봤자 성당에 장식하는 석상이나 고딕성당 주례소에 걸어두는 판넬화, 스테인드글라스 정도. 이 시대 미술들은 유럽 미술사에서도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바자리, 알베르티, 빙켈만 같은 시대를 주름잡던 미술사학자들도 모두 중세를 까고 고전 그리스•로마 미술을 빨기 바빴다.

의술[편집]

근데 의술은 좀 많이 씹창 났었다. 기초적인 절제를 통한 외과수술이 이루어 졌던 로마시대의 의술이 죄다 실전되었고 마취를 사용해 수술하던 이슬람과는 비교 자체가 쪽팔리는 수준.

당시에는 4체액설이라는 병신같은 이론이 주류를 이루었으며(근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그리스시대의 유산이다.), 십자군 전쟁 이후 이슬람의 문화가 들어오고도 한동안은 정체된 상태였다.

하지만 구호기사단이 설립한 병원은 이후에 어떤 병원도 따라오지 못할 ㅆㅅㅌㅊ였다고 한다.


심지어 피는 신성한 것으로 굳이 닦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의사들이 시체를 부검한 손을 그대로 산모의 출산을 돕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 학자가 손을 씻고 출산을 돕는 산파들이 의사가 출산을 도울 때에 비하여 산모와 아기의 사망률이 낮다는 사실을 밝혀냈으나

당시 의사들은 자신들이 산파만도 못하다는 사실에 열등감에 휩싸여 그 학자의 주장을 무작정 비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위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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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더러웠다. 길거리에는 똥, 오줌, 시체가 나뒹굴고 악취가 매우 심해졌다고 전해진다. 뭐 과거시대니 안 더러운 곳이 있겠냐만은 중세는 특히 더 심했다.

집들도 다닥다닥 붙어있고 똥오줌 휘갈기는 가축들도 집안쪽에서 키웠으니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더럽고 미개한 위생상태때문에 유럽에서는 흑사병으로 최소 7천만명에서 2억명까지 한순간에 증발한 적도 있다. 새부리 가면을 쓴 의사들도 이때 전염되는 것을 막기위해 생겨난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 가면은 중세 이후에 나온 것이다.

이때 정신차려서 위생관리를 철저하게 한건지 그냥 쥐새끼들이 다 뒤져셔 그런건지 또 흑사병이 크게 돈 적은 없었다. 그에 반해 19세기 동양은 또 다시 흑사병이 돌아서 1200만명이 증발한다.

특이하게도 조선 역시 중세마냥 위생이 퇴화했다. 명불허전 조선의 얼굴마담이자 유일하게 촌티 안난다는 한양 길거리에는 똥이 넘쳐다녔다. 고려까지만 해도 오히려 짱깨들 보고 씻지도 않는 미개한 새끼들이라면서 멸시한 그 나라가 말이다.

결국 해외문물이 대거로 들어온 구한말이 되서야 위생상태가 개선된다.

경제[편집]

화폐제조를 개나소나 다 했다. 농담이 아니라 『이야기 세계사』라는 책에 따르면 한자동맹의 유적지를 발굴했을때 발굴된 동전 가지수만 80여개가 넘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은이 존나 부족해서 남미 개척과 명나라에서 은자 수출을 하기 전까지는 금과 은의 공급이 부족했다.

참고로 동전 둘레에 있는 돌기, 그거 만든게 중세 잉글랜드다. 당시 금화 은화의 둘레를 살살 긁어서 금과 은을 모으는 새끼들이 널리니까 그걸 막기위해 새겨 놓은 거. 지금도 10원짜리 모아서 녹여 팔다 걸린 새끼들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ㅉㅉ

길드라는 조직이 탄생해 도시경제를 이끌어가는 주역으로 성장한 것도 바로 이때다. 양판소이고깽물에서 존나 중2병 걸린 새끼들 모인 곳처럼 나오는 거기. 물론 쫌생이처럼 너고소 시전해서 상대 길드 좆되게 만드는 것도 있었고, 일종의 독과점을 구성해서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어쨋든 이 길드제도 덕에 도시부에서 생산되는 물품들이 최소한의 품질을 유지했으며 일부 대형길드는 각국에 지부를 설립해 1국의 왕보다도 더 큰 돈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초보적인 실물보험이 등장하던 시기도 바로 이때.

다른 대륙과 비교[편집]

대체 그렇게 평가하면 장점없는 시기는 언제가 있냐? 그 시대상만 보면 존나 좆같고 미개한거 사실인데? 흑사병도는데 교회에 모여서 기도질하는게 정상이냐? 라고 묻는 사람이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똥양은 19세기까지 그 지랄을 해댔다.

조선은 콜레라가 창궐하자 쥐의 신이 노했다며 달래는 굿을 하고 중국은 서양 총과 대포가 가진 불의 기운을 물의 기운으로 제압한다며 성벽에 여자 오줌 발라놨다가 개처발렸다.

한마디로 전근대 시대에 미개한 모습을 보여주는건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였지 오직 중세 서유럽만 신에게 달라붙어 빌빌댔던게 아니다. 신학의 하위에 과학, 철학 등이 있었기에 학문이 발달하게 된 경향도 있었다는 것이다.

종교에 의지한 유럽과는 달리 서아시아지역은 과학이 발달되었다. (유리, 사탕, 도자기, 연금술 등등)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하면서 지식흡수를 한 것도 있고 비잔틴제국+이집트+인도 사이의 서아시아라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는 지리적 이점도 있었다.
ㄴ 도대체 어딜봐서 유리 사탕 도자기가 무슨 과학이냐 기술이지 ㅋㅋㅋㅋㅋㅋ 서유럽이 미개한 게르만 색히들 때문에 학문이고 뭐고 세기말 아포칼립스 찍는 동안 그나마 사회가 멀쩡하게 돌아가서 그런 지식들을 활용했을 뿐이지

ㄴ그거야 사회가 멀쩡하게 안돌아간 윾럽 잘못이지

종교에 의지하는 미개한 시대인건 중동도 다를게 없다.
ㄴ 과학은 몰라도 수학은 중동에서 주워먹는 수준이었는데?

사회[편집]

중세하면 마녀사냥을 떠올리는데,그건 중세 다 끝나갈 때부터 근세에 있던거고. 중세에는 고대보다 여권도 상승했다. 과거 게르만만 해도 여자를 화살과녁으로 쓰는 등 정신나간 풍습들이 있었는데, '교회가 남자나 여자나 역할이 다를 뿐 주님앞엔 평등함' 을 주장하며 여성에 대한 폭력을 죄악시한 것도 있다. 또한 결혼은 남녀간의 상호합의로 가능하다는 것도 중세에 나온 관념이다. 그리고 중세의 야만적인 고문 어쩌고 하는데 그런 고문들은 동서남북 오대양 육대주에 널리고 널렸다. 고문 자체가 악인 건 맞지만 중세만 나쁜건 아님.

신분제도에 탄압받던 불쌍한 우민 흐규흐규도 그냥 우월감일 뿐, 농민들도 반란 일으키고 할 거 다했다. 또한 노동력 착취는 도리어 산업혁명 때 더 심했다.

한국의 중세[편집]

한국사에서는 고려와 개화이전 조선을 중세로 분류한다.

고려 정치만 본다면 중세유럽과 거의 동급이었다. 쓰레가같은 이민족들이 쳐들어와서 나라를 아작내거나 영주가 '향리'나 '호족', '권문세족'등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2] 그러나 이들은 여말선초때 싹 다 망해버린다.
왜냐고? 먼저 고려말 고려에 쳐들어온 왜구는 말만 해적이었지, 사실상 일본군이라고 봐도 다름없을 정도로 존나세졌기 때문에 몇몇 지방 유력자들이 이놈들하고 전쟁하다가 자기 사병과 땅을 날려버렸고,
지방깡패같이 먹고 살아온 놈들은 공민왕의 친원파숙청으로 원나라응딩이만 믿던놈들이 벌집핏자가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토지문제에서 강경한 입장을 보인 이성계+정도전라인의 급진파 신진사대부들의 과전법크리로 제대로 박살났다.
그리고 조선건국되고 나서는 사병이란 사병은 죄다 박살내고 향리는 아전으로 강등먹이고, 모든군현에 중앙에서 임명한 수령을 파견하면서 완전히 뒤져버렸다.

양판소에서[편집]

개나소나 중세풍인데 중세랑은 100만광년 떨어져 있다. 그러니 중세 고증으로 시비 걸지마라. 애초에 중세 고증 빠삭한 새끼가 양판소를 쳐 보겠냐. 중세 고증이 존나 잘되어 있는 씹덕물 보려면 늑대와 향신료봐라.

사실 양판소는 근세랑 중세랑 쓰까되있는 혼종들이 많다. 편하게 분류하자면 삐까뻔쩍한 대도시에 성당이 널려있는 배경은 근세에서 따온거라고 보면되고 딥다크한 깡촌은 거의 다 중세라고 보면 된다.

각주

  1. 당시 갈릴레오가 말년에 종교재판을 받은 적은 있다. 근데 그건 당시 종교개혁이 불타오르며 "씨발 좌빨새끼들이 교회를 뒤집어 엎으려 하네?"라며 골머리를 앓던 교회 분위기 때문이었다.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받은 건 1633년인데, 지동설이 옳다는 걸 발표하고 교황청이 대학자를 직접 로마로 초빙한게 1610년이었다. 만약 지동설이 진짜 교회에서 좆같이 여겼다면 한동안 "캬 갈릴레오님 지리구여. 님 존나 똑똑한듯."이라며 개빨아주다 20여년이 지나서 깜빵을 쳐넣을 리가 있을까.
  2. 호족, 향리, 권문세족들은 영주처럼 지방의 권력자가 중앙정부보다 군력이 강했고, 특히 권문세족들은 기사처럼 동네깡패들을 '사병'으로 만들어 자신의 힘을 과시하거나 쿠데타를 시도하는데에 써먹었다.